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다 먹고 나서 여름은 집을 나섰다.여름이 나오는 것을 보더니 하준이 즉시 차에서 내렸다. 이틀 연속 밤을 새우고 집에도 가지 않아서 셔츠는 온통 구깃구깃하고 얼굴에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조각 같은 얼굴을 가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최하준 특유의 아우라를 더하는 느낌이었다.“어제 당신이 신고했어?”충혈된 눈으로 하준이 여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응. 계속 우리 집 앞에서 안 가고 버티니까 너무 불편하더라고.”여름이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당신….”최하준의 가슴이 들썩였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뭐? 내가 뭐 당신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사람이야? 최하준 씨, 필요하면 날 찾고 살기는 백지안이랑 살겠다는 거야 뭐야?”여름이 가차 없이 지적했다.“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날 백지안에게 갈 거면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말라고.”자기에게 셀카를 찍어 보내고 곧바로 뽀르르 백지안에게 간 것을 생각하니 여름은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다.“그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안 오면 치료를 안 받겠다고 병원에서 난동을 부린다잖아. 그래서 내가 가서 확실하게 말하고 왔어. 이거 봐. 내가 이별 통보했다고 나 영식이한테 맞았다니까.”하준이 입가의 상처를 보여주며 불쌍한 척을 했다.“쓰읍, 아직도 너무 아파.”“잘됐네!”여름이 싸늘하게 한 마디 뱉었다.하준은 흠칫하더니 그래도 말을 이었다.“그래. 잘 됐지. 역시 우리 자기가 선견지명이 있더라. 가지 말았어야 했어.”“누가 당신 자기야? 말조심해.”여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커다란 눈에 보드랍고 깨끗한 피부, 윤기 나는 입술을 보고 있자니 하준은 머리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특히나 그날 여름의 뽀뽀 이모티콘을 떠올리니 두근거리는 심장을 도무지 수습할 수가 없었다.오늘은 그야말로 생떼를 쓰더라도 용서를 받고 그 달콤한 키스를 맛보고야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전에 그사이를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내가 언제 뽀뽀를 빚졌다고 이래?”여름은 어리둥절했다. 최하준의 뻔뻔한 발언에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다.“그저께 밤에.”하준이 휴대 전화를 꺼내 여름에게 그날 보낸 이모티콘을 보여주었다.여름은 뽀뽀 이모티콘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때는 순전히 최하준을 안달나게 만들 생각에 충동적으로 보낸 것이었는데 아직까지 이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아아, 그거. 생각은 난다. 근데, 내가 내 이모티콘 받고는 바로 백지안한테 달려간 거잖아?”여름이 꼭 집어 말했다.“아니거든.”하준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더니 어색하게 답했다.“받고 나서 바로 냉수 샤워하러 갔는데.”“……”하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여름도 바로 알아들었다.여름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더니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아니, 그럴 일이냐고? 그냥 흔해빠진 이모티콘이잖아. 그걸 가지고 다 큰 어른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야?’“그간 상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안달 날 일인가?”결국 여름이 중얼거렸다.하준의 귀에는 그 작은 소리도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하준의 눈에 난감한 기색이 스치더니 얇은 입술이 살짝 움찔거렸다. 자신의 몸은 여름에게만 반응이 생긴다고 말하려다가 혹시나 자신이 여름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곤란하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그게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너무 치명적이라서 그런 거지.”여름은 시선을 피했다.“다음에 한 대 쥐어박는 이모티콘을 보내면 그다음에는 쥐어박는 것도 되겠네.”“그럼.”여름의 입술을 바라보는 하준의 눈은 점점 더 강하게 타올랐다. 지금 여름에게 입만 맞출 수 있다면 나중에 한 대 맞는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아주 끝 간 데를 모르는 인간이구먼.’“아직 잠이 좀 덜 깨셨나 보네. 난 바쁜 사람이야. 출근 해야 돼.”여름은 하준은 신경도 안 쓰고 그대로 돌아섰다.“기다려! 내가
“안 타. 여름이가 싫다는데 어디다 쓰겠어?”상혁은 당황했다.“하지만 AM 사 걸로 타셔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지위를 생각하면….”“상관없어. 여름이도 거기 거 타네. 여름이는 하얀색이니까 난 검은 색으로 하면 커플카 같고 딱 좋겠다.”스포츠카 따위 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쉽게 말하더니 하준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여름은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진지하게 운전만 했다.그러고 한참을 가다가 하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이거 화신 가는 길 아니잖아?”“어. 벨레스 가거든. 아직 아버지 해독이 다 되지 않아서 요양하셔야 해서 내가 좀 대신 들여다 보려고.”어제 저녁 서경주가 하는 말을 들으니 서신일이 서유인이 출근하는 데 동의했다고 하니 들여다 봐야겠다 싶었다. 안 그랬다가는 벨레스가 완전히 서유인 부녀의 손에 놀아날 수도 있다.“벨레스에 가다니, 이제 벨레스에도 손 대게? 바빠서 되겠어?”여름의 말을 듣거니 하준은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나랑 연애할 시간이나 있겠나?”“내가 언제 당신이랑 연애한다고 했는데?”여름이 툭 뱉었다.“당신이 동의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쨌든 나는 동의했거든.하준이 여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여름은 아무 말 없이 하준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서 좀 자야 하는 거 아냐?”“지금 나 신경 써 주는 거야?하준이 눈을 빛냈다.“아니거든요. 지금 당신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서 줄넘기 해도 될 것 같아.”여름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하준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당장 휴대 전화를 꺼내서 제 몰골을 비춰보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꾹 참기로 했다.차가 벨레스 주차장에 멈추자 여름은 내릴 준비를 했다. 하준은 갑자기 여름을 잡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나 다시 위챗 추가해 줘. 그리고 전화번호 차단도 풀어주고. 차단 안 풀어주면 나 계속 자기 따라 다닐 거야.”여름은 한숨을 쉬더니 하준이 보는 앞에서 위챗과 전화번호 차단을 풀었다.“이제 가도 돼?”“응.”하준은 여름과
서신일은 회사 일에 간여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오늘은 어쩌다가 서유인 손에 이끌려 나오긴 했지만 추성호의 말을 듣자니 상당히 혹했다.서신일은 평생 벨레스가 한 손에 꼽히는 대기업이 되지 못한 것이 큰 한 티었다.“어르신, 한 말씀 하시지요. 저희는 어르신의 안목을 믿습니다.”현 전무가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지금 서 회장이 편찮으시니 역시 저희는 어르신을 따르겠습니다.”“그렇습니다. 차제에 회사로 돌아오시지요.”몇몇 이사가 권했다.“요 몇 년 벨레스가 아주 커져서 이제는 FTT다음 가는 그룹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맞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야 어떻든 추신과 함께 운영한 전자 상거래 플랫폼 사업이 아니었으면 벨레스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는 없었죠.”“우리 벨레스의 화려한 미래를 다시 이끌어 주시죠.”다들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니 은퇴를 해었던 서신일이지만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 몸이 안 좋아서 은퇴를 하기는 했었지만 요 몇 년 요양을 잘한 덕에 몸도 많이 회복이 되었고 아직 사업적인 야심도 남아 있었다.“솔직히 말입니다.”현 전무가 서신일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서경주 회장이 강여름을 후계자로 정했다지만 어쨌든 그 친구야 강 씨 아닙니까? 서 씨의 벨레스를 강 씨에게 넘겨줄 수는 없죠.”그 말을 들은 서신일의 안색이 변했다. 이렇게 지적을 하지 않았더라면 생각도 못해봤을 문제였다.서유인의 얇은 입술이 씩 올라갔다.할아버지, 합자 회사 설립 건은 추신에서 몇 번이나 건의를 했었는데요, 지금 실행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투자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어요. 두 가문이 사돈을 맺지 않았더라면 추신에서 이 좋은 프로젝트에 굳이 벨레스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마어마한 투자액이 들어오는 일인데 우리는 할아버지 같은 분의 과단성 있게 결단이 필요하다니까요.”서신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책상을 탕 내리쳤다.“그래! 그렇게 하자꾸나.”“그렇게 하시는 거
사실 여름은 벨레스와 추신의 합작을 내내 반대해 왔다.“제 생각에는 일단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사를 설립하고 나면 인재는 어느 쪽에서 제공할지, 관리자는 누가 담당하게 할 지 등등을 말이죠. 우리 벨레스는 금융 쪽은 잘 모르잖아요. 이렇게 무턱대고 덤비면….”“무슨 뜻이냐? 내 결정을 못 믿겠다는 말이냐?”서신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사업만 수십 년을 했는데 너보다 모르겠느냐? 벨레스 일에는 끼어들 필요 없다.”“할아버지를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회사로 복귀하신 뒤에 다시….”추성호가 묘한 말투로 끼어들었다.“그러니까, 명예 회장님은 회장님보다 안목이 부족하다, 그런 말입니까?”서신일은 그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내가 벨레스를 수십 년 경영하면서 나보다 시장을 잘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번 건은 그냥 이렇게 진행하도록 해. 여름이 너는 벨레스는 잘 모르니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게 좋겠다.”그러더니 서신일이 선언했다.“됐다. 그만 해산.”“할아버지 모셔다드릴게요.”서유인이 바로 일어나 따라 나갔다. 나가면서 의기양양한 눈으로 여름을 흘끗 쳐다봤다.회사 중진이 하나씩 자리를 떴다. 여름을 신경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추성호가 다가와 느물느물 우었다.“벨레스 후계자면 뭐하나? 아무도 신경도 안 쓰는데? 원래 있던 자리로나 돌아가시죠?”“추 대표, 난 당신이 정말 벨레스와 협력할 의도 따 따위 없다고 생각해요. 그간 FTT를 손에 넣고 돌리면서 추신의 자금을 거기서 다 빼돌린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이제 FTT 다음가는 그룹이 되었으니 이제 곧 1위 자리에 올라서고 싶겠지.”여름이 싸늘하게 추성호를 쏘아 보았다. 솔직히 여름은 추성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추성호와 서유인이 결혼할 때만 해도 여름은 추성호가 바람둥이에 가벼운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3년 만에 추신은 FTT 다음 가는 그룹이 된 것이다.여름에게는 그런 추신의
떠나는 여름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추성호는 음험한 표정으로 입술을 문질렀다.‘평범하다? 두고 봐라 내가 언젠가는 널 손 봐주겠어.’----사무실.여름은 벨레스의 자료를 잠시 살펴보고 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쉬려고 휴대폰 게임을 열었다.한판 놀고 나니 ‘넌내마음속에’가 함께 플레이 하고 싶다고 신청을 보냈다.여름은 상대를 추가하고 둘이 같이 플레이를 했다.그러나 잠깐 플레이를 해보고 여름은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뭐야? 완전 초보잖아? 떨어진 다음에 어디로 간 거지?’여름은 할 수 없이 음성을 켜고 불렀다.“저기요, 언니. 아무 데나 막 뛰어다니지 말아요. 맵끝까지 가면 죽는다고요.”“저 남자인데요.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죠?”귀에 착 붙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흠칫했다.‘뭐야, 목소리 너무 좋잖아?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그러나 게임에 집중하느라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오른쪽 위를 보면 맵 있어요. 거길 벗어나면 안 돼요. 제가 있는 쪽으로 오세요.”“알겠어요.”그렇게 대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는 여름이 있는 곳으로 왔다.여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주 바보는 아니구나.’그러나 맵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 속도로는 곧 끝장날 것이 뻔했다.여름은 즉시 지프를 하나 찾아 타고 쏜살같이 상대 쪽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상대는 완전히 맨몸이었다. 어이가 없었다.“저기요, 무기는요? 장비는? 이러고 있다가는 바로 죽어요.”“…장비는 어디 가서 구하는데요?”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울고 싶었다.“게임 처음 해 봐요? 나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담?”“처음이죠. 여자친구랑 놀고 싶어서 하는 중이에요.”남자의 저음이 들려왔다.“그러면 여자친구한테 가지 왜 날 찾아와 가지고….”여름은 다시 상대의 게임명을 확인했다.‘ ‘넌내마음속에’라니 게임명 이렇게 노골적으로 짓는 사람이 있나? 아주 순정파인가 보네.’남자가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그쪽이
“누가 당신 자기야?”여름이 짜증스럽게 말했다.“최하준, 일 안 해요?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대낮에 나랑 게임이나 하게?”“돈은 이제 실컷 벌어 놨고, 지금은 여자 친구랑 노는 게 제일 중요하지.”하준이 아주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여자 친구랑 게임 하는 게 이제 내 역할이야.”여름은 마른 세수를 했다.“내 게임명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여름의 게임명은 톡 아이디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그날 영화관에서 게임 할 때 봐놨지.”하준이 말을 이었다.“게임 처음 해봤어. 예전에는 게임은 인생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좋아하는 사람이랑 게임 하는 것도 꽤 로맨틱하네.”전화기를 통해서 목소리만 듣는데도 여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뭐라고 말을 받아야 좋을 지모 알 수 없었다.“자기 몇 시에 퇴근할 거야? 데리러 갈게.”하준이 계속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도 운전할 줄 알아.”“알았어. 그러면 김 실장한테 태워달라고 해야겠다. 자기 차에서 기다릴게.여름은 결국 퇴근 시간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오후.여름은 핸드백을 들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다.엘리베이터가 25층에 멈추더니 서유인이 의기양양한 눈빛을 하고 발을 들여놓았다.여름은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서유인이 가운데 끼었다.“뭐야? 사람 죽일 셈이야?”서유인이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뭐래?”여름은 다시 열림 버튼을 누르더니 서유인을 밀쳤다.“뭐라고 쓰여 있는지 안 보여?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타는 거야?”서유인이 냉소를 지었다.“넌 회장님이 준 후계자라는 허울뿐이지만 난 벨레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잘 모르나 본데, 할아버지가 이미 재무팀에 내가 추신이랑 합자 회사 세우는데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해 주라고 하셨거든. 생각도 못 했지? 그렇게 나랑 우리 아빠를 쫓아내지 못해 안 달이었는데 우리가 이러게 빨리 복귀할지는 몰랐을 거다.”“요즘 아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어지간히 알랑방
스포츠카는 실내 공간이 좁은 편이다.하준은 마침 여름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이 고개를 드는 순간 하준이 여름을 쳐다보면서 여름의 촉촉한 입술에 하준의 입술이 닿았다.온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하준의 목젖이 움찔했다. 한껏 쌓여있던 장작에 불꽃이 튀어 화르륵 타오르는 듯했다.이렇게 가까이에서 여름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촉촉한 피부가 너무나 탐스러웠다. 우유처럼 뽀얗던 피부가 빠른 속도로 핑크색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저리 가!”여름이 하준을 밀쳤다.“한 번만 더 해주면 비킬게.”하준은 몸에 힘을 주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솜사탕처럼 가벼운 키스였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평생을 바라왔던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뭐가 다시야? 방금 그건 그냥 실수로 부딪힌 거거든.”여름은 당황해서 입을 비죽거렸다.“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하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어쨌든 뽀뽀 안 해주면 못 비켜.”“최하준!”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올 줄 몰랐다.“어? 저거 좀 봐!”하준이 갑자기 깜짝 놀란 듯 창밖을 가리켰다.여름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하준의 입술은 여름의 입술을 덮었다. 빠르게 키스하고 곧 몸을 뗐지만 하준은 이미 츄르를 한껏 훔쳐먹은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어이가 없었다.‘뭐야? 며칠 전까지 백지안이랑 얽혀있었으면서 처음 키스하는 사람처럼 이래?’하준은 운전석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시동을 걸었다.“자기야, 오늘 벨레스에서 어땠어?”“별로였어.”여름이 눈썹이 쓱 올라갔다 내려왔다.“벨레스랑 추신이 합자회사를 설립하기로 했어. 아주 돈을 있는 대로 퍼부어 가면서 야심만만하더라고. 내가 보니까 추신에서 국내 최대 금융사를 차릴 셈인 거야. 아마도 FTT 금융 자회사를 찍어 누를 셈인 것 같더라고.”“우리 삼촌이 열심히 안 해서 요즘 FTT가 금융 쪽에서는 영 힘을 못 쓰고 있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