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쓰라림을 억누르려 애썼지만, 결국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자조하듯 중얼거렸다.“이게 내가 원한 건가?”배진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는 온지유와 여이현이 수년간 겪어온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온지유가 여이현에게 모든 것을 바친 것처럼, 여이현 역시 온지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향해 선택한 길은 이렇게 엇갈리고 있었다.이 순간, 배진호는 어떤 말이 적절할지 알 수 없었다.온지유는 점점 격앙되었다.그녀는 처음엔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이내 자조적인 웃음으로 바뀌었다.“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라고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 속에 감춰진 분노와 슬픔이 얼굴에 드러났다.배진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대표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온지유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이 대표님이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 아닌가?’그러나 배진호는 알지 못했다. 온지유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여이현의 재산이 아니라 그의 곁에서 함께하는 것이었다.온지유가 바란 것은 그와 함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지, 그가 모든 것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홍혜주는 그런 온지유를 보며 마음이 아파져 왔다. 그녀는 침대 옆에 있던 휴지를 꺼내 온지유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했다.“지유 씨, 지금 산후조리 중이잖아요. 울면 안 돼요. 이렇게 흥분해서도 안 되고...”배진호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여이현의 결정이었다. 그 역시 여이현의 모든 생각을 헤아릴 수는 없었다.배진호는 수년 동안 여이현 곁에서 일하며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속마음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다만, 여이현이 매우 위험한 일을 앞두고 있었고, 그 위험이 너무 커서 온지유를 그 고통에서 보호하고 싶었던 것만은
여이현은 떠나기 전에 홍혜주에게 모든 일을 미리 지시해 두었다.홍혜주는 여이현의 지시를 따르는 것 외에도, 온지유와의 인연 때문에 그녀를 잘 돌봐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몇 분 후, 배진호가 병실을 떠난 뒤로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혜주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병실 분위기는 조용히 가라앉았다.그런 온지유의 모습을 보고 홍혜주는 걱정이 앞섰다.“지유 씨, 말 좀 해봐요. 이렇게 있으면 너무 무서워요.”“괜찮아요.”온지유는 힘들다고 울기만 하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잠깐 바람 쐬러 다녀올까요? 아니면 친구들을 부를까요?”홍혜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온지유는 침대 위에서 옆으로 돌아누우며 나지막이 말했다.“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알겠어요... 푹 쉬세요.”홍혜주는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의 작은 소파에 앉았다. 처음에는 잠깐 나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온지유가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와 온지유의 관계를 생각하면, 온지유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홍혜주는 온지유가 침대에서 일어날 때까지 다섯 시간이나 기다렸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다.온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배가 고파요.”다섯 시간 동안, 온지유는 침대에 누워 자는 듯 마는 듯한 상태였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인생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과거를 떠올릴 수 없다면, 더 이상 억지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잊고 흘려보내고 지금부터 현재를 잘 살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래! Y국으로 가야 해!’홍혜주가 작은 테이블을 펴고 보온 용기에 담긴 음식을 차례대로 꺼내는 동안, 온지유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혜주 언니, 전 Y국으로 가야겠어요. 언니가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언니한테서 호신술을 배워야겠어요. 가르쳐 줄 수 있나요?”‘내 독은 Y국이 관련 있고, 나
“대표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배진호는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온지유는 배진호가 여이현과 연락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잠시 침묵했다.여이현이 배진호에게 연락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거리를 두려 한 듯했다.지선율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유 씨, 저번에는 못 갔잖아요. 이번에는 우리 드라마가 또 상을 받았어요. 내가 문라이트 레스토랑에 큰 룸을 예약해 뒀으니까, 같이 가요!”온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멀리서 들려오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제가 좋은 타이밍에 왔네요.”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시선을 돌리자, 공아영이 꽃다발을 안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지선율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같이 가요.”그때, 홍혜주는 눈치 빠르게 배진호가 돌아가려는 것을 보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불러세웠다.“휴대폰 좀 보여줘요.”모두가 놀란 눈으로 홍혜주를 쳐다보았다.배진호와 온지유가 눈을 마주치자, 상황의 흐름이 명확해졌다.배진호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휴대폰을 꺼내 잠금을 해제하고 통화 기록을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온지유는 배진호의 통화 목록을 훑어보았다. 맨 첫 번째에 있는 번호는 여이현의 것이었고, 그와 통화한 기록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통화 시간은 겨우 몇십 초에 불과했다.온지유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다시 배진호에게 돌려주며 차갑게 말했다.“꽃은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처리해요.”배진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망설였다.‘이 많은 꽃을 어떻게 처리하라고...’그는 난감한 마음에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지선율이 웃으며 끼어들었다.“꽃 두 다발인데 뭐 어때요? 집에 갖다 놓거나,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길거리에서 한 송이에 500원씩 팔든가...”배진호는 더욱 당황스러워졌다.‘그래도 사모님의 집에 갖다 놓는 게 낫겠지. 버린 걸 대표님께서 알게 되면 화를 낼 거야..’...온
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가슴이 미친 듯이 아파져 왔다.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것은 죽은 아이였다. 아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어떤 기억들은 떠오르는 순간 그녀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다.“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온지유는 장다희 옆에 서 있었고, 장다희는 그녀의 이상함을 가장 먼저 눈치챘다. 온지유의 붉어진 눈을 보고,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장다희는 재빨리 온지유를 따라갔다. 화장실에 들어서자, 온지유가 세면대에 손을 짚고 흐느끼는 모습을 보았다.온지유의 소리 없는 울음소리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 감정이 장다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지유 씨...”장다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온지유는 장다희가 따라온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에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다희 씨, 전 지금 모든 걸 가졌잖아요. 명예도 얻고, 여러분의 축하도 받고... 나도 알아요.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렇게 기쁠 수가 없죠? 너무 공허해요. 여기가 너무 텅 빈 것 같아요...”온지유는 가슴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모두가 부러워하던 부부였다. 하지만 지금 여이현은 그녀 곁에 없었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장다희는 온지유의 깊은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뿐만 아니라 나민우를 잃었고, 인명진도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열 달 동안 품었던 아이를 잃은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온지유의 마음속 빈자리는 단순한 공허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무감각하게 살아가면서도, 죽을 수 없는 현실이 더욱 답답하게 다가왔다.장다희는 온지유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지유 씨, 지유 씨가 지금 가진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갈망하는 것들이에요. 어떤 이별은 진정한 잠시일 뿐이
온지유는 장다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치 목구멍에 날카로운 칼날이 들어있는 듯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모든 것이 그녀 앞에 너무나도 명확하게 펼쳐져 있었다.몸속에 있던 KA48 독약은 더 이상 발병하지 않았고, 여이현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한 이유도 너무나 분명했다.노승아와 그녀의 기억 속 혼란, 그리고 죽은 아이까지... 여이현은 처음에 아이가 자신의 것인지도 몰랐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크게 화를 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아이를 받아들이고, 그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려 했다.여이현의 깊은 사랑은 그의 모든 행동에 담겨 있었다.그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난 후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온지유가 안전하길 바랐고, 그녀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기 위해 떠난 것이다.하지만 온지유 또한 그가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장다희는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지유 씨도 잘 알잖아요. 여 대표님이 지유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해냈는지. 지유 씨가 무너지면, 대표님이 모든 걸 바쳐서 해온 일들이 다 헛수고가 될 거예요.”장다희는 그저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온지유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온지유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온지유가 겪은 어려움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녀가 독이 몸에서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장다희의 말은 온지유에게 힘을 주려는 의도였다. 그녀는 온지유가 다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장다희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저도 이현 씨가 저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했는지 알아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가 저에게 직접 말해주는 거예요. 그의 아픔과 고통을 나와 함께 나누는 거라고요!”온지유는 장다희를 부드럽게 밀쳐냈다. 장다희의 따뜻한 포옹은 위로가 되었지만, 온지유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물러설 수는 없다는 사실을...장다희는 온지유의 말을 이해했다.‘온지유가 진정으
“언니,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그녀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 곳에 있던 모두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그러던 중 홍혜주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안심하세요 여러분,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꼭 지유 씨를 지켜 드리도록 할게요.”이는 그녀의 직책이자 여이현이 맡긴 임무이기도, 더군다나 인명진의 바람이기도 했다.장다희, 지선율, 그리고 공아영은 모두 술에 취해 쓰러져 버렸다.백지희만 술을 마시지 않았다.온지유는 술을 못 마셨고 홍혜주도 계속 깨어있을 필요가 있었다.“지희야, 이따가 모두를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 난 이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온지유는 백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둘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백지희는 온지유의 말을 이해했다.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옥 목걸이를 풀어 온지유의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지유야, 몸조심해.”“그래.”둘은 그렇게 헤어졌다.하지만 온지유는 곧바로 Y국으로 떠나지 않았다.위험한 곳으로 떠나기 전 먼저 홍혜주와 호신술을 배우기로 했다.홍혜주는 온지유가 Y국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온지유의 몸 상태를 생각해 홍혜주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연습 상대를 맡았다.온지유는 감각이 좋아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3일간의 노력 끝에 온지유는 드디어 홍혜주를 매트 위에 넘어뜨릴 수 있었다.홍혜주는 특수 전사급 실력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홍혜주가 일부러 양보한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이 정도 실력이면 온지유도 누가 오던 쉽게 당하지 않을 실력은 갖춘 거나 마찬가지였다.“지유 씨, 이렇게 배우는 게 빠를 줄을 몰랐어요. 대단한 각오예요.”홍혜주도 온지유의 노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온지유가 조직을 빠져나오지 않았더라면 이 실력으로는 그곳에 있던 모두를 쉽게 제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다행히도 온지유는 그곳에서 탈출했다.조직의 잔인함과 훈련에서 겪은 고생은 평생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홍혜주는 생각을 멈췄다.그 순간, 온지유가
한편 배진호 쪽은...여진 그룹에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여이현의 부재로 그룹의 수많은 일들은 배진호의 몫으로 되었다. 그 덕에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배진호였다.여이현의 번호가 휴대폰 액정에 나타나자 배진호는 번뜩 눈이 뜨이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대표님!”“삑... 삑... 삑...”미세한 전파 소리가 울렸다. 여이현 쪽의 신호는 좋지 않은 듯 했다.Y국이 있는 곳은 세 나라가 이어진 삼각지대였다. 총격전이 밥 먹듯 일어나는 곳이다.그런 환경 속에서 여이현은 이미 여러 날을 버텨오고 있었다.“배 비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최근 지유는 잘 지내고 있나요?”휴대폰 안에서 여이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여이현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온지유였다.배진호는 솔직하게 전달했다.“사모님은 산후조리를 잘 마치시고 퇴원 후에는 친구들과 모임도 가지셨습니다. 지금은 집에서 홍혜주 씨와 호신술을 배우고 계십니다...”홍혜주한테서 전달받은 내용이었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배진호는 급히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딱딱한 기계음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지금 거신 전화는 당분간 통화 하실 수 없습니다...’신호가 끊겼다.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배진호의 얼굴에는 무거운 표정이 드리웠다.마음속은 불안으로 가득했다.잠시 고민을 한 끝에 결국 배진호는 여이현이 자신에게 내렸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Y국.여이현 자신도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Y국에 온 지 보름이 넘지만 나민우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아직 시 중심에 들어서지도 못했다.머지않은 곳에서 미사일과 저격총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용경호와 성재민은 반쯤 부서진 벽 위에 서 있었다.용경호는 대나무 장대 위에 안테나를 묶어 매달고 있었다.그들이 있는 구역은 이미 물과 전기가 다 끊긴 상태였다.“으악!”용경호가 벽 위에서 미끄러 떨어지며 손에 들고 있던 안테나가 두 동
온지유는 매일 어플을 확인하고 있었다.마음속에 아직도 한치의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똑똑’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온지유는 노크 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그러자 다음 순간 홍혜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홍혜주는 물을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오다가 온지유의 방안에 아직 불빛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찾아온 것이었다. 혹시 아직도 잠에 들지 못한 건지 걱정이 되어 와 봤더니 과연 온지유는 아직 깨어 있었다.“왜 아직도 안 자는 거예요? B항구에서 Y국까지 가려면 적어도 20시간은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지금 자두지 않으면 못 버틸 거예요.”퍼스트 클래스의 티켓을 사두긴 했지만 아무리 좋은 좌석이라도 푹신하고 널찍한 침대보다는 불편할 것이다.홍혜주는 시종일관 온지유의 몸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온지유는 가볍게 웃었지만 웃음 속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잠이 오지 않았다.비행시간이 긴 것도, Y국 상황이 안 좋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여정에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하지만 온지유는 두렵지 않았다. 그곳에는 여이현이 있었기 때문에.홍혜주는 온지유의 휴대폰 액정에 비친 내용을 보았다.순간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이 아파왔다.그 아이는 죽은 지 이미 며칠이나 지났다. 하지만 온지유는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홍혜주는 어떻게 온지유를 위로해 줘야 할지 몰랐다.“지유 씨.”홍혜주는 온지유를 안고 가볍게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 줬다. 마치 예전에 조직에서 온지유가 자신을 안아줬던것 처럼.“알고 있어요. 그래도 전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두려워하지 않을 거고요.”그 한마디에는 온지유의 확고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그날 밤, 홍혜주는 온지유 곁을 지키며 함께 있었다.온지유는 침대에 누웠지만 결국 잠에 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홍혜주는 온지유를 대리고 경성 국제 공항으로 출발했다.두 사람은 체크인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배진호가 두 사람이 Y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샀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