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합시다. 조금 전까지 논의했던 안건은 뭐죠?”여름이 조 이사의 반응을 무시하며 담담한 얼굴로 회의장 안을 둘러보았다.“방금 인테리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강여경 상무가 디자인 기획안을 제출했는데 저희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오 부사장이 머뭇거리며 디자인 도안을 펼쳤다.강여경은 심장이 툭 떨어졌다. 강여름이 회의에 참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름은 분명 그 기획안을 알아볼 것이다.호텔에서의 그날, 여름이 가져왔던 그 기획안 그대로였다. 하지만 강여경이 훔쳤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중역의 비웃음을 살 것인데...여름은 디자인 도면들을 뚫어지게 들어다보더니 차윤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지시했다.차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고 여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흠… 기획안 정말 훌륭하군요. 출력 시간이 오늘 새벽 1시인데, 강 상무는 낮에 출근한 걸 보니 철야 했나 보군요.”“그렇습니다. 강 상무가 며칠 밤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했다고 합니다.”“노고가 많았습니다.”회의실이 강여경을 칭찬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강여경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출력했는데 먹혔군.’“제가 작업한 디자인 기획안 어떠신가요?”“디자인이 훌륭합니다. 그런데 아주 공교롭군요. 내가 보름 전에 이것과 똑같은 기획안을 잃어버렸거든요.”여름의 발언에 갑자기 장내 분위기가 싸하게 변해버렸다.회의 참석자들은 조용해졌다. 강여경은 질새라 억울한 척 연기를 했다.“내가 디자인을 베꼈단 말씀이신가요?”“강 상무 재능을 질투하는 건 아니겠죠?”조영호 이사가 비꼬듯이 말했다.“다들 아시겠지만 여기 두 자매분 사이가 안 좋으십니다. 두 분 사적인 관계를 회사로 끌고 들어와 괜한 힘겨루기를 하시면 곤란합니다.”잠시 모두 숨을 죽이고 여름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명색이 대표이사인데 그릇이 너무 작은 거 아닌가. 회의장이 점점 술렁거렸다.“여러분들이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여름이 짧게 한숨을 지었다.
조영호의 얼굴빛이 일순간 흐려졌다.“내 능력이 의심되면 어디 재주껏 나를 쳐내보시던가.”조영호가 여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럴만한 깜냥이 안 될걸? 대표이사 자리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그렇게는 못하지요. 조 이사는 회사 이윤 창출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당연히 믿죠.”여름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그런 의미로, 오늘 회의는 조 이사에게 맡기겠습니다.”여름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회의장을 나갔다.조영호는 멀어져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자신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름이 나가자마자 조영호의 아내가 갑자기 회의장으로 들이닥쳤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남편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갈겼다.“조영호! 이 자식! 나 몰래 밖에서 바람을 피워?!!네가 나랑 결혼하지 않았으면 화신그룹에 들어올 수나 있었을 것 같아?!이날 이때껏 뒷바라지 다 했더니 이제 마누라가 늙었다고 이렇게 배신을 때려? 네가 사람이냐? 너 나랑 오늘 죽자!”“…….”******회의실에서의 파문은 삽시간에 회사 안팎으로 퍼졌다.여름에게 보고를 하던 노선경이 박장대소했다.“대표님께서 조 이사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요... 완전히 똥 됐습니다. 화가 나서 와이프를 한 대 쳤는데, 그걸 보고 류 이사가 학을 뗐습니다.”“이제 이건 시작일 뿐이야.”여름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이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훈 씨, 회사 계열사 중에 언론사가 있죠? 번거롭겠지만 화신그룹 조영호 이사가 바람 피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실 수 있을까요?“하하, 문제없어요. 제수씨가 나서기 어렵다면…”이지훈이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싸한 느낌을 받았다. 최하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다가와 있는 걸 보고는 난감해졌다.“제수씨, 왜 하준이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요?”“쭌이요? 그 사람은 이런 일 이해 못해요. 게다가 조영호는 아주 교활해서 우리 쭌을 귀찮게 할까 봐 걱정이 돼요.”“…….”이해 못한다고? 이런 일을?
“강여름이 좋다면 다 좋은거지. 아참, 강여경은 수감 중이겠군. 잘 대접해 줘라. 수감생활이 불편하지 않게. 하하.”냉랭했던 최하준이 순식간에 여유가 생겼다. 한때 강여름이 감옥에서 똑같은 고통을 겪었었지. 이제는 되돌려줄 차례다.******다음날, 화신의 조영호가 바람을 피워 회사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조영호는 화가 났지만 자신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걸 어쩌겠는가.내연녀와 공적인 장소에서 다정한 포즈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가득 돌았고, 와이프 폭행영상까지 모두 유포되었다.온라인에는 매일 수만 건의 댓글이 올라와 조영호에게 욕을 퍼부었다.대표이사의 집무실. 조영호는 분기탱천하여 쳐들어왔다. 그리고는 여름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너 뭐 하자는 짓이야! 회의장 동영상 네가 다 뿌렸지?!”“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여름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짐짓 애석한 얼굴로 말했다.“이런 분이신 줄 정말 몰랐네요. 크게 실망했습니다. 회사 이미지에 먹칠 해도 유분수지.”“네가 뭔데 뻔뻔하게 입을 놀려! 이게 진짜! 내가 모를 줄 알아? 다 네가 꾸민 짓이잖아. 감히 날 건드렸겠다!”조영호가 성큼성큼 다가가 여름을 발로 차려고 했다. 이때 차윤이 번개처럼 나서 그의 팔을 꺾더니 책상 위에 눌러버렸다. “이게, 이거 못 놔?”조영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여름이 내선번호를 눌러 경비원들을 불렀다.“이분 밖으로 모셔요. 조 이사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것 같으니 업무는 우선 오 부사장이 맡죠.”“강여름. 두고 보자! 네가 감히 날 어떻게 해보시겠다? 꿈도 꾸지 마!”조영호가 끌려나간 후 오봉규 부사장이 황급히 대표실로 올라왔다.젊고 능력있는 상사를 보니 문득 경외감마저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 중역은 강여름을 무시했다. 그러나 불과 하루만에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조영호의 평판은 시궁창에 떨어졌다.증거는 없지만 강여름이 손을 썼다는 것은 다들 알았다.“오 부사장은 능력도 있고 수
불과 일주일 만에 오봉규는 발빠르게 화신의 중역부터 일반 직원들까지 인사 관계를 정리했다. 여름에 불복하는 중역은 요직에서 물러나 좌천되었다.강여경도 예외 없이 직위를 내려놓아야 했다.강여경은 수감 중이어서 바깥 상황이 완전히 뒤집힌 것을 모르고 있었다.유치장 안에서 매일 구타당하고 찬물에 홀딱 젖기도 하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다.일주일 이상 온갖 수모를 견디며 강태환은 엄청난 돈을 써서 겨우겨우 강여경을 감옥에서 꺼내올 수 있었다.강태환의 딸은 두 발로 걷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나왔다.코가 시퍼렇게 멍들고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모습에 이정희는 딸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내 딸을… 어떻게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누가 이런 거야? 내가 가만있지 않겠어!”“엄마, 아버지. 꼭 복수해주세요. 죽을 것 같아. 엉엉엉.”강여경은 아파서 머리를 들지도 못했다.옆에서 강여경의 참혹한 모습을 본 진현일은 이 상황에 오히려 진절머리가 났다. 보면 볼수록 구역질이 날 뿐이다.“불쌍한 것. 걱정하지 마라. 아비가 반드시 이 수모를 모두 갚아주마.”강태환이 미친듯이 노발대발했다. 진현일이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는 더 화가 치밀었다.“애가 아픈데 한 번 안아주지 그러나. 상태를 보니 빨리 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 같네.”“네, 네.”진현일이 억지로 강여경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기울였다. 강여경은 수감되면서부터 계속 목욕을 하지 못해 악취가 진동했다. 구역질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진현일은 후회가 되어 속이 쓰렸다. '진작에 이 집 사정을 알았더라면, 오늘 여기 이러고 있지 않았을 텐데....'******병원.강여경이 눈을 부라리며 의사에게 지시했다.“최고의 약으로 처방해주세요. 사흘 내에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요. 회사로 가봐야 해요.”“죄송합니다만 그런 약은 없습니다.”의사가 단박에 잘라 말했다.“이 병원은 도대체 뭐야? 모두 모자란 것들뿐이군. 엄마, 병원 옮겨줘요. 빨리 회복해서 회사로 돌아가 강여름 찢
“되찾아 오는 거야 간단하죠.”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진현일이 끼어들었다.강태환과 가족들은 모두 그 말에 놀라서 진현일을 주시했다.“오빠, 빨리 말해봐. 우리 이제 한 식구잖아.”강여경이 급히 재촉했다.“강여름을 끌어 내리려면, 하루빨리 내가 너랑 결혼해야 해.”진현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최윤형이 곧 동성에 온다는 소식이 있어. 그 사람의 환심을 살 수만 있다면, 화신의 간부들이나 중역들이 널 받아들여 줄 거야.”강여경과 가족들의 눈이 번쩍이기 시작했다.강태환은 상당히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그 집안은 누가 뭐래도 최고 재벌가지. 최윤형이 직계는 아니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FTT와 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될 거다. 다시 일어서는 건 문제없지. 그렇게 된다면야 강여름 정도는 무시해도 그만이다.”“맞습니다.”진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최윤형의 비서가 먼 친척이니 때가 되면 제가 접대를 할 예정입니다. 그때 소개해 드릴 테니 적당한 선물을 준비해 주십시오. 최윤형은 골드바를 좋아하더라고요.”“오빠, 정말 고마워. 오빠를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내가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야.”강여경이 감동하여 그를 바라보았다.진현일은 속이 울렁거렸지만 겨우 참았다.“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인 걸.”******화신.저녁 여섯 시 반.여름이 사무실 전등을 끄고 퇴근하려고 나오는데, 구진철 이사의 손자인 구성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 퇴근하시나 봅니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이 근처 맛집을 제가 잘 알고 있거든요…”여름은 머리가 아팠다.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좋아지면서 이렇게 남자를 소개를 해주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회사 간부의 손자, 아들 할 것 없이.“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집에 빨리 가봐야 해서요.”“그럼,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구성호는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가방이 무거워 보이네요. 들어드리겠습니다.”손을 뻗었지만
최하준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기울여 여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내심 궁금했다.“남자친구예요.”여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구 이사님 뜻은 잘 알겠지만, 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사님들께서 소개해 주시는 분들 모두 응대할 만큼 제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전해주시면 좋겠네요.”구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마디 말을 남겼다.“똑똑한 분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잘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이사회의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다면 여러모로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점은 꼭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대표님이 지금 얼굴만 보고 남자 만나실 처지가 아닙니다.”최하준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옆에 있던 차윤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졌다.“충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제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거든요. 알았으면 그만 가보세요.”여름이 단호하게 잘라냈다.“세상 물정을 정말 모르시는군요.”구성호가 잔뜩 열이 뻗쳐 여름을 쏘아보다가 가버렸다.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돌리다가 모호한 최하준의 시선과 마주쳤다. 방금 했던 오글거리는 말들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빨리 포기하라고 그런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무슨 오해?”최하준이 웃음기를 빼고 눈을 가늘게 뜨고 똑바로 바라보았다.“날 사랑해서 이젠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헉,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어? 내가?’그러나 그 위험스러운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여름의 침묵에 최하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탑시다.”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적절한 화제를 찾다 보니 또 이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식사했어요?”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여름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뱃속이 다시 조용해지자 여름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겨우 여섯 시 조금 넘었는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나 했더니 점심도 안 먹었잖아?” “회사 구내식당 밥이 맛이 없습니까?”최하
“그럼, 계속 거기 서 계시던가. 같이 안 가면 삐칠 거야.”여름이 입을 삐죽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이렇게 억지를 쓰는 모습은 처음이라 최하준은 말문이 막혔다.마지못해 자리로 가서 앉을 수밖에 없었다.10여 분 후 치킨이 나왔다. 감자튀김에 불닭다리까지….“이 닭다리, 예술이에요.”여름이 흥분해서 최하준에게 권했다.“보여줄 게 있습니다.”최하준은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하더니 치킨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보여주었다.뭔가 해서 들여다보았더니 날개와 다리가 몇 쌍씩 붙어 있는 기형 닭 사진이었다.“쭌, 이렇게까지 흥을 깰 필요는 없잖아요.”“이런 음식에는 해로운 물질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만 봐주는 거예요. 다음부터는 이런 데서 먹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어린애도 아니고….”최하준은 일관성 있게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여름은 더는 상대하기도 귀찮아 닭날개에 집중하고 두 개를 순삭했다. 그리고 다른 치킨 조각들을 뜯어먹다가 별맛이 없자 최하준의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최하준은 느닷없이 치킨으로 입이 막힌 채 여름을 노려보았다. 여름은 되려 당당하게 말했다.“남자친구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요. 여자친구가 먹기 싫어하면 대신 먹어주기도 하고, 저 사람들 좀 봐요.”과연 저 옆에는 대학생 같아 보이는 두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여자친구가 햄버거를 몇 입 베어 물다가 남자친구에게 넘겨버렸다.“맛없어. 자기가 먹어줘.”남자친구가 거절하자, 여자친구가 나긋나긋하게 애교를 부렸다.“내가 먹던 건 싫다는 거야? 나 사랑하는 거 맞아?”최하준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아연실색했다.최하준과 마주 보고 있던 여름은 눈을 깜박이며 저쪽 두 남녀를 쳐다보며 한숨 지었다.“완전 부러워요. 나도 저런 거 해보고 싶다.”“그만.”최하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여름이 먹다가 남긴 치킨 조각을 베어 물었다. 전에는 여름이 항상 최하준을 따라주었는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우스운 건 이런 변화를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최하준은
“쭌, 고마워요. 오늘 너무 기분 좋았다!”여름이 하준의 입술에 뽀뽀를 쪽 했다. 반짝이는 눈에 달달한 행복이 넘치고 있었다.하준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매력 넘치는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생각 마십시오. 태어나서 치킨집이란 데는 처음 간 건 알고 있습니까?”여름은 심장이 찌릿했다. 자신을 위해 하준이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심장이 너무 달달해졌다.“그럼, 이건 어때요?”여름은 상기된 얼굴로 하준의 목을 감싸 안으며 하준의 입술에 살포시 자기 입을 가져다 댔다.이번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을 그대로 놓아줄 수가 없었다. “읍!”하준이 여름의 뒷머리를 단단하게 받치면서 입술을 밀착시키고 더욱 깊숙이 탐하기 시작했다.뜨거운 호흡에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 하준이 여름을 놓아주었다.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 사이로 참았던 숨이 길게 흩어졌다.******호화로운 객실.진현일과 진가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몇 명이 소파 중앙에 앉은 준수한 외모의 한 남자에게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이 사람은 바로 서울에서 왔다는 최윤형이었다.FTT는 국내 최대 기업이자 최고의 명문가이다. 최윤형이 직계가 아니라고 해도 FTT회장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디를 가든 환대를 받았다.“소개를 올리지요. 여기는 제 여자친구, 강여경입니다.”진현일이 강여경을 옆으로 끌어당겼다.“이 친구 아버지가 화신그룹 최대 주주인데 오늘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오늘 저녁 강여경은 한껏 신경을 써 가녀린 각선미가 특별히 돋보이는 시폰 원피스를 입었다. 여름보다는 못하지만 강여경도 동성에서는 알아주는 미모였다.오늘 밤에는 작정하고 최대한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화장을 했다. 청순한 얼굴로 살짝 웃으니 청순하기 그지 없었다.최윤형의 눈빛이 어둡게 빛났다. 강여경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FTT집안과 결혼할 수만 있다면 진현일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음흉한 속마음을 숨긴 채 아리따운 미소를 지었다.“이건 저희 집에서 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