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희는 조용히 글을 다 읽었다.그녀는 이 축하 선물이 그가 마음 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쓴 카드도 진심이겠지만, 그녀는 받을 수 없다.그녀는 그림을 창고에 넣고, 그 카드는 쓰레기통에 버렸다.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사장님, 어떤 손님이 가장 비싼 그림 5점을 모두 사고 80억짜리 수표를 줬습니다. 그 손님이 사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박연희가 몸을 일으켰다.“지금 갈게요.”그녀는 비서를 따라 전시 구역에 왔다.VIP 코너.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최민정은 검은 머리를 뒤에 곱게 묶고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만 봐도 기품이 넘쳤다.박연희가 걸어갈 때 최민정이 몸이 돌리고 빙그레 웃으며 박연희를 바라보았다.”박연희 씨죠?”박연희가 순간 굳었다.최민정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제 남편은 심씨예요. 경서가 그쪽 얘기를 하면서 그쪽을 존경한다고 해서 일부러 와봤어요. 과연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재능이 있네요.”박연희가 부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날 밤은 아무 일도 없었다지만 그녀는 심경서를 호스트로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심경서의 어머니가 오셔서 그녀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그녀와 말을 나누기까지 하시니...박연희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사모님, 그날은 제가 너무 충동적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최민정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경서가 뭐 숫처녀도 아니고,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집안 어르신께서 화가 많이 나셔서 굳이 경서에게 설명을 듣고 경서를 박연희 씨에게 주겠다고 헛소리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박연희 씨가 지금 이혼 수속을 밟고 있으니 앞으로 사귈 기회는 많을 거라고 해뒀죠.”“...”“...”박연희와 그녀의 비서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민정은 목적을 달성하였다.그녀의 점잖은 아들이 그녀에게 와서 개업하는 날에는 시끌벅적해야 한다고, 박연희를 추켜세워 달라고 부탁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대신 말도 전했다
요 몇 년 동안 조은혁은 사업장에서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최민정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막혀왔다. 하지만 또 하필이면 심씨 가문이라서 쉽게 미움을 살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기에 그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럼, 조 대표님은 흰 머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보시죠.”최민정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조 대표님은 자신 있으시잖아요. 어쩐지 여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싶더라니. 비즈니스에서 만난 여자들은 다 그런 걸 바라고 달려드는거겠죠?”두 고수가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말다툼을 했다.조은혁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최민정이 말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확실히 오랫동안 방황을 했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났고 그 황홀한 느낌을 즐겼다. 그는 그것이 몇 년 동안의 옥살이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 그는 그런 것에 싫증이 났다.그는 이제 가정의 따뜻함을 지향한다.최민정은 말을 몇마디 더 나누다가 웃으며 떠났다......이러한 예상외의 일이 생기자 조은혁은 안에 들어갈 마음이 없어졌다.그래서 그는 차에 앉아서 기다렸다.어둠이 깔리고 밤이 깊어지자 박연희가 화랑에서 나왔다.조은혁의 차는 바로 입구에 세워졌다.그는 검은 롤스로이스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는데 차창을 반쯤 내리고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긴 손가락에는 하얀 담배를 끼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그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뚜렷한 이목구비, 아름다운 미모, 그리고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음을 떨리게 하기 충분했다...하지만 박연희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조은혁이 문을 열고 두세 발짝을 떼더니 그녀의 가는 손목을 잡고 롤스로이스 차 안으로 끌고 갔다.박연희는 몸부림 치며 벗어나려 했다.그때, 차 자물쇠를 잠근 조은혁이 그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심씨 집안과는 무슨 일이야? 최 사모님이 왜 여기에 왔어?”박연희가 그를 무시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장사
박연희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어렴풋이 맺혔다.그녀가 입을 열었다.“조은혁 씨,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양 치기 소년 이야기는 우리 다 들어봤잖아요, 안 그래요?”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내리게 해줘요. 전 진범에게 작은 케이크를 사주기로 약속했어요. 진범이가 집에서 절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잠을 자려고 하지 않을거예요.”조은혁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그는 박연희의 말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가 박연희를 놓아주지 않으면 이제는 좋은 남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좋은 아빠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그는 결국 박연희를 떠나보냈다....박연희는 작은 케이크를 샀다.그리고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진범이는 거실에 없었다. 박연희는 어린아이가 못 참고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장숙자가 침실에서 나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진범 도련님이 아픈 것 같아요. 여기가 좀 더운지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 같아요.”박연희는 케이크를 두고 급히 침실로 갔다.하민희는 잠이 들었다.몸이 불편한 조진범은 몸을 옆으로 웅크리고 여동생의 한쪽 팔을 껴안았다. 강아지같은 까만 눈을 뜨고는 박연희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흐느껴 울었다. “엄마.”박연희가 가서 아이를 안아올리고 만져보니 좀 뜨거웠다.그녀가 말했다.“병원에 데리고 가볼게요.”넋이 나가있던 장숙자는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는지 작은 옷을 가지고 진범에게 입혔다. 원래는 그녀도 같이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집에 아이가 하나 더 있기에 여기 남기로 했다.박연희가 말했다. “나중에 집에 상주할 아주머니를 한 분 더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 집도 한 분 더 살 수 있을 정도는 되니까요.”장숙자가 찬성했다.박연희는 혼자 조진범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조진범이 어린이 의자에 앉아 반쯤 잠에서 깬 채 케이크에 대해 이야기하자 박연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진범이 병 다 나으면 엄마가 큰 케이크 사줄게.”조진범은 순순히 고개를 끄
박연희가 굳자 심경서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간호사님이 우리가 남매인줄 알았나 보네요. 닮았다는 뜻이겠죠?”박연희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간호사가 조진범에게 링거를 놔줬지만 심경서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그가 조진범과 함께 말하는 내용을 듣고 있으면 진범이 그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링거를 반쯤 맞았을때 아이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병실 안은 적막했다.박연희가 비로소 입을 열려고 할때, 먼저 말을 꺼낸 심경서가 박연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제가 병원에 있냐고 묻지 않으세요?”“왜 있는데요?”그녀의 무성의한 질문에 심경서가 가볍게 웃었다.그는 화를 내지 않고 통창 쪽으로 다가가 바깥의 어둠을 살피다가 한참 뒤에야 말했다.“저 예전에 혈액병에 걸린 적이 있는데 16살 때 골수이식을 받았어요. 심씨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알아보니 골수를 기증해 준 사람이 이 도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보다 겨우 3살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여기까지 말한 심경서가 몸을 돌렸다.그의 얼굴은 야경 속에서 특히 희고 준수했다.그가 박연희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그녀를 찾고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결국 그녀를 찾아내고 그녀의 이름을 알았죠. 그런데 제가 그녀를 만나러 집을 찾아갔을 때 그녀의 오빠가 이미 그녀를 데리고 이사를 갔더라고요.”“박연희 씨, 저는 불자라서 인연을 강요하지 않아요.”“그래서 그 여자를 더 이상 찾지 않았죠.”“하지만 지난 2년 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한 도시에서 골수가 맞는 사람을 찾을 확률은 만분의 1도 안되는데... 어쩌면, 저랑 그 여자는 원래 혈연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소파에 앉아 있는 박연희의 얼굴이 창백했다.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박연희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박연희가 말했다.“모르겠어요.”심경서는 줄곧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원래 심씨 가
깊은 밤.박연희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는 그 날, 어머니가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꿈을 꾸었다.밤바람에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펄럭펄럭 휘날렸다.그녀의 어머니가 찢어지게 소리를 질렀다. “박정혁, 난 잘못한 게 없어. 모든 건 다 네 잘못이야!”“엄마...”박연희가 인형을 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녀는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가 한 발짝만 더 가면 엄마가 진짜 뛰어내릴까 봐 무서웠다...민지희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막내딸을 마지막으로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가 널 키워줄 거야. 연희야, 잘 있어.”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핏방울이 튀기고, 민지희의 옷이 바람에 날리며 그녀는 아주 멀리 날아갔다.“엄마!”박연희가 악몽에서 놀라 깼다.그녀의 등뒤는 모두 식은땀이었다...사방은 고요했고 조진범의 달콤한 숨소리만이 그녀의 마음속 고통을 소리 없이 어루만져 주었다.박연희는 천천히 돌아누웠다.그러나 심경서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쩌면 그들은 혈연관계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그의 말이....날이 밝아왔다.병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나자 박연희가 가서 문을 열었다.밖에는 조은혁이 서 있었다.박연희가 잠시 굳었다. “진범이가 입원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조은혁이 들어왔다. 그의 코트에는 한기가 묻어 있었고, 담배 냄새가 조금 났다. 그가 병상 가장자리에 앉아서 말했다.“아침에 집에 갔는데 아주머니가 진범이가 아프다고 하더라고.”진범이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조은혁은 박연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있었다.“방금 오면서 심경서를 만났는데. 그가 왜 병원에 있어? 병원에서 데이트하는거야?”그는 서슬 퍼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박연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제가 당신처럼 염치없는 사람인줄 알아요? 당신이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호르몬을 뿌리고 다니겠죠.”조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한참 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은 것 같았다.때마침 진
박연희는 그를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녀는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르고는 진범에게 링거를 맞혔다.바로 그때, 김비서가 푸짐한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그녀는 박연희가 조은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먼저 말했다. “아침은 제가 쏘는 겁니다. 제 돈 내고 산거예요. 진범 도련님을 굶겨서는 안되죠...맞죠?”박연희는 충동적인 나이를 이미 지났기에 그녀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았다.아이가 둘이나 있는 김 비서는 조진범을 잘 달랬다. 그녀가 조진범에게 맑은 죽을 퍼주며 아이를 달래자 녀석은 금방 아까의 잊어버리고 김 비서를 불렀다.“이모.”“그럼 이모가 먹여줄까? 엄마 아빠는 할 얘기가 있대.”김 비서가 조진범을 달랬다.조진범은 워낙 얌전한 데다 김 비서를 좋아했기에 가만히 앉아서 죽을 먹었다.조은혁과 박연희가 얘기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이 통로 끝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자 박연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진범이 내일 퇴원해요. 그러니 당신은 이제 오지 마요. 예전에도 애에게 관심 없었잖아요. 그러니 지금도... 당신 관심 필요 없어요.”조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단지 너희들을 걱정할 뿐이고, 남편과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한테 한 번쯤은 기회 줄 수 있는거 아니야?”박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대치했다.그러다가 결국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 이제 병원에 오지 않을게. 대신 넌 심경서와 만나지 마... 연희야, 이건 내 마지노선이야.”“그건 당신 마지노선이지 제 마지노선은 아니죠.”...그녀가 그를 봐주지 않자 조은혁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런 애송이가 뭐가 좋아?”박연희가 심경서를 떠올렸다.그녀가 눈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그는 좋은 사람이에요.”그말에 조은혁은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있다고 추측했고 당장이라도 미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와 박연희의 관계가 이렇게 팽팽하니 그는 박연희를 너무
병실 안.박연희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심지철이 방금 왜 그토록 추태를 부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비슷한 얼굴 때문인가... 아니면 누군가와의 일부 추억 때문인가?“엄마! 엄마!”진범이가 그녀의 소매를 살짝 끌어당기자 박연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아 올렸다.“엄마랑 바깥에서 산책하자.”그녀는 심경서에게 미안한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자 심경서는 진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점잖고 부드럽게 말했다.“형은 다음에 올게.”어느덧 애교를 부릴 줄 알게 된 진범이는 심경서의 손바닥에 대고 얼굴을 문질렀다.이윽고 심경서는 1층 마당에서 뒤늦게 심지철을 따라잡았다.“할아버지.”심지철은 예전부터 심경서를 매우 예뻐하고 애지중지한다.전에 무당이 이 아이는 몸이 허약하지만 운명에 따르는 재물이 많다고 해서 특별히 자기와 비슷한 이름을 지어 자신의 원기를 조금이나마 그에게 전하려고 한 것이다.하여 심경서의 부름에 몸을 돌린 심지철은 생에 처음으로 손자에게 심한 말을 하게 되었다.“심경서, 너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복도에 서 있는 심경서의 시공간은 마치 그 순간에 멈춰버린 듯 고요하고 아름다웠다.“저도 조은혁이 직접 찾아와 그 여자의 이름이 박연희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제가... 제가...”“그 입 닥쳐!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그 순간, 심지철이 한바탕 고함을 질렀다.심지철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자리를 떴고 심지어 심경서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명령했다....평화로운 오후 시간.심씨 저택의 작은 뜰에는 대나무 숲이 심겨 있고 바로 앞에는 정교한 작은 꽃집이 있다.심지철은 마호가니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있는데 그 앞 탁자 위에는 다 식어버린 차가 놓여있었다.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날 밤의 황당함을 회상했다.당시 그는 중년에 아내를 잃었지만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그에게 일을 부탁하려 하는 사람은 도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줄을
심지철은 누렇게 변한 신문을 가볍게 쓰다듬었다.그의 눈가에 천천히 눈물이 맺혔다.이 꼬맹이가 바로 그날 밤 생긴 아이란 말인가? 이 아이가 바로 그가 당시에 저지른 실수란 말인가?선심과 악이 한순간에 교차하고 짧은 황혼이 스침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진로에 대한 명성도 고려했다.심지철은 만약 자신이 이 딸을 품게 된다면 심씨 가문이 비바람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하늘 끝에 걸려있던 마지막 한 줄기의 주황빛 황혼도 자취를 감춰버렸다.그때, 최민정이 차를 들고 방에 들어서며 유리 등을 켰다.“아버님, 날도 어두워졌는데 왜 불을 켜지 않으십니까?”환한 불빛이 순식간에 방안을 밝게 비추고 심지철의 얼굴에는 아직 미처 거두지 못한 지난 일에 대한 깊은 근심이 어려 있었다. 이윽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 민정이구나. 서 비서는?”“서 비서는 집무실로 돌아갔어요.”최민정은 새 찻잔을 내려놓고 또 낡은 것을 거두며 우연히 그 해묵은 신문을 보게 되었다.“아버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심지철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며느리에게 나지막이 물었다.“어제 그 아이를 보러 가지 않았느냐? 어떤 것 같아?”최민정은 똑똑한 사람이다.하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내부인이 아니기에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고 자신의 본심에 따라 말을 꺼냈다.“저는 연희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호감도 있고요.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서가 이런 훌륭한 여성과 접촉하는 것도 상당히 좋다고 생각해요.”그러자 심지철은 손을 떼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는 깊이 사색하는 것 같았지만 또 무언가를 마음먹은 듯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심씨 집안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 심지철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그럼 됐어.”그는 새로 들여온 찻잔을 들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차 한 잔을 전부 다 마신 후 눈을 치켜들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친 눈빛 속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