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뒷모습을 보는 상혁은 존경심이 솟아났다.‘강태환과 이정희는 강여경이 남긴 FTT의 주식을 차지할 셈이었던 거야.강여름님 을 자기 딸이라고 그렇게 한사코 주장을 했으니 딸이 부모님 회사를 관리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웃기시네. FTT는 우리 거야. 까불지 말고 꺼져!”이정희가 씩씩거렸다. 이주혁에게 좋은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주혁은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서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당최 수치심이 뭔지 모르는 인간이 있다니까?FTT가 자기네 거라고?강여경이 강신희의 딸을 자처하고 나서서 죽자 살자 FTT 주식을 사들이지 않았더라면 FTT는 회장님 손에서 진작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었을 거라고!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감 없던 하찮은 인간들이 어디서 그딴 소릴 지껄여? 이젠 아주 개나 소나 다 나와서 난리군.’“죄송합니다만 못 꺼지겠습니다. 두 분은 우리 사모님의 부모님이시니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상혁도 여름이 했던 대로 싱글싱글 웃으며 입구에 버티고 섰다.이정희가 계속 발딱거리자 강태환이 잡아끌었다.“진정해, 진정. 여경이 장레를 치러줘야 할 거 아닌가?”“아가씨가 아직 안 왔는데 뭘 멋대로 한다는 거야?”이정희가 발을 굴렀다.“보라고 해야지. 아가씨 딸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지. 보고 복수하라고 해야지.”“통화가 안 돼. 차진욱이 눈치챈 것 같아. 언제 연락이 닿을 줄 알고 기다려? 여경이 시체를 이대로 둘 수도 없잖아. 부패하면….”강태환이 눈시울을 붉히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이정희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양유진의 계획을 떠올리고 앞으로의 이익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그러면 일단 냉동해 놔요. 아가씨에게 여경이 시신을 보여주고 충격을 줘야지. 그래야 아가씨랑 강여름이 서로 잡아먹을 거 아냐?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FTT를 날로 먹으면 되고.”“날로 먹는다고?”강태환은 차마 맞장구칠 수가 없었다.“양유진이 얼마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우리는 그냥 놈의 허수아비
‘사모님께서 보낸 사람들인가?아닌데? 사모님이 보낸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강여경이 미워도 시신을 모독하는 짓은 하지 않으실 거야.누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군. 하지만 내공이 보통 아니게 생겼는걸.’“대체 누구십니까? 여긴 장례식장입니다. 난동 부리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상혁이 걸어갔다. 말로는 위협했지만, 얼굴을 가리고 ‘무섭지만 어쩔 수 없이 나선다’ 라는 듯 용감하게 나섰다.“쓸데없는 참견 하지 말고 비켜.”키 큰 사내들이 상혁을 막았다.상혁은 바로 멈췄다.몇 분을 때려 부수더니 무리는 의기양양하게 나갔다.강여경의 시신은 이정희에게 던져놓았다. 봉합해 놓았던 곳이 다시 뜯겨 나갔다.그 모습을 본 상혁은 구역질이 올라왔다.그러나 끽소리하지 않았다. 엄마라는 이정희는 놀란 나머지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있었다.그러나 밀려 넘어지면서 척추가 부러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부짖기만 했다.“빨리, 빨리! 얘 좀 치워줘. 너무 무섭잖아.”강태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옥에 몇 년을 있다 보니 몸이 많이 상했다. 아까 무리에게 몇 번 밟히더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상혁은 강태환 내외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아주 천생연분이네.’******여름의 차가 집 주차장에 도착하자 상혁에게서 전화가 왔다.“저기… 누가 장례식장으로 쳐들어 와서 안을 다 부수고 갔습니다. 강여경의 시신도 훼손되었습니다. 강태환 부부도 적잖이 다친 데다 충격이 심해서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병원으로 이송하겠습니다.”여름은 놀라서 ‘앗’하고는 물었다.“그게 누구죠?”상혁이 쿨럭거렸다. 목소리를 낮추었다.“사모님께서 보내신 게 아니었습니까?”“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평소에 강여경에 적을 많이 만들었군요.”“세 식구 평소 행실을 보면 적을 만들고도 남죠.”상혁이 비웃었다
“……”초췌한 얼굴을 보니 여름은 차마 또 어딜 다녀오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내려. 나랑 놀자.”하준의 손이 창문 안으로 들어와 여름을 잡았다.“악! 쭌… 전화 받는 중이야. 한 번 더 나갔다 와야 해.”여름이 간신히 말했다.“아주 중요한 일이야.”뜻밖에도 하준은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실망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나보다 더 중요해?”잠긴 목소리에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쭌보다 중요해’라고 말하는 순간 눈물이 또르륵 떨어질 것 같았다.여름은 진땀이 났다.“당연히 우리 쭌이 제일 소중하지. 하지만 하루 종일 쭌하고만 붙어 있을 수는 없어. 식구가 많아서 나는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해. 돈을 벌어야 쭌 사탕도 사주고 선물도 사주지.”“그러면 우리 엄마한테 돈 달라고 하자. 엄마가 날 낳았으니까 날 위해서 돈 벌어 와야지. 여름이 돈 안 쓸 거야.”잠시 생각해보더니 하준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여름은 속으로 최란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나도 우리 하늘이랑 여울이 유치원 보낼 돈을 벌어야 해.”“그러면 하늘이랑 여울이 아빠한테 벌어오라고 해.”하준이 툴툴거렸다.“왜 여름이 혼자서 다 하는데?”“……”여름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저기요, 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는 당신이거든요.그건 그렇고, 잠깐 나가 있는 사이에 아이는 엄마 아빠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여름은 의아했다. 자기는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할머니가 텔레비전 보는데 거기서 그러던데.”여름은 이마를 짚었다.장춘자는 틈이 나면 막장 드라마를 즐겨 봤다. 처음에는 여울이를 물들이더니 이제는 하준에게도 전염이 된 모양이었다.“하늘이하고 여울이 아빠는… 일이 있어서 다쳤어. 아이들을 책임질 수 없어.”여름이 안타까운 얼굴로 설명했다.하준은 눈을 깜빡이며 여름을 한참 쳐다보았다.“여름이 불쌍하다. 어디서 그런 걸 만났어, 그래?”“……”‘저기요? 나중에
하준이 고개를 숙였다. 여름은 막 몸을 드는 참이었다. 옆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머리카락 두 가닥이 뽀얀 뺨에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니 우아한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하준은 갑자기 목이 건조한 느낌이었다. 여름을 파고 들어가 키스를 퍼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잘 매.”여름은 끄떡 않고 고개를 들었다.두 눈이 마주쳤다. 활활 타오르는 하준의 시선이 여름을 피하지 않았다.여름은 움찔했다. 재미있다는 듯 하준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무슨 생각 했어? 말해 봐.”하준은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했다.“여름이 목에 뽀뽀하고 싶다.”“……”여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타올랐다. 하준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왜 이래, 정말? 그냥 안전벨트 매주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이 가냐고?”여름이 하준을 노려보았다. 간지럼 태우듯 요염한 시선이 하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하준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여름을 바라보았다.여름이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지금은 바빠. 밤에 해줄게.”“응.”‘해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준은 기뻤다.******40분 뒤 차는 병원 주차장에 멈췄다.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상혁이 알려준 병실에 도착하니 안에 경찰 몇 명이 보였다.이정희가 울며불며 사정을 말하고 있었다.“십중팔구 강여름 그 인간이 한 짓이라니까요. 그런 짓은 걔만 할 수 있는 짓이에요. 우리를 엄청 미워하거든요. 우리 부부만 죽으면 우리 재산은 다 자기 거라고 막 그랬거든요.”“어! 쟤예요. 당장 잡아가요. 쟤가 사람을 시켜서 한 짓이 분명하다니까!”강태환이 맞장구쳤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름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뛰어들었다.“엄마, 아빠. 괜찮으세요? 사고가 났다고 해서 얼마나 깜짝 놀랐다고.”여름이 다급한 표정으로 울부짖었다.경찰은 놀라서 멈칫했다. 이정희가 씩씩거렸다.
“아, 경찰 아저씨. 제 사촌이 살아 있을 때 여기저기 적을 많이 만들고 다녔는데요….”여름이 이정희의 말을 끊더니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정희는 짜증이 났다.“여경이가 제일 원수진 게 너다!”“엄마…”여름의 눈이 다시 그렁그렁했다. “대체 내가 엄마 딸이에요, 여경이가 엄마 딸이에요? 두 분이 지금 여경이 엄마 다치신 거 커버하려고 이러시죠? 대체 우가 우리 엄마 아빠에게 이런 짓을 했는지 저는 알아야겠어요. 왜 이렇게 저를 못살게 주시는 거예요?”“그게 똑같니? 여경이는 나랑 아빠를 감옥에서 꺼내주었는데 넌 우리를 감옥에 집어넣었잖아?”이정희가 씩씩거렸다.여름이 당당하게 말했다.“엄마 아빠가 할머니를 안 죽였는데도 내가 그랬겠어요? 할머니가 날 어려서부터 얼마나 애지중지 아껴주셨으니 저도 법과 가족 사이에서 선택을 하기 어려웠어요.”“할머니를 살해했다고요?”경찰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친엄마가 아니었나 보지. 설마 친엄마에게 그런 짓을 하겠어? 인간이 아니지.’“아닙니다.”강태환이 당황해서 연신 부인했다.“저는 함정에 빠진 거예요.”“아무 말씀이나 해 보세요. 어쨌든 사건은 3년 전에 판결이 난 거니까요. 강여경이 무슨 수로 두 분을 꺼내드렸는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엄마 아빠가 양심에 손을 얹고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저는 아무 상관 없어요.”여름이 힘 없이 웃었다.“됐습니다.”경찰이 얼굴이 굳어졌다. 더는 들을 것도 없겠다 싶었다.“장례식장 습격 사건은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배후 세력까지 잡아낼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네요.”경찰의 냉담한 태도에 이정희는 열불이 터졌다.“사건 조사는 경찰이 본문 아니에요? 뭐가 조사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무조건 조사를 해야지. 못 잡으면 우리 다친 건 누가 보상해 주냐고?”“경찰이라고 모든 사건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매년 경찰에 쌓이는 미결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경찰은 그러더니 가버렸다.자기 어머니도 살해하는 사람이라니 얼른 떨
여름은 몸이 떨렸다. 소름이 우르르 떨어질 듯했다.하준은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눈앞의 사람을 노려봤다. 자기보다 살짝 작은데 검은 슈트를 입었다. 얼굴이 못생긴 것은 아닌데도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다.특히나 ‘당신’이라는 말이 거슬렸다.“누구야?”하준이 여름의 손을 잡고 어린애처럼 물었다.양유진의 시선이 하준의 유치하게 불타오르는 두 눈을 마주했다. 우아한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강여름 남편인데.”하준이 눈을 깜빡였다.“남편이 뭐야?”양유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롱하는 시선은 굳이 감출 생각도 없었다.“바보가 됐다더니 하루 못 본 사이에 정말 바보가 되었잖아?”“누가 바보라는 거야. 네가 바보다!”하준도 양유진이 나쁜 말을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씩씩거리며 그대로 돌려주려고 했다.“나쁜 놈!”잠시 있다가 아까 텔레비전에서 들은 말을 떠올리고는 덧붙였다.“못생긴 게 못생긴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푸흡!”여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구역질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하준 덕분에 오심은 반쯤 사라졌다.“저 사람은 못생기기만 한 게 아니고 아주 악랄한 사람이야. 늘 남의 것을 빼앗고 늘 못된 계략만 꾸미지. 저런 인간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이야.”여름은 대놓고 하준의 손을 꼭 잡고는 비웃었다.하준이 진지하게 끄덕였다.“알겠어. 나쁜 사람이구나.”양유진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러나 하준의 바보 같은 모습을 또 비웃었다.“정말 저런 인간 곁에서 평생 살겠단 말인가? 엄마 노릇을 하나? 이모 노릇을 하나? 궁금해서 말이야.”“뭐가 됐든 당신하고 사는 것보다야 낫지. 양유진, 계속 그렇게 날뛰어 보시지. 경고하는데 당신이 지금 하는 짓 하나하나가 다 위태로운 줄타기야. 맹국진이 비호해준다고 무슨 짓이든 다 덮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이 한 일은 언젠가는 다 세상에 까발려질 테니까.”여름은 뒤에 있는 강태환 내외를 흘겨보았다.“그리고 강여경도 당신이 죽였지? 그래 놓고 저 두 분 앞에서는 내 욕을 해
“그러면….”“그냥 좀 약올려주려고 했던 거예요. 간 김에 양유진도 좀 볼 셈이었죠.”여름이 설명했다.“양유진의 진짜 목적이 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보셨겠지만, 말끝마다 사위, 사위 거리는 걸 보니 강태환 부부를 허수아비로 세우지도 않을 것 같네요. 보니까 강태환의 사위라는 신분을 내세워 자기가 직접 FTT를 장악하려는 거예요. 아마도 강태환은 이사장을 시켜놓고 자기는 회장이나 뭘 하려는 속셈이겠죠.”상혁은 깜짝 놀랐다.“회장님께서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그룹이 결국 양유진의 손에 넘어가겠군요.”“서두르지 말아요. 양유진이 사위라면 난 강태환의 딸이니까, 명분은 나에게 더 있거든요.”여름이 냉소를 지었다. 뻔뻔함이라면 이미 양유진에게 실컷 단련이 되어 있었다.“아, 경찰서 좀 들여다 봐 주실래요? 양유진에 나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여러 가지 알아봤을 거예요. 장례식장에 난입한 인간들은 날 모함해서 강태환 부부에게 더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양유진이 보냈을 거예요.여름이 침착하게 지시했다.상혁이 떠나자 엶은 하준을 데리고 차에 탔다.가는 길에 하준은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남편이 무슨 뜻이야?”여름은 흠칫했다. 하준이 아직까지 그 말을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별로 말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라도 물어볼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알려지게 될 일이었다.잠시 생각해 보다가 여름은 길 가에 차를 세웠다. 진지한 얼굴로 하준을 바라보았다.“나랑 아까 그 사람 관계는 좀 복잡해. 남편이라는 건… 혼인관계의 다른 쪽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나랑 그 사람은 부부란 말이지.”“부부가 뭔데?”하준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나보다 소중한 사람이란 뜻이야?”“아니. 쭌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어.”여름은 하준의 손을 잡았다. 아까 본 사람은 한때 나에게 엄청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어. 그래서 난 평생을 함께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결혼했거든.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그 사람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러나 전에는 하준이 늘 멋대로 자신의 입술을 빼앗고는 했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해보고 싶었다.‘몰라. 너무 좋은데 어떡해?”******서울 남쪽의 대도시 광성.어느 조용한 정원의 꽃나무 아래 원연수가 서 있었다. 연분홍 꽃잎이 원연수의 머리에 떨어지며 향기를 내뿜었다.그러나 원연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장례식장 쪽 일은 내가 깔끔하게 처리했다. 경찰에서 널 찾아갈 일은 없을 거야.”“고마워, 중연 씨.”원연수가 손을 들어 눈에 보이는 나뭇잎을 만지며 작은 소리로 답했다.“고맙기는 뭘. 그런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죽은 사람에게 뭐 하려고 그렇게까지 해?”서중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인간이… 가장 소중한 자매를 죽였거든.”원연수의 검은 두 눈에서는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원연수는 최근에야 겨우 많은 일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전의 지다빈은 강여경이 분장한 것이었으며 지다빈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내자 강여경은 불을 질러 진짜 지다빈을 불구덩이에 집어 넣었고 그 일로 백소영을 함정에 빠트렸던 것이다.백소영이 감옥에 갇힌 뒤에는 부모님이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그러니 강여경은 백소영의 불구대천의 원수였다.다만 그렇게 쉽게 죽어버리다니 너무 아쉬웠다.‘정말 너무 쉽게 갔어.’“그랬구나.”서중연이 말했다.“다친 건 좀 어때? 서울은 언제 올래? 인간쓰레기 아버지 상대한다고 몸까지 그렇게 상해서 되겠어? 내가 해결해 줬으면 간단할 걸.”“됐어. 우리 사이는 비밀로 해둬야지.”원연수가 통화를 끝냈다.어머니인 서영란이 니트를 들고 나와 원연수의 어깨에 덮어주었다.“얘는, 감기 걸리려고 그렇게 얇게 입고 나와 있어?”“전 괜찮아요.”원연수가 눈 앞의 자상한 중년 부인을 바라보았다. 누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처럼 아렸다.이 몸을 낳아준 어머니는 눈 앞에 있지만 진짜 자기 엄마인 연화정은 이미 세상에 없다.자신의 원수를 값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가슴에 남은 상처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