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영은 부정하고 싶었다.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눈가의 홍조가 그녀의 거짓말을 들춰내고 말았다. 결국, 진안영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 조진범의 단단한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헛수고였다. 조진범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다시 쥐어 잡더니 부드럽게 자신의 얼굴에 올려놓았다.이 순간, 그들의 사이에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를 향한 애틋한 시선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조진범은 손에 꽉 힘을 주더니 얼굴에 올려놓았던 진안영의 손을 천천히 내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손바닥에 벅찬 떨림이 전해졌다. 조진범의 심장 박동이었다.이윽고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설레는 말을 건네주었다.“이 결혼과 감정이 당신에게 불공평하다는 것은 알아. 나에겐 오래된 연애 생활이 있었지만 당신에게 난 첫 연인이겠지. 하물며 후에 이혼까지 하면서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어.”“하지만 안영아, 나에게 다시 한번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이미 한 번의 결혼생활을 거쳤으니 난 전보다 더 성숙해질 거고 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물론 우리 딸도 잘 돌보고 싶어.”...묵묵히 듣고 있던 진안영의 볼이 옅은 홍조를 띠었다.그녀는 애써 붉게 달아오른 볼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배고프진 않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이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셨으니 방금 김 비서가...”그러나 조진범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그 까만 눈동자는 성숙한 남자만의 섹시한 매력을 띄고 있었다. 진안영은 도무지 그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계속하여 눈을 피했지만 남자는 끈질기게 늘어지며 진안영에게 투정을 부렸다.“네가 답하지 않으면 나 안 먹을 거야. 입맛 없어.”진안영은 부끄러우면서도 괜스레 화가 나 일부러 퉁명스럽게 답했다.“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나 체면은 갖다버린 지 옛날이야.”아직 회복되지 않은 조진범의
며칠 지내다 보니 진안영은 조진범의 성격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진범이 퇴원하기 하루 전, 진안영은 아현이의 분유를 챙기기 위해 홀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아래에 차를 멈춰 세우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웬 부부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정지혜의 부모님이었다.진안영은 그들과 만날 일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김유리가 신분을 밝히고 진안영은 곧바로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온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정지혜 씨의 일이라면 저를 찾아오셔도 소용없어요. 검찰과 이야기해 보세요.”물론 정상철과 김유리도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하지만 그들은 조진범의 친필 서명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게다가 현재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으니 이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진안영뿐이었다. 진안영이 아무리 밉고 원망스러워도 현재는 진안영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하여 김유리는 한사코 진안영의 손을 끌어안고 잡아당기며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진안영 씨, 우리 지혜 제발 한 번만 봐줘요, 응? 안영 씨만 너그러이 넘어가 주면 조진범도 분명 합의해줄 거고 우리 지혜에게도 집행유예로 풀려날 기회가 있을 거란 말이야.”진안영은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김유리의 힘이 너무나도 셌다.애걸복걸 매달리던 김유리는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다.“우리가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부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요? 진안영... 당신만 아니었다면 내 딸이 이렇게 됐겠어?”두 사람의 소란은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운 좋게 이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여도 진안영에게 차려지는 이득은 없었다. 게다가 옆에는 정상철까지 지키고 있으니 빠져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그런데 그때,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검은 캠핑카 한 대가 그들의 옆에 멈춰서더니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각자 김유리와 정상철을 끌어내고 진안영을 향해 공손히 입을 열었
진안영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러자 조진범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무것도 아니긴. 우유가 다 흘러넘치고 있는데?”고개를 숙여보니 조진범의 말은 사실이었다.이윽고 조진범은 능숙하게 넘쳐난 물을 정리하고 손바닥을 모아 진안영의 잘록한 허리를 가볍게 감싸더니 그렇게 잠깐 묵묵히 포옹을 이어갔다.“보디가드의 말을 들어보니 정지혜의 부모님이 널 찾아갔다면서?”진안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상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진안영에게 당신도 엄마이지 않냐고, 그러니 자식을 위해서라도... 정지혜 역시 그들 부부의 심정이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차에 치인 건 조진범이지 그녀가 아니기에 진안영에게는 그들을 용서할 자격도, 조진범을 말릴 자격도 없었다.한편, 한때 진안영과 부부로 지냈던 사람으로서 진안영의 속내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실 조진범은 그녀의 눈빛과 동작 하나만으로도 진안영의 걱정거리를 알아차렸지만 굳이 폭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진범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일 B 시로 돌아가기 전에 정지혜를 만나보고 싶은데... 괜찮아?”그 말에 진안영은 본능적으로 답했다.“당신이 만나고 싶은 건데 왜 저한테 말해요?”그러자 조진범은 진안영의 어깨라인에 엎드려 가볍게 웃었다.“넌 내 아내잖아.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건데 당연히 아내한테 보고해야지... 혹여나 네가 화낼까 봐 걱정돼서 그래.”“저는 당신의 아내가 아닌데요.”“곧 내 아내가 될 거잖아.”...다른 사람이었다면 쓸데없이 자신감이 넘치는 비호감으로 전락하였을 테지만 조진범이 그 말을 하니 오히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요즘 두 사람은 확실히 예전의 감정을 되찾게 되었고 현재의 그들 사이에는 전과 달리 다정함과 사랑이 싹트고 있었다.진안영은 진득한 남성의 숨결에 휩싸여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그리고 함께 B시로 돌아가
이 비서는 믿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진아현은 이 비서에게 안아달라며 짧은 팔을 뻗고 휘저었다... 이토록 향기롭고 부드러운 녀석이 손을 뻗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번 안고 있으니 아이의 재롱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결국, 이 비서는 한밤중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이튿날, 조은혁 부부가 찾아와서 퇴원절차를 밟았다.조진범은 절차를 마치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아파트로 돌아갔다.아침 일찍 일어난 진아현은 엄마 품에 안겨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조진범은 고개를 숙이고 딸을 이리저리 건드리면서 진안영에게 말을 건넸다.“나 잠깐 나갔다 올게... 우린 오후 2시에 전용기를 타고 돌아갈 거야.”정지혜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한 진안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가볍게 불렀다.“조진범 씨.”그러자 문고리를 잡은 조진범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걱정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가을 햇살이 기분 좋게 두 사람을 비춰주었다.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30분 후, 조진범은 C시의 제1 구치소에서 정지혜를 만나게 되었다.한때는 약혼녀였지만 그것 역시 한때일 뿐 현재의 두 사람은 아예 다른 세상에 놓여있다. 조진범은 생사의 위협을 겪고 나서도 성숙한 모습에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기분 좋은 윤택함이 남성미를 더하고 있었지만 반면 정지혜는 비쩍 마른 몸에 푸석푸석한 머리까지 더하여 초췌하기 그지없었다.조진범을 바라보며 정지혜의 첫마디는 축하였다.조진범 역시 부인하지 않았다.“조진범 씨, 그럼 저는 대체 당신에게 뭡니까? 당신들 사랑의 징검다리인가요?”녹슨 난간을 사이에 두고 조진범은 묵묵히 정지혜를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나 그는 주머니에서 쭈글쭈글한 담배를 꺼내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았다. 희미한 푸른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서로의 눈을 흐렸다. 정지혜의 눈꼬
햇빛이 비좁은 철창으로 스며들어 얼룩덜룩한 그림을 그려냈다. 따스한 햇볕이 몸에 닿아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하지만 이로 하여금 남자의 덤덤함은 더욱 살을 찔렀다.정지혜는 잘 알고 있다. 조진범이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는 이유도 결국 진안영 때문일 것이라고. 조진범은 진안영과 B시로 돌아가야 하기에 정지혜를 놓아주는 것은 그에게 일도 아닐 것이다. 조진범에게는 진안영과 함께 누릴 수 있는 평생의 행복이 보장되어 있으니까.행복...그렇다. 그들은 평생 행복할 것이다.곧이어 정지혜는 고개를 들어 조진범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윽한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게 있어 정지혜의 존재는 그저 공적인 일일 뿐이었다.방금 조진범은 이미 명확히 말했었다. 정지혜와 조진범 사이는 그저 거래일 뿐이었다고.정지혜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가벼운 웃음 속에는 이 관계에 대해 석연함이 담겨 있었다. 정지혜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인생을 맡길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 남자 때문에 평생을 망칠 가치도 없었다. 다행히 모든 것은 아직 늦지 않았다. 변호사는 될 수 없지만 정씨 가문에는 아직 인맥이 남아있기에 정지혜에게는 여전히 찬란한 인생을 누릴 기회가 남아있다.“좋아요.”정지혜는 눈물을 훔치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조진범을 위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리라고....조진범의 합의서는 정지혜의 변호사에게 건네졌다.이는 변호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B시 JH그룹의 조 대표는 악독하고 악랄하기로 유명한데 이렇게 큰일에 합의를 해준다는 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따로 없다. 몇 번이고 확인해보았지만 확실히 조진범의 친필 서명이 확실했다.조진범이 떠나려는데 정지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그가 몸을 돌리자 정지혜는 한참 동안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마침내 한마디 내뱉었다...“잘 가요.”조진범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한참 후, 정지혜는 조진범이 답하지 않으리
진안영이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조은혁은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아주머니에게 와인잔 4개를 꺼내어 달라고 분부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모두가 와인을 반 컵 따라 장남의 퇴원을 축하하며 다시 모이게 된 가족을 위해 건배했다.단지 조진범의 몸 상태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실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그들 부자는 해가 뜰 때까지 술을 퍼마셨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행복했으니까. 이 세상에 아들 딸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조진범과 조민희 모두 이제 각자 가정을 꾸렸으니 남은 조우현도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유일한 골칫거리라면 이제 저 멀리 해외에 떨어져 있는 조은희뿐이다. 이번에 조진범이 중상을 입은 사실도 그들은 조은희에게 알리지 않았다...와인 한 잔이 목구멍을 타고 기분 좋게 배 속을 채웠다.이제 일 년만 지나면 조은희도 돌아올 것이다.막내딸 생각에 조은혁은 저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어올랐다.그때, 조진범이 고개를 쳐들었다. 와인잔에는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고 순식간에 조진범의 얼굴은 이미 엷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진안영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조진범은 그녀의 손끝을 꼭 잡아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이까짓 술은 날 넘어뜨릴 수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조진범이 JH그룹을 인수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미룰 수 없는 접대도 많았고 거절할 수 없는 술도 수도 없이 많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던 나날이 얼마나 많았던지...진안영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다시 망설였다.조은혁 부부도 자리에 있고 더욱이 그녀는 아직 조진범과 공식적인 부부가 아니기에 쉽사리 꺼낼 수 있는 화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 속내는 조진범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하여 그는 빈 잔을 아주머니에게 건네주며 가볍게 웃었다.“더 마시면 우리 와이프가 삐질 것 같아서요.”이 말은 조진범 자신도 덕을 보면서 진안영의 체면도 차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방 밖에서 조은혁은 또다시 아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진범아, 서둘러라. 전용기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조은혁이 언성을 높이자 조금 전까지 뜨거웠던 열기도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처음부터 장난으로 시작한 스킨쉽이었기에 조진범은 순순히 진안영을 놓아주고는 그녀의 말캉한 얼굴을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우리 이제 집에 갈까?”집...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진안영은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창밖의 따스한 햇볕을 바라보다 보니 이 상황에서 그들보다 중요한 건 존재하지 않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녀는 조진범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두 시간 후, 그들은 이전에 살던 별장으로 돌아갔다.1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진안영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조진범은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여기가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서 살자.”그러자 진안영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이곳도 좋아요.”별장 안의 고용인들은 그들의 짐을 옮기느라 바삐 돌아쳤고 김씨 아주머니는 아현이를 안고 더욱이 손을 떼지 못했다. 워낙 사람 손을 잘 타는 아이이기에 아현이는 순순히 김씨 아주머니의 품속에 안겨 깔깔거리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아이의 재롱에 심장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김씨 아주머니는 애써 이성의 끈을 꽉 붙잡으며 뽀뽀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혹시나 아이에게 세균을 옮길까 걱정되어서였다.한편, 진안영은 조진범의 팔짱을 끼고 현관으로 향했는데 몇 걸음 더 가 남자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맞잡더니 깍지를 꼈다...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진안영은 순간 멈칫했지만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조은혁 부부는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조은혁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에서 떠다니는 흰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눈앞의 별장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바로 그들 맏이의 집... 정말 좋았다. 이곳이 바로 진범이의 집이다.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진 박연희는 남편의 어깨
조진범은 이미 세 시간 내내 회의를 했는데 두 시간을 더 한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그는 아직 환자란 말이다.진안영은 고용인에게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한 뒤, 직접 숄을 어깨에 걸치고 조진범이 먹을 알약과 따뜻한 물 한 잔을 쟁반에 올려두어 직접 서재로 들고 갔다.2층 서재에는 골초들이 한곳에 빽빽이 모여있어 방안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리고 그곳에서는 JH그룹의 고위층 인사들이 한창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같은 시각, 조진범은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다루는 정수는 바로 그들이 서로를 제약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다. 조진범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결코 좋은 지도자가 아니다.안은 계속되는 언쟁에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때, 문 앞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 고용인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조진범은 기분이 언짢아 고개를 숙여 이 비서에게 문을 열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안영일 줄은 이 비서 역시 생각지도 못했고 게다가 그녀는 손에 약 접시까지 받쳐 들고 있는지라 이 비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조진범에게 말을 건넸다.“대표님, 사모님이십니다.”‘진안영이라고?'그 말에 조진범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졌다.심지어 진안영이 들어올 때, 그는 주위의 담배 연기 때문에 진안영이 불쾌해할까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진범의 모습에 고위층 인사들도 즉시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어 통풍을 시켰다.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안영은 서재에 들어온 뒤, 코를 찌르는 담배 연기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순간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진안영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끓인 물을 조진범에게 건네주고 손수 알약을 건네주며 다정하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약 먹을 시간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하루 세 번 시간은 8시간 간격으로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 그랬어요... 참, 방금 임 의사가 전화해서 당신 건강 상태를 물어보시길래 저도 말씀드렸어요.”진안영
진석은 조은희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눈치챘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조은희의 얼굴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너와는 결혼 첫날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지! 게다가 방금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은 아마 어려울 거야. 너에게 더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해.”조은희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진석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참 묘했다!예전에는 그저 감정에서 비롯된 관계였고 항상 예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로 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조은희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나도 처음이야! 결혼 첫날 밤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배워둘게.”조은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책을 보거나 동영상을 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진석의 품에 몸을 맡겼다.햇살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쯤, 진석은 조용히 일어나 집을 떠났다. 조은희의 집이었기에 그 잠깐의 온기는 이미 지나쳐버린 상태였다...그들은 예전에는 갑자기 헤어졌지만, 지금 다시 함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 조은희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확실히 진석과 다시 함께하게 되었고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있었다.그들은 연애를 건너뛰고 바로 결혼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조은희는 조금 망설였다...조진범은 레드 와인을 손에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적어도 아이도 일찍 낳고 그 후엔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테니.’진안영은 말했다.“아이를 낳으면 둘만의 시간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요?”조우현이 답했다.“다시 만난 연인들은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한다고요. 그게 아니면 후회할 거예요. 많은 시간을 허비할 테니까요. 사실 처음에 부소연과 결혼해야 했어요.”오빠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은희는 그 말
진석은 예의 있게 조은혁을 호칭했다.“아버님.”조은혁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볍게 기침하며 조은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먼저 올라가라. 네 엄마가 네가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마 할 얘기가 있을 거다.”조은희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고 진석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밀면서 말했다.“먼저 올라가.”조은희는 그제야 움직였고 조은혁 옆에 다가갔다. 집에서 막내딸인 조은희는 가장 애교가 많았고 조은혁을 안고 인사한 후 아쉬운 듯 올라갔다.조은혁은 작은 딸을 안자 화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진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앉아서 얘기해.”진석은 즉시 자리에 앉아 조은혁에게 차를 따랐고 조은혁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눈치가 빠르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버님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합니다.”조은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여전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은희와 만나고 싶다면 지금은 조건은 없어. 하지만 요구 사항은 몇 가지 있네.”진석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은혁은 진석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했지만, 하는 말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첫째, 결혼을 하게 되면 은희는 너의 집에 가지 않고 결혼식과 생활은 모두 B시에 있어야 해. 둘째, 조씨 가문은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결혼 때 충분한 축의금을 줘서 편하게 생활하게 할거야. 하지만 네가 결혼 후 벌어들인 모든 돈은 은희와 공동 재산으로 해야 하며 은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어. 또한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 은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이 조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그렇지만 진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조은혁은 더 이상 그를 어렵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석을 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사실 그도 같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진석이 처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몇 달 후 가을 10월쯤.방유설이 주연한 《청홍》이 대히트를 치며 영화 글러브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시상식 당일 날 조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모여 방유설을 응원하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다음에 받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계속 전했다. 방유설은 매우 감동했다. 진안영이 갓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마친 후 이렇게 와서 자신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방유설은 진안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난 이미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을 받았어요.” 진안영은 원래 차분한 성격인데 방유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우현이랑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 활발해져! 우현이가 사람을 잘 챙긴다고 네 아주버님이 자주 칭찬하셔.” 방유설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진안영과 얘기했다. 조은희는 사탕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평소에 연기하면서 다이어트해도 이럴 때는 사탕 하나 드세요. 나중에 여우주연상 받고 저혈당으로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방유설은 사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우유사탕이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았다. 조은희는 살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언니예요! 다른 여배우들보다 언니가 훨씬 이뻐요.” 조우현은 여동생을 흘깃 보며 말했다. “이건 외모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외모만 보고 결정되면 긴장감이 없잖아.” 조은희는 달콤한 사랑을 떠먹은 기분에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때 최우수 남자주연상이 발표되었고 다른 영화의 남자 주연이 받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박도원이었다. 그는 국내에 없어서 촬영 감독이 대신 상을 받으며 발언 중 여러 번 방유설을 언급했다. 갑자기 설원 커플 팬들이 들썩이며 이 장면을 모든 플랫폼에 퍼뜨렸다. 설원 커플 팬클럽에서 활동 중인 팬들은 102만 명에 달한다. 그렇게 인기 있는 커플이었다. 조우현은 아내의 직업을 존중하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저 코를 머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