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먹여주기까지 하면 정말 어색할 것 같아서 그랬다.물론 이런 걸 원하는 여자들도 있겠지만 은서우는 그게 싫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파스타를 다 먹어버렸다.아마도 엄청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러나 허겁지겁 먹지는 않았다. 옆에 있는 인명진과 똑같이 품위를 유지하면서 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언뜻 보면 판박이였다. 거의 다 먹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그가 휴지 한 장을 집어 입가를 닦아주었다.“묻었어요.”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냥 입가만 닦아주려고 했는데 자신의 향한 그녀의 시선이 너무 강해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였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불편한 것 같아요. 접시 좀 치워줄래요?”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의자에 누워 방금 그의 행동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일부러 그런 걸까? 아니면 내 착각인가?’비행기는 저녁 9시가 다 되어서 착륙했다. 그들은 공항에서 바로 호텔로 향했다.다행히 인명진이 오기 전부터 묵을 호텔을 예약해 놓았고 은서우와 이혜성이 묵을 방은 인접한 방이었다. 이혜성은 기분 좋은 눈치였고 은서우는 왠지 모르게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옆방이니까 밤에 너한테 가기도 편하겠다.”이혜성은 은서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친구의 웃는 얼굴을 보니 은서우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자신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룸 안으로 들어와 짐 정리를 하는데 속옷을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은 걸 발견했다. 순간, 멍해졌다.‘지금 사러 가야 하나? 이 시간이면 다 문을 닫았을 텐데.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그렇고... 해외는 배송이 빠르지가 않으니.’침대 앞에 서서 한참
좁은 욕실 공간에 뜨거운 물이 가득 차올랐고 은서우는 빌린 속옷 세트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즈가 커서 입으면 헐렁했고 어깨끈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아무리 끈을 조절해 봐도 여전히 몸에 맞지 않았고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속옷을 사야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서 그녀는 목욕 가운을 두르고 욕실을 나섰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어깨에 걸쳐져 있었고 물방울이 머리끝을 따라 미끄러져 카펫 위로 떨어졌다.머리를 닦고 있을 때, 갑자기 초인종이 맑게 울렸고 그녀는 흠칫했다.‘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혜성인가?’그녀는 슬리퍼를 끌고 빠른 걸음으로 문 앞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인명진이 꼿꼿한 자세로 문밖에 서 있었고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목욕 가운을 단단히 감싼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긴장한 탓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원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쳐다보던 그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가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건네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급하게 짐을 싸느라고 아마 깜빡하고 못 챙긴 물품이 있을 것 같아서요. 마침 한 벌 더 준비했으니까 아마 쓸모가 있을 거예요.”그녀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확인해 보니 속옷이었고 사이즈는 평소 그녀가 입던 사이즈였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어색한 분위기에 발가락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꺼냈다.“정말 고마워요. 방금 혜성이한테서 빌렸어요.”약간 얼굴을 찡그리던 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마음속으로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고 생각했다. 은서우가 한발 먼저 남에게 도움을 청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받아요. 하나 더 준비해도 나쁠 게 없잖아요. 내일 사러 나가기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혜성 씨의 사이즈가 당신
이혜성은 그제야 하품을 하며 입을 열었다.“알았어. 10분만 기다려.”두 사람은 곧 호텔을 나와 길을 따라서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이국적인 거리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다양한 가게들로 가득했다.마침내 길모퉁이에서 속옷 가게를 찾았고 은서우는 이혜성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 속옷을 골라 입어본 후 마침내 몸에 맞는 속옷을 샀다.계산하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인명진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전화기 너머로 낮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 있어요? 호텔 로비에 나왔는데 서우 씨가 안 보여서요. 오전에 화성 제약 쪽 사람들과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약속 시간 거의 다 되었어요.”은서우는 황급히 대답했다.“뭐 좀 사러 나왔어요. 금방 들어갈게요. 죄송해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이혜성을 끌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고 뛰어가면서 이번 미팅이 자신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은 이미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저 멀리 로비 중앙에 서 있는 늘씬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갔고 숨이 차오르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정말 죄송합니다.”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표정이 환해졌다. 붉어진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니 마음속의 불쾌함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괜찮아요. 얼른 차에 타죠. 밖에 차 대기 중입니다.”이혜성은 뒤를 따라가면서 몰래 인명진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평소에는 침착하고 냉담해 보였는데 왜 서우와 연관된 일이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거지? 재미있네...’세 사람은 황급히 차에 올라탔고 바로 화성 제약으로 향했다.차 안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은서우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프로젝트 자료를 되짚어 보면서 컨디션
인명진의 표정이 진지해지고 수시로 옆에 있는 은서우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며 약 성분을 토론하고 있었다. 임상시험에서 발견한 문제에 관해서도 토론을 하며 호흡이 척척 맞았다.옆에 앉아 있던 이혜성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곤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아 묵묵히 화성제약에서 나온 직원들의 안색을 관찰했다.그러다가 무심코 그녀는 임성한의 비서가 인명진과 은서우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그들의 열띤 토론 끝에 초보적인 방안이 점차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임성한은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오늘 토론 덕에 그래도 뭔가 성과를 얻은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끝내요. 다들 쉴 사람은 쉬고 점심 식사할 사람은 식사하고 오후에 다시 구체적으로 연구해 봐요.”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임성한은 일부러 은서우 앞으로 다가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말했다.“은 선생님은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세요. 뭐든 척척 이해하시고 앞으로의 협력에서도 티키타카를 기대하고 있을게요.”은서우는 겸손하게 웃기만 할 뿐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임성한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점심이 되자 건물 최상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선 퀄리티가 높은 음식들이 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프로젝트에만 신경이 쏠렸던 은서우는 입맛이 없었던지라 대충 몇 젓가락 집어 먹다가 내려놓고 다시 연구 자료를 훑어보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이 나직하게 말렸다.“너무 열심히 해도 안 좋으니까 쉬면서 해요. 그래야 오후에 다시 연구할 힘이 나죠.”은서우는 고개를 들자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느덧 오후가 되고 회의는 계속 이어갔다. 임상시험 표본 앞을 둘러싼 그들은 중요한 부분만 계속 관찰하며 토론했다. 토론이 길어질수록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고 분위기가
그러나 임상시험에서 제일 중요한 단계로 들어갈 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실험 표본에 갑작스럽게 혼동이 생기면서 여러 개 팀의 데이터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곧이어 실험 기기가 고장이 나는가 하면 수리 기사님은 실험 기기 고장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은서우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매일 실험실에 박혀 두 눈이 충혈될 때까지 자료를 훑어보았고 인명진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조절해보려고 애썼다.이날은 은서우가 혼동이 생긴 표본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다급하게 들어온 인명진의 표정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이건 분명 우연이 아닐 거예요. 누군가 일부러 우리 임상시험을 망치고 있는 거예요. 반드시 배후에 있는 그 사람을 잡아서 우리 프로젝트에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막아야 해요.”은서우는 입술을 틀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다가 최근에 방문한 적 있는 직원부터 하나씩 배척해보기로 했다. 말하고 있던 와중에 임성한이 몇몇 비서들과 함께 들어오며 미소를 지었다.“인 원장님, 은 선생님. 지금 상황에 관해 전해 들었어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인명진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임 대표님, 갑자기 문제들이 줄줄이 생겨나서요. 뭔가 의심스러워서 그러는데 임 대표님 직원들을 하나씩 조사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히 우리의 프로젝트에 더 큰 문제라도 생기면 안 되는 거잖아요.”임성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헛웃음 지으며 말했다.“하하, 당연하죠. 이미 하나씩 조사해보고 있으니까 뭔가를 발견하면 두 분께 꼭 먼저 알려드리죠.”말을 마친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기 옆에 서 있는 비서를 보았다. 비서는 빠르게 시선을 피하며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예민한 은서우는 당연히 비서의 그런 모습을 포착했고 인명진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무언가 알아낸 듯한 모습이었다.임성찬과 그들이 떠나자 인명진은 나직하게 말했다.“비서를
인명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러네요. 그대로 혜성 씨 덕분에 병원 일도 많이 해결되고 고맙네요. 이번에 돌아가면 확실히 제대로 보답을 해야겠어요.”말을 하면서 그는 손을 들어 은서우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두 손은 따스했다.“가요. 돌아가기 전 시간이 조금 남으니까 내가 아는 좋은 곳으로 가요.”은서우는 그에게 끌려다니며 궁금한 얼굴로 보았다. 인명진을 쫄래쫄래 따라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어느 한 오래된 거리로 왔다. 길가엔 아기자기한 물건을 파는 가게가 많았고 창가엔 독특한 디자인과 문양이 새겨진 예쁜 옷들이 전시되었다.인명진은 고개를 돌려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은서우를 보았다.“그동안 프로젝트로 엄청 바쁜 시간을 보냈잖아요. 쇼핑할 시간도 없이 바삐 보냈으니까 한번 골라봐요. 마음에 드는 거 전부 골라도 돼요. 서우 씨한테 예쁜 옷 선물하고 싶어서 그래요.”그의 말에 은서우는 얼굴이 붉어졌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옷가게로 들어갔다.인명진은 옆에 서서 옷 고르는 은서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은서우는 연하늘색의 원피스를 고르더니 거울 앞으로 가 몸에 대보았다. 치맛자락이 휘날리고 거울 보며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은 감탄했다.“정말 예뻐요. 서우 씨한테 아주 잘 어울려요.”그의 칭찬에 은서우는 민망해져 웃었다. 이번엔 심플한 셔츠를 몇 개 골랐다. 인명진은 하나씩 전부 담아주며 전부 계산했다.가게에서 나온 인명진의 두 손엔 쇼핑백이 가득했지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모아 전부 다 들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행여라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놓칠까 봐 말이다.길을 걷다가 우연히 빈티지 사진관을 발견한 은서우는 빤히 보았다. 사진관에 걸린 사진들은 전부 나무로 만든 액자 속에 있었고 세월의 흔적이 있어 보였다.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인명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우리도 들어가서 몇 장 찍
“이 옷 이상하지 않아요?”인명진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며 눈을 반짝였다.“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으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 한복은 서우 씨를 위해 만든 것처럼 너무 잘 어울려요. 이따가 사진에서도 아주 잘 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사진사도 옆에서 호응해 주었다.“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이 차림새는 완전히 아가씨한테 찰떡이니까. 이따가 포즈만 잘 해주면 분명 엄청난 사진들이 나올 거예요.”은서우는 그제야 결심을 내리고 우물쭈물 배경 앞으로 갔다. 인명진도 한복차림이었고 평소보다 더 우아한 분위기였다.곧이어 그들은 몇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콘셉트도 바꿔가며 찍었다. 커플티를 입고 익살스러운 표정도 짓기도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셔터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카메라에 찍힌 것은 전부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들이었다.두 사람이 사진관에서 나왔을 때 하늘엔 어느새 예쁜 노을이 졌다. 사진을 보고 있는 은서우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인명진은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보다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아무리 봐도 실물이 훨씬 더 낫네요. 그래도 나중에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오늘을 떠올리면 되겠네요.”은서우는 주먹으로 그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누가 보고 싶어 한다고 그래요.”말과는 달리 그녀는 사진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호텔로 돌아온 은서우는 여전히 사진을 찍으면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떠올리고 있었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낮에 산 새 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수시로 사진을 꺼내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인명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쇼핑백을 정리한 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팔을 올렸다.“오늘 하루 피곤했을 텐데 얼른 씻고 쉬어요.”인명진은 일부러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따듯한 온기가 귓속으로 불어 들어오자 은서우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버렸다.
매캐한 연기가 코와 입안으로 들어오자 괴로워진 은서우는 숨쉬기가 힘들었다. 설령 젖은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다고 해도 구조를 기다리기까지 아마 버티기 힘들 것이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인명진은 그녀를 품에 꼭 안고 있었고 불씨가 두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자신의 뒤로 밀었다. 그가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그런 그의 행동에 코끝이 찡해 난 은서우는 너무도 울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만약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이라면 너무도 짧게 주어진 것 같았다.점점 더 세게 타오르는 불길에 그녀는 언제 정신을 잃을지 몰랐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이대로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설령 지금 드는 생각이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결국 입을 연 은서우는 갈라져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다음 생에도 명진 씨랑 알콩달콩 살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에서 자신을 꽉 잡는 힘이 느껴졌다. 인명진이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고 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의미로 자신을 끌어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헛소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화가 난 그의 모습에 은서우도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새카만 연기 때문에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주위의 온도는 점점 더 높아져 흘러내린 땀이 옷을 흠뻑 적셔버렸다.귓가엔 어디서인지 모를 뭔가가 타는 소리가 자꾸만 시끄럽게 들려왔다. 만약 그녀 혼자만 이 불길 속에 있었다면 아마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을지도 모를 테지만 그녀의 옆에는 인명진이 있었다.인명진이 단단한 몸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그녀가 느끼던 공포도 처음보다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은서우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던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물줄기가 뿌려지는 것이 느껴졌다.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억센 물줄기에 꺼져버렸고 몇 명의 소방관이 달려왔다. 그들은 그렇게 구출된 것이다. 마음
최지후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여자가 순수하고 귀여웠다. “여울 씨 생각은?”여울은 그가 최주하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최주하에 비하면 어리석고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손에 잡히다니, 너무 시시한데...’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떨며 치마 뒤에 있는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반쯤 내리자 매끄럽고 하얀 등이 훤히 드러났고 그가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말고.”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으니 여기서 대충 관계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 나갔다. 한편, 최주하는 핸드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최지후가 이렇게 쉽게 걸려들 것이라는 건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사생아의 신분이니 좋은 여자를 만나봤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최지후 자신보다 최지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캐슬 호텔.룸 안, 문지원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숙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약속된 시간을 이미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미팅을 하기로 했던 협력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얼마 후, 문 앞에서 자물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차가운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 대표님,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네요.”문지원은 바로 고개를 들었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협력은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사람이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문지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말을 하면서 문지원은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문지원 씨, 저랑 협력하고 싶은 거예요?”
방 안에 들어온 여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예외 없이 눈빛 속에 욕망이 가득했다.최지후는 여자들을 한번 스쳐본 후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여자들은 흔히 보던 사람들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그는 차가운 태도로 매니저를 쳐다보며 물었다.“이게 네가 말한 새로 온 애들이야?”술집 매니저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지후는 그의 중요한 고객이었기에 실수하면 큰일 날 수 있었다.“도련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술집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최지후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매니저의 얼굴에 확 뿌렸다.“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감히 이런 것들로 대충 넘기려고?”술집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얼굴을 닦으며 더욱 기를 쓰고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바로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 드릴게요.”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802호 맞나요?”최지후는 그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 눈길이 멈췄다.여자는 흰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었지만 자연스러우며 청순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하고 긴장된 기색이 가득했다.그녀는 신임임이 분명했다.최지후는 술집 매니저를 놓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에 데려왔어야지. 왜 이제야 데려왔어? 좀 더 일찍 데려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술집 매니저는 최지후가 눈앞의 여자를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가 데려온 사람 중에 이 여자가 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최지후가 만족하면 그게 제일 중요했다.그는 재치 있게 말했다.“좋은 건 항
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최주하가 너무 많은 금액에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주하가 말을 끊었다. 그는 다소 불쾌한 듯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2억만 있으면 뭐든지 할 거야?”여자는 그 말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뭐든지 할 수 있어요.”최주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 도와줄 수는 있어. 그런데 너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해.”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서 최주하의 옷을 풀려고 손을 뻗었다.최주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뭐 하는 짓이야?”그의 눈에 드러난 혐오감에 여자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이건 서로가 알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여자의 의도는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여자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주하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이 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확실히 네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야.”그렇게 말하며 최주하는 휴대전화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주하와 어느 정도 닮아 보였다.“내 동생이야. 내 동생을 유혹해서 그 옆에 남아있는 거야.”최주하는 간결하게 설명했다.여자는 혼란스러워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꺼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목표는 분명 최주하였기 때문이다.최주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어.”“저 할게요. 하겠습니다.”여자는 곧장 마음을 다잡으며 간절히 말했다.최주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실망하게 하지 마.”최주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휴대전화에는 1억이 입
그 여자가 최주하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사실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최주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 클럽에 오는 사람들은 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네가 진짜 누군가를 붙잡고 싶으면 밖에서 아무나 찾으면 돼. 나는 네 구세주가 아니야. 더군다나 남 도와줄 마음도 없어.”하지만 그 여자는 최주하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은 이미 불쾌하게 굳어 있었다.그제야 그는 여자가 검은색 깊은 V넥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여자는 정말 마른 체형이었지만 피부는 하얗고 매력적이었다.최주하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얼굴을 힘껏 잡았다. 여자는 그의 힘에 의해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최주하는 여자의 작은 얼굴과 그 눈에 맺힌 흐릿한 눈물을 봤다.“내 앞에서 불쌍한 척하지 마.” 최주하는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그를 놓지 않았다.최주하는 처음에는 여자를 발로 차서 밀어낼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그를 더 꽉 붙잡았다.그는 잠시 생각하다 결국 여자에게 손을 쓰지 않기로 했다.“놔.”최주하는 다시 차갑게 말하며 그녀에게 경고했다.그녀는 여전히 놓지 않았다.그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대표님 저도 정말 어쩔 수 없어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절대 이렇게 비참하게 대표님한테 매달리지 않았을 거예요…”사람은 정말 절박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다.하지만 최주하는 구세주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돈이 부족하다고 그를 찾아온다고 해도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가 모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했다.“나한테 부탁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스스로 노력하면 되지. 필요하면 일자리 소개해 줄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소개 해 줄 수 있어.”최주하는 그녀를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지석훈처럼 결혼 압박을 받는 사람도 아니어서 여자를 붙잡고 연극을 할 필요도 없었다.여자는 최주하가 꿈쩍도
지석훈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야, 너 지금 말하는 게 완전 원망 가득한 아낙네 같아.”“원망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거든? 왜? 사실도 말하면 안 돼? 지석훈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최주하는 억울하다는 듯 따져 물었다.지석훈은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그와 최주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주하는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지석훈이 자신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으니 최주하도 똑같이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 했다.최주하는 어차피 죽을 일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게다가 설령 죽게 되더라도 그건 지석훈이 화병으로 죽은 것이었기에 최주하와는 아무 상관 없었다.지석훈은 덤덤하게 말했다.“참나. 인간이 너처럼 뻔뻔하기도 쉽지 않겠다.”“내가 뭘?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설마 너 다른 사람이 사실을 말하는 것도 막으려는 건 아니지?”최주하는 태연하게 말했다.지석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술이나 마실 거면 마시고 아닐 거면 꺼져.”최주하는 그가 진짜로 화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단둘이 술을 마시는 건 심심했던지라 결국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불렀다.잠시 후 외모가 각기 다른 여자들이 방으로 들어왔고 금세 두 사람을 둘러쌌다.그러나 지석훈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피했다.“너 혼자 실컷 놀아. 난 간다.”말을 마치자마자 지석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이제는 최주하가 지석훈을 붙잡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지석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대표님 더 부를까요?”“꺼져.”최주하는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그는 단순히 지석훈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사람들을 불렀던 건데 정작 당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그러고 나니 혼자 남은 이 상황이 너무도 어이없었다.차라리 다 보내고 혼자 있기만도 못했다.그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한 여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넌 아직도 안 가고 여기서 뭐
게다가 그는 문지원과 단순히 역할놀이를 하는 것뿐 애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최주하의 생각은 달랐다.“보아하니 아직 진짜 사귀는 건 아닌가 보네. 이렇게까지 데려와서 보여줬는데 뭘 그렇게 머뭇거려? 이 여자라면 너랑 잘 어울려.”최주하는 평소엔 장난을 많이 쳤지만 지금은 석훈이 솔로를 벗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워낙 일에 치여 지내고 이상한 소문도 많이 도는 사람이니 옆에 누군가 있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최주하는 아예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네 생각이 어떤지 나도 알아. 근데 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그렇게 집착해서 얻는 게 뭐야? 나중에 너만 힘들어질 거라고. 정말 그렇게 버티다 버티다 몸이라도 망가지면 어쩔 건데?”“인명진 좀 봐.”최주하의 말에 지석훈은 자연스럽게 인명진을 떠올렸다.인명진과 함께 수술하면서 그의 집중력과 실력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가 온지유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의 감정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인명진은 온지유를 위해 정말 헌신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은서우와 이어졌다.결국 놓지 못할 사람도 없고 못 넘을 고비도 없는 법이었다.지석훈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알아. 하지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어.”“그럼 언제 할 건데?”최주하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지석훈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내 결혼 계획 물어볼 시간에 네 계획이나 먼저 세워.”“난 금방 할 건데? 괜찮은 사람 만나면 바로 결혼하고 아니면 그냥 혼자 지내면 되지. 근데 말이야 문지원 너랑 꽤 잘 어울려 보이던데? 더 이상 밀어내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게 어때? 그러다 진짜 혼자 남으면 어쩌려고?”최주하의 농담에도 지석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혼자면 혼자인 거지.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잖아.”지석훈은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 발견하고 묻어줄 거라고 생각했다.아무도 발견 못 해도 썩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더더욱 상관없었다.어차피 죽고 나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지원은 정말로 일부러 강윤슬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지석훈은 그녀의 말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빤히 그녀를 보았다. 문지원의 얼굴엔 진지함과 단호함만 담겨 있었다. 그는 확실히 문지원이 일부러 찾아갔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그와 문지원의 관계를 알게 될 거고 경성의 모든 사람들도 어떻게든 문지원을 도와주려고 할 것이니 말이다. 문지원의 야망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솔직하게 말해줄 줄은 몰랐다.그녀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강윤슬이 일부러 문지원을 찾아온 것이 맞았다. 그 순간 지석훈은 대충 뭔가를 짐작하게 되었다.그러나 문지원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어서 말했다.“혹시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하지 마세요. 전 제 주제를 알고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석훈 씨와 석훈 씨 아버지는 이미 충분히 저를 도와주고 있어요.”그녀에게 정말로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티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그녀와 지석훈은 결국엔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주건 때문에 그녀는 더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알았어. 그럼 협력 업체를 만나러 온 거야?”지석훈은 더는 그녀와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네.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아보려고 왔어요. 저희 직원들이 일을 너무도 잘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부족한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보려고 온 거예요.”직원들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주고 있는 덕분에 주문도 밀리지 않고 제때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파산해버린 회사를 버리고 도망쳤을 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직원들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지석훈은 입술을 달싹였다.“내가 사업하는 내 친구들을 소개해줄게. 내 친구들이라면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최근에 제약 회사에서도 뭔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한번 생각해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것이 지석훈이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임혁수의 안색이 더 일그러졌지만 강윤슬은 난감하기만 했다. 예전에 지석훈이 자신에게 어떻게 애절하게 사랑 고백했었는지 전부 지켜보았었다. 그런 지석훈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오히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강윤슬은 그런 그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석훈아, 말 좀 가려서 해. 사람을 존중해야 할 줄 알아야지. 우리가 언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그래?”강윤슬도 어느새 미간을 찌푸렸다. 임혁수는 계속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지석훈, 너 지금 윤슬이를 갖지 못했으니까 질투하고 있는 거잖아. 너 그런 모습 추해. 애초에 네가 강아지처럼 꼬리 살살 흔들며 멋대로 윤슬이 옆에 있었던 거였으면서.”임혁수의 날카로운 눈빛과 말에 지석훈은 정곡을 찔리게 되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전의 지석훈은 한 마리의 개처럼 강윤슬의 주위만 맴돌았고 비굴하고도 애절하게 사랑 고백하면서 잘해주었지만 결국 지석훈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지만 강윤슬은 단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고 임학수의 전화 한 통에 강윤슬은 바로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심지어 강윤슬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임혁수의 편을 들어주었고 자신과 혈연관계도 없는 임혁수의 딸까지 받아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석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맞아. 내가 개처럼 꼬리를 흔들었지. 인정해. 그런데 너희들이 한 건? 너희들은 이 세상이 너희들을 둘러싸고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니야?”“네가 질투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임혁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문지원은 더는 뻔뻔한 두 사람을 봐줄 수가 없었다.“만약 우리가 정말 그런 거라면 틀린 말도 아니겠죠. 하지만 이미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데 뭔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안 그래요?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 함께 살아요. 다른 사람 해칠 궁리는 하지 말고요. 두 사람의 피해망상증이 다른 사람에게도
문지원은 반드시 회사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회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방법이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돈을 많이 버는 것.그녀는 프로젝트를 더 많이 받으려고 나온 것이지만 강윤슬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윤슬은 연분홍색 정장을 입고 있어 청순하고 아름다운 매력이 있었다. 비록 강윤슬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강윤슬이 했던 말을 지금도 잊지 않았다.이번에 우연히 만나도 문지원은 당연히 먼저 인사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강윤슬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강윤슬의 두 눈엔 여전히 그녀를 깔보는 듯한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석훈이랑 같이 있지 않네요?”다른 사람이 듣기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문지원이 듣기엔 이상하게도 말 속에 가시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저희 인사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설령 강윤슬과 지석훈이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의 사이에서만 통할 뿐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강윤슬의 모습은 꼭... 일부러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먼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강윤슬은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그렇죠.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죠. 하지만 석훈이 봐서라도 인사를 해주는 거예요. 석훈이 도움으로 문정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하고 있잖아요.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하죠.”문정 그룹의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도 지석훈의 공로였다. 만약 지석훈이 여이현을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아마 끝까지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알고서도 지석훈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고 강윤슬의 말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강윤슬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맞아요. 아주 좋은 방법이죠. 그런데 그쪽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강윤슬 씨, 혹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문지원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강윤슬이 대꾸하기도 전에 누군가 끼어들며 강윤슬의 편을 들어주었다. 목소리를 들은 문지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