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차윤이 하준을 쭌이라고 불렀다가 하준이 회복하고 나면 가만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옷 갈아입자.”차윤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자 얼른 여름이 끼어들었다. 서랍에서 옷을 꺼내며 환하게 웃었다. 창바지와 셔츠였다. 하준에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준이 보더니 인상을 징그렸다.“싫어. 안 예뻐.”“안 예쁘기는. 너무 좋구먼. 이걸 입으면 정말 멋질걸.여름이 달랬다.“안 입어.”하준이 몸을 비틀었다. 앙탈을 부리는 모습을 본 차윤은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회장님의 저런 모습을 어떻게 참아 내는 거지? 저게 바로 진정한 사랑의 힘이란 건가?’“그럼 뭐 입을래?”여름이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하준이 씩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하늘이처럼 슈퍼 히어로 옷 사줘. 그런 거 입고 싶어.”“……”하준이 말을 이었다.“어제 복도에서 봤는데 어떤 형아는 로보트 옷 잆었더라.”차윤은 등에서 땀이 흘렀다. 하준이 로보트 옷을 입은 꼴을 어찌 보겠는가!“하지만 난 이거 입히고 싶은데.”여름이 갑자기 매우 실망한 듯 말했다.“하준이가 이거 입으면 더 멋질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이건 내가 일부러 골라온 건데, 내가 고른 싫구나?”그러더니 기다란 눈썹을 위아래로 깜빡거리며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하준은 그런 여름을 보고 당황했다.“아니 아니, 좋아. 입을게.”그러더니 얼른 옷을 채갔다.“고마워, 쭌.”여름이 기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준은 헤벌레하고 웃었다.차윤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얼른 병실 밖으로 나갔다.‘아픈데도 회장님과 강여름 님은 같이 있기만 하면 꽁냥질이 줄질 않는군.’하준의 환자복을 벗기며 여름이 조그맣게 말했다.“앞으로는 내 도움 없이 혼자서도 입어야지. 단추는 이렇게 잠그는 거야.”“하지만 나는 아직 아기인데. 그냥 입혀줘.”하준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다른 친구들도 다 자기가 입어. 여울이도 하늘이도 자기가 입는걸.”여름이 달랬다.“누나랑 형이니까 그렇지.”“
여름은 전에 그 사람이 최진욱과 함께 있었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어제 막 차진욱의 도움을 받은 터라 거절하기 어려웠다.“알겠습니다.”어차피 여름도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모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하준은 호기심에 찬 어린애처럼 엘리베이터 유리에 착 달라붙었다. 아래로 보이는 자그마한 사람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와, 저거 봐! 사람 되게 많아!”맥퀸은 저도 모르게 하준을 흘끔흘끔 보게 되었다. 뉴스에서 보던 카리스마 넘치는 최하준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굉장히… 묘하네.’여름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하준을 상혁이 차에 태웠다.“나도 같이 갈래.”하준이 여름의 손을 꼭 잡았다.“그래, 그럼.”여름은 할 수 없이 하준을 데리고 갔다.차진욱은 고급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있었다.여름이 문을 열어보니 차진욱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여름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준을 먼저 들여 보내고 자신은 문가에 앉았다.“안녕하세요!”하준은 보자마자 예의바르게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여름이 어른을 만나면 예의바르게 인사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엄청 크네요.”하준은 천장에 닿을 듯한 차진욱의 덩치를 보았다.“하지만 여름이가 밥을 잘 먹으면 나도 엄청 클 거랬어요.”하준이 그런 소리를 하자 여름은 조금 난처했다.어벙한 하준의 모습을 보고 차진욱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여름을 향해 자기 머리를 톡톡 치며 물었다.“정말… 이렇게 된 건가?”“네.”여름이 끄덕였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차진욱이 물었다.“양유진이 한 짓이죠.”여름이 숨김 없이 말했다.“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차진욱이 여름을 흘끗 보았다. 말투가 살짝 바뀐 것을 보니 여름이 자신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듯했다.어쨌거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여름은 강신희의 딸일 가능성이 있으니 나주에 정말 가족으로 지내게 될 수도 있었다.“강여경이 죽었다.”차진욱의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폭탄 발언을 했다.“네?”여름은 완
“죽었어. 어제저녁에 내가 너무 늦게 돌아갔던 게지. 강여경은 뛰어내려서 죽었더군. 경찰은 탈출하려다가 죽었다고 했어. 시신은 이미 장의사에게 보냈고.”여름은 얼떨떨했다.정신이 혼미했다.‘아무리 해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 같은 원수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강신희의 딸이 되려고 그렇게 죽어라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짜내더니만. 나와 최하준에게 복수하겠다고 그러더니 난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데 먼저 죽어버렸다고?’여름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강여경이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 없어요.”여름이 중얼거렸다.“가짜는 아니었겠죠?”“진짜였다.”차지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백하게 말했다.“그냥 사람이 죽은 것뿐인데 이상할 게 뭐 있나?”여름은 씁쓸했다.“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는 강여경과 몇 년을 싸워왔어요. 이겼다고 생각할 때마다 강여경은 다시 일어났어요. 어쨌든 그때마다 제 삶과 주변 사람은 모두 박살이 났죠. 이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같이 죽을 생각이었어요.”차진욱이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름이 강여경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과 강신희도 한몫한 것이 분명했다.“강여경의 시신은 내가 검사해 보았다. 누군가가 밀었더군. 그날 집에는 집사와 고용인 말고는 경찰 뿐이었어.”여름은 흠칫했다.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그러면 경찰이 한 짓이겠군요. 집사와 고용인이 밀었다면 경찰의 주의를 끌었을 테니까요. 경찰 내부의 소행이 아니라면요.”“나와 같은 생각을 했군.”차진욱이 감탄한 얼굴을 했다.“이 일에 관해서는 VIP에게 전달했다. 그쪽에서도 많이 놀라더군. 비밀리에 조사가 진행 중이야.”여름이 끄덕였다.“이제 막 취임하셨으니 전 대통령의 세력을 모두 흡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동안 VIP 편에 있던 정객들도 지위가 높아지면서 다른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죠.”“똑똑하구나.”차진욱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점점 더 여름이 강신희의 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신희도 예
웃음을 띠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여울의 납치 사건 이후로 강신희에 대한 호감이 전부 사라졌었다. 심지어 미워하게 되었다.그런데 강여경이 강신희에게 약물을 사용했다는 말을 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하준이 했던 얘기를 여름이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강여경이 정말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차진욱이 여름을 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의사 말로는 혈액에서 금지 약물 성분이 발견되었대. 보통은 수술 뒤에나 정신질환자들이 복용하는 약이라던데. 장기 복용하면 불면, 지적 능력 저하, 분노조절 장애, 불안을 일으키고 중독에 환각까지 일으킬 수 있다던데. 일단 신희는 병원에 두고 왔어.”여름은 경악했다. 입술을 깨물고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전에 강여경이 최하준 곁에서 간호 조무사로 있을 때 비슷한 약을 썼어요. 원래 정신 질환이 좀 있기는 했지만, 약을 복용하고부터 점점 더 심해졌죠. 기억력이 엄청 떨어지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고, 환각도 있었어요.”“그래서? 치료는 되었고?”차진욱이 다급히 물었다. “외국에서 최고의 정신과 의사를 초빙해 왔었는데 그게 백지안이었어요. 확실히 전공 분야에서는 능력이 있었죠. 하지만 백지안은 최하준의 전 여자친구로 교활한 인간이었어요. 그래서 최하준의 기억을 편집하는 바람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된 거고요.”그 일을 진술하는 여름의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차진욱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이마를 문질렀다.“정말 원수가 많기도 했군.”“백지안이 신경정신과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혹시 누가 추천하거든 저대로 부르지 마세요. 애진작부터 양유진과 한패일 거예요.”여름이 미리 경고했다.“알겠다. 사실 난 더 좋은 선생을 알고 있거든.”차진욱이 담담히 말했다.“다만 신희는 실제 정신 질환이 있는 게 아니고 약물의 영향을 받은 거지. 강여경이 죽는 바람에 신희에게 뭘 먹였는지 물어볼 수가 없게 되어서 아쉽군. 의사는 약물 종류를 알면 더 빨리
“강여경의 행실이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었을 게다. 그러나 어려서 납치되었다니 엄마로서 책임을 다 못했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있었다면 그렇게 돈을 탐하고 수작이나 부리는 인간이 아니라 반듯하게 잘 키웠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더욱 죄책감을 느꼈지.”여름이 침을 꿀꺽 삼켰다.마음이 살짝 움직였다.“자네도 엄마니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네.”차진욱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름의 심장을 울렸다.“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라면 아이를 버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애가 못된 짓을 해도 자기 자신을 탓할망정 버리지는 못할 거야.”“그래도 그렇게 끝간 데 없이 오냐오냐하지는 말았어야죠.”여름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답했다.“신희가 강여경을 오냐오냐할 때 머리가 온전했을 거라고 생각하나?”차진욱이 되물었다.순간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돌아가세요.”차진욱은 얼이 빠진 여름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이제 좀 짚이는 게 있는데 막 동성에 갔을 때는 뭔가가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어. 그런데 나중에는 전혀 익숙한 느낌이 아니라고 하더군. 신희가 기억을 되찾는 것을 보고 강여경이 계속해서 약을 먹이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너무 방심했던 게지.”“기억을 되찾으셨다면 딸 이름이 강여경이 아니라 강여름이라는 것을 떠올렸을 텐데.”여름이 자조적으로 웃었다.차진욱은 아무 말 없이 여름을 바라보았다.“뭐, 회장님도 제가 친딸이라는 걸 믿지 않으시잖아요?”“이제는 믿는다. 강태환 부부는 문제가 많더군. 우리가 다 속았어. 내 수하가 모두 다친 것이 아쉬울 따름이야. 아니었으면 제일 먼저 그들 부부를 손봤을 텐데.”차진욱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강여경은 그 부부의 딸이에요. 전에는 그 집 식구들이 화신을 꿀꺽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 할머니가 찬성하지 않으셨죠. 엄마가 저에게 남겨준 회사였으니까요. 그래서 셋이 공모해서 할머니를 살해한 거예요. 저도 간신히 화신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여름이 차진욱을 돌아보았다.“하루 빨리 이 나라를 떠나세
“그러지 마.”여름이 얼른 하준의 손을 잡았다. 목이 멨다.“아니야. 쭌도 다 봤잖아. 아저씨가 날 괴롭혔어?”하준은 고민에 빠졌다.두 사람이 나눈 많은 이야기를 하준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하지만 괴롭히지는… 않았지. 때리지도 않았고.’“그런데 왜 울어?”어쨌거나 여름이 우니 하준은 다급했다. 마음이 아팠다.“슬픈 일이 생각나서 그래.”여름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차 타자.”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하준은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여름이는 슬픈 일을 생각하면 우는구나. 그러면 기쁜 일을 생각하면 웃는 건가?하지만 어떻게 해야지 기쁘게 해주지?’하준은 뺨에 두 손을 받쳤다. 볼살이 볼록 올라와 귀여웠다.그러나 여름은 강여경 일을 생각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집에 도착해 차가 멈췄다.여울과 하늘이 바람처럼 달려왔다.“엄마! 쭌!”여울은 순식간에 달려와 여름을 꼭 안았다.“보고 싶었어요.”“나도.”그렇게 말하던 여름은 한병후와 최란을 보고 놀랐다. 아침 9시인데 벌써부터 한병후가 와 있다니 좀 이르지 않나 싶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도 묘했다.그제야 여름은 자기가 떠날 때 여울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자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 생각났다.‘설마….’여름은 깜짝 놀랐지만 얼른 침착한 척하고 여울을 안아 올렸다. “안 무서웠어? 어제 잘 잤어?”여울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하늘이 시큰둥하게 답했다.“어젯밤에 몇 번이나 울었는데요. 아주 시끄러워서 죽을 뻔했어요.”“너도 누가 연못에 빠트리려고 했으면 무서워서 울었을걸.”여울이 씩씩거렸다.“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자서 다행이야.”두 사람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특히나 최란의 단아한 얼굴에는 홍조가 끼어 있었다.최란은 어려서부터 길러진 재벌가의 우아함이 베어있는데다 관리도 잘해온 터라 중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특히나 십 년은 더 젊어진 듯 눈에서 광태가 나고 있었다.여름은 사랑이 사람에게 일으키는 변화에 놀랄 뿐이었다
다들 집으로 우르르 들어가다가 누군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돌아보니 하준이 아까 그 자리에 서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다들 날 버리고 갔어’라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여름과 식구들은 심장이 저릿했다. 아이를 버리는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엄마인 최란은 특히나 견딜 수가 없었다. 얼른 부드럽게 불렀다.“쭌, 얼른 와. 케익 만들어 주라고 할게.”하준은 여름을 원망스럽게 쳐다볼 뿐이었다.“나 화났어. 아무도 난 신경 쓰지 않고.” “…그런 게 아니야. 당연히 따라오는 줄 알았지.”당황한 여름이 되돌아가서 하준의 손을 잡아끌었다.“하늘이랑 여울이를 데려가느라고.”하준이 하늘과 여울을 노려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내가 있는데 왜 쟤네만 챙겨!”하늘이 인상을 찡그렸다. 여울은 폭발했다.“너무해! 우리 엄마거든. 엄마를 뺏어갈 셈이야?”하준은 당황했다. 하준도 엄마 아빠가 아이들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알았다. 입을 씰룩거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난 엄마가 없어! 엄마가…”여름은 완전히 황당했다.여울도 당황했다. 뭔가 아주 나쁜 짓을 한 기분이었다.할 수 없이 최란이 나섰다.“쭌, 울지 마라. 내가 네 엄마야. 이분이 네 아빠란다.”“그래. 내가 아빠야.”한병후도 어쩔 줄 몰라 했다.재계의 카리스마 넘치는 경영자들이라고 하지만 직접 아이를 키워본 적은 없어서 둘 다 이렇게 유치한 하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하준은 두 사람을 한 번, 여름을 한 번 쳐다보더니 더 크게 울었다.“싫어! 내 엄마 아빠는 왜 늙었어?”최란과 한병후는 하준의 말에 타격이 컸다.사실 두 사람은 나이는 쉰이 넘었어도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끽해야 40대로 보일 외모였다.최란이 중얼거렸다.“우린 안 늙었어. 너도 나이가 꽤 많은 걸.”한병후도 찬성한다는 듯 끄덕였다. 의사가 아들에게 충격을 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자기 더러 늙었다고 하는 데는 참을 수가
여름이 하준을 데리고 들어갔다. 하준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여름이가 생긴 걸로 놀리면 안 된다고 하긴 했지만, 늙은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집에 들어가자 여울은 더 이상 질투하지 않았다. 여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아빠를 친구처럼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우리 집에 장난감 방 있다. 같이 가서 놀자.”여울이 먼저 초대했다.그 말을 들은 하준은 너무 가고 싶어서 여름의 눈치를 봤다.“그래, 가서 놀아. 난 샤워 좀 하고 옷 갈아입어야겠다.”여름이 부드럽게 말했다. 며칠을 병원에서 보냈더니 온몸이 찌뿌드드했다.“알았어.”하준은 살짝 실망했다.“가자. 엄마한테만 붙어있지 말고. 우리끼리 좀 놀자.”여울이 하준을 데리고 장난감 방으로 갔다.장난감 방은 매우 컸다. 온갖 인형에 레고가 가득했다.“우리 소꿉놀이하자.”여울은 마침내 놀이 친구가 생겨서 신났다. 하늘과 할머니는 여울이와 소꿉놀이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혼자 놀려니 심심했던 것이다.여울은 밥그릇이며 수저를 몽땅 꺼내왔다.“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줄게…”하준은 여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레고에 눈이 돌아갔다.“그건 하늘이 거야. 넌 만지면 안 돼.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성질부린다니까.”여울이 소리쳤다.“그리고 그거 얼마나 어렵다고. 사람이 가지고 노는 게 아니야.”하늘은 무표정하게 여울을 쳐다보았다.“난 사람이 아니냐?”여울이 메롱을 해 보였다.“너도 이거 일주일째 못 맞추고 있잖아? 할머니가 이건 18살 넘어야 가지고 노는 거랬어! 그런데도 죽으라고 사달라더니 돈만 버렸지.”하늘이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분한 모양이었다.“어쨌든 할 거거든. 내가 꼭 조립하고 만다. 야, 막 만지지 마!”하준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 진지하게 책상 위의 도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알아보지도 못하면서 뭘 열심히 보는 척이야?”여울이 한숨을 쉬었다.“옛날 아빠가 좋았는데. 똑똑하고. 이런 건 금방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