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없어요. 얼굴로 회사 경영하는 거 아니잖아요. 자, 이제 각 지역 프로젝트 진행 상황 보고해주시죠.”한 시간 후, 회의는 끝이 났다.대표이사실로 돌아온 여름의 눈에 책상 위에 놓인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유인과 추성호가 보낸 초대장이었다. 내일 무진 인터내셔널호텔에서 약혼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서유인이 나한테 초대장을? 뭐 하자는 거지?’그때, 알 수 없는 발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초대장 봤어, 언니?”“언니 같은 소리 하네, 남의 남편 뺏으려고 안달 난 게 동생인가?”이제 혼인증명서까지 있겠다, 서유인 앞에서 움츠러들 이유가 없었다.“어이없어, 누가 누구 남편을 뺏어?”서유인은 발끈하더니,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말을 이었다.“됐고, 나도 이제 드디어 내 행복을 찾았어. 어쨌든 가족이니까. 동생 약혼식이니 참석할 거라 믿어.”“초대한 정성을 봐서 참석은 하지.”여름이 흔쾌히 온다고 하니 서유인은 잠시 당황했다.“완전히 환영이지. 아참, 얼굴 다쳤다며? 내일 하객들 안 놀라게 얼굴은 가리고 와. 그럼 내일 봐.”말을 마치더니 서유인은 키득거리며 전화를 끊었다.여름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속셈을 알 것 같았다.하지만, 여름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얼굴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디, 진짜 혐오스러운 사람이 누군지 한번 보자고.’******퇴근 후, 차윤이 차로 데리러 왔다.“회장님께서 오늘 야근하셔서 제가 대신 모시러 왔습니다.”뒷좌석에 앉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차윤이 설명해주었다.그러고 보니, 하준이 회장직에서 쫓겨난 후에도 다른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름은 아는 바가 없었다.“어느 회사에서 야근한다는 거죠?”차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말하기 싫으면 됐어요. 그냥 생각난 김에 물어본 것뿐이에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딘지 꺼림칙했다.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하준의 달달한 고백이 여
뉴빌가든으로 돌아온 여름은 샤워 후 노트북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각 부서에서 지역별 매물의 판매 실적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잠시 자료를 보다가 어느새 무언가에 홀린 듯 인터넷으로 지안그룹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있었다.검색하던 여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 5년이 되지 않은 회사인데 시장 가치가 놀라웠다. 게다가 지안그룹과 FTT에서 가장 수익이 큰 자회사는 모두 주력 상품이 전자제품이었다.물론, 업계에서 FTT의 규모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지안의 실적은 단연 돋보였다. FTT 시장을 무려 4분의 1이나 점유하고 있었다.5년 전, 하준은 이미 암암리에 이 모든 걸 다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FTT에서 내쳐지게 될 걸 예측했던 걸까?’여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최하준이란 사람은 정말 가늠할 수가 없었다.“지안 그룹 공부 중입니까?”갑자기 문에서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깜짝 놀라 황급히 노트북을 닫고는 도깨비처럼 뒤에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됐습니다, 다 봤어요. 차 실장이 말해주던가요?”하준이 몸을 책상에 기대며 말했다.“네.”여름은 하준이 차윤을 나무랄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내가 물어봤어요….”“좋은 자세네, 이제 남편한테 관심도 가지고.”하준이 허리를 숙였다. 입술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하지만,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검색하지 말고 나한테 물어봐요.”“…….”여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하준이 그런 여름의 뺨을 쓰다듬었다.“지금 내가 FTT에 대적하려고 5년 전에 지안그룹을 설립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면서….”“무슨, 그냥 보험 들어둔 거겠죠, 이해해요.”“당신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예전엔 FTT에서 제일 잘 나가던 자회사가 전자 쪽이 아니었어요. 처음엔 금융으로 시작했고 전자 쪽은 별 볼 일 없었지. 내가 회장직 맡은 후에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회사도 위기를 맞았고 그래서 전자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
하준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준은 곧 웃으며 말했다.“회사에서 다들 상의해서 결정했습니다.”“그렇구나….”여름이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답했다.차라리 사실대로 말해줬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준은 여름이 백지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매번 이런 식이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고 할 때마다 날 실망시켜.’“그 얘긴 그만하고… 이건 뭡니까?”하준이 봉투를 잡고 흔들었다.여름이 돌아와 책상에 올려둔 걸 본 모양이었다.“서유인이 약혼식에 초대했어요.”“나도 초대했던데.”하준이 가볍게 웃었다.“어지간히 자랑하고 싶은가 보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전 남친까지 불렀다고? 내일 아주 볼만하겠네.’“이건… 그냥 안 본 걸로 해요. 갈 필요 없어요.”하준은 초대장을 한쪽으로 던져버렸다.“당신은요?”여름이 하준을 쳐다보았다.“나는 추신그룹 사람들을 좀 만나려고.”하준의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여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최근에 일어난 일들이 그 집안과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응, 특히 요트 동영상 같은 건 최양하 혼자서는 벌일 수 없는 일이거든, 분명 추신에서 도왔을 겁니다.”하준이 여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에 기분이 좋았다.“당신은 출근해요, 다른 건 나한테 맡기고.”“아뇨, 간다고 했어요. 나도 갈 거예요.”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결연한 눈빛이었다.“굳이….”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여름이 하준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내가 이런 얼굴로 그런 데 가면 웃음거리나 될까 봐 그래요? 아니면 나 때문에 당신이 망신당할까 봐?”“강여름….”하준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당신에게 나는 그런 사람입니까? 당신을 보호하고 싶으니까 가지 말라는 거지. 서유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여름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당신은 앞으로 이런저런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게 될 거예요. 나더러 평생 숨어있으라고? 난 집에서 당신이 연회에 참석하
”하지만… 당신이 사람들 앞에 설 준비가 되면 그땐 어떤 자리든 같이 갈 거야. 당신 손을 꼭 잡고.”하준의 말에는 마치 선서라도 하듯이 한 글자 한 글자 진지함이 묻어있었다.여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분명 하준의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달콤한 말이 이렇게 멋진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가 여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아무래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것 같네.”하준은 씩 미소 짓더니 여름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하지….”하준이 진심임을 깨닫자 여름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그날 밤 이후 지금까지 여름의 마음속엔 아직도 두려움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쉿, 이렇게 생각이 많아서야… 그 걱정 내가 다 지워줄게.”하준이 여름의 허리를 꽉 잡았다.여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만 하라고! 저런 부끄러운 소릴 어쩜 저렇게 당당하게....’“다시는 다치게 하지 않을게.”하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여름은 온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다음 날.하준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설 때, 여름은 아직 이불 속이었다. 입술에는 한껏 요염함이 흐르고 눈은 감은 채로 하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했다.“잠꾸러기, 해가 중천이라고. 이제 일어나야지. 곧 스타일리스트가 옷 가지고 올 텐데.”“누구더러 잠꾸러기래?”여름이 눈을 뜨고 살짝 흘겼다. 하지만 게슴츠레 뜬 눈에는 애교가 흘러넘쳤다.하준은 그런 여름을 보며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얼굴은 예전 같지 않지만, 여름의 두 눈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우리 애기, 옷 입어야지.”하준이 옷장에서 옷을 꺼내 여름에게 입혀주려 했다.“아니, 됐어. 내가 입을게요.”하준을 밀어내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던 여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두 눈을 보며 잠시 황홀감에 빠졌다.‘내 모습이 어떻든 정말 상관 없나봐. 어제 그거 진심이었잖아.’그런 밤을 보
11시.회사에 갔던 하준이 여름을 픽업하기 위해 돌아왔다.여름이 먼저 하준의 손을 잡았다.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이 드레스 마음에 들어요.”“맘에 든다니 다행이네.”하준의 표정이 밝아졌다.‘서유인 드레스를 가로채려고 애쓴 보람이 있군.’호텔로 향하던 차가 사거리에서 멈추었다. 그때 길거리에서 약국을 본 여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잠깐, 병원 좀 들려요.”“뭔데? 내가 갈게.”하준이 여름을 응시했다.“…사후피임약요.” 여름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아기 가져도 되잖아?”하준이 여름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좋은 아빠가 될게.”“…….”여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아이는 무슨, 아직 그런 사이 아닌 것 같은데. 난 해야 할 일도 많고.’“지금은 갖고 싶지 않아요. 나도 아직 한참 어린데.”여름이 얼굴을 홱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알았어, 그냥 있어. 내가 받아 올게.”병원에서 받은 처방을 들고 하준은 약국으로 달려갔다.“비타민이랑 피임약요.”약사에게 약을 건네받은 하준은 그 자리에서 피임약과 비타민을 바꿔 넣었다.약사 눈이 휘둥그레졌다.‘뭐지? 저렇게 멀쩡하게 생겨서 임신으로 여자를 잡으려는 건가?’하준이 차에 타더니 여름에게 약을 건넸다. “몸에 안 좋으니까 오늘만 먹어요. 다음엔 내가 조치를 취할 테니까.”‘다음이라고….’여름은 운전석에 앉은 상혁이 신경 쓰여 부끄러움에 하준을 흘겨보았다. “부부 사이에 뭐가 어때서?”하준이 응큼하게 웃었다.“…….”‘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무진 인터내셔널호텔.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5성급 호텔로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프라이빗 비치가 있고 전 세계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일곱 곳을 갖추고 있었다.많은 재벌가 자제와 연예계 스타들이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로 유명했다.약혼식은 프라이빗 비치와 잔디밭에서 거행되었다.서유인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고모
”어머, 이 호텔이 추 서방 거였구나. 연매출이 어마어마 하다던데 대단하다!”“맞아요.”서유인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추성호를 바라보았다. 최하준만큼 잘생기지도 키가 크지도 않았지만, 얼굴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게다가 전도유망하지 않은가!무엇보다 오늘 FTT 일가부터 정·재계 고위 인사들까지 모두 불러 모았으니 서유인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준 셈이었다.서유인이 꿈꿔 온 결혼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이제 최하준이 이걸 다 보고 나면 엄청 후회하겠지? 그러게 누가 날 마다하래? 그리고 강여름, 얼굴마저 그 꼴이 됐겠다, 내가 부러워 죽겠지?’“최하준이다. 옆에 강여름도 있네.”서원희가 소리쳤다.비치에 있던 하객의 시선이 온통 그쪽으로 향했다. 하준은 흰색 수트 차림이었다. 원래 이런 자리에 흰색 슈트를 잘 입지 않았지만 오늘 하준은 그림에서 걸어 나온 듯 근사했다. 그 수많은 하객들 사이에서 홀로 찬란히 빛났다.그 무엇보다 하준과 마찬가지로 흰색 슈트를 차려입은 오늘의 남자 주인공 추성호는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너무 화가 나 당장 호텔을 다 뒤집어엎을 기세였다. 화가 나기는 서유인도 못지않았다. 여름이 입은 드레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유인은 약혼식에 레오의 역작인 그 드레스를 입고 싶었지만 아무리 거금을 줘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드레스를 여름이 입고 나타난 것이었다.서동희가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 막으며 말했다.“저 드레스 언니가….”서유인이 무섭게 쏘아보았다. 서동희가 곧 태도를 전환했다.“무슨 상관이야. 얼굴이 저 꼴인데, 드레스만 아깝네.”“맞아.”예전에 서유인은 여름이 예쁜 게 너무나 샘이 났었지만, 이제 엉망인 여름의 얼굴을 보니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기분이 좀 나아지자 유인은 추성호와 함께 최하준 쪽으로 갔다.“제 약혼식에 참석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자리가 빛이 나네요.”추성호가 다가가며 형식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손을 내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여름은 추성호와 초면이었다.사실,
”그래, 참 안 됐지 뭐야.”서유인이 맞장구를 쳤다.“사람이 체면 때문에 그럴 때도 있지.”“그래, 체면 정말 중요하지. 추 대표만 해도 그러시더라. 내가 막 서울에 왔을 때 여대생하고 뜨거운 사이길래 신데렐라 스토리 하나 나오나 했는데 그냥 내 망상이었지 뭐야.”여름이 진지한 태도로 서유인에게 말했다.“동생 약혼식이니 언니로서 진심으로 한마디만 할게. 나이 들면 누구나 늙게 돼 있어. 예쁜 여자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귀하지. 변치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혼인 관계를 오래 유지시켜 주는 비결이야.”“당신 말이 맞아요.”하준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도 회장에게 말했다.“그건 우리 도 회장님께서 잘 아시지. 평생 스무살 짜리만 좋아하셨거든. 이번에 또 애인이 바뀌었다던데 연로하신 사모님께선 그저 모른 척하고 계시겠지.”여름이 갑자기 정색하며 추성호에게 말했다.“도 회장님과 친분이 깊으신 걸로 아는데, 설마 그런 것도 배우는 건 아니죠? 우리 유인이한테 미안할 일은 하지 말아주세요.”약혼식 날 졸지에 도매금으로 욕을 먹게 된 추성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의기양양하던 서유인도 이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추성호가 어린애와 사귀었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럴 리가요. 유인 씨에게 전 첫눈에 반했습니다. 평생 유인 씨만 아껴줄 겁니다.”추성호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그랬군요. 그럼 그동안 짝사랑하시느라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남의 남자한테 죽자사자 매달려서….”여름이 황급히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어머, 나 좀 봐,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강여름! 일부러 이러지?”서유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전에는 내가 눈이 멀어서 사람을 잘못 봤지. 뭐로 보나 우리 성호 씨가 백배 낫다고.”“그래.”여름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제 최양하가 FTT회장이라 추 대표가 FTT를 등에 업었으니까. 안 그랬으면 네 눈에 들었으려
”서유인 엄마가 한 짓이에요.”여름이 서경주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그 분이 하준씨 고모를 시켜서 제 밥에 약을 탔어요. 그래서 얼굴이 이렇게 됐고요.”“뭐라고?!” 서경주는 무척이나 놀랐지만, 위자영의 그간 행적으로 보아 충분히 했을 법한 짓이었다."이 사람이 정말.... 내가 당장 가서….”“오늘 좋은 날이잖아요. 하객도 많은데 괜히 소란피우지 마세요. 하준 씨 할아버지도 와 계시니 아무도 아버지 편이 돼주지 않을 거예요.”여름이 말렸다.서경주가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네 얼굴이….”“아버님, 천천히 하시죠.”하준이 침울하게 말했다.“여름 씨를 건드린 사람은 제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서경주는 마음이 무거웠다. 반평생 사업에 미쳐 살면서 누구에게도 신세지지 않고 지냈지만, 딸에게만큼은 빚진 게 너무나 많았다. “유인이 결혼식만 끝나면 나는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벨레스에서 아무리 말려도 할 거다.”여름이 의아하다는 듯 서경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여름은 아버지가 위자영 모녀에게 쩔쩔맨다고 생각했었다.“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진심이니까. 벨레스 지분 절반의 40퍼센트는 내 거다. 그중 35퍼센트를 너에게 주고 유인이에게 5퍼센트를 줄 생각이다. 곧 변호사 통해 공증받을 거야.”“아니….”“그러기로 결심했다. 넌 그냥 가만히 기다리면 돼. 남은 생은 먹고 살 걱정 없게 해주마. 비록 몹쓸 짓을 당했다만, 그거라도 받아서 얼굴을 어느 정도 복구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서경주는 말을 마치고 최하준을 도발이라도 하듯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름은 침을 삼키다가 하마터면 목에 걸릴 뻔했다.아버지가 이렇게 저돌적인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저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최하준이 웃으며 말했다.“흥, 남자 말을 어떻게 믿나?”불신이 가득한 목소리였다.최하준: “…….”여름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빠 재밌는 분이셨네.’멀지 않은 곳에서 위자영이 이 광경을 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