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그래서 나도 크게 신경은 안 써. 할아버지께서 추신과 함께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시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어. 괜히 내가 양쪽에서 다 욕먹을 이유가 없지.”여름은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솔직히 벨레스나 서씨 집안에 별 감정 없어.”“그래. 벨레스에는 너무 마음 쓰지 마. 내 아내가 되면 FTT는 이제 다 자기 거야.”하준이 갑자기 여름의 손을 잡았다.“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되는 거라고.”“됐어. 난 내 힘으로 벌 거야. 언제 또…버려질지도 모르는데.”여름이 손을 빼면서 눈을 내리깔며 눈동자에 어린 냉기를 감추었다.“날 못 믿는구나. 상관없어.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천천히 증명해서 보여줄게.”하준은 느긋하게 웃었다.여름은 하준의 옆모습을 보면서 의아했다.“추신이 벨레스를 꿀꺽하고 나면 FTT보다 더 큰 그룹이 될까 봐 걱정되지는 않아?”“그렇지 않을 거야. 우리 FTT는 그간 엄청난 자금을 들여서 이쪽에서 연구를 많이 해 놨거든. 이제 중대한 돌파구를 찾았으니까 앞으로는 엄청나게 발전할 거야.”하준이 자신에 찬 웃음을 지었다.“추신의 시야는 국내에만 머물러 있지만 우리 FTT는 글로벌 시장을 노리고 있다고. 추신은 아무리 해도 우릴 못 따라와.”여름은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하준이 뿜어내는 자신감을 보고 있자니 늘 보아왔던 얼굴인데도 새삼 감동적이었다.‘인간은 쓰레기지만 정말 비즈니스 머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잘생긴 비즈니스의 천재라니, 누구에게라도 매력적이잖아.’----40분 뒤.차는 강변의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 멈췄다. 인테리어가 사뭇 이국적이었다.야외 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강바람이 불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여름은 해산물 요리 몇 가지를 주문했다.하준은 특별한 고객이었으므로 쉐프는 곧 빠르게 요리를 올렸다.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는 하나하나 모두 너무나 맛있었다.여름은 맛있게 먹었다.“자기들은 정말 레스토랑 하나는
하준은 흠칫했다.순간적으로 온몸에서 용암이 터져 나오는 기분이었다.호흡이 무거워지고 시선은 여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일부러 이러는 걸까?’“됐다. 이제 피 안 나네.”여름의 입술이 하준의 손가락에서 떨어졌다. 하준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지만 때로는 바짝 당겨서 마음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줄 필요가 있었다.하준은 멍하니 지혈이 된 손가락을 보고 있더니 게 껍질데기를 찾아서 다른 손을 찔렀다. 그러더니 곧 말했다.“이거 봐. 또 피나네.”“……”‘분위기 파악 정말 못하네.’“여기요!”여름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소금 좀 가져다주시겠어요?”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았다.“이거 안 보여 피가 점점 더 많이 나는데?”“괜찮아. 이따 소금 뿌리면 돼.”여름이 가식적으로 웃었다.“강바람에 잘 말리고 연기에 구우면 베이컨이 되겠지.”“……”하준은 사색이 되었다.“아까는 빨아주더니 지금은 왜 안 해주는데?”“돌았어? 내가 무슨 당신 손가락 빨아주는 사람이야? 남들이 보면 미쳤다 그래. 그리고 손에는 세균이 잔뜩이라고.”여름이 화를 냈다.하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자 할 수 없이 조용히 냅킨으로 손가락을 눌렀다.“어휴, 이리 내. 게 살도 못 발라주는 남자친구라니 정말 쓸모없네.”여름은 한숨을 쉬며 하준의 손가락을 눌러주었다.“그냥 내가 할게.”하준은 할 수 없이 얌전히 여름에게 게를 발라주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여름 앞에서 자신이 점점 더 주접스러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방금 여름이 자기 손가락을 입에 넣었던 장면을 떠올리니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러나 곧 이주혁과 시아가 나타났다.“뭐야? 진짜 하준이잖아? 난 내가 잘못 봤나 했네.”이주혁의 온화한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같이 백지안과 함께 밥을 먹으러 다녀봤지만 하준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공손하게 게를 발라주는 모습 같은 건 본 적이 없었다.시아는 더욱 놀랐다. 평
다들 안색이 확 변했다. 이주혁의 시선이 시아를 향했다. 하준의 얼굴은 매우 어두워졌다.“내가 언제… 지안이 목에 키스 마크를 남겼단 말이야?”‘난 지안이에게 손도 못 대는데 키스 마크라니 무슨 소리야?’시아가 눌린 목소리롤 물었다.“여름아, 무슨 소리야? 난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뭐 사실 난 너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어.”여름이 유유히 말을 이었다.“그때 연금되어 있다가 간신히 산전 검사를 하러 나갔을 때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백윤택이 언론에 ‘임윤서가 자기를 유혹하려고 했다’고 퍼트리고 다닌 걸 알았겠어? 뭐, 그 사실을 알고 내가 광분하는 바람에 하준 씨랑 싸우다가 유산하게 되긴 했지만… .”쌍둥이를 잃은 것이 그때였다.하준은 그 일의 발단을 제공한 사람이 시아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어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날 여름이가 칼을 들고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에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신경을 못 썼네.이제 보니 시아가 나불댄 거였군.시아가 나불대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쌍둥이를 잃는 일도 없었을 텐데.’“너였어?”하준이 벌떡 일어서더니 와락 시아의 팔을 움켜잡았다.“누가 그렇게 입 함부로 놀리래?”그러더니 하준은 손을 치켜들었다.시아는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아, 아니에요. 난 억울해요. 주혁 씨, 살려줘.”“하준아.”이주혁이 하준의 팔을 잡았다.“이러지 말자.”“이 인간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 바람에 나는 애를 잃었어.”하준의 눈에서 무한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여름은 냅킨으로 입을 닦더니 한마디 했다.“시아는 그냥 아는 대로 말을 해준 것뿐이잖아. 뭐 사실 그때 나도 너무 흥분하긴 했지. 안 그랬으면 그런 멍청한 소리에 속아서 날뛰진 않았을 텐데. 아이를 잃은 일은 당신하고 내 책임이야.”하준의 몸이 굳어졌다. 여름의 말은 백윤택은 도화선이 되었을 뿐 실제로 나쁜 짓을 한 것은 자신이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을 깨달았다.이주혁은 하준의 팔을 내리고 시아를 하준
“네가 나에게 쓸모가 있는 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차버렸을 거야.”이주혁이 사뭇 차가운 말투로 경고했다.“앞으로는 분수껏 행동해. 입은 다물고. 한 번만 더 나댔다가는 다시는 TV에 얼굴 못 나올 줄 알아.”시아는 창백한 얼굴로 얌전히 끄덕였다.지난번에 여름 때문에 평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예능에나 간간이 출연했을 뿐 새로운 드라마 배역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 믿을 구석이라고는 이주혁뿐이었다.“저기,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시아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이주혁이 확 말을 끊었다.“아니, 이상해서 그래.”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말을 꼭 해야 했다.“최하준이 예전에 강여름에게 얼마나 상처를 줬나 생각해 봐. 가두고, 유산되게 만들고, 정신병원에 넣고… 나였으면 절대 용서 못 해.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다시 둘이 잘 지낼 수가 있지?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단 말이야?”“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이주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시아는 움찔했다.“아니… 뭐… 여름이가 최하준에게 복수하려는 게 아닌가 해서. 내가 여름이를 모함하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하준 씨가 너무 빠져들어서 나중에 상처받게 되면 어떡해?”“주문이나 해.”이주혁이 싸늘하게 뱉었다.“응, 응. 알았어.”시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얼른 직원을 부르러 갔다.이주혁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이주혁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밤 9시.스포츠카 한 대가 성운빌 주차장에 섰다.여름이 안전 벨트를 풀고 내리려고 했다. 하준이 갑자기 여름의 손을 잡았다. 목젖이 꿈틀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식사할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시아가 와서 물을 흐리는 바람에 이후로 분위기가 싸해지고 말았다.“여름아, 미안해….”후회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다시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여름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않았을 텐데.“아직도 내가 미워?”“
“자기가 해주는 밥은 정말 너무 맛있어.”하준은 다시 흥분해서 말했다.“평생 먹고 싶어.”“평생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당신이 차버렸잖아.”여름이 접시와 수저를 치웠다.“이제 가. 늦었어.”여름이 돌아서자 하준이 다가와 뒤에서 여름을 꼭 안았다. “가기 싫다. 여기 있을래. 소파에서 자도 괜찮은데.”“나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야.”여름이 진지하게 말했다.“당신이랑 관계하고 나서 내게 돌아오는 건 무시와 사후 피임약뿐이더라. 난 이제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어. 이젠 쉽게 날 내주지 않을 거야.”하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내가 내 발등을 찍었군.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더라면 못된 짓 하지 말 걸.타임머신이 있으면 타고 가서 과거의 날 때려주고 싶다.여름이를 안아줄 수 있을 때 아껴주지 못했더니 이제는 안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을 수도 없네.’“알았어. 갈게. 하지만 뽀뽀는 한번 받고 싶어.”하준은 여름을 돌려세우더니 분홍빛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여름은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으나 저도 모르게 점점 하준의 허리에 손을 감게 되었다.하준의 키스는 너무나 부드럽고 뜨거웠다.키스가 끝나고 문밖으로 밀려나는 하준의 눈에는 아직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가득했다.“자기야, 내일 아침에 같이 아침 먹자, 응?”“알았어.”여름은 문을 닫고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박박 힘주어 양치했다.백지안에게 입 맞추던 입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더러웠다.----하준은 정반대였다.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너무나 달콤했다.상혁이 차를 몰고 데리러 올 때까지도 하준은 계속해서 입술에 남은 감촉을 음미하고 있었다. ‘너무 짧았지. 한 5~6분 되나?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걸.’“기분 좋아 보이십니다.”상혁이 눈치채고 과감하게 한 마디 던져 보았다.“막 연애를 시작한 스무 살 같아 보입니다.“스무 살 ‘같아 보여’?”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나이 들었단 말이야?”막 연애를 시작한 입장에서 나이 문제가 민감하게 다가왔다. 더구나 여름
“그 사람은? 갔어?”하준이 이주혁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넌 언제까지 걔를 그렇게 데리고 있을래? 전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보니까 정말 별로더라. 너에게 안 어울려.”“어떤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야.”이주혁이 술을 한 잔 삼켰다.“그러는 넌? 정말 강여름이랑 다시 합칠 생각이야?”“응.”하준은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물론 중간에 시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이주혁이 걱정스럽게 하준을 흘끗 봤다.“강여름이… 정말 너랑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건지… 복수하려는 건지… 생각해 본 적 있냐?”싱글벙글하고 있던 하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술잔을 내려놓은 하준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눈빛에 압도되어 입도 못 열었겠지만 이주혁은 어려서부터 하준과 함께했다. 하준의 됨됨이를 낱낱이 아는 주혁은 하준의 눈빛 따위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네가 그간 강여름에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그 온갖 못된 짓을 다 했는데 그걸 다 내려놓아서 일말의 원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주혁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준의 심장을 꼭꼭 찔렀다.이주혁이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했던 못된 짓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되돌이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내게 복수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한참 만에야 하준이 눌린 목소리로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이주혁이 하준의 어깨를 두드렸다.“그냥 환기시켜 주고 싶었어. 걔가 널 가지고 놀도록 너무 몰입하지 말라고. 아니면 또 무슨 다른 방법으로 너에게 복수할지도 모르고.”“탕!”하준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리쳤다.“아니야. 여름이는 날 사랑해. 느낄 수 있어. 전에는 내가 여름이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나친 짓을 했지만, 지금은 여름이를 사랑해. 이 세상에 좋은 건 모두 여름이에게 주고, 내 온 마음을 다 줄 거야.”“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난 할 말 다 했다.”이주혁은 하준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혀를 하며 냅킨을 건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본 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부끄러워야 정상이겠지만 두 사람이 동성에 살 때 여름은 이 수를 써본 적이 있었다.‘흥, 무슨 여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내외를 하고 난리야?’“알았어.”여름은 침실로 들어가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나왔다.하준은 식탁에 앉아서 싸 들고 온 아침 식사를 펼쳐놓고 있었다.“자기 먹이려고 내가 우리 쉐프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싸 왔어. 계란국에, 감자샐러드, 메추리알 장조림, 마늘쫑 무침…”하준이 하나하나 읊었다.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다.수저를 들어 막 먹기 시작했는데 한참 먹다 보니 가만히 앉아만 있는 하준이 눈에 들어왔다.“당신은 왜 안 먹어?”“입맛이 없어.”하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름이 해주는 게 아니면 하준은 그다지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그러면 어떡해? 아침은 먹어야지. 이리와, 먹여줄게.”여름이 메추리알을 입에 물고는 장난스럽게 하준을 쳐다보았다.하준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여름의 속눈썹 하나하나까지도 잘 보였다.‘그러니까… 입으로 먹여준다는 말이야?’전혀 식욕이 없다던 하준의 목젖이 꿈틀했다. 고개를 숙여 메추리알을 반 베어 물었다.“이제 먹고 싶지?”생글생글 웃는 여름에게서 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는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어.”하준은 참지 못하고 여름을 잡아당겨 무릎에 앉히고는 여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강여름은 마약이야. 전에는 매일 싸우느라 바빠서 몰랐는데 정말 날 너무 빨아들인다고.’‘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저 좋다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너무너무 좋아. 아니, 사랑해.처음부터 강여름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아.’“자기가 나에게 복수하려고 접근한 거라고 해도 난 자기랑 함께 있고 싶어.”하준은 여름의 목이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여름의 몸이 굳어지더니 하준의 얼굴을 떼어내고 바라보았다.“지금 무슨 소리야?”“전에는 내가 너무 자기한테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하준이 두 손으로 여름의 두 볼
“하지만….”여름이 화제를 돌렸다.“꼭 혼내주고 싶은 사람은 있어. 그 사람을 손봐주지 않으면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을 의심할 수 밖에 없어.”“그게 누군데?”“민정화.”여름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온 이름이었다. 목소리에 한껏 한이 서려 있었다.하준은 깜짝 놀라서 미간을 찌푸렸다.“민 실장이 왜? 내가 지안이를 보호하라고 해서….”“아니.”여름이 눈을 똑바로 뜨고 하준을 노려보았다.“이혼협의서에 사인하던 날, 민정화에게 내 몸을 뒤지라고 했었지? 그런데 민정화가 그 자리의 다른 남자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내 옷을 벗겼다니까. 상혁 씨가 말리지 않았으면 바지도 벗길 뻔했다니까. 그때의 모욕감은 내가 잊을 수가 없어.”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그날을 하도 정신이 없었지만 자기가 밖으로 나갔다가 김 실장과 민정화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다시 들어왔을 때 여름의 옷매무새가 흩어져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났다.“뭐야? 날 안 믿는 거야?”여름이 갑자기 화를 내며 하준의 품에서 벗어났다.“내가 민정화랑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모함을 하겠어? 못 믿겠거든 가서 상혁 씨랑 그날 왔던 보디가드들에게 물어봐. 내 말이 거짓말이면 벼락을 맞아 죽지.”“당신이 벼락을 왜 맞아?”하준의 안색이 변했다.“어쨌든 난 거짓말 안 했으니까 겁날 거 없어.”그러더니 여름은 이제 아침 식사에 흥미를 잃은 듯했다.“말로는 날 좋아한다면서도 민정화에게는 손을 못 대겠나 보네? 뭐, 날 못 믿는 건가? 지룡파 멤버 하나만도 못하게 여기면서 좋아하긴 뭘 좋아해?”여름이 이제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아니,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라….”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마음 속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민정화는 백지안을 지키기 위해 여름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으니 여름이 민정화에게 개인적인 억하심정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었다.그러나 그렇게 망설이는 하준을 보니 여름은 눈에 거슬렸다.“가서 조사해 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여름은 갑자기 시선을 피하면서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