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남자의 숨결이 너무도 익숙해서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뒤돌아보지 않은 이유가 더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녀는 몸에 걸쳐 있는 외투를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어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병원은 교회보다 더 많은 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게 잘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들어보니까 나도 이미 당사자가 되어있더라고요.”담담한 말투에 서글픔과 탄식이 가득 차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꼭 안았다.그의 행동에 그녀는 물론 그도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손을 놓지 않았고 그녀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고 잠시 후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벽이 지금 이 순간 허물어진 것 같았다. 은서우는 마음속의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느꼈었는데 오늘에서야 깨닫게 된 것 같아요.”“가끔은 내가 위선적인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어요. 그저 마음속으로만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아니요. 당신은 착한 사람이에요.”“자신을 의심하지 말아요. 이미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충분히 다 했으니까.”병원 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은서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잠시 기대어 있었다.다음 날, 그녀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불행을 많이 보게 되고 때로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타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본업에 충실했다. 열심히 일해야만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거니까. 그녀는 여전히 병원 일로 많이 바빴지만 매일 최소 한 시간은 시간 내서 염정아를 보러 갔다. 염정아의 기분을 풀어주고 그녀가 자살하려는 생각이 다시
은서우는 염정아 엄마의 태도에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그녀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염정아는 그녀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의 환자였다. 힘들게 마음을 다잡은 환자가 또다시 우울해지는 모습을 보고 펄쩍 뛰지 않을 의사가 어디 있겠는가?한편, 며칠 사이 안색이 밝아졌던 염정아는 엄마의 방문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은서우는 염정아의 엄마를 끌어내려고 결심했다. “다른 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긴 병원이에요.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환자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고요. 이곳에서는 의사만 그럴 수 있는 겁니다.”그녀의 태도는 아주 강경했다. 염정아의 엄마가 약자에게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게 한없이 약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완강한 태도에 염정아 엄마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잠시 후, 씩씩거리던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염정아의 엄마가 떠난 뒤, 은서우는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염정아를 위로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인지 염정아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는 은서우가 했던 말을 가슴에 새겼다.“서우 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 다시는 바보 같은 짓 안 해요. 언니 말이 맞아요. 저들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그래. 울지 마. 많이 울면 눈만 나빠져.”은서우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병실을 나선 후, 은서우는 난감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프런트 데스크 직원의 말에 의하면 염정아의 엄마가 떠나기 전에 이후의 병원비를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이에요?”은서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자기 자식한테 이렇게 대하는 부모도 있다니. 이렇게 독하게 굴 거면 애초에 뭐 하러 자식을 낳은 건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자신의 카드로 일단 병원비를 계
“2억 정도는 될 거예요.”담담하게 말하는 염정아의 말에 은서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초래해 보였다. 염정아도 그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 염정아의 집안이 보통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는 회사의 대표이고 어머니는 디자이너이다. 그런데 염정아가 어떻게 그저 평범한 집 딸이겠는가?마음이 복잡했지만 결국 카드를 그녀에게 돌려주었다.“안 돼. 얼마가 됐든 받을 수 없어. 의사가 환자한테서 뇌물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게다가 이 안에 2억이 넘는 돈이 있다며? 이렇게 많은 돈은 더더욱 받을 수가 없지. 이거 받으면 나 해고당하고 감옥에 갈지도 몰라.”그녀는 일부러 심각하게 말했다.하지만 단순히 염정아한테 겁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뇌물을 받는다면 정말 그렇게 되는 거니까. 깜짝 놀란 염정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드를 건네받았다. “그럼 나중에 돈이 부족하면 말해요.”은서우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순간, 염정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더 생긴 듯하다. “어쨌든 난 성인이야. 스무 살도 안 된 너한테 도움까지 받아야 하겠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그녀가 염정아를 위로했다.얼마 후, 간호사가 들어와서 새 링거를 바꿔주었다.은서우가 병실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염정아의 엄마가 또 와서 소란을 피우는 줄 알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화려한 옷차림의 한 할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걸어왔고 그 옆에는 중년 남자가 따라왔다.할머니는 중년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쓸모없는 것. 네가 직장을 잃을 뻔한 게 그게 왜 정아 탓이야?”“그리고 네 마누라도 그래. 정훈이만 친자식이고 정아는 친자식 아니야? 이 늙은이도 남녀 구별을 안 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다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자기는 뭐 여자 아니야?”
염정아는 할머니가 온 걸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할머니,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아이고, 우리 손녀. 얼굴 좀 봐 봐. 왜 이렇게 야윈 거야? 너 아비가 널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거지?”할머니는 말을 하면 옆에 있는 중년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염정아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미안해. 아빠가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염정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제는 더 이상 바보 같은 소녀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믿지 않을 것이다.이 세상에 친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이건 분명 핑계였다. 은서우의 말처럼 자신을 버린 사람에게는 잘 보일 가치가 없는 것이다. 염정아는 옆에 있는 아버지를 무시한 채 할머니의 팔을 이끌고 은서우의 앞으로 다가갔다.“할머니, 은 선생님이 그동안 절 돌봐주셨어요.”“저한테 필요한 것들도 많이 챙겨주셨고요.”“할머니도 선생님한테 너무 고마워. 선생님 덕분에 우리 손녀가 이리 무사한 거잖아.”은서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염정아의 아버지가 옆에서 얼마나 난처한지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업자득인 걸 누구를 탓하겠나. 할머니는 은서우한테 염정아의 건강 상황에 대해 물었다.“그리 물으시는 건 정아가 퇴원해도 되는지 그게 궁금하신 거죠?”그 말에 할머니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선생님을 속일 수가 없다니까요. 정아를 데려가고 싶어요. 병원이 집에서 멀기도 하고 정아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선생님도 알잖아요.”“병원에 있으니 내가 정아를 돌볼 수가 없어요. 정아 부모한테 돌봐달라고 해도 아마 꿈쩍도 안 하겠죠. 그래서 정아를 데려가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요.”은서우는 바로 동의했다.“정말 그래도 돼요?”“네. 며칠 병원에 있으면서 몸이 많이 좋아진 상태예요. 다만 심한 운동은 안 됩니다. 다른 건 주의할 게 없어요.”사실 은서우도 염정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기를 바랐다.열아홉, 한창 풋풋한 나이가 아닌가? 앞으로
“갔니? 난 네가 그 아이를 옆에 두고 돌볼 줄 알았어.”물을 마시던 은서우는 갑자기 사레가 들렸고 연속으로 기침을 했다.“그게 무슨 소리야? 다 큰 애를 내가 왜...”성인이 된 여자아이를 입양한다니?은서우도 받아들일 수 없을뿐더러 염정아도 원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 때는 연적 사이었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혜성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어떤 면에서 보면 이혜성도 참 대단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물컵을 들고는 책상 옆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자신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연구 프로젝트를 맡았다며?”은서우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내가 누구야? 이 병원의 소식통 이혜성이야 나.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얼른 자세히 말해 봐.”은서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아직 결정된 건 아니야. 며칠 뒤에 본사로 가서 시찰한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언제쯤 결정이 될 건지...”말을 하면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도 이런 연구 프로젝트를 맡았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매우 특별했다. 프로젝트 보고서를 받았을 때 깜짝 놀랐었고 그 후로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인명진에게 물어보기도 좀 그랬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한테 이런 일로 방해하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이미 다 정해졌거든. 네가 요즘 염정아 때문에 바쁘니까 너한테 말을 안 한 거야.”이혜성이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언제?”은서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안 됐어. 병원에서는 이미 준비하고 있고. 해외로 간다고 하던데 원장님한테 말해서 나도 좀 데려가면 안 돼?”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일단 한번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그녀는 바로 원장 사무실로 향했다. 하도 급히 뛰어간 탓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안에 있던 남자는 한창 바쁘게 일을 하는 중이었고 인기척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은서우가 미리 알게 되었지만 뭐 상관없었다.그 말에 은서우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그럼 오늘 바로 들어가서 짐 챙길까요?”“그래요. 그리고 이건 상대 쪽 본사의 자료예요. 한번 봐 봐요.”인명진은 자료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자료를 살펴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화성 제약... 외국계 기업 같지 않아 보이는데요.”“외국계 기업은 아니에요.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한 회사이고 작년에 회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탓에 현재 회사의 일은 사위가 맡고 있어요.”“부회장도 있잖아요.”그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부회장은 오래전부터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신경 안 써도 됩니다.”은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안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상대방이 만든 특효약이 정말 그렇게 신기한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화성 제약은 이미 몇십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다.오래전부터 약품을 개발하고 있었고 얼마 전, 그들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 항암제를 연구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암은 현대 의학에서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일부 양성과 초기 단계의 암만이 치료될 가능성이 있었고 말기 암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병원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몇 달 사이에 은서우는 암 환자를 많이 봐왔다. 현재 암 발병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알았을 때 그녀는 너무 흥분되었다.“돌아가서 봐 봐요. 내일 오후에 공항으로 갈 겁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서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왜요?”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인명진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한 사람 더 데려갈 수 있나요?”다음 날 오후, 은서우가 캐리어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인명진은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캐리어를 건네받았다.옆에 있던 이혜성은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은 채 이리저리
말하면서 이혜성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고개를 돌리는데 은서우가 인명진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남자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인 채 눈앞의 여자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은서우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한눈에 봐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같은 시각,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방금 본 우스운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보안 검사를 할 때, 한 승객이 우유 한 병을 들고 왔더라고요. 신선한 우유 같아 보였는데 보안 요원이 한 모금 마시라고 했어요.”“그런데 그 사람이 그 큰 병에 든 우유를 단번에 다 마신 거예요. 다 마시고는 계속 해서 딸꾹질을 했어요.”인명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곧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었다.“얼른 자리에 가서 앉아요. 짐은 내가 올려둘게요.”고개를 끄덕이던 은서우는 그제야 이혜성의 생각이 난 건지 사방을 둘러보았다.“이제야 내 생각이 난 거야? 난 두 사람이 날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 줄 알았네.”뒤에서 이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우는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혜성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따가 맛있는 거 사줄게.”이혜성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인명진과의 관계에 대해 은서우한테 묻지 않았다. 묻더라도 비행기에서 내린 뒤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뜻밖에도 은서우의 자리가 바로 인명진의 자리와 붙어있을 줄은 몰랐다. 반면, 이혜성의 자리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자리에 착석하고 나면 더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은서우는 뒤를 돌아보았고 비행기가 아직 이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도에는 아직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혜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상하다. 왜 저 뒤에 앉아 있지?”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그가 흠칫하더니 시선을 피했다.그 모습을 봤더라면 아마 그가 켕기는 것이 있다는 걸 눈
당연히 일어날 수 있었다. 비행기 멀미가 난 것이지 장애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이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처음 봤다.가까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 같아서는 손을 뻗어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혼자 할 수 있어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따뜻한 물에 약을 먹었다.약 효과는 그리 빨리 나타나지 않았다. 약을 먹고 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다시 누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토하고 싶어서 누워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그도 그녀가 지금 많이 괴롭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힘이 없는 은서우를 보며 그가 다정하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졸음이 쏟아졌던 그녀가 어렵게 눈을 떴다.“담요는 어디서 난 거예요?”아주 부드러운 담요였다. 덮고 나니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승무원한테 부탁했어요. 서우 씨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요.”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녀는 이내 눈을 감았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비행기는 아직 착륙 전이었다. 주위가 어두컴컴한 것이 커튼이 닫혀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살짝 움직이는데 옆에 있던 사람도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뜬 그가 멍해 있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물었다.“깼어요? 괜찮아요?”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담요를 위로 당겨주었다. 이미 여러 번 해본 사람처럼.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렸다. 두 자리가 딱 붙어 있었고 그녀가 자고 있을 때 그도 잠을 청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저도 모르게 붙어서 잠을 잤다.마치 한 침대에 있는 사람들처럼.그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