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다 했어?”윤상원이 버럭 화냈다.“아니지?”윤서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윤상원, 나 장난 아니야. 다시는 나 찾지 마. 우리 이제 정식으로 헤어지자.”“너 정말, 정도껏 해!”“끝났다고. 그 눈에는 평생 신아영 밖에 안 보일 거야. 그래, 차 사고 났으니 가볼 수 있지. 하지만 우리 가족을 까마득히 잊은 채 전화 한 통화 없는 건 아니지. 오늘이 우리한테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지 신경조차 안 쓴 거야. 이제 기대 안 해.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윤서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그리고 다 울고 나서, 윤상원과 신아영의 연락처를 모두 삭제해버렸다.그 두 사람 때문에 너무나 고통받고 지쳐 있었다.‘앞으로 다시는 기대나 희망 같은 거 가질 일 없을 거고 아파할 일도 없을 거야.’윤서는 불러내 함께 술 마시며 넋두리할 상대가 간절했다.원래는 여름에게 전화할 생각이었으나 자유롭지 못한 여름의 처지가 떠올라 그냥 혼자 차를 몰아 바(Bar)로 갔다.******동성의 바는 모두 거리 한 곳에 몰려 있다.있는 집 자제들이 가는 곳도 딱 몇 군데 정해져 있다.11시, 지훈과 하준 두 사람이 위층 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저녁을 먹었는데도 하준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훈이 어쩔 수 없이 함께 술친구가 되어 주었지만 하준은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술에 취한 모습이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하준아, 이번에 서울 가서 설 보내냐? 만약 안 가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같이 오라고 하시는데.”지훈이 내려가며 말했다. 아래쪽을 슬쩍 곁눈질하던 눈에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얀 피부의 여인이 들어왔다. 옅은 노란색 니트를 입고 긴 웨이브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린 여인은 이목구비가 매우 서구적이었다.그런데 윤서는 완전히 취해있고 옆에는 남자 둘이 지분거리고 있었다. “윤서 씨 아냐? 왜 혼자 술 마시고 있지?”윤서와 몇 번 함께 자리한 적이 있는 지훈은 윤서를 괜찮게 생각하고 있
“평생 차여라!”지훈이 짜증 내며 말했다.“임윤서 씨, 잘 봐요. 나 이지훈인데요?”“이지훈이 누구야….”임윤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처음 듣는 이름인데. 당신 나한테 반해서 납치하는 고야?”지훈은 어이가 없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최하준은 알죠? 당신 베프의 남친.”윤서가 몽롱한 상태로 앞을 바라보다가 눈을 번쩍 떴다.“어머~ 외삼촌이시구나. 외삼촌, 안녕하세요!”하준이 미간을 문질렀다. ‘어허, 또 취해서 아무렇게나 부르네.’지훈이 ‘풉’하고 웃었다. “착각했나 보네요. 저 녀석이 왜 외삼촌입니까?”“아닌데요? 외삼촌 맞잖아요, 히힛!”윤서가 손을 내저었다.“맞다니까! 한선우 그 쓰레기 외삼촌. 내가… 여름이랑 바에 있을 때… 내가 딱! 찍어줬는데에~”하준이 미간이 움찔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날 뭘로 찍었다는 겁니까?”“꼬시라고. 우리 여룸이가 외숙모가 되면 한선우가 완전 약 오를 거 아녜요? 한주그룹 서열도 완전 꼬이고, 흐흐~”윤서는 완전히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아, 아니다. 그쪽은 외삼촌 아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봐서… 여름이를 그렇게 만들었어, 흐엉.”최하준의 눈빛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어째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겁니까?”하준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윤서 씨 외삼촌이랑 닮았을 리도 없는데?”“에이, 난 외삼촌 없어요.”윤서가 헤롱헤롱하다가 잠시 후 웅얼웅얼 말했다.“외삼촌, 우리 여룸이한테 잘해줘여어. 화내지 말요. 내가 약 쓰라고 했어요. 진짜 걔가 그런 거 아니에요.”윤서는 계속 중얼거리다가 차 문에 기대어 정신없이 잠들었다.운전하는 상혁도, 뒤에 있는 지훈도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물이 있으면 죄다 얼어붙을 듯 분위기는 싸늘했다.5분쯤 뒤, 하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차 세워.”“하준아.”지훈은 좀 걱정이 됐다.“너무 늦었다.”“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 넌 윤서 씨 데려다
번쩍! 갑자기 등이 켜졌다.곧이어 여름이 덮고 있던 이불이 걷히고.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십시오.”“대체 또 뭘 하려는 거예요?”여름은 피곤한 듯 일어나 앉아 올려다보았다가 얼어붙고 말았다. 하준의 눈은 완전히 핏발이 서고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하준은 여름의 청순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여름과 만났던 날의 장면, 여름이 했던 말, 세세한 표정, 모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답해요. 그때 바에서 왜 나를 유혹했던 겁니까?”“그건 갑자기 왜요?”여름이 눈을 피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그러나 하준은 피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바로 여름의 턱을 잡고는 차가운 눈으로 똑바로 바라봤다.“날 한선우의 외삼촌이라고 착각했던 겁니까?”‘치지직’ 머릿속에 번개가 치고 있었다.“…….”여름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하준은 계속 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름의 얼굴색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당황하고 놀란 눈동자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하준의 마음도 점차 차가워지고 있었다.그동안 정말 바보처럼 여름이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껏 둘 사이의 밀당에서 자신이 우위라고 믿었는데 사실 저쪽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사랑은 모두 거짓이다. 달콤함도 모두 거짓이다. 이 세상에 좋은 건 다 거짓이다.‘이렇게 가식적인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렸었다니.’“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여름은 망연자실한 채 어쩔 바를 몰랐다.“당신 그 변명도 이제 역겹습니다.”하준은 여름을 떨쳐내고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티슈로 손을 박박 닦았다.여름은 이런 그의 행동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좋아요, 인정할게요. 처음엔 그랬어요. 하지만 나중엔….”“나중에 한선우 약혼식장에서 양유진을 보고 착각했다는 걸 알았겠지. 그래서 바로 이혼하자고 했고, 아닙니까?”돌아오는 길에 하준은 모든 걸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아마도,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겠지.’애초에 지저분한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했었고, 나중에는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이 더해졌다.이제 그 거짓이 다 드러났고 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거품처럼 그대로 터져버렸다.******밤새 잠을 못 잔 여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준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아마 이것은 여름이 그를 위해 준비하는 마지막 아침이 될 것이다.“아유,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겨우 6시 반인데.”임옥희가 하품하며 주방으로 들어오다가 여름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흠칫 놀랐다.“어젯밤에 잠 못 잤어요? 얼굴이 너무 안 좋네요.”“이모님, 어젯밤에 식단을 적어봤어요.”여름이 노트를 건넸다.“하준 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에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라 이제 이모님께서 수고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어머, 무슨 뜻이에요?”임옥희가 깜짝 놀랐다. 최근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부부싸움 칼로 물베기지’ 하고 있었다.“아이고, 도로 가져가요. 선생님은 여름 씨가 한 것만 좋아하지 내가 한 건 건드리지도 않는다고요.”“앞으로… 앞으로라는 게 없을 거예요, 이제.”여름이 힘없이 웃었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더 머물 수 있다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믿지 않겠지. 자기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더군다나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신뢰가 깨져 있었다. 계속 함께한다고 행복해질 리도 없었다.“아이고, 그런 소리 말아요, 부정 타게.”임옥희는 끝까지 거부하더니 나가버렸다.여름은 하는 수 없이 조리대 위에 두었다. 아주머니가 볼 거라 믿었다.오늘 아침은 공을 많이 들였다. 손수 만든 겉절이에 미역국, 명란 계란말이, 조기구이….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고 처음 준비했던 메뉴와 비슷했다.8시가 되자 하준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검은 팬츠에 검은 터틀넥 니트를 받쳐입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 옷이나 걸쳐 입어도 워낙 핏이 좋다 보니 모델처럼 빛이 났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하준은 여름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았다.여름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겠는가?여름은 펜을 들어 서류에 사인했다.‘강여름’이란 세 글자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사인했어요. 올라가 짐 싸고 지금 나갈게요.”여름은 몸을 돌려 올라갔다. 하준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슬쩍 보았다.핑크색 실내복에 폭포수 같은 머리칼이 어깨에 흩어져 내려 있었다. 여름이 떠난 자리에 삼나무 향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 힘을 더 줄수록 가슴 속 답답함이 좀 사그러드는 것 같았다.한바탕 악다구니가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고분고분 사인할 줄은 몰랐다.‘그렇게 양유진에게 가고 싶었단 말이지.’“하아….”탄식하듯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이 여자 하나 없다고 죽기야 하겠는가?30분 후, 여름이 캐리어를 끌고 내려왔을 때 거실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식탁 가득 차려놓았던 아침 식사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여름은 눈가에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떠났다.백미러에 하준의 집이 점점 작아져 갔다. 여름은 조용히 읊조렸다.“안녕, 쭌쭌.”여름에게 하나뿐인 집이었고 하준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이제, 여름은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여름이 떠나고 20분도 채 되지 않아, 지훈의 차가 하준의 집에 나타났다.지훈은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준은 테라스에 서 있었다. 시선은 도로 쪽을 향한 채, 손가락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옆에 놓인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정말 서울로 돌아가려고?”지훈이 매우 실망스러운 듯 말했다. “가지 마라, 인마. 너 없이 어떻게 사냐, 내가.”“내가 아쉬운 게 아니라 내가 로펌에 벌어다 주는 돈이 아쉬운 거겠지.”하준이 담담히 담뱃재를 털었다.“…….”지훈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로펌 수익이 수백억 늘긴 했지.”하준은 손을 주머니
“가지 마, 그 사람 내가 그 사람을 한선우 외삼촌으로 착각해서 접근한 거 다 알아버렸어. 네가 전에 나 경찰서에서 구하려고 일부러 거짓말한 것도 다 알아.”여름이 말렸다.“뭐? 그걸 어떻게 알았대?”윤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망했다, 최하준이 날 잡아먹으려들겠네.’“그러니까. 너랑 나밖에 모르는 일인데 말이야.”여름이 힘없이 윤서를 쳐다보았다. “난 아무것도 말한 적 없거든. 너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하네, 어제 너무 마신 거 아냐? 너 원래 술 마시면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잖아.”“애먼 사람 잡지…”순간 무언가 윤서의 머릿속에서 번쩍했다. 윤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생각났어. 어젯밤에 지훈 씨가 나 바래다준 것 같아. 너무 취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차에 남자 한 사람 더 있었는데 네 남편이라고….”“…….”‘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전생에 널 팔았지 싶다.’윤서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여름아, 진짜 미안해.”윤서가 두 손바닥을 맞대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내가 또 다 망쳤어. 평생 어떻게 해야 너한테 보상이 될지 모르겠다. 정말 널 볼 면목이 없어. 우리 오빠라도 소개해 줄까? 평생 너만 바라볼 거고 바람도 안 피울 거야, 내가 보장해.”“됐다.”여름이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윤서를 탓할 힘도 없었다.“네가 아니었어도 그 사람하고 계속 가기는 힘들었을 거야. 양 대표 일도 그렇고, 또… 그 사람 전 여친. 그 사람 아직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어. 술에 취하니 그 사람 이름을 부르더라.”“뭐? 남자들은 왜 꼭 그렇게 한 사람으로 만족을 못 하는 거야?”윤서는 자신의 상황이 생각나 이를 꽉 물었다.“맞다, 어제 상원 오빠 부모님께 인사드리지 않았어? 술은 왜 마신 거야?”여름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설마… 또 바람맞은 건 아니지?”“…….”윤서가 씁슬해하며 말했다.“신아영이 차 사고가 났다는 거야. 신아영 챙기느라 전화 한
양유진에게 여름은 늘 미안했다.음료와 과일을 들고 병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려는데 낮게 흐느끼는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엄마, 울지 마세요.”양유진이 위로했다.“내가 안 울 수가 있니? 우리 집에 아들이라곤 너 하나라 네가 대 이어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라니? 너 신장 하나 잃었다고 소문나서 동성에 너한테 시집오려던 아가씨들 지금은 어디로 숨었는지 다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상관없어요. 지금은 결혼 생각도 없어요.”“내 뱃속으로 낳은 네 속을 모를까 봐? 너 계속 그 강여름이란 애만 마음에 두고 있는 거지? 걔라면 아주 목숨을 바치지. 그냥.”“…….”과일바구니를 쥔 여름의 손에 땀이 났다. 부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그 여자는 너한테 마음 없다. 입원한 지가 며칠인데 보러 오지도 않잖아.”“그만 하세요.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 좋아한다고 꼭 사귀는 건 아니잖아요. 그 사람 행복한 거 지켜보는 거로도 족해요.”여름은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목이 메였다. 너무나 괴로웠다.자신에 대한 양유진의 마음이 그 정도로 깊은 줄은 몰랐다.“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갑자기 뒤에서 양유진 아버지의 ‘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화들짝 놀랐다. 병실 안의 두 사람도 이쪽을 바라보았다.여름은 어쩔 수 없이 병실로 들어갔다.‘방금 어머니와의 대화를 들었겠군.’양유진은 당황스러웠다.“어떻게 왔어요? 최하준 씨가 화 안 내겠습니까?”“이제 막 왔어요. 우리는… 헤어졌어요.”여름이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 겨우 며칠 만에 양유진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환자복도 헐렁허렁하고 빛이 나던 얼굴도 영양실조 환자처럼 수척했다.“갑자기 왜요?”양유진이 놀라며 물었다.“설마 나 때문에….”“아니에요. 그냥 우리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몸은 좀 나아졌어요?”여름이 화제를 돌렸다.“나아지긴 뭐가 나아져요?!”양유진의 어머니 민현숙이 차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그냥 살점도 아니고 신장 하나를
다들 패닉 상태가 되어 의사를 불렀다.의사가 꾸짖었다.“큰 수술 받은 환자를 자극하면 어떻게 합니까? 환자 죽일 생각입니까!”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현숙도 가만히 입을 닫았다.양유진은 곧 지쳐 잠이 들었다. 민현숙은 다시 한번 원망의 눈길로 여름을 쳐다보았다. 기다란 여름의 눈썹이 아래로 떨궈졌다.“어머님, 염려 놓으세요. 제가 갚을게요. 이제 제가 병간호할게요. 회복된 이후에도 계속 신경 쓰겠습니다. 양 대표님이 반려자 되실 분 만날 때까지요.”“만약에 못 만나면요?”“그럴 리가요.”민현숙이 차갑게 웃었다.“누가 오겠어요? 다른 한쪽 신장에 문제라도 생기는 날엔 그날로 눈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정말 모르겠어요? 세상에 누가 자기 목숨 내놓고 남을 구하겠어요?”“…….”여름은 한참을 침묵하다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약혼하겠습니다.”******카페 안.윤서는 이 소식을 듣고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너 미쳤어? 네 인생을 그 사람한테 다 쓰겠다는 거야?”“빚을 너무 크게 졌어.”여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주 썼다.“우리 사진도 이리저리 다 퍼져서 사람들 다 우리가 썸 타는 줄 알잖아. 그런 데다 이번엔 내 목숨까지 구해줬으니….”윤서는 한숨이 나왔다.“사실 양 대표가 널 정말 좋아하긴 하지. 묵묵히 지켜주고. 하지만 넌 하준 씨랑….”“우린 이제 가능성 없어.”여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여름은 윤서에게 최하준이 FTT사람이란 사실을 아직 얘기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고 가치관도 달랐다.“좋아. 사실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편이 낫기도 해. 그래야 안 힘들지.”윤서는 자신의 상황이 떠올라 또 한숨이 났다.“맞다, 나 설 지나면 서울 가서 일하려고.”여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갑자기?”“갑자기는 아니야. 작년에 서울 오슬란에서 연구원으로 와달라고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어. 내가 상원 오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