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 씨는 자기 친구이기도 하잖아? 강여경은 최하준도 상대하려고 한다고. 이러고 눈 뻔히 뜨고 앉아서 친구가 당하는 꼴을 보고 있겠다는 거야?”윤서가 되물었다.송영식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윤서가 부엌으로 가서 밥을 먹고 나자 결국 송영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는 건 좋은데, 나도 따라가야겠어.”윤서는 송영식을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40분 후, 여름의 차가 송영식 집 앞에 멈췄다.차에 올라 송영식이 미간을 찌푸렸다.“왜 혼자 왔어요? 하준이는요?”“FTT에 또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서류를 내가고 있어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걱정할까 봐 준에게는 말도 안 꺼냈어요.”여름이 답했다.“말도 안 하고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더 걱정할 텐데.”송영식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영식 씨 내외 있잖아요?”여름이 빙긋 웃었다.“강여경이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설마하니 송영식 씨를 건드릴 정도는 아닐 거예요. 게다가 그렇게 오래 숨어 있다가 돌아왔으니 아마도 날 심연으로 밀어 넣어 서서히 말려 죽이고 싶을 거예요. 단숨에 적을 처치하고 나면 재미가 없잖아요.”송영식은 심란한 얼굴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아무래도 여름이 점점 하준을 닮아가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속을 알기 어렵고 남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악해 내고는 했다.뉴아쥬 클럽에 도착하자 송영식이 회원 카드를 내밀었다. 여러 차례의 보안 감사를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여긴 처음 와보는데 보안이 너무 지나지네.”윤서가 송영식에게 부루퉁하게 말했다.“당신이 운영하는 클럽도 있잖아? 그런데 여기처럼 삼엄하지는 않은 느낌인데.”송영식이 복잡한 심경으로 말했다.“여기는 사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야.”“누군데요?”여름이 궁금한 듯 물었다.“조의성이라고, VIP의 손자죠.”송영식이 답했다.“나보다 두 살 어린데 보통이 아니에요. 원래는 걔가 우리 삼촌하고 대선에서 맞붙을까도 했었는데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서
다들 뻔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친밀하게 안긴 것이 불편했지만 윤서는 송영식이 연기를 하는 것을 눈치채고 대충 맞춰주기로 했다.“어머나, 사모님을 무척 아껴주시나 봐요.”눈치 빠른 매니저가 생긋 웃었다.“정말 행복하시겠어요.”윤서는 빙긋 웃을 뿐,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들 송영식과 백지안의 일을 알고 이는데도 그렇게 입에 발린 말을 해주니 윤서는 그냥 둘 뿐이었다.“아, 오다가 보니까 조 대표 차가 있던데. 모처럼 왔는데 인사라도 해야지. 지금 조 대표 어디 있나요?”송영식은 은근슬쩍 거짓말을 했다. 사실 들어오면서 송영식은 조의성의 차 같은 것은 보지도 못했다. 그저 해본 말이었다.매니저가 웃었다.“마침 친구분이 오셔서 그쪽에 가 계세요.”“잘됐네. 조 대표가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죠.”송영식이 웃었다.여름이 갑자기 작은 소리로 끼어들었다.“그래도… 괜히 방해하는 거면….”“맞아.”윤서도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난 그냥 구경하러 온 건데.”“당신이 잘 몰라서 그래. 이렇게 하는 게 예의야.”송영식이 툭 뱉었다.“조 대표가 누군데, VIP의 손자라고.”윤서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그러면 인사해야겠네.”매니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끄덕였다.“위층에 계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그러더니 안내했다.뒤에서 송영식이 티 나지 않게 윤서의 귀여 속삭였다.“우리 둘이 짜지도 않았는데 연기에 죽이 착착 맞는데?”윤서의 허리에 손을 감은 채로 귀에 속삭이니 사뭇 야했다.윤서는 간지러워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송영식이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어허, 사이좋은 척하지 않으면 의심 산다고.”윤서가 남몰래 송영식을 흘겨보았다.왜 클럽 같은 데를 와서 뭔가 적진에 잠입하는 스파이마냥 사이좋은 척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곧 매이저가 송영식 일행을 데리고 어느 룸 앞에 멈추더니 가볍게 노크했다.곧 보디가드 같은 사람이 문을 열었다.“누구를 찾으십니까?”“조 대표를 좀 볼까 하고. 친구인
“어, 송 대표님께서 어쩐 일로 뉴아쥬를 다 들리셨습니까?”조의성이 웃으며 송영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뭇 친한 모양새를 연출했다.“아무래도 송 대표님과 사모님이 날 찾아오신 것같은데.”강여경이 입꼬리를 올린 채 강여름을 향해 와인잔을 들어 보였다.“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네.”조의성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의심스러운 얼굴로 송영식을 보았다.“아니, 대표님. 이게….”“자네 친구분과 내 와이프가 아는 사이인가 보군.”송영식은 짐짓 모른 척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깊게 얽힌 사이잖아요?”강여경은 위선을 떨기도 귀찮다는 듯 대놓고 지껄였다.“우리 사촌, 지난번에 남긴 메시지는 잘 봤어?”“봤지. 자기 고모 묘소까지 파헤칠 정도로 막장인지는 정말 몰랐다.”여름이 한 걸음씩 강여경을 향해 다가가더니 씩 웃었다.“어디 나가서 사는 동안 못된 것만 배웠나 봐?”조의성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소리쳤다.“말씀 조심해 주시죠.”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 송영식이 바로 지원에 나섰다.“무슨 일이야? 저 여자가 자네 여자 친구인가?”“제 여자친구였으면 좋겠네요.”조의성이 아무 표정 없이 입만 웃는 모양을 지었다.“그러니까 말씀들 조심해 주십시오.”그 말을 듣더니 강여경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신아영도 피식 웃었다.“아직도 여경이가 예전처럼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인 줄 아나 봐요? 조 대표님, 정말 여경이랑 사귀고 싶으면 오늘 저 강여름 대표 제대로 좀 대접해 주셔야겠어요. 저 여자가 아니었으면 우리 여경이가 애초에 외국까지 나갈 필요가 없었거든요.”강여경은 그저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신아영의 말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조의성이 싱긋 웃었다.“그야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을.”그러더니 갑자기 싸늘한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들어와!”“네!”바로 보디가드 몇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조의성이 아래턱으로 여름을 가리켰다.“
최하준은 조의성도 몇 번 만나 봤지만 대단한 인물이었다.특히나 요즘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추신을 무너트리기도 했다.원래 그분이 최하준을 처리해달라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찬성하지 않았다. FTT가 우리나라 경제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보통 분이 아닌지라 조의성의 할아버지도 결국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최하준이 일을 얼마나 철저히 처리하는지 이틀을 뒤졌는데도 건질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그리고 FTT의 배후에는 지룡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정말 최하준의 여자친구를 건드렸다가는 안 그래도 솜씨가 매서운 최하준이 함께 죽을 각오로 결사적으로 덤벼들까 봐 걱정되었다.물론 그 분이 말씀을 하신 이상 FTT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자기도 함부로 날뛸 수 없었다.송영식이 틈을 노려 한 마디 했다.“그리고 우리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군. 자네 할아버지께서 퇴임하실 텐데, 자네도 야심이 있는 사람 아닌가? 그 야심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야 할 텐데.”조의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송영식과 강여름이 너무 날뛰는 바람에 강여경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생긴 것이다.“오빠, 서두르지 말아요.”강여경이 생긋 웃으며 나서주었다.“이렇게 바로 죽여버리면 그것도 재미없지. 새장에 가둬두고 조금씩 조금씩 죽고 싶도록 괴롭혀야 재미있지 않겠어?”신아영도 덩달아 임윤서를 노려보았다.“차기 대통령 딸의 친구라고 대단한 줄 아나 본데 우리 여경이는 너희들 따위 말 한마디로 다 죽여버릴 수 있다고. 솔직히 강여름, 내가 당신이라면 지금 바로 여기서 무릎 꿇고 빌 거야. 그러면 최하준의 목숨 정도는 간신히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신아영, 너 이러는 거 윤상원이 알긴 하니?”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신아영이 비웃었다.“차기 대통령 딸이라고 그만 거들먹거리시지. 말이야 바른말이지, 친딸도 아니잖아? 여경이 뒤를 받치고 계신 분은 언니네 양부모 따위가 함부로 건드릴 수
조의성도 최하준, 이주혁에 댈 실력은 아니었지만, 송영식과는 싸워볼 만했다.옆에 있던 보디가드는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어쨌거나 송영식도 보통 사람은 아니므로 보디가드가 조의성과 함께 떼로 송영식을 패다가는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임윤서는 옆에서 보고 있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어머 어머, 평소에는 그렇게 말랑하더니 싸움을 꽤 하잖아?”그러나 그 정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 어찌 최하준과 어울리겠는가?여름은 둘의 실력이 비등비등해서 승부가 나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리하게 파악해냈다.역시나 한참을 붙어서 싸우던 송영식과 조의성은 헐떡거리며 떨어졌다. 둘 다 얼굴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여름은 이제 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강여경에게 다가갔다. “뭐, 마침 잘 돌아왔어. 안 그래도 내가 널 엄청나게 찾고 있었거든. 예전의 빚은 내가 하나하나 천천히 갚아줄 생각이야.”그러고 돌아섰다. 나가려는 순간 내내 가만히 있기만 했던 시아가 눈에 들어왔다.“주혁 씨가 오늘 너 여기 있는 거 아는지 모르겠다?”그러더니 안색이 확 바뀌는 시아는 못 본 척하고 그대로 나가버렸다.강여경은 여름의 경고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 생각에 지금은 그 누구도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차진욱과 강신희라는 백은 실로 엄청나게 강했다. 대통령의 손자마저도 자기 비위를 맞추려고 들 정도로….“미안.”조의성이 매우 미안한 듯 얼른 다가왔다.“내 클럽에서 당신 친구들 잘 대접해 주려고 했던 건데….”“대체 쟤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강여경이 갑자기 의심에 찬 눈으로 시아와 신아영을 돌아보았다.“자기들 올 때 미행당했어?”“아닐걸”신아영과 시아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뭐, 상관없어. 알면 아는 거지. 어쨌든 언젠가는 마주쳐야 했을 테니까.”강여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니, 실은 내내 강여름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시아는 여름이 가기 전에 했던 말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가서 주혁 씨에게 뭐라
‘그러게….강여경이 대체 누굴 잡은 거지?’여름도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무슨 드라마에서처럼 헤어진 지 수십 년 된 친부모를 만난 것도 아닐 거 아냐? 강여경의 친부모는 외삼촌인데.’“일단 병원부터 가죠.”결국 여름은 그렇게 말했다.여름은 송영식을 이주혁의 병원으로 데려갔다.윤서가 말했다.“넌 가서 하준 씨에게 오늘 일을 얘기해 줘. 이쪽은 내가 데려가서 봐주면 되니까.”“그래요. 여름 씨는 하준이한테 가 봐요. 우리는 이따가 기사를 부르면 되니까.”송영식도 덧붙였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얼른 빠져나갔다.응급실. 흰 가운을 입은 이주혁이 들어오더니 막 상처를 싸매는 송영식을 보았다. 그리고 옆에 모처럼 함께 있는 윤서를 흘끗 쳐다봤다.“설마 가정 폭력은 아니겠지?”윤서가 어이없다는 듯 이주혁을 흘겨보았다.“임산부가 사람을 이 꼴로 만들 수나 있겠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그쪽 약혼녀가 아주 잘 아니까 직접 물어봐요.”시아를 언급하자 이주혁의 얼굴이 무거워졌다.“어떻게 된 겁니까?”“조의성 자식에게 맞았어. 하지만 그 자식도 적잖이 나한테 맞았지.”송영식이 볼때기의 아픔을 참으며 씩씩거렸다.“요즘 하준이가 조사받고 있잖아? 우리도 나름 조사를 하다 보니까 여름 씨의 사촌 동생인 강여경과 관계가 있겠구나 하는 것까지는 알아냈단 말이지. 오늘 뉴아쥬 클럽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거든. 갔더니 글쎄 조의성이 강여경, 시아랑 같이 있더라고. 강여경 그건 아주 기고만장하더라. 조의성도 걔 앞에서 알랑거리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더구먼.”들을수록 경악스러운 말이었다.FTT가 조사를 받는 게 VIP 쪽에서 말이 들어간 거라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조의성에 강여경까지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이주혁도 강여경은 알았다. 3년 전 지다빈으로 분장하고 하준 곁을 맴돌다가 진짜 지다빈은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죄는 백소영에게 뒤집어씌워 소영이를 사망에 이
송영식은 입을 달싹거리더니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자꾸 고맙다고 하지 마. 아까도 말했잖아.”윤서는 고집부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송영식과 결혼을 했으니 이제는 동지나 마찬가지고, 더는 원수처럼 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여름은 원래 FTT로 가려고 했으나 전화해보고 하준이 이미 퇴근해서 집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집에 도착해서 보니 여울과 하늘이는 할머니와 놀러로 갔고 하준이 혼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그러나 기분이 안 좋아서인지 입맛도 없었다.여름이 돌아온 것을 보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어디 갔었어? 이모님이 당신 저녁 먹자마자 나갔다고 하던데.”“뭐 좀 알아보러.”여름이 앉아서 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여름의 말을 들은 하준은 얼굴이 굳어졌다. 화도 났다.“자기야, 그렇게 큰일을 나랑 상의도 안 하고.”“당신 바쁠까 봐 그랬지.”여름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누구라도 넘어갈 듯 사랑스러웠다.그러나 하준은 정말 화가 났다.“당신은 조의성이 얼마나 무서운 녀석인지 몰라서 그래. 영식이도 그래. 그런 일은 나한테 귀띔도 안 해주고. 당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내가 갈 용기를 냈을 때는 무사히 빠져나올 계산도 다 있었던 거야.”그렇게 말하고 여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거기 안 갔으면 이 일이 강여경하고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어?”“지룡 애들 시켜서 조의성을 지켜봤으면 될 것을. 조의성은 강여경 배후의 인물이 누군지 아니까 그렇게 강여경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을 거야. 그게 누군지는 차차 알아내면 되지.”하준이 싸늘하게 말했다.하준은 FTT가 조사받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상대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정말 해결할 수 있겠어?”여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하준은 몇 초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해결하지 못할 것 같으면 당신은 바로 애들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여름은 심장이 저릿했다.늘 그렇게
차민우는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고 나서야 받았다.의외라는 듯 전화를 받은 차민우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전화를 받았다. “오, 먼저 전화할 줄은 몰랐는데.”“혹시 데이트라도 방해했어?”예민한 여름은 차민우가 지금 전화 받기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데이트는 아닌데 식구들끼리 얘기를 좀 하고 있어서.”차민우가 웃음을 띠고 답했다.“여자친구는 없다고 얘기했었는데.”“부모님이 다들 서울에 오셨어?”여름은 살짝 놀랐다.‘어쩐지 요즘 연락이 뜸하더라니.’전에는 집 알아봐야 한다느니, 서울 여기저기에 대한 걸 물어본다느니 하면서 연락이 자주 왔었다.“며칠 전에 오셨어.”여름도 FTT일로 마침 정신이 없기는 했었다.“내일 같이 밥 먹을 시간 있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어쩐 일이야? 내내 내 쪽에서만 졸라댔는데.”차민우가 농담을 던졌다.“시간 있니? 시간 없으면….”“있어. 내일 점심!”차민우는 즉답해버렸다.******전화를 끊고 나서 발코니에 선 차민우는 심란했다. ‘이런 때 전화라니, 강여름이 뭔가 알아낸 건 아니겠지? 그동안 엄청 조심했는데.아마도 나한테 뭐 부탁할 일이 있는 거겠지. FTT 관련해서 말이야.’“누구랑 그렇게 비밀스럽게 전화를 하니?”강신희가 거실에서 차민우에게 손짓했다.“어서 와. 네 동생이 야식을 가져왔는데 너무 맛있다.”“친구가 추천해준 집인데 엄마 매운 거 좋아하시잖아요. 나도 매운 거 잘 먹거든요. 그래서 한 그릇 사 왔죠.”강여경이 생글생글 웃었다.“역시 딸이 좋구나.강신희가 아들을 흘끗 보며 말했다.차민우는 억울했다.“내가 엄마한테 너무 다정하게 하면 아빠가 질투한다고요. 두 분 사이에 끼어든다면서.”차진욱이 콧방귀를 뀌었다.“난 그렇게 쩨쩨하지 않거든.”차민우는 속으로 비웃었다.‘세상에 아빠처럼 쩨쩨한 사람도 없거든.’“아유, 부자지간에 뭘 그런 걸로 싸워?”강신희가 두 사람을 흘겨보더니 강여경에게 다정하게 물었다.“오늘 조의성이랑 가서 뭘 했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