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어요.”임옥희가 자신이 만든 아침 식사를 들고 왔다.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여름 씨, 내 아침을 안 했습니까?”“내가 만든 밥 안 먹겠다고 했잖아요.”여름은 담담하게 응대했다. 하준은 늘 그랬다. 의심할 때면 여름이 만든 아침밥에 화풀이해놓고, 또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피곤하지도 않나?’“당장 하십시오.”하준의 얼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안 해요. 내가 하인도 아니고.”여름은 죽을 다 비우고 일어났다.“회사 갔다 올게요.”하준은 고개를 돌려 현관 입구에 서 있던 차윤에게 말했다.“잘 지켜봐. 병원에 가려고 하거든 바로 데려와.”“내가 당신 노예에요?”여름은 너무 화가 났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억압하려 하다니.“최하준 씨, 적당히 하죠.”“날 건드렸을 때는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반항은 받아주지 않겠습니다.”담담한 말투였지만 사람 환장할 소리였다.여름은 핸드백을 챙겨 나갔다. 차윤이 따라나섰다.출근길, 여름이 아무리 속도를 내도 차윤은 쉽게 따라붙고는 했다.주차장에 도착해 여름이 내리자 차윤도 얼른 뒤에서 따라 내렸다.“따라오지 말아요. 병원 안 가요.”여름은 차윤 앞으로 가 솔직히 말했다. 이 경호원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분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최하준 씨가 고용한 거죠? 얼마 받나요? 내가 두 배 줄게요.”여름이 가방에서 카드를 꺼냈다.차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얼마를 주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그 댁에서 특별히 훈련받았습니다. 고용주를 위해서만 일합니다.”여름은 흠칫했다. ‘FTT에 차윤 같은 사람이 더 있다는 건가?’FTT는 상상 이상으로 미스테리했다.“하준 씨하고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됐죠? 혹시 ‘지안’이라고 알아요?”늘 차분하던 차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찰라였지만 여름은 분명히 봤다.“하준 씨가 그러던데, 전 여친이라고. 두 사람이 아주 깊은 사이었나 봐요?”“이미 지난 일입니다. 그분 마음속엔 이제 강여름
“지금 회의가 있어서 5시 반은 되어야 끝날 것 같아. 이따가 나는 바로 갈게. 너희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좀 전해줘.”윤상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하지만 절대 늦으면 안 돼. 우리 아빠 약속 안 지키는 거 제일 싫어하신단 말이야.”“걱정 마, 내 평생이 걸린 큰일인데 늦으면 안 되지. 어머님 아버님 드릴 선물도 벌써 준비해 놨어. 얼른 날짜 잡고 우리 윤서 데려와야지.”윤상원이 웃으며 말했다.윤서는 스윗한 말투에 기분이 좋아졌다.전화를 끊고 윤서는 부모님을 픽업해 컨피티움으로 향했다.도착하니 딱 5시 반이었다. 윤서가 음식을 주문하고 얼마 안 되어 오빠 임준서도 도착했다.6시가 되도록 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윤서의 아버지는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직도 안 오는 거냐, 어른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원.”어머니가 말했다.“연말이라 일이 많을 거 아녜요, 조금 기다려봐요.”윤서는 윤상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아마 오는 길이라 못 받나 봐요, 곧 도착할 거예요.”하지만 다시 30분이 지나도록 상원은 오지 않았고 윤서의 아버지는 더 화를 참을 수 없었다.“첫 대면 자리에서조차 바람을 맞히고 전화 한 통 없다니, 내가 보기엔 그 녀석 진심이 아닌 것 같구나. 난 이 결혼 허락 못 한다.”이번에 어머니도 아무 말 없었고 임준서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당장 헤어져라. 세상에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가족들에게 질책을 들으며 윤서는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눈물을 꾹 참고는 있었지만 너무나 실망스럽고 괴로웠다.자신을 수도 없이 바람맞혔던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처음 뵙는 날 약속을 어기다니!‘정말 날 사랑하긴 하는 걸까?’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서야, 평생 너한테만 마음 쏟아주는 사람을 만나야지. 괜찮아. 아직 어리니 서두르지 말고 결정하자꾸나. 밥 먹자, 다 식겠다.”다들 입맛이 없어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다.윤상원은 끝까지 전화 한 통화 없었다.식
”말 다 했어?”윤상원이 버럭 화냈다.“아니지?”윤서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윤상원, 나 장난 아니야. 다시는 나 찾지 마. 우리 이제 정식으로 헤어지자.”“너 정말, 정도껏 해!”“끝났다고. 그 눈에는 평생 신아영 밖에 안 보일 거야. 그래, 차 사고 났으니 가볼 수 있지. 하지만 우리 가족을 까마득히 잊은 채 전화 한 통화 없는 건 아니지. 오늘이 우리한테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지 신경조차 안 쓴 거야. 이제 기대 안 해.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윤서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그리고 다 울고 나서, 윤상원과 신아영의 연락처를 모두 삭제해버렸다.그 두 사람 때문에 너무나 고통받고 지쳐 있었다.‘앞으로 다시는 기대나 희망 같은 거 가질 일 없을 거고 아파할 일도 없을 거야.’윤서는 불러내 함께 술 마시며 넋두리할 상대가 간절했다.원래는 여름에게 전화할 생각이었으나 자유롭지 못한 여름의 처지가 떠올라 그냥 혼자 차를 몰아 바(Bar)로 갔다.******동성의 바는 모두 거리 한 곳에 몰려 있다.있는 집 자제들이 가는 곳도 딱 몇 군데 정해져 있다.11시, 지훈과 하준 두 사람이 위층 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저녁을 먹었는데도 하준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훈이 어쩔 수 없이 함께 술친구가 되어 주었지만 하준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술에 취한 모습이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하준아, 이번에 서울 가서 설 보내냐? 만약 안 가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같이 오라고 하시는데.”지훈이 내려가며 말했다. 아래쪽을 슬쩍 곁눈질하던 눈에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얀 피부의 여인이 들어왔다. 옅은 노란색 니트를 입고 긴 웨이브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린 여인은 이목구비가 매우 서구적이었다.그런데 윤서는 완전히 취해있고 옆에는 남자 둘이 지분거리고 있었다. “윤서 씨 아냐? 왜 혼자 술 마시고 있지?”윤서와 몇 번 함께 자리한 적이 있는 지훈은 윤서를 괜찮게 생각하고 있
“평생 차여라!”지훈이 짜증 내며 말했다.“임윤서 씨, 잘 봐요. 나 이지훈인데요?”“이지훈이 누구야….”임윤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처음 듣는 이름인데. 당신 나한테 반해서 납치하는 고야?”지훈은 어이가 없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최하준은 알죠? 당신 베프의 남친.”윤서가 몽롱한 상태로 앞을 바라보다가 눈을 번쩍 떴다.“어머~ 외삼촌이시구나. 외삼촌, 안녕하세요!”하준이 미간을 문질렀다. ‘어허, 또 취해서 아무렇게나 부르네.’지훈이 ‘풉’하고 웃었다. “착각했나 보네요. 저 녀석이 왜 외삼촌입니까?”“아닌데요? 외삼촌 맞잖아요, 히힛!”윤서가 손을 내저었다.“맞다니까! 한선우 그 쓰레기 외삼촌. 내가… 여름이랑 바에 있을 때… 내가 딱! 찍어줬는데에~”하준이 미간이 움찔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날 뭘로 찍었다는 겁니까?”“꼬시라고. 우리 여룸이가 외숙모가 되면 한선우가 완전 약 오를 거 아녜요? 한주그룹 서열도 완전 꼬이고, 흐흐~”윤서는 완전히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아, 아니다. 그쪽은 외삼촌 아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봐서… 여름이를 그렇게 만들었어, 흐엉.”최하준의 눈빛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어째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겁니까?”하준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윤서 씨 외삼촌이랑 닮았을 리도 없는데?”“에이, 난 외삼촌 없어요.”윤서가 헤롱헤롱하다가 잠시 후 웅얼웅얼 말했다.“외삼촌, 우리 여룸이한테 잘해줘여어. 화내지 말요. 내가 약 쓰라고 했어요. 진짜 걔가 그런 거 아니에요.”윤서는 계속 중얼거리다가 차 문에 기대어 정신없이 잠들었다.운전하는 상혁도, 뒤에 있는 지훈도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물이 있으면 죄다 얼어붙을 듯 분위기는 싸늘했다.5분쯤 뒤, 하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차 세워.”“하준아.”지훈은 좀 걱정이 됐다.“너무 늦었다.”“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 넌 윤서 씨 데려다
번쩍! 갑자기 등이 켜졌다.곧이어 여름이 덮고 있던 이불이 걷히고.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십시오.”“대체 또 뭘 하려는 거예요?”여름은 피곤한 듯 일어나 앉아 올려다보았다가 얼어붙고 말았다. 하준의 눈은 완전히 핏발이 서고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하준은 여름의 청순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여름과 만났던 날의 장면, 여름이 했던 말, 세세한 표정, 모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답해요. 그때 바에서 왜 나를 유혹했던 겁니까?”“그건 갑자기 왜요?”여름이 눈을 피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그러나 하준은 피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바로 여름의 턱을 잡고는 차가운 눈으로 똑바로 바라봤다.“날 한선우의 외삼촌이라고 착각했던 겁니까?”‘치지직’ 머릿속에 번개가 치고 있었다.“…….”여름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하준은 계속 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름의 얼굴색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당황하고 놀란 눈동자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하준의 마음도 점차 차가워지고 있었다.그동안 정말 바보처럼 여름이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껏 둘 사이의 밀당에서 자신이 우위라고 믿었는데 사실 저쪽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사랑은 모두 거짓이다. 달콤함도 모두 거짓이다. 이 세상에 좋은 건 다 거짓이다.‘이렇게 가식적인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렸었다니.’“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여름은 망연자실한 채 어쩔 바를 몰랐다.“당신 그 변명도 이제 역겹습니다.”하준은 여름을 떨쳐내고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티슈로 손을 박박 닦았다.여름은 이런 그의 행동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좋아요, 인정할게요. 처음엔 그랬어요. 하지만 나중엔….”“나중에 한선우 약혼식장에서 양유진을 보고 착각했다는 걸 알았겠지. 그래서 바로 이혼하자고 했고, 아닙니까?”돌아오는 길에 하준은 모든 걸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아마도,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겠지.’애초에 지저분한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했었고, 나중에는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이 더해졌다.이제 그 거짓이 다 드러났고 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거품처럼 그대로 터져버렸다.******밤새 잠을 못 잔 여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준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아마 이것은 여름이 그를 위해 준비하는 마지막 아침이 될 것이다.“아유,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겨우 6시 반인데.”임옥희가 하품하며 주방으로 들어오다가 여름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흠칫 놀랐다.“어젯밤에 잠 못 잤어요? 얼굴이 너무 안 좋네요.”“이모님, 어젯밤에 식단을 적어봤어요.”여름이 노트를 건넸다.“하준 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에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라 이제 이모님께서 수고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어머, 무슨 뜻이에요?”임옥희가 깜짝 놀랐다. 최근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부부싸움 칼로 물베기지’ 하고 있었다.“아이고, 도로 가져가요. 선생님은 여름 씨가 한 것만 좋아하지 내가 한 건 건드리지도 않는다고요.”“앞으로… 앞으로라는 게 없을 거예요, 이제.”여름이 힘없이 웃었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더 머물 수 있다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믿지 않겠지. 자기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더군다나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신뢰가 깨져 있었다. 계속 함께한다고 행복해질 리도 없었다.“아이고, 그런 소리 말아요, 부정 타게.”임옥희는 끝까지 거부하더니 나가버렸다.여름은 하는 수 없이 조리대 위에 두었다. 아주머니가 볼 거라 믿었다.오늘 아침은 공을 많이 들였다. 손수 만든 겉절이에 미역국, 명란 계란말이, 조기구이….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고 처음 준비했던 메뉴와 비슷했다.8시가 되자 하준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검은 팬츠에 검은 터틀넥 니트를 받쳐입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 옷이나 걸쳐 입어도 워낙 핏이 좋다 보니 모델처럼 빛이 났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하준은 여름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았다.여름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겠는가?여름은 펜을 들어 서류에 사인했다.‘강여름’이란 세 글자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사인했어요. 올라가 짐 싸고 지금 나갈게요.”여름은 몸을 돌려 올라갔다. 하준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슬쩍 보았다.핑크색 실내복에 폭포수 같은 머리칼이 어깨에 흩어져 내려 있었다. 여름이 떠난 자리에 삼나무 향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 힘을 더 줄수록 가슴 속 답답함이 좀 사그러드는 것 같았다.한바탕 악다구니가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고분고분 사인할 줄은 몰랐다.‘그렇게 양유진에게 가고 싶었단 말이지.’“하아….”탄식하듯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이 여자 하나 없다고 죽기야 하겠는가?30분 후, 여름이 캐리어를 끌고 내려왔을 때 거실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식탁 가득 차려놓았던 아침 식사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여름은 눈가에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떠났다.백미러에 하준의 집이 점점 작아져 갔다. 여름은 조용히 읊조렸다.“안녕, 쭌쭌.”여름에게 하나뿐인 집이었고 하준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이제, 여름은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여름이 떠나고 20분도 채 되지 않아, 지훈의 차가 하준의 집에 나타났다.지훈은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준은 테라스에 서 있었다. 시선은 도로 쪽을 향한 채, 손가락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옆에 놓인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정말 서울로 돌아가려고?”지훈이 매우 실망스러운 듯 말했다. “가지 마라, 인마. 너 없이 어떻게 사냐, 내가.”“내가 아쉬운 게 아니라 내가 로펌에 벌어다 주는 돈이 아쉬운 거겠지.”하준이 담담히 담뱃재를 털었다.“…….”지훈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로펌 수익이 수백억 늘긴 했지.”하준은 손을 주머니
“가지 마, 그 사람 내가 그 사람을 한선우 외삼촌으로 착각해서 접근한 거 다 알아버렸어. 네가 전에 나 경찰서에서 구하려고 일부러 거짓말한 것도 다 알아.”여름이 말렸다.“뭐? 그걸 어떻게 알았대?”윤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망했다, 최하준이 날 잡아먹으려들겠네.’“그러니까. 너랑 나밖에 모르는 일인데 말이야.”여름이 힘없이 윤서를 쳐다보았다. “난 아무것도 말한 적 없거든. 너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하네, 어제 너무 마신 거 아냐? 너 원래 술 마시면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잖아.”“애먼 사람 잡지…”순간 무언가 윤서의 머릿속에서 번쩍했다. 윤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생각났어. 어젯밤에 지훈 씨가 나 바래다준 것 같아. 너무 취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차에 남자 한 사람 더 있었는데 네 남편이라고….”“…….”‘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전생에 널 팔았지 싶다.’윤서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여름아, 진짜 미안해.”윤서가 두 손바닥을 맞대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내가 또 다 망쳤어. 평생 어떻게 해야 너한테 보상이 될지 모르겠다. 정말 널 볼 면목이 없어. 우리 오빠라도 소개해 줄까? 평생 너만 바라볼 거고 바람도 안 피울 거야, 내가 보장해.”“됐다.”여름이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윤서를 탓할 힘도 없었다.“네가 아니었어도 그 사람하고 계속 가기는 힘들었을 거야. 양 대표 일도 그렇고, 또… 그 사람 전 여친. 그 사람 아직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어. 술에 취하니 그 사람 이름을 부르더라.”“뭐? 남자들은 왜 꼭 그렇게 한 사람으로 만족을 못 하는 거야?”윤서는 자신의 상황이 생각나 이를 꽉 물었다.“맞다, 어제 상원 오빠 부모님께 인사드리지 않았어? 술은 왜 마신 거야?”여름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설마… 또 바람맞은 건 아니지?”“…….”윤서가 씁슬해하며 말했다.“신아영이 차 사고가 났다는 거야. 신아영 챙기느라 전화 한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