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석의 앞에 놓은 건 오늘 재경그룹에서 해고당한 인원의 리스트였다.“이 사람들, 왕 부사장 사람들이지? 회사 기밀을 빼돌린 혐의로 해고되었어. 앞으로도 아마 경인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걸?”고연우의 목소리가 어두운 지하실에서 싸늘하게 울려퍼졌다.“이건 오늘 분량이고. 아마 내일에 2차 리스트가 올 거야.”왕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스트를 꽉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희미한 광선을 통해 리스트에 쓰인 명단이 한눈에 들어왔다.“말했잖습니까. 다 돈 때문에 한 일이라고요. 누군가가 저에게 새 프로젝트에 장난질 좀 쳐주면 10억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재경에서 평생 일했지만 보지도 못했던 금액이었어요. 하늘에서 떡이 떨어졌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지요.”그는 리스트에서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이 사람들은 제 직장 동료일 뿐이고 회사에서 그들을 해고한다고 해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그래. 왕 부사장 말을 믿을게. 그래서 이들을 재경에서 쫓아낼 때 이들에게 말했어. 왕 부사장 당신이 돈을 받고 이들을 배신한 뒤에 가족들이랑 해외로 도주했다고.”왕지석은 분노한 눈으로 고연우를 힘껏 노려보았다. 극도의 분노 때문인지 기름기 좔좔 흐르는 그의 얼굴이 더 흉하게 일그러졌다.“제 집사람은요? 아들은요? 그들을 어디로 보낸 겁니까?”박태준은 집사람이라는 단어를 듣고 신은지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왕지석은 온몸을 비틀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의자에 손발이 꽁꽁 묶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음이 잘 되어 있는 별장 지하실이었기에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도 필요 없었다.고연우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박태준이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여전히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멍청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박태준을 볼 수 있었다.고연우는 욕설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그는 소매를 걷고
깊게 잠들었던 강혜정이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비명을 질렀다.신은지는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하고 다시 강혜정을 불렀다.“어머님.”다행히 그녀를 알아본 강혜정이 한숨을 쉬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하구나. 금방 눈을 떴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만… 많이 놀랐지?”신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비명소리를 듣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박용선이 안으로 들어왔다.“무슨 일이야?”강혜정은 긴 악몽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별장에 있었는데 봄 향기가 가득한 정원 흔들의자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주변에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중에 있는 별장이었는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강혜정이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별장에서 밖으로 나왔다. 편안한 복장을 입은 사내는 흔들의자 옆으로 천천히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혜정아.”분명 목소리는 자상하고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광기와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관자 시선으로 바라본 그는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사내는 흔들의자에 누운 여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녀를 잡아당겼다. 여자는 힘없이 사내에게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그 순간 방관자인 강혜정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그것은 그녀의 어릴 적 얼굴이었다.놀란 강혜정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분명히 꿈이고 방관자 시선이었는데 갑자기 사내가 고개를 들리더니 음침한 눈을 하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놀란 강혜정은 그대로 눈을 떴다.잠에서 깬 강혜정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었다. 강혜정이 꿈에서 본 사내는 기재욱, 기민욱의 아버지이자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경쟁사와 결탁하여 재경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박용선의 손에 충분한 증거가 있었기에 기재욱은 발뺌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 미친놈은 그때 강혜정을 납치하여 그
“대체 내가 박용선보다 못한 게 뭐야?”강혜정은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기에 절망적인 얼굴로 눈을 감았다.당장이라도 넌 미친놈이고 네 주제에 누구랑 비교하냐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이 미치광이를 자극할 수는 없었다.대답을 듣지 못한 기재욱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들더니 말했다.“자, 박용선한테 전화해. 요 며칠 지방 출장 나갈 거고 5일 뒤에 돌아간다고 말이야.”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혜정아, 나랑 5일만 같이 있자. 응?”애원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모든 게 자신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기에 강혜정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가서 자수해요. 자수하고 합의까지 하면 양형을 좋게 받을 수 있잖아요. 어린 아들까지 있는데 아들을 생각해야죠. 엄마까지 잃은 아이인데 아빠까지 잃으면 애는 어떡해요?”“그럼 죽으라지. 어차피 나중에 커도 큰일을 못할 놈이야. 난 자수 따위 안 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경찰에 잡히지 않을 거야.”그의 손길이 강혜정의 옷섶에 닿았다. 강혜정은 바짝 긴장하며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기재욱은 흥미롭다는 듯이 겁에 질린 그 모습을 감상하더니 말했다.“내 말을 안 들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내 말만 잘 들으면 5일 지나고 풀어줄게. 사실 나 정사에 딱히 관심이 없어. 사랑이 없는 정사는 재미가 없거든. 그러니까 내 신경만 자극하지 않으면 무사할 거라는 얘기야.”섬뜩한 협박이 담긴 말에 강혜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박용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재욱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녀는 납치에 관한 그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었다.물론 이 미친놈이 하는 말을 믿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핸드폰에 대고 섣불리 구조요청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 갇힌 건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박용선이 오기 전에 미친놈이 발작을 일으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지켜보며 기회를 기다리기로
창문을 두드린 자는 키 큰 남자였다. 그의 굴곡진 몸 선으로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는데 모자로 윗머리를 가렸고 검은색 마스크로 아래 얼굴까지 가렸다.신은지의 차는 가로등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허리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불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이 더욱 검게 보였다.정말... 귀신같았다.신은지는 손을 뻗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를 더듬거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사물함에 넣어둔 망치를 꺼내 날이 선 쪽을 위로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재빨리 라이터 키를 눌렀다.“작은 사모님, 접니다. 겁먹지 마세요.”남자는 서둘러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신은지가 얼굴을 더 똑똑히 확인할 수 있도록 심지어 유리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먼저 가지 마세요. 보스께서 보내셨습니다.”“...”저번 주차장에서 그녀의 입을 막았었던 남자였다. 박태준의 사람이었지만 정확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지인인 것을 발견한 신은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창문을 내렸지만 여전히 망치를 꼭 움켜잡고 있었다.“사장님은요?”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박태준은 아직 그녀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은 상태였다.남자가 대답했다.“보스께서 저더러 이사를 도우라고 분부하셨습니다.”“어디로요?”그녀는 박태준이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를 넘어 뒤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옆에 주차된 차에 시야가 완벽히 차단되었다.“혼자 왔어요?”“신당동이요. 보스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미처 오지 못했고 저 혼자 왔습니다.”신은지는 차에서 내리더니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옷깃을 여미며 물었다.“차는 어디에 있어요?”“네? 저... 저 운전하지 않고 택시로...”신은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그녀는 휴대폰 플래시를 켠 채 차의 뒷좌석을 꼼꼼히 체크했다.남자는 그녀의 뒤를 꼭 붙어 다녔지만 한참 지나도 이상한 점을 눈
신은지와 어렵게 단둘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박태준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우더러 이삿짐 옮기라고 하자.”그는 사실 그녀에게 중요한 물건만 챙기고 나머지 물건들은 죄다 버리고 새로 사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여나 여지라도 남겼다가 후에 그녀가 이 핑계로 다시 집을 나오려고 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신은지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더니 입을 열었다.“응.”어차피 그녀는 현재 휴가를 신청한 상태라 재경그룹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 비좁아 죽을 지경인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운수 좋게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쇼핑센터를 드나들지 않아도 되며 박태준이 그녀 때문에 가슴을 썩히지 않아도 된다.아내를 달랬다는 건 재혼에 관한 희망도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기민욱이란 변태만 해결하면 곧바로 그녀를 데라고 구청으로 가 재혼 증명을 뗄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뒤로 또 다른 요소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참에 아이도 다시 돌려받을 계획이었다.그러나 임신 중이라 또 한동안 참아야 한다.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 그보다 더 처참한 유부남은 없을 것이다. 알고 지낸 지 10여 년, 결혼한 지 3년, 이혼한 지 1년이 되면서 정작 행복한 식사 자리를 가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하지만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신은지가 어느날 갑자기 후회하여 도망치면 어떡하나.만약 고연우의 그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분명 대놓고 그를 놀렸겠지? 그녀는 남편을 버린 채 아이만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고 임신한 채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도 있다. 심하면 아이에게 남편을 아저씨라 각인시키고 세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데 슬픔에 잠긴 그에게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아저씨, 왜 울어요?”박태준은 이토록 다채로운 인생을 경험한 적이 없었고 더우기는 이런 추잡한 상상마저 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현재 기분이 아주 좋았고 기운이 넘쳤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먼저 고개를 먹을 것인지 먼
신은지가 신당동으로 이사왔을 때 거실에 있던 꽃은 이미 진영웅에 의해 영생화로 뒤바뀌었다. 혹여나 그녀의 심기를 자극할까 봐 걱정되어 2층 손님방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그녀가 올 거란 소식에 가사 도우미들은 서둘러 집안 곳곳을 청소했고 심지어 침대 시트까지 바꾸었다.너무 늦은 탓에 신은지는 아파트에서 가지고 온 트렁크를 정리할 힘도 없었다. 원래는 신당동에 옷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일상용품만 챙기려고 했으나 민우는 한사코 짐을 몽땅 옮기자며 우겼다.멀쩡한 아파트는 마치 메뚜기 떼가 지나간 것처럼 원래 있던 가구들을 제외하고 죄다 신당동으로 옮겨졌다. 심지어 쓰레기까지 알뜰히 챙겨서 집 밖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다.신은지는 대충 샤워를 마친 뒤 곧바로 취침했다.이튿날.그녀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저녁에 너무 늦게 잠든 탓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고 의식도 엉망진창이었다.“여보세요, 누구시죠?”“아직 안 일어났어?”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잠깐 곰곰히 생각해 보더니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아빠.”신은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때마침 9시였다.강태민이 입을 열었다.“강이연 출소했어.”“네? 강이연... 2년 선고받지 않았어요?”바다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이연은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예전에 괴롭혔던 친구가 법원에 기소하는 바람에 각종 죄목까지 추가되어 2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재판도 급급히 마쳤다. 그 과정이 강태민의 손을 거쳤는지 아닌지는 그녀도 몰랐고 그리고 묻지도 않았다.“출소했단 소식은 나도 오늘에 알았어. 정상 절차를 밟고 감형으로 출소한 게 아니야. 아무래도 뒷문을 쓴 게 분명해. 파출소장 말로는 출소한 강이연을 데리러 온 게 강태석의 비서래. 그자도 배에 있었던 것 같아.”“...”신은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강태석이 죽었는데 그가 아직 살아있다니, 게다가 이젠 감옥에서 강이연을 석방시켜 데려갈 수도 있다니.강태민은 표정
그러나 고연우는 매우 바쁜 탓에 전화를 받고 끊기까지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태준이가 그냥 신당동에 머물라고 했어요.”이러한 상황에 신은지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계속 머물더라도 먼저 박태준이 안전한지 확실히 해야 했다.이제 뉴스에는 온통 그의 실종 소식으로 도배되어 있었다.그녀는 이것이 그의 계획인지 아니면 기민욱의 계획인지 확인되기 전에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마침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서는 순간 신은지는 나유성과 마주쳤고, 나유성은 자신의 눈앞에 멀쩡히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살짝 안도했다.육영 그룹의 사고 소식을 듣고 그는 즉시 신은지의 아파트를 찾아서 내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그는 전화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혹시나 아직 뉴스를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괜히 그의 전화로 그녀가 소식을 알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결국 아파트에서 그녀를 찾을 수 없으니, 나유성은 그녀가 혹시 신당동에 있지 않을까, 신당동에 가보기로 했다.하필이면 마침 외출하려던 신은지와 마주치게 되었다.만약 그가 한 발 더 늦었더라면 그녀와 마주칠 수 없었다는 생각에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곽동성 변호사님을 만나러 갈 거야.”그녀는 숨기지 않았다.“태준이가 이제 육영 그룹의 총책임자야, 만약 정말로 불법 자금 조달로 규정된다면 태준이도 연루될 거란 말이야!”“넌 가도 별로 도움이 안 돼, 가도 소용없다고!”나유성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해서 무모하게 신은지를 편애하지는 않았다.“기민욱이 정말 태준이를 상대로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일 거야. 기민욱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행실을 볼 때 절대 태준이를 가만히 놔둘 사람이 아니야. 기민욱도 태준이가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너를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아. 너도 지금 태준이만큼 위험하다고!”그녀를 개처럼 고문하고 그것을 박태준에게 보여주는 것, 기민욱에게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그런 변태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답은 기민욱,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었다.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속이고 자신을 바보취급 하며 농락한 것 같았다.그는 숨이 끊어질 것 같이 말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장기간의 수면 부족까지 겹쳐 정신이 고갈되기 직전이었다.오 박사가 당시 박태준의 정신 상태는 최면에 걸리기 최적의 상태라고 했다. 감히 반항한다면 몇 천 배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일반적으로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망치를 들고 뇌를 내리치는 고통과도 같다고 했다.그래서 오 박사가 그에게 성공했다고 호언장담했을 때 그는 그 말을 너무 쉽게 믿었다.나중에 박태준이 그런 명백한 허점을 드러냈음에도 그는 자기 공략으로 그를 되찾았다.“그녀가 울까 봐 두려웠어.”당시만 해도 신은지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차마 잊을 수 없었다.“형님이 은지 누나를 신당동으로 데려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형님, 은지 누나는 형님 생각만큼 순종적이지 않아요.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법이죠.”기민욱은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켰는데 작은 빨간 점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이 말은 보육원 원장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죠. 은지 누나도 말을 안 듣는 아이니까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죠?”박태준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기민욱은 손에 손수건을 들고 그의 뒤로 슬며시 손을 뻗었다.“형님도 알다시피 저는 형님에게 아무 짓도 안 해요. 저는 형님이 곧 나이고 우리는 항상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어떻게 다른 나 자신에게, 그것도 가장 만족하는 나에게 함부로 대하겠어요, 하지만 은지 누나는 달라요. 저는…”박태준은 휴대폰 화면의 빨간 점을 본 순간, 즉시 얼굴이 굳어졌다.마치 그의 예상을 빗나간 듯 그의 머릿속은 대혼란에 빠졌다.“뭘 하려고?”그가 한눈을 판 틈을 타 기민욱은 손을 번쩍 들어 손수건으로 그의 입과 코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