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하준을 데리고 들어갔다. 하준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여름이가 생긴 걸로 놀리면 안 된다고 하긴 했지만, 늙은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집에 들어가자 여울은 더 이상 질투하지 않았다. 여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아빠를 친구처럼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우리 집에 장난감 방 있다. 같이 가서 놀자.”여울이 먼저 초대했다.그 말을 들은 하준은 너무 가고 싶어서 여름의 눈치를 봤다.“그래, 가서 놀아. 난 샤워 좀 하고 옷 갈아입어야겠다.”여름이 부드럽게 말했다. 며칠을 병원에서 보냈더니 온몸이 찌뿌드드했다.“알았어.”하준은 살짝 실망했다.“가자. 엄마한테만 붙어있지 말고. 우리끼리 좀 놀자.”여울이 하준을 데리고 장난감 방으로 갔다.장난감 방은 매우 컸다. 온갖 인형에 레고가 가득했다.“우리 소꿉놀이하자.”여울은 마침내 놀이 친구가 생겨서 신났다. 하늘과 할머니는 여울이와 소꿉놀이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혼자 놀려니 심심했던 것이다.여울은 밥그릇이며 수저를 몽땅 꺼내왔다.“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줄게…”하준은 여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레고에 눈이 돌아갔다.“그건 하늘이 거야. 넌 만지면 안 돼.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성질부린다니까.”여울이 소리쳤다.“그리고 그거 얼마나 어렵다고. 사람이 가지고 노는 게 아니야.”하늘은 무표정하게 여울을 쳐다보았다.“난 사람이 아니냐?”여울이 메롱을 해 보였다.“너도 이거 일주일째 못 맞추고 있잖아? 할머니가 이건 18살 넘어야 가지고 노는 거랬어! 그런데도 죽으라고 사달라더니 돈만 버렸지.”하늘이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분한 모양이었다.“어쨌든 할 거거든. 내가 꼭 조립하고 만다. 야, 막 만지지 마!”하준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 진지하게 책상 위의 도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알아보지도 못하면서 뭘 열심히 보는 척이야?”여울이 한숨을 쉬었다.“옛날 아빠가 좋았는데. 똑똑하고. 이런 건 금방
그러나 하준은 달랐다. 병원에서도 여름은 샤워를 했지만 오늘 맡은 향기는 낯설면서도 좋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심장이 두근거렸다.여름을 바라보는 순간 마구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그러나 여울이 먼저 후다닥 뛰어갔다.“목욕했어요?”여울이 여름의 다리에 매달렸다.“웅.”여름이 꿇어앉으며 조립이 끝난 스포츠카를 보더니 웃었다.“지난번에 할머니가 하늘이에게 사주셨다는 게 이거니? 다 맞췄나 보네? 정말 대단하다.”하늘은 민망해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하준이 입술을 비죽거렸다.여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하늘이가 한 게 아니에요. 하늘이는 일주일째 못 맞췄는걸. 쭌이 한 번 보고 다 맞췄어요. 진짜 대단해.”하준은 거만한 공작새 마냥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어쩐지 여름이 와서 뽀뽀를 해주며 칭찬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여름이 깜짝 놀라서 하준을 쳐다보았다.며칠 사이에 하준의 지능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바보라기보다는 어린애의 지능 상태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이 스포츠카 레고는 매우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것이었다.하늘이는 지능도 매우 높고 어려서부터 레고 조립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지금은 18세용 레고를 사달라고 조르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하준이 단수에 맞춰버리다니.‘이게 무슨 뜻이지? 최하준의 지능이 결코 낮지 않다는 의미가 아닐까?’“오, 쭌 정말 대단하구나.”여름이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준은 기분이 좋아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그러면 상 줘?”“그러지, 뭐.”여름이 웃었다.“뭐가 받고 싶은데?”“뽀뽀해 줘.”조금도 망설임 없이 하준이 말했다.“푸흡!”여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하늘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도 하준과 여름이 뽀뽀하는 것을 몰래 본 적이 있었다. 하준의 뽀뽀는 아이들에게 해주는 뽀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을 다 알았다.여름은 얼굴이 빨개졌다.‘둘만 있을 때면 몰라도 애들이 있는데….’할 수 없이 대답했다.“그래. 다들 사이좋게
“같이 가겠습니다.”상혁이 바로 답했다.“하지만 강여경이 진짜 죽었다면 주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설마 강태환 부부에게 가는 건 아니겠지요?”여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지금 FTT 상황은 어떤가요? 전에 하준 씨 말로는 강여경이 팀원들을 데리고 쳐들어왔다던데, 기존 임원을 다 내쫓았나요?”“네, 강여경이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맹원규를 필두로 해서 주요 직과 팀장직에 앉았습니다.”상혁은 골치가 아팠다.“그리고 조사해 보니 맹원규는 양유진과 개인적으로 친했다고 합니다.”여름은 바로 알아차렸다.“아마도 맹원규는 양유진의 사람이군요.”“네. 이해는 되죠. 강여경이 악랄하기는 했어도 경영에는 아는 게 없으니까요. 인맥이래야 CB그룹 사람이 아니면 양유진밖에 없었잖습니까? 강여경은 먹이사슬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양유진이 강태환 부부를 찾으려고 갑자기 동성에 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그래요. 강여경은 자기와 양유진이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착각이지. 양유진에게 강여경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여름이 한숨을 쉬었다.“결국 또 양유진을 얕봤군요.”양유진의 악랄함과 뻔뻔함은 그야말로 끝 간 데가 없었다.상혁이 힘없이 웃었다.“정말 그렇다면 회장님께서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FTT가 양유진의 손에 넘어가겠군요. 진영그룹은 이미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양유진이 뒤로 몰래 FTT를 조정한다면 강태환이 허수아비겠군요. 앞으로 누가 양유진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여름은 마침내 맹국진이 왜 양유진과 손을 잡았는지 이해했다.“그렇게 둘 수는 없죠.”여름이 싸늘하게 말했다.상혁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어쩌시게요? 회장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모를까, 지금은 지적 장애잖아요? 그리고 두 분은 정식 부부 관계도 아니니 명분도 없고. 게다가… 법적으로는 양유진과 아직 부부시고. 사모님께서 FTT에 손대려고 했다가는 엄청난 반격을 받으실 겁니다. 사모님과 양
하준이 보니 자애로운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얼른 받았다.“고맙습니다.”“에고, 착하기도.”장춘자는 하준의 깜찍한 반응에 살짝 놀랐다.“아이고, 우리 하준이가 이렇게 얌전한 모습을 다 보는구나. 전에는 내가 할머니 노릇도 제대로 못 했는데 지금이라고 보충해야겠다. 여보, 하준이에게 예전처럼 너무 엄하게 하지 말아요.”“알겠어.”최대범도 마음이 짠하기는 매한가지였다.밥 먹는 동안 온 식구가 모두 하준에게 신경을 썼다.그러나 다들 그렇게 다정하게 해주는데도 하준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닭 다리를 조금 먹더니 그대로 장난감 방으로 가버렸다.“무슨 일이냐? 싸웠니?”최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여름은 움찔했다.‘설마 아까 째려보면서 눈짓했다고 삐친 건 아니겠지?완전히 어린애라니까.아휴.여울이보다고 속이 좁아요.’장춘자가 인상을 썼다.“끼니를 거르면 쓰나. 란아, 네가 가서 좀 먹여라. 에미 노릇 보충하고 싶다며?”최란이 더듬더듬 답했다.“먹이기 싫은 게 아니고, 내가 먹이면 안 먹어요….”“에잉~”최대범이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최란을 흘겨보았다.“……”“이따가 제가 먹일게요.”여름이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애썼다.“그래도 쭌이 제 말은 잘 들어요.”장춘자가 웃었다.“하준이 지능이 두 살 수준으로 떨어졌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거 아니다. 엄마한테 붙어있지 마누라에게 붙어 있는 두 살짜리가 어디 있다니? 아무래도 걔가 기억은 못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저가 제일 좋아하는 게 여름이 너라는 걸 아는 것 같다.”최대범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소리를 들으니 여름은 민망했다. 하지만 어쩐지 기분은 좋았다.확실히 하준이 여름에게는 좀 달랐다.먹던 밥을 후다닥 먹고 여름은 밥을 들고 장난감 방으로 갔다.뒤에서 여울이 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쭌이 엄마더러 뽀뽀해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이마에 해줬거든요. 그랬더니 그때부터 계속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우리랑 놀면서도 계속 툴툴거렸어요.”
장난감 방.하준은 멍하니 입구를 보면서 손에 제일 좋아하는 블록을 들고 있었다.그러나 놀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너무 슬펐다.‘대체 언제쯤에나 와서 날 달래줄 거야?’여름이 달래주지 않으니 노는 것도, 그림 그리기도, 밥 먹기도 싫었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이라고 확신했다.하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블록을 쌓는 척했다. 여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그러나 문 앞에서 걸음 소리가 멈추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왜 이러지? 몸이 고장 났나?’“진짜 블록 좋아하는구나?”여름이 하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내일 마트에 가서 블록 사줄까?”“됐어.”하준은 거절하고는 도도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아직도 화났어? 정말 쩨쩨하네.”여름이 얼굴을 받치고 물었다. 팔꿈치는 무릎에 대고 있었다.“아까 내가 왜 째려봤는지 알아?”“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하준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시선은 자꾸만 여름의 작은 얼굴로 향했다.여름은 뻔한 거짓말을 하는 하준의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그러나 꾹 참고 하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이마에 뽀뽀해달라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 하지만 여울이랑 하늘이가 있는데 입에 뽀뽀하면 내가 부끄럽단 말이야.”“뭐가 부끄러워?”하준은 이해가 안 됐다.“입에다 하는 뽀뽀는 우리 둘이만 있을 때 하는 거라니까. 다른 사람이 보는 건 싫어. 우리 둘 만의 비밀이야. 가서 봐봐 누가 사람들 보는 데서 입에 뽀뽀하나?”“텔레비전에서는 하던데.”하준이 즉답했다.“아침에도 봤다고.”“……”골치가 아팠다.‘꼬맹이 셋이서 대체 뭘 보는 거냐고? 이렇게 조숙하다니 여울이랑 하늘이를 제대로 가르쳐야겠구먼.’“텔레비전은 텔레비전이고.”여름은 이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어쨌든 난 그렇다고.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앞으로 뽀뽀 안 해줄 거야.”여름의 협박을 들으니 하준은 두려웠다
좀 서툴긴 했지만, 하준은 곧 키스의 주도권을 쥐었다.키스를 받는 여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세상에, 속은 하나도 안 변했잖아?’몇 번 만에 하준은 키스하는 법을 능숙하게 터득했다. 키스는 점점 카리스마 넘치고 파워풀하게 바뀌었다.그러나 여기는 아이들의 장난감 방이고 밖에 식구들이 있어 여름은 키스에 너무 빠져들 수 없었다.숨을 몰아쉬며 하준을 밀어냈다.“인제 그만.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아.”멍하니 여름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준은 입이 벌어졌다. 침이 떨어질 지경이었다.“여름이는 너무 예뻐.”여름은 달콤한 하준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검지를 세우더니 하준의 심장을 꾹 찔렀다.“잊지 마. 내가 쭌의 마음속에 제일 예쁜 사람이라는 거.”“응.”하준은 심장에 뭔가가 꽉 찬 것 같았다. 여름은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었다. 모든 순간을 여름과 함께하고 싶었다.“자, 이제 화 풀렸지? 그러면 밥 먹자. 안 그러면 배고파진다고.”하준은 이제 거부할 수가 없었다.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기도 했다. 밥을 배불리 먹고 나자 여름이 하준을 데리고 가서 하늘, 여울과 낮잠을 재우러 올라갔다.겨우 셋을 재우고 나서 여름은 옷을 갈아입고 내려갔다. 상혁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 두 사람은 장례식장으로 갔다.상혁이 책임자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강여경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안내했다.가까이 가자 안에서 이정희와 강태환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여경아, 팔자가 왜 이리도 불쌍하냐? 이렇게 가다니, 우리 불쌍한 딸.”이정희가 서럽게 울었다. 강여경이 두 내외만 감옥에 처넣고 사라져 미워했었지만, 나중에 돌아와 감옥에서 꺼내 줬을 분 아니라 부유한 삶까지 살게 해주었던 것이다.강태환의 붉어진 눈시울에는 증오가 가득했다.‘내 딸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다니….’“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길 왔죠?”상혁이 놀랐다.“들어갈까요?”여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에 강태환이 여름을 발견했다.“야! 네가 여길
“흥!”여름이 코웃음을 쳤다.“은혜를 모르는 게 누군데? 어머니도 살해하고. 나중에는 돈에 눈이 멀어서 자기 친딸도 남이라고 하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반성을 못 하신 것 같네요. 아니, 더 못된 것만 배우고 나오신 것 같네.”여름의 비아냥에 강태환은 얼굴이 벌게졌다. 여름의 말이 거슬렸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헛소리하지 마라. 누가 친딸을 남이라고 해? 네가 내 딸인데. 어머니를 죽였다니, 난 억울하다. 감옥에서도 우릴 풀어준 걸 보면 모르겠냐?”여름은 실망한 눈으로 강태환을 바라보았다.“전에는 감옥에 가서 좀 뉘우치셨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우린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이정희가 흥분해서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대성통곡을 했다.“넌 양심이 없니? 낳아준 부모도 모른 척하다니. 그래, 우리는 강신희나 서경주처럼 돈이 없다. 하지만 돈 때문에 친부모를 모른 척하다니 말이 되니? 사촌 언니까지 죽게 만들고.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악독하지?”“아, 그래요? 난 왜 여태 두 분이 날 낳아준 부모님인 걸 몰랐을까?”여름이 비웃었다.“3년 전 동성에서 두 분은 왜 강여경이 친딸이라고 하셨어요? 내 남자친구까지 뺏어서 걔한테 주고. TH에서 힘겹게 일해서 커리어를 쌓아왔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고. 날 폐가에 가두기도 했잖아요? 굶기고, 추위에 떨게 만들고! 친딸이라며? 친딸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이정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강태환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다 너 잘 되라고 가르치느라고 그랬지! 누가 그렇게 부모 말을 안 들으라고 했냐?”여름뿐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상혁까지도 어이가 없었다.과연 강여경의 부모답구나 싶었다.“아, 그래요? 그러면 같이 친자 확인 검사 한 번 받아보시죠.”여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두 분이 정말 내 친부모라면 앞으로 두 분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살게요.”“꺼져라! 친자 확인 따위, 네가 인맥을 동원해서 수작을 부리면 결과는 네가 원하는 대로 나오겠지.”이
그러더니 여름은 핸드폰을 꺼냈다. 두 사람에게 녹은 파일의 녹음을 정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것만 있으면 증명할 수 있으니까. 두 분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장례도 치러드릴게요. 그리고 FTT 주식이 제게 넘어오면 제가 잘 관리할게요.”“……”분위기가 확 변했다. 강태환과 이정희는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졌다.“꿈도 꾸지 마라!”이정희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돌로 자기 발등을 찍은 기분이었다.“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십중팔구 네 짓이겠지.”“사람 그렇게 나쁘게 보지 마세요.”여름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여기까지 왔는데 여경이 얼굴이라도 좀 볼게요. 이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네요. 행복하겠다.”“……”상혁은 자기 귀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다, 닥쳐!”강태환이 참지 못하고 뺨을 때렸다.“아빠, 뭐 하시는 거예요?”여름이 강태환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강태환은 성인 남성인데도 아무리 뿌리치려고 해도 여름을 떨굴 수가 없었다.여름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틀린 말 했어요? 강여경이 평생 못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살아서 얼마나 많은 남자랑 잠자리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치고 속였어? 그런데 저렇게 죽다니 너무 깔끔하게 갔잖아요? 인간이 그렇게 못된 짓을 하면 힘겹고 고통스럽게 고생을 하다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감옥에 수십 년 갇혀 있다가 죽는다든지? 그런데 저렇게 갔으니 행복한 거 아닌가?”“너야말로 온갖 못된 짓을 다 했으면서. 네가 뒤에서 떠밀어 죽인 걸 누가 모를 줄 알아?”이정희가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었다.상혁이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하게 막았다.여름은 강태환을 뿌리치고 시신 옆으로 가서 흰 천을 걷었다.“멈춰!”강태환과 이정희는 다급했다. 외동딸이 죽어서도 모욕을 당하다니….“진정하세요. 시신을 훼손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좀 보려는 거예요. 진짜 강여경인지 아닌지. 또 가짜로 죽은 거면 어떡해?”여름은 장갑을 끼고 얼굴을 만져봤다. 확실히 뭘 씌운 느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