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가까워졌을 때가 돼서야 조은서는 집안 고용인한테 발견되었다.대낮인데도 서재의 등불은 그대로 켜져 있었고, 조은서는 짙은 색 원목 책상 위에 가로로 누워있었다. 몸 위에는 검은색 가운이 대충 걸쳐진 채, 밤에 있었던 일로 생긴 여러 가지 자국들이 말라붙어있었다.그녀는 눈을 꾹 감고 있고 눈 주변에는 마른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그렇게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얼굴에는 이상하게 발그스레 달아올라 있었는데, 만져보니 몸은 완전 불덩이 같았다.고용인은 흠칫 놀라며 소리 질렀다.“사모님이 열이 나고 있어요!”나이가 지긋한 데다 보고들은 경험이 많은 고용인은 금세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하고 다급하게 유선우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에서는 아무 감정 없는 연결음 소리만 계속 들려오고 받는 사람이 없었다.그 시각에 유선우는 그룹 내 임원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매우 큰 프로젝트가 걸린 사안인데, 유선우는 개발하기로 결정했지만 임원진과 주주들이 대부분 보수적인 성향이라, 너무 저돌적으로 덤비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반수 이상이 반대표를 던졌다. 결국 이 문제로 10시간이 넘도록 회의하고 있었던 것이다.고용인은 연결이 안 되자 어쩔 수 없이 기사를 불렀다.사모님의 볼품없는 상황을 고려해서 고용인 둘은 조심스럽게 그녀한테 옷을 입히고 큼직한 외투로 몸을 감싸주었다. 그러는 과정에 그녀들은 사모님의 몸을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무나 섬뜩하여. 대표님이 너무 했다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이다.그녀들한테 부축되며 일어나는 순간, 조은서의 손에서는 어떤 물건이 흘러내렸다.두 개의 커프스가 어두운 카펫에 툭 떨어진 채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연인의 눈물처럼 슬픈 빛을 내며.......차에 오른 조은서는 의식이 불분명했다.고용인이 체온을 재어보니 40.2도였다. 그 숫자에 화들짝 놀란 고용인은 연거푸 유선우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연세가 든 고용인은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대표님 부부가
조은서, 네 꼴이 정말 우습구나!......YS그룹 대회의실 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저조했다.진 비서가 갑자기 문을 열고 다급하게 걸어와 유선우의 귀에 대고 낮게 몇 마디 전했다.유선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진 비서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이 몹시 심하다고 합니다. 몸에 상처도 있고요. 그리고... 입원할 때 약간 시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아마 백아현 씨가 VVIP 병실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습니다.”유선우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회의를 이만 마친다고 알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 비서가 그의 뒤에 종종걸음으로 바짝 붙어 따라가며 물었다.“차량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가시는 거예요, 대표님?”유선우는 답이 없었다.차에 올라타서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눈을 지그시 감았다.머릿속에는 책상 위에 누워있던 조은서의 모습만 떠올랐다. 그녀가 말한 말도 귓전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었다.‘유선우, 당신은 사람을 사랑할 줄 전혀 몰라!’그 말은 그에게 역린과 같은 것이었다. 무참하게 굴었던 것도 그 이유에서 그랬고.조은서한테 그는 정곡을 찔린 것이다.서둘러 병원에 달려갔지만, 임도영이 그녀를 못 보게 병실 앞을 가로막았다.임도영은 시뻘건 눈으로 쏘아보며 복도에서 낮게 울부짖었다.“왜요, 이제야 당신 와이프가 생각났어요? 유선우 씨, 씨발 마음에 없으면 그냥 떠나보내요! 이 떡 저 떡 주무르지 말고!”아무리 안타까워도 임도영이 제삼자의 신분으로 해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 날 대로 난 그는 서류와 수표를 손에 꺼내 들고 유선우한테 거칠게 내밀었다.“이건 당신과 체결했던 계약서랑 투자받은 400억짜리 수표예요. 다 돌려드릴게요! 내가 여기서 감히 한마디 하는데, 나 임도영이 집이고 뭐고 싹 다 팔아서라도, 재원 선생님한테 있는 돈 싹 다 끌어모아서 길거리에 나 앉는다 해도, 우린 당신한테서 인제 땡전 한푼 안 받을 겁니다! .
조은서는 아직도 고열이 나고 있었다.걸친 옷으로 숨겨지지 않는 군데군데 남아있는 퍼런 멍 자국들은 그녀의 하얀 살결 위에서 더 뚜렷이 보였다.그녀는 그런 몸을 겨우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나, 약지에 낀 반지와 귀에 걸린 다이아몬드 귀걸이, 그녀가 평소 자주 하고 다니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하나하나 빼서 전부 침대 협탁 위에 놓아두었다.그리고 단단한 눈빛으로 유선우를 쳐다보았다.“내가 입고 있는 속옷, 팬티도 다 명품이에요. 당신 돈으로 산 거죠. 그건 내가 당신 집안 문턱을 나설 때 벗어서 돌려드릴게요.”이 말을 듣는 유선우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그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녀와 둘이 한창 사이가 좋았을 때 그녀가 그의 귓전에 대고 속닥였던 그 말.‘선우 씨, 나 좀 야한 란제리 슬립이랑 속옷 여러 벌 샀는데, 나중에 한 벌씩 입어 보여줄까요?’당시 그는 주체하지 못하고 차 안에서 그녀와 키스를 나눴었더랬다.이제 와서 그녀는 그걸 모두 벗어 돌려주겠다고 한다. 그것들이 필요 없다고.무슨 심정인지 자신도 가늠이 안 되는 그가 병상에 있는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두터운 울 카펫 위에서 걸어오는 그의 발걸음은 고요했다.눈에 그녀의 얼굴만 오롯이 들어오는 거리쯤에 서서, 손을 뻗어 그녀의 매끄러운 얼굴을 가볍게 감싸쥐었다.“유 사모님, 그런 얘기 말고, 제일 중요한 걸 얘기해야지.”그의 손길이 다가오자 조은서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피하려 했다.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팠지만 비장했다.“난 이제 더는 유 사모님이 아니에요. 선우 씨, 똑바로 들어요, 난 당신과 이혼할 거예요. 어르고 달래든, 협박하든, 내 생각은 변함없어요. 당신 물건들은 필요 없고, 그저 오빠 소송 관련한 박 변호사 대리 지정 위임서랑 YS그룹의 2퍼센트 지분만 가지고 나갈 거예요.”유선우는 그녀의 갸름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그게 제일 값나가는 건데?!”조은서가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주기 싫으면 우리 시간 갖고 질질 끌어봐요, 어디.”유선우는 뭐라 말하려고 입을
조은서는 입안에서 쓴맛이 돌며 작게 웃음이 터졌다.“당신이 그렇게도 아끼면 저 여자랑 결혼하지 그랬어요?”그녀의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닿는 곳에 작은 약병이 하나 있었다.유선우는 그쪽에 다가가 약병을 가볍게 집어 살펴보았다.사후피임약.그는 고개를 돌려 조은서를 쳐다봤다.조은서도 그의 눈길에 마주하며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당신이 콘돔을 안 써서 내가 약 먹은 건데, 무슨 문제 있어요?”유선우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아니, 전혀!”말을 마치고 그는 고개를 홱 돌려 밖으로 향했다.그가 자기 옆을 지나가자 백아현이 흐느끼며 소리를 냈다.“선우 씨!”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그녀 이마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유선우는 문 앞에 있는 간호사한테 한마디 내던졌다.“처치해요, 저거 흉터 안 생기게. 죽을 때 보기 흉하니까.”병원 복도를 걸어가며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조은서의 그 한마디뿐이었다.‘어젯밤 당신이 콘돔을 안 써서 내가 약 먹은 건데, 무슨 문제 있어요?’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녀와 함께 눈 내리는 황혼 속을 거닐며, 껴안고 그녀한테 아빠가 되고 싶다고, 예쁜 딸아이가 달려와서 ‘아빠 퇴근했어요’를 외치며 안아달라고 해주는 모습이 너무 기대된다고 했었다.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사랑 할 줄 모른다고 한다.그건 그가 싫다는 얘기겠지.사랑하고 밉고를 떠나서 그냥 단순히 그가 싫어졌다는 얘기였다.뒤에 진 비서가 바짝 따라오며 조용히 말했다.“대표님, 임원들이 아직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유선우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먼저 돌아가라고 해. 다음 날 결정하자.”진 비서는 감히 말을 못 꺼내고 입을 꾹 다물었다.차를 직접 운전하여 유선우는 별장으로 돌아왔다.눈은 그쳤고, 별장 안에 히터도 빵빵하게 켜 놓았는데, 왠지 집안이 냉동창고같이 서늘하고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용인들은 감히 한마디도 못 한 채 눈치만 보고, 유선우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와 서재에 들어가 앉았다.책상에는 어젯밤의 흔적들을 여전히 찾아
이른 아침, 유선우는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백아현의 주치의가 그한테 말했다.“어젯밤 백아현 씨가 몸이 좀 안 좋았는데, 저희가 최선을 다해 치료해서 지금은 컨디션이 매우 좋습니다. 물론 이건 병원 의료진의 힘을 합친 것이므로 저 혼자만의 공로라곤 할 순 없겠습니다만.”유선우는 소파에 기대어 미간을 집고 누르며 물었다.“은서는 어떻게 됐어요? 밤새 열은 다시 안 난 겁니까?”저쪽에서 의사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 하고 있었다.이상한 낌새를 차린 유선우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은서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의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잘못 판단한 것일까. 대표님이 신경 쓰시는 분이 백아현 씨가 아니라 대표 사모님인 건가?더는 숨길 수 없다 생각되어 그는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사모님께서 반복적으로 고열이 나긴 했습니다만, 저희 의료진 인원이 부족해서... 아! 다행히 옆에 계신 도우미 아주머니가 물리적 해열도 잘해주고 해서 지금은 정신이 꽤 돌아온 것 같습니다.”그는 가능한 말을 얼버무리려 했다.하지만 이쪽 별장에 있는 유선우는 탁자에 있는 크리스털 재떨이를 세게 집어 던졌다.방금 자기가 뭘 들은 건지 믿을 수 없었다, 자기 와이프가 자기 병원에서 반복적으로 고열이 나는 데 물리적 해열을 하며 버텼다니.그녀가 얼마나 아팠을지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얼른 일어나서 가보려고 하는데, 카펫 위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다이아몬드로 된 커프스 한 쌍, 그것들이 고요하게 카펫 위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걸어가서 허리를 굽혀 그것들을 주어 보니, 거기에는 눈물 자국으로 의심되는 얼룩과 옅은 피가 묻어있었다. 원래는 눈부시게 반짝거려야 할 이것들이 얼룩에 가려져 광채를 잃었다.조은서가 산 물건인가. 그한테 주려고?그저께 밤에 그녀가 좀 일찍 돌아오라고 한 것이 이걸 주려는 것이었구나.섹시한 실크 가운까지 갈아입고 기분 좋게 해주려고 그를.그런 여자한테 기껏 했다는 말이 ‘네가 날 꼬시려고 입은 이
유선우는 목 안에 솜이 들어찬 것만 같았다.그녀를 다시 붙잡았을 때 원했던 게 바로 이런 거였는데, 그녀가 자기를 위해 이쁜 짓도 하고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거.하지만 그녀는 이젠 실망, 아니 절망에 절어있었다. 남편한테서 또 한 번 치 떨리게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커프스를 바라보며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이 커프스는 그녀가 유선우를 또 한 번 사랑했다는 증거였다. 이걸 살 때 기분이 얼마나 날아갈 듯했다면 그에 의해 책상 위에 짓눌렸던 기억이 얼마나 비참했다.그녀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그럴 일 다시 없을 거예요. 더는... 선우 씨, 우리 인제 그만, 그만해요.”피투성이가 된 마음을 안고 그녀는 짐을 챙겨 병실을 나왔다.임지혜가 퇴원 절차를 하러 갔다.병실은 텅 비었고, 조은서가 남기고 간 환자복과 속옷들만 남았다.그녀는 말한 대로 명품 속옷과 팬티들을 벗어서 유선우한테 돌려준 것이다.벗을 때 심지어 유선우를 피하지도 않았다.감정이 없는 로봇인 양 속옷들을 하나하나 벗어 임지혜가 사 온 값싼 옷으로 갈아입었다.울지도 않고, 조용하고 담담하게.옷을 다 갈아입은 그녀는 고요한 눈빛으로 말했다.“선우 씨. 당신과 부부가 못 된다고 하더라도, 원수지간은 되고 싶지 않아요. 인생 길잖아요. 피차 너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연락 기다릴게요.”그녀와 몸이 엇갈릴 때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잡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바람처럼 빠르게 스쳐 갔다.그녀가 병실을 나와 아래층에 다 내려간 후에야 유선우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침대 머리맡에 가지런히 개어 놓은 옷가지와 환자복, 속옷을 그는 멍하니 쳐다봤다.그한테 시집올 때 혼수만 몇 트럭은 됐을 텐데, 떠나갈 때는 팬티까지 벗어주고 갔다. 떠나려는 결심이 얼마나 굳건하길래 이러는가 싶었다.유선우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손바닥 안에 있는 커프스가 배겨
유선우는 무릎을 반쯤 꿇어 조은서를 끌어안았다.그녀의 온몸을 물들인 진붉은 피가 그의 손바닥을 흥건하게 만들었다.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안 들리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손안에서 그녀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체온이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마치 그한테 쏟아부었던 그녀의 감정이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처럼.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의 얼굴을 적시고 가슴도 적셨다.......YS병원 응급실에 의사, 간호사가 분주하게 드나들며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치료에 임하고 있었다.유선우는 수술실 입구에 서서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었다가 또 조급하게 고개를 들어 수술실 바깥에 켜져 있는 표시등을 빤히 지켜봤다.조금 전 외과의사가 한 말이 귓전을 계속 때리고 있었다‘대표님,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사모님 왼쪽 팔에 분쇄골절이 일어나서 앞으로 세밀한 동작을 요하는 일은 아마 못할지도 모릅니다.’무슨 뜻이지? 앞으로 바이올린을 켤 수 없다는 얘긴가?수술 들어가기도 전에 그녀한테 사형을 때린 거랑 별반 차이 없는 말에 그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조은서가 깨어나서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일까.생각하기도 싫었다.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전화를 걸었다.진 비서한테 전 세계 최고의 외과 서전을 모셔 오라 지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조은서의 왼팔을 무사하게 해야 한다고.저편에서 진 비서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대표님, 최고의 외과 서전은 우리 병원에 있습니다.”다만 그건 백아현을 위해 영입한 것이었다.......조은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병실 안에는 무드등 하나만 켜져 있었고, 사방은 고요하여 바깥에서 바람부는 소리가 가끔 들려왔다.밖이 많이 추운가보다.그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라 안 아픈데가 없었다.하지만, 다른 데는 여겨볼 새 없이 눈을 내리깔아 왼쪽 팔에 감긴 붕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분쇄골절.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온 그녀는 그것이 뜻하는 의미를 모를 리 없었
유선우의 다리가 무의식에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파들파들 떨리는 그녀의 입술에서 독한 말이 나왔다.“내가 미쳐 돌아... 당신 애인한테 손대게까지는 하지 말라고요.”......유선우의 목울대가 잘게 아래위로 움직였다.한참 후,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네가 피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난 걔 안 좋아해, 내가...”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건 사실 은서 너라고, 백아현과는 남녀 간의 정 같은 거 아니라고. 그래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덮쳐 구한 건 와이프인 네가 아니라 백아현이었다고... 그런 개새끼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숨이 죽은 우거지상을 하고 그는 병실을 나갔다.조은서와 이제 더는 가능성이 없다.끝이다, 이제.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낯설고도 미움만 들어찼다.미워해야지, 그게 맞았다.그녀는 이제 음악가로서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는데, 자기가 그 말도 안 되는 애인을 구한다고 그녀를 나 몰라라 했다.그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말, 그 말에 심술이 나 그녀를 괴롭히고 상처를 줬지만, 틀린 거 하나 없이 조목조목 맞는 말이었다.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 왔다는 것부터? 이익만 추구하고 권력 지상이 신조였던 그한테는 가족애 따위는 필요에 따라 희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진작에 그녀를 놓아주었어야 했는데...그랬으면 그녀는 더 잘 살았을 것이다. 이지훈한테 가던지, 허민우한테 가던지... 그는 축복을 해줬어야 했다. 그녀한테 빚 갚는 마음으로.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그녀가 자신을 원망만 가득 찬 눈으로 노려봐도, 여전히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갖고 싶었다.이것이 정말 남녀 간의 단순한 욕심뿐일까?그냥 욕심뿐이라면 왜 그녀의 우는 모습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익숙하고도 낯선 가슴속의 울림. 좋아한다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자기가 사실은, 좋아하는 것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구두 밑창과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