하준이 싸늘하게 상혁을 노려보았다.“……”‘내가 뭘 또 잘못했나? 그냥 서류 처리해 달라고 말씀드린 것뿐인데. 아아 회장님 모시기가 왜 점점 더 힘들어지냐고?’“줘 봐.”여전히 싸늘한 시선을 한 채로 하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상혁이 사류를 내밀자 후다닥 사인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 참, 회장님 어제 병원 가셨던 일이 기사로 나왔습니다.”상혁이 뉴스를 열어서 하준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강 대표님과 만나고 계신데 강 대표님이 보시게 되면 좀 불편하시지 않을까요?”“왜 그런 얘기를 이제서 해?”뉴스를 보더니 하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이거 어떤 놈이 찍은 거야?”“쓰리윅스 쪽인 것 같습니다. 원래 가십성 기사에 강한 매체입니다. 병원 쪽에는 늘 기자가 한 명 상주하는 모양입니다.”하준이 입을 일자로 다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오전 안으로 관련 기사 싹 삭제하고 그 매체는 박살내 버려. 그리고 홍보팀 동원해서 앞으로 내 사진 함부로 찍으면 다들 이렇게 박살 날 거라고 언론에 흘려.”“알겠습니다.”안 그래도 상혁도 쓰리윅스는 쓰레기 언론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상혁이 나가자 하준은 바로 차를 끌고 화신그룹으로 갔다. 그런데 여름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엄 실장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하준이 마땅찮았지만 하준의 신분이 있다 보니 대접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강 대표님께서 매일 이쪽으로 출근을 하시는 건 아닙니다. 가끔 개인 일정을 소화하시기도 하고요.”“전화 걸어봐요. 당장 출근하라고 해.”하준이 강경한 말투로 명령했다.엄 실장은 하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최하준 회장님께서 지금 화신에 오셨습니다. 뵙고 싶으시다는데요.”“바빠요. 시간 없으니까 꺼지라고 하세요.”그러더니 여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준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했다. 엄 실장은 숨도 크게 못 쉴 지경이었다.다행히도 하준은 더는 머무르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송영식이 없는 틈을 타서
“준, 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나중에 얘기하자.”곁눈질로 보니 서류에는 부동산 계약서 등이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백지안은 얼른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이 상황을 모면할 셈이었다.“피하려고 하지 마.”하준은 이제 더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해변 별장 계약서야. 다른 집도 두 채 더 마련해 줄게. 그리고 이 통장에 있는 금액이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을 거야.”“그만! 난 너랑 못 헤어져.”백지안이 흥분해서 난동을 부리다가 뜨거운 물을 쏟아서 손을 데었다.“지안 님!”민 실장이 깜짝 놀라서 급히 의사를 부르러 갔다.“아파. 손이 너무 아파.”백지안은 고통에 눈물이 흘렀다.민 실장이 다가왔다.“회장님, 아직 아픈 분에게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예전 같았으면 하준이 아마도 한 번 더 참았을 것이다.그러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내 난동을 부리는 백지안을 보니 더욱 멀어지고 싶은 충동도 일고 백지안과 계속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백지안은 울며 막 물건을 부수고 집어 던졌다.나중에 송영식이 와서 보고 부어오른 지안의 손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영식아, 하준이가 날 버리겠대. 이딴 걸 나에게 주고 날 쫓아내려고 해.”백지안은 송영식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걸까? 난 하준이 자체가 좋은 거지 하준이의 돈이 좋은 게 아닌데.”“정말 너무 하구먼.”하준이 놓고 간 서류와 카드를 보니 송영식은 하준이 녀석이 너무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울지 마. 하준이는 내가 혼내 줄게.”송영식이 주먹을 꽉 쥐었다.“네 뒤에는 나도 있어.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하지 않도록 널 지켜줄게. 내가 하준이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쿠베라도 FTT에 뒤지지는 않는다고.”“영식아….”백지안이 멍하니 있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안 돼. 어떻게 내가 너에게 그렇게 상처를 줘? 그리고 너희 식구들이 날 인정하지 않을 거야.”“내가 원한다면 식구들도 어쩔 수
백지안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송영식을 잡을 정신도 없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영 하준을 못 잡을 것 같으면 송영식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싶었다.그러나 쿠베라의 후계자도 아니고, 미래 대통령의 조카도 아니라면, 최하준과 결혼하는 것과 비교해서 너무나 초라해질 게 아닌가?쿠베라에서 송영식을 내쳐서 그룹의 후광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꼴랑 오슬란 하나 보유한 것으로 송영식은 개뿔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은 시아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는 것이다.‘왜 이렇게 일이 안 풀려? 진짜 미쳐버리겠네.’----송영식은 그 길로 본가로 달렸다.정자에서 송우재가 송근영와 회사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네가 잘해주고 있으니 내가 안심이 된다.”손녀와 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송우재는 회사를 전부 송근영에게 맡기지 못하는 것이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네. 믿어주시니 감사해요.”송근영이 웃었다.송우재가 막 다음 말을 하려는 참에 송영식이 들어왔다.“할아버지, 쿠베라 계승권은 제게도 있잖아요? 왜 저는 후계자 권리를 박탈당했나요?”“네 녀석이 워낙에 어리석으니 그렇지.”송우재는 송영식이 나타날 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고요히 차를 따를 뿐이었다.“……”‘내가 어리석다고?’송영식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제가 어디가 어때서요? 태어나면서부터 뭘 배워도 제가 우리 집에서 젤일 빨리 익혔고, 수능 성적도 전국 3등이었어요. 대학도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할아버지도 제가 삼촌보다도 똑똑하다고 하셨잖아요?”송우재가 우습다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왜 너더러 어리석다고 하는지도 모르니 멍청하다는 게야. 그래, 어렸을 때 머리가 비상했는지는 모르겠다면 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멍청해지는데 내가 어찌 널 믿고 쿠베라를 맡기겠느냐? 아니, 혹시 이제는 내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할 마음이 들었느냐?”송영식은 이제야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았다.“이제 알겠어요. 이게 다 절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수단이었군요.”“수단
송근영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송영식을 쳐다봤다.“할아버지 지금 진심이셔.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쿠베라의 지원 없이 네가 뭘 얼마나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니?”“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 난 누나처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 눈곱만큼도 없어.”송영식이 씩씩거렸다.송근영의 안색이 확 변했다. 눈에 상처받은 기색이 스치더니 말없이 그대로 자리를 떴다.잠시 그대로 서 있던 송영식도 짜증스럽게 발길을 돌렸다.차에 타자마자 서 전무에게서 전화가 왔다.“회장님, 스킷그룹 매수 건에 실패했습니다.”“어떻게 된 거야? 스킷 매수에만 몇 년을 매달렸잖아?”다시금 화가 불같이 올라왔다. 송영식은 차제에 해외기업인 스킷을 구매해서 샴푸 관련 분야에서 오슬란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굳이 그까짓 SE따위 신경 쓰지 않고 글로벌 시장을 노리면 그만이었다.기업이 성장하려면 제품 라인을 확장해야 한다. 이번에 스킷을 손에 넣으면 순조롭게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서 전무가 씁쓸하게 웃었다.“스킷에서도 우리 오스란에 합병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쿠베라 후계 자격문제가 불거지면서 스킷에서 쿠베라의 지원이 없이는 오슬란의 전망이 밝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A국의 다른 기업을 물색하고 있다고 합니다.”“젠장. 오슬란이 지금 어디 쿠베라에 기대서 먹고사는 줄 알아! 순전히 내 힘으로 키운 회사라고!”오늘은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꼬인다는 생각이 들었다.“회장님, 지금은 우리 오슬란이 국내에서 피부 보호 제품 라인을 안정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지금 업계에서는 임윤서와 SE가 콜라보를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쪽에서 제품 라인을 내놓기 시작하면 오슬란은 절벽으로 몰리게 될 겁니다. 업계에서 도태될 가능성도 있어요.”서 전무가 말을 이었다.“지금은 제품 교체 주기가 빨라서 아무래도 실력 있는 조제사가 절실합니다. 이제 쿠베라의 후광이
밤 9시 반.하준은 여름의 집 문에 기대어 시시때때로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왜 이렇게 늦어? 아직까지 안 들어오고 뭘 하는 거야? 설마 딴 놈이랑 데이트 중인 건 아니겠지? 서인천이 야근이라는 것만 확인 안 했어도 내가 여기서 7시간씩 버티고 있지는 않았지.’하준이 여자를 이렇게 기다려 보기는 처음이었다.이때 엘리베이터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렸다.경찰 몇 명이 인상을 쓰고 다가왔다.“당신이군.”“????”“갑시다. 집에 가시든지 서로 같이 가시든지.”경찰이 차갑게 뱉었다.“이 댁 주인이 신고하셨습니다. 전 남편이 이혼한 뒤에도 계속 와서 괴롭힌다면서 집에도 못 돌아오신다고요.”“경찰에 신고를 했다고?”하준은 냉소를 지으며 위협적인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 모습을 본 경찰은 하준을 더욱 위험한 인물로 인식했다.“당연히 신고하죠. 아니면 계속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까?”경찰이 훈계하기 시작했다.“선생님처럼 이혼하고 나서도 전처 찾아가는 분 저희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이혼까지 하셨는데 각자 인생 알아서 사셔야지 이렇게 질척거리시면 됩니까?”“알겠습니다.”최하준은 주먹을 쥐고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이 막 닫힐 때쯤 경찰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와씨, 더럽게 험악하게 생겼네. 내가 아내라도 이혼해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 같다.”“……”주차장에 도착한 하준은 쾅 하고 소리 나게 차 문을 닫더니 바로 지룡의 전 당주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강여름 위치 파악해 봐.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야겠어.”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주에게서 주소가 하나 날아왔다.하준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다행히도 다른 남자와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음 날 새벽.오랜만에 하늘을 데리고 푹 자고 일어난 여름이 아침을 먹는데 집사가 들어왔다.“회장님, 어제 10시 좀 넘어서부터 집 앞에 스포츠카가 한 대 서 있는데 수위 말로는 차 안에 불이 켜져 있고 남자가 하나 타고 있답니다. 알아보니 최하준 회장 소유의 차량
아침을 다 먹고 나서 여름은 집을 나섰다.여름이 나오는 것을 보더니 하준이 즉시 차에서 내렸다. 이틀 연속 밤을 새우고 집에도 가지 않아서 셔츠는 온통 구깃구깃하고 얼굴에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조각 같은 얼굴을 가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최하준 특유의 아우라를 더하는 느낌이었다.“어제 당신이 신고했어?”충혈된 눈으로 하준이 여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응. 계속 우리 집 앞에서 안 가고 버티니까 너무 불편하더라고.”여름이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당신….”최하준의 가슴이 들썩였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뭐? 내가 뭐 당신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사람이야? 최하준 씨, 필요하면 날 찾고 살기는 백지안이랑 살겠다는 거야 뭐야?”여름이 가차 없이 지적했다.“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날 백지안에게 갈 거면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말라고.”자기에게 셀카를 찍어 보내고 곧바로 뽀르르 백지안에게 간 것을 생각하니 여름은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다.“그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안 오면 치료를 안 받겠다고 병원에서 난동을 부린다잖아. 그래서 내가 가서 확실하게 말하고 왔어. 이거 봐. 내가 이별 통보했다고 나 영식이한테 맞았다니까.”하준이 입가의 상처를 보여주며 불쌍한 척을 했다.“쓰읍, 아직도 너무 아파.”“잘됐네!”여름이 싸늘하게 한 마디 뱉었다.하준은 흠칫하더니 그래도 말을 이었다.“그래. 잘 됐지. 역시 우리 자기가 선견지명이 있더라. 가지 말았어야 했어.”“누가 당신 자기야? 말조심해.”여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커다란 눈에 보드랍고 깨끗한 피부, 윤기 나는 입술을 보고 있자니 하준은 머리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특히나 그날 여름의 뽀뽀 이모티콘을 떠올리니 두근거리는 심장을 도무지 수습할 수가 없었다.오늘은 그야말로 생떼를 쓰더라도 용서를 받고 그 달콤한 키스를 맛보고야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전에 그사이를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내가 언제 뽀뽀를 빚졌다고 이래?”여름은 어리둥절했다. 최하준의 뻔뻔한 발언에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다.“그저께 밤에.”하준이 휴대 전화를 꺼내 여름에게 그날 보낸 이모티콘을 보여주었다.여름은 뽀뽀 이모티콘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때는 순전히 최하준을 안달나게 만들 생각에 충동적으로 보낸 것이었는데 아직까지 이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아아, 그거. 생각은 난다. 근데, 내가 내 이모티콘 받고는 바로 백지안한테 달려간 거잖아?”여름이 꼭 집어 말했다.“아니거든.”하준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더니 어색하게 답했다.“받고 나서 바로 냉수 샤워하러 갔는데.”“……”하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여름도 바로 알아들었다.여름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더니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아니, 그럴 일이냐고? 그냥 흔해빠진 이모티콘이잖아. 그걸 가지고 다 큰 어른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야?’“그간 상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안달 날 일인가?”결국 여름이 중얼거렸다.하준의 귀에는 그 작은 소리도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하준의 눈에 난감한 기색이 스치더니 얇은 입술이 살짝 움찔거렸다. 자신의 몸은 여름에게만 반응이 생긴다고 말하려다가 혹시나 자신이 여름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곤란하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그게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너무 치명적이라서 그런 거지.”여름은 시선을 피했다.“다음에 한 대 쥐어박는 이모티콘을 보내면 그다음에는 쥐어박는 것도 되겠네.”“그럼.”여름의 입술을 바라보는 하준의 눈은 점점 더 강하게 타올랐다. 지금 여름에게 입만 맞출 수 있다면 나중에 한 대 맞는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아주 끝 간 데를 모르는 인간이구먼.’“아직 잠이 좀 덜 깨셨나 보네. 난 바쁜 사람이야. 출근 해야 돼.”여름은 하준은 신경도 안 쓰고 그대로 돌아섰다.“기다려! 내가
“안 타. 여름이가 싫다는데 어디다 쓰겠어?”상혁은 당황했다.“하지만 AM 사 걸로 타셔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지위를 생각하면….”“상관없어. 여름이도 거기 거 타네. 여름이는 하얀색이니까 난 검은 색으로 하면 커플카 같고 딱 좋겠다.”스포츠카 따위 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쉽게 말하더니 하준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여름은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진지하게 운전만 했다.그러고 한참을 가다가 하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이거 화신 가는 길 아니잖아?”“어. 벨레스 가거든. 아직 아버지 해독이 다 되지 않아서 요양하셔야 해서 내가 좀 대신 들여다 보려고.”어제 저녁 서경주가 하는 말을 들으니 서신일이 서유인이 출근하는 데 동의했다고 하니 들여다 봐야겠다 싶었다. 안 그랬다가는 벨레스가 완전히 서유인 부녀의 손에 놀아날 수도 있다.“벨레스에 가다니, 이제 벨레스에도 손 대게? 바빠서 되겠어?”여름의 말을 듣거니 하준은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나랑 연애할 시간이나 있겠나?”“내가 언제 당신이랑 연애한다고 했는데?”여름이 툭 뱉었다.“당신이 동의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쨌든 나는 동의했거든.하준이 여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여름은 아무 말 없이 하준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서 좀 자야 하는 거 아냐?”“지금 나 신경 써 주는 거야?하준이 눈을 빛냈다.“아니거든요. 지금 당신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서 줄넘기 해도 될 것 같아.”여름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하준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당장 휴대 전화를 꺼내서 제 몰골을 비춰보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꾹 참기로 했다.차가 벨레스 주차장에 멈추자 여름은 내릴 준비를 했다. 하준은 갑자기 여름을 잡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나 다시 위챗 추가해 줘. 그리고 전화번호 차단도 풀어주고. 차단 안 풀어주면 나 계속 자기 따라 다닐 거야.”여름은 한숨을 쉬더니 하준이 보는 앞에서 위챗과 전화번호 차단을 풀었다.“이제 가도 돼?”“응.”하준은 여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