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의 표정이 진지해지고 수시로 옆에 있는 은서우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며 약 성분을 토론하고 있었다. 임상시험에서 발견한 문제에 관해서도 토론을 하며 호흡이 척척 맞았다.옆에 앉아 있던 이혜성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곤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아 묵묵히 화성제약에서 나온 직원들의 안색을 관찰했다.그러다가 무심코 그녀는 임성한의 비서가 인명진과 은서우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그들의 열띤 토론 끝에 초보적인 방안이 점차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임성한은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오늘 토론 덕에 그래도 뭔가 성과를 얻은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끝내요. 다들 쉴 사람은 쉬고 점심 식사할 사람은 식사하고 오후에 다시 구체적으로 연구해 봐요.”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임성한은 일부러 은서우 앞으로 다가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말했다.“은 선생님은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세요. 뭐든 척척 이해하시고 앞으로의 협력에서도 티키타카를 기대하고 있을게요.”은서우는 겸손하게 웃기만 할 뿐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임성한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점심이 되자 건물 최상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선 퀄리티가 높은 음식들이 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프로젝트에만 신경이 쏠렸던 은서우는 입맛이 없었던지라 대충 몇 젓가락 집어 먹다가 내려놓고 다시 연구 자료를 훑어보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이 나직하게 말렸다.“너무 열심히 해도 안 좋으니까 쉬면서 해요. 그래야 오후에 다시 연구할 힘이 나죠.”은서우는 고개를 들자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느덧 오후가 되고 회의는 계속 이어갔다. 임상시험 표본 앞을 둘러싼 그들은 중요한 부분만 계속 관찰하며 토론했다. 토론이 길어질수록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고 분위기가
그러나 임상시험에서 제일 중요한 단계로 들어갈 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실험 표본에 갑작스럽게 혼동이 생기면서 여러 개 팀의 데이터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곧이어 실험 기기가 고장이 나는가 하면 수리 기사님은 실험 기기 고장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은서우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매일 실험실에 박혀 두 눈이 충혈될 때까지 자료를 훑어보았고 인명진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조절해보려고 애썼다.이날은 은서우가 혼동이 생긴 표본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다급하게 들어온 인명진의 표정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이건 분명 우연이 아닐 거예요. 누군가 일부러 우리 임상시험을 망치고 있는 거예요. 반드시 배후에 있는 그 사람을 잡아서 우리 프로젝트에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막아야 해요.”은서우는 입술을 틀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다가 최근에 방문한 적 있는 직원부터 하나씩 배척해보기로 했다. 말하고 있던 와중에 임성한이 몇몇 비서들과 함께 들어오며 미소를 지었다.“인 원장님, 은 선생님. 지금 상황에 관해 전해 들었어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인명진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임 대표님, 갑자기 문제들이 줄줄이 생겨나서요. 뭔가 의심스러워서 그러는데 임 대표님 직원들을 하나씩 조사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히 우리의 프로젝트에 더 큰 문제라도 생기면 안 되는 거잖아요.”임성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헛웃음 지으며 말했다.“하하, 당연하죠. 이미 하나씩 조사해보고 있으니까 뭔가를 발견하면 두 분께 꼭 먼저 알려드리죠.”말을 마친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기 옆에 서 있는 비서를 보았다. 비서는 빠르게 시선을 피하며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예민한 은서우는 당연히 비서의 그런 모습을 포착했고 인명진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무언가 알아낸 듯한 모습이었다.임성찬과 그들이 떠나자 인명진은 나직하게 말했다.“비서를
인명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러네요. 그대로 혜성 씨 덕분에 병원 일도 많이 해결되고 고맙네요. 이번에 돌아가면 확실히 제대로 보답을 해야겠어요.”말을 하면서 그는 손을 들어 은서우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두 손은 따스했다.“가요. 돌아가기 전 시간이 조금 남으니까 내가 아는 좋은 곳으로 가요.”은서우는 그에게 끌려다니며 궁금한 얼굴로 보았다. 인명진을 쫄래쫄래 따라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어느 한 오래된 거리로 왔다. 길가엔 아기자기한 물건을 파는 가게가 많았고 창가엔 독특한 디자인과 문양이 새겨진 예쁜 옷들이 전시되었다.인명진은 고개를 돌려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은서우를 보았다.“그동안 프로젝트로 엄청 바쁜 시간을 보냈잖아요. 쇼핑할 시간도 없이 바삐 보냈으니까 한번 골라봐요. 마음에 드는 거 전부 골라도 돼요. 서우 씨한테 예쁜 옷 선물하고 싶어서 그래요.”그의 말에 은서우는 얼굴이 붉어졌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옷가게로 들어갔다.인명진은 옆에 서서 옷 고르는 은서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은서우는 연하늘색의 원피스를 고르더니 거울 앞으로 가 몸에 대보았다. 치맛자락이 휘날리고 거울 보며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은 감탄했다.“정말 예뻐요. 서우 씨한테 아주 잘 어울려요.”그의 칭찬에 은서우는 민망해져 웃었다. 이번엔 심플한 셔츠를 몇 개 골랐다. 인명진은 하나씩 전부 담아주며 전부 계산했다.가게에서 나온 인명진의 두 손엔 쇼핑백이 가득했지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모아 전부 다 들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행여라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놓칠까 봐 말이다.길을 걷다가 우연히 빈티지 사진관을 발견한 은서우는 빤히 보았다. 사진관에 걸린 사진들은 전부 나무로 만든 액자 속에 있었고 세월의 흔적이 있어 보였다.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인명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우리도 들어가서 몇 장 찍
“이 옷 이상하지 않아요?”인명진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며 눈을 반짝였다.“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으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 한복은 서우 씨를 위해 만든 것처럼 너무 잘 어울려요. 이따가 사진에서도 아주 잘 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사진사도 옆에서 호응해 주었다.“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이 차림새는 완전히 아가씨한테 찰떡이니까. 이따가 포즈만 잘 해주면 분명 엄청난 사진들이 나올 거예요.”은서우는 그제야 결심을 내리고 우물쭈물 배경 앞으로 갔다. 인명진도 한복차림이었고 평소보다 더 우아한 분위기였다.곧이어 그들은 몇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콘셉트도 바꿔가며 찍었다. 커플티를 입고 익살스러운 표정도 짓기도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셔터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카메라에 찍힌 것은 전부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들이었다.두 사람이 사진관에서 나왔을 때 하늘엔 어느새 예쁜 노을이 졌다. 사진을 보고 있는 은서우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인명진은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보다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아무리 봐도 실물이 훨씬 더 낫네요. 그래도 나중에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오늘을 떠올리면 되겠네요.”은서우는 주먹으로 그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누가 보고 싶어 한다고 그래요.”말과는 달리 그녀는 사진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호텔로 돌아온 은서우는 여전히 사진을 찍으면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떠올리고 있었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낮에 산 새 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수시로 사진을 꺼내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인명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쇼핑백을 정리한 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팔을 올렸다.“오늘 하루 피곤했을 텐데 얼른 씻고 쉬어요.”인명진은 일부러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따듯한 온기가 귓속으로 불어 들어오자 은서우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버렸다.
매캐한 연기가 코와 입안으로 들어오자 괴로워진 은서우는 숨쉬기가 힘들었다. 설령 젖은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다고 해도 구조를 기다리기까지 아마 버티기 힘들 것이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인명진은 그녀를 품에 꼭 안고 있었고 불씨가 두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자신의 뒤로 밀었다. 그가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그런 그의 행동에 코끝이 찡해 난 은서우는 너무도 울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만약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이라면 너무도 짧게 주어진 것 같았다.점점 더 세게 타오르는 불길에 그녀는 언제 정신을 잃을지 몰랐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이대로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설령 지금 드는 생각이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결국 입을 연 은서우는 갈라져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다음 생에도 명진 씨랑 알콩달콩 살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에서 자신을 꽉 잡는 힘이 느껴졌다. 인명진이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고 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의미로 자신을 끌어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헛소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화가 난 그의 모습에 은서우도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새카만 연기 때문에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주위의 온도는 점점 더 높아져 흘러내린 땀이 옷을 흠뻑 적셔버렸다.귓가엔 어디서인지 모를 뭔가가 타는 소리가 자꾸만 시끄럽게 들려왔다. 만약 그녀 혼자만 이 불길 속에 있었다면 아마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을지도 모를 테지만 그녀의 옆에는 인명진이 있었다.인명진이 단단한 몸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그녀가 느끼던 공포도 처음보다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은서우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던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물줄기가 뿌려지는 것이 느껴졌다.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억센 물줄기에 꺼져버렸고 몇 명의 소방관이 달려왔다. 그들은 그렇게 구출된 것이다. 마음
은서우는 그렇게 한참 동안 멍하니 인명진을 보았다....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회복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는 은서우이다. 분명 화재 현장에 똑같이 있었지만 인명진은 그녀보다 더 빨리 회복되고 있었고 심지어 그녀를 정성껏 돌봐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인명진은 사람 돌보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가끔 그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은서우는 자신이 그의 전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퇴원한 후 은서우는 며칠 동안 휴가를 더 연장했다. 인명진은 그녀의 기분전환을 위해 거리로 나왔다.두 사람은 깍지를 낀 채 천천히 걷고 있었고 모든 게 화재가 일어나기 전처럼 돌아간 듯했다. 다만 가끔 은서우는 그래도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밤에 부는 바람은 조금 차가웠다. 은서우는 그 순간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잡고 있는 인명진의 손바닥을 살짝 간질이며 물었다.“땀이 났네요?”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인명진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때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리고 어둑어둑한 밤 아래로 수많은 전구가 번쩍 켜졌다. 은서우는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멍하니 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프러포즈 자세하고 있는 인명진의 모습이 보였다.“미안해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조금 초라해 보일 수 있는데 더는 기다릴 수 없었어요.”그의 입에서는 고백의 말이 흘러나왔다. 은서우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엔 인명진만 보였고 주위는 동화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환상적이게 아름다워 현실 같지 않았다.인명진이 중간에 뜸을 들이고 있을 때 그녀는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네, 할게요.”무릎을 꿇은 인명진은 그녀의 말에 멈칫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아직 묻지도 않았어요.”심지어 그는 반지도 이제 막 꺼내려던 참이었다. 은서우는 두 눈에 흙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계속 눈을 깜빡였다.“저도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명진 씨가 분명 그 말을
웨딩드레스를 피팅하는 과정에서 은서우는 정말이지 어디 숨을 곳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었다. 인명진의 눈빛이 너무도 노골적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주위에서 피팅을 도와주는 직원들이 자신과 인명진을 힐끗힐끗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원래부터 민망했던 은서우는 더 민망해졌고 얼른 다른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려고 하는 것으로 민망함을 숨겨보았다. 그러자 피팅을 도와주는 직원이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정말 서로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게 느껴지네요.”순간 당황해진 은서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자 직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제가 여기서 일한 지 몇 년 되거든요. 그런데 신랑님처럼 그런 눈빛으로 신부님을 보는 건 처음이었어요.”마치 애정이 흘러넘쳐 이 웨딩숍을 담가버릴 정도였다. 은서우는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생각이 다른 듯 자꾸만 올라갔다.“아, 그렇군요.”두 사람 사이가 좋다는 의미였기에 인명진이 계속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아도 그녀는 더는 민망해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디자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은서우는 머리가 아팠다.그러자 인명진은 큰 손을 올리더니 문제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럼 다 입으면 되죠.”은서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하객들은 제 패션쇼가 아니라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죠.”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인명진의 곁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전부 다 사요. 그리고 나한테만 보여주면 되죠.”은서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내 그녀는 그가 미래를 암시하려고 이 말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작게 대답했다.“누가 웨딩드레스를 이렇게나 많이 사요.”그녀가 거절하자 인명진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내 아내는 예쁘니까 어떤 옷이든 전부 다 소화해내죠. 예쁜 모습을 볼 기회는 앞으로도
이혜성은 원래 조금 더 버텨보려고 했지만 인명진과 인명진의 친구들이 힘으로 밀어버린 덕에 문이 열려버렸다.분명 그와 만난 지 엊그제인 것 같았지만 눈앞에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은서우는 감회가 남달랐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손에 든 부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인명진이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우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혜성은 먼저 인명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가갈 수 없게 했다.“이렇게 쉽게 우리 서우를 데려가게 할 수는 없죠. 꿈 깨요!”이 말을 마친 이혜성은 손가락을 튕겼고 이내 들러리들과 함께 말했다.“앞으로 결혼 후 돈 관리는 누가 하죠?”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보았다.“당연히 아내한테 맡겨야죠!”그들은 이어서 물었다.“앞으로 누구 말만 들어야 하죠?”“당연히 아내 말만 들어야죠!”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웃음을 터뜨려 버렸고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집안일은 누가 하죠?”“내가 해야죠.”...연거푸 10개가 넘는 질문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혜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축하해요. 남편감으로 합격이네요.”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인명진이 은서우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한 걸음만 움직였을 뿐인데 이혜성은 또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눈을 깜빡였다.“설마 한 입으로 두말할 건 아니죠? 만약의 상황을 위해 저희가 이렇게 각서를 준비해왔어요. 말로 하겠다고 하는 것보다 종이에 증거를 남기는 게 더 좋잖아요.”이혜성이 손뼉을 치자 들러리들은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와 테이블을 그의 앞에 대령했다. 테이블 위엔 종이와 인장이 있었다. 글씨로 빼곡한 종이엔 전부 그녀들이 방금 했던 질문과 그가 지켜야 할 서약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 모서리엔 인명진이 인장을 찍을 수 있는 빈 곳도 있었다. 들러리들은 인명진의 손을 잡더니 인장을 쥐여주며 종잇장에 꾹 찍게 했다. 한 장, 두 장... 꽤나 많은 종이가 휙휙 지나갔다. 인명진은 너무도 빨리 종이를 빼버리는 그들 때문에 뭐가 적
“왜? 마음이라도 아픈 거야?”“알았어요.”그녀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던 그녀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최지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왜 불도 안 켜고 있어요?”여울은 놀란 가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두컴컴한 게 좋아서.”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이리 와봐.”여울은 얌전히 다가가 살짝 몸을 숙여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렀다.“왜요? 기분 안 좋아요?”“응.”무심하게 대답하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당신은 나 배신하지 않을 거지?”그 말에 여울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설마 최지후가 뭔가 눈치라도 챈 걸까?’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냥 궁금해서.”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당연히 그럴 일 없죠. 난 지후 씨 곁에 평생 있을 거예요.”그녀는 예쁜 말로 골라서 했고 원하는 답을 들은 최지후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그래. 당신이 날 배신한다면 내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야.”농담처럼 들리지만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윤슬 씨, 나 어떡하죠? 최근에 회사의 프로젝트들이 지석훈 때문에 다 엉망이 되어버렸어요.”엄우정이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문지원을 건드린 것이 엄청 후회되었다.강윤슬은 그녀를 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바보같이 왜 일을 만들어서는... 일이 틀어지니까 날 찾아와?’“윤슬 씨, 말 좀 해봐요.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요?”강윤슬이 말이 없자 엄우정은 더 초조해졌다.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집에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강윤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정 씨, 석훈이는 이제 우정 씨가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우정 씨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어요.”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문지원 씨를 찾아간다면 어쩌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문지원 씨는 줄곧 우정 씨와 협력하고 싶어
최주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역시 그럴 줄 알았어. 문지원 씨 때문이 아니라면 네가 나한테 보자고 할 일도 없겠지.”“말해 봐.”한참을 망설이던 지석훈은 끝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됐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최주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술잔을 들자마자 최주하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여울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잠깐 전화 좀 받게 올게.”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최주하는 밖으로 나오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볼 일이 있어서요...”전화를 끊고 최주하는 다시 지석훈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하다.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중에 시간 되면 내가 술 살게.”“됐어. 일 있으면 가.”최주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혼자 술을 마시던 지석훈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한 그룹의 그 프로젝트, 나한테 넘겨.”전화를 끊은 후, 그는 눈앞의 술잔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버렸다. 자신이 왜 신한 그룹을 겨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본능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한편, 프라이빗한 호텔에 도착한 최주하는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꽃 같은 여인, 여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눈빛은 아무런 파동이 없었다. “말해.”여울은 그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하 씨, 최지후 씨가 저한테 마음을 완전히 연 것 같아요.”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현재 최지후는 여울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었고 무방비 상태라 그녀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알아. 하지만 난 더 가치가 있는 것이 필요해.”최주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왔고 최주하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 최지후 씨가 최근에 입찰을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입찰 문서를 손에 넣었어요.”그녀는 급히 입을 열
문지원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고통스러웠다. 지석훈에게 붙어있으면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고는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흠칫 놀라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가 앞에 앉아 있는 운전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출발해요.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갑시다.”이내 가림막이 내려졌고 문지원은 여전히 끙끙거리며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얼마 후,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고 그가 그녀를 안아 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프런트 데스크에 다가가 블랙 카드를 꺼내며 한마디 했다.“스위트룸으로 잡아줘요.”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룸에 들어온 후, 그는 문지원을 침대에 눕혔다. 막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그녀가 그의 목을 감싸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가지 마요.”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문지원, 이건 당신이 선택한 거야.”더 이상 그도 참지 않았고 들끓어 오른 욕정을 드러냈다. ...뜨거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잠에서 깨어난 문지원이 몸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그가 천천히 눈을 뜨는데 눈빛은 평온하기만 했다.“깼어?”“저기... 우리...”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지석훈은 아주 자연스러웠다.“걱정하지 마. 책임질게.”“책임... 책임질 필요 없어요. 어젯밤 일은 사고였어요.”어젯밤의 일에 대해 기억이 남아있었고 자신이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 일로 지석훈한테 뭔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그한테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왜? 그렇게 나랑 선 긋고 싶은 거야?”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차갑게 입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종업원은 바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부탁이라니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분이셨다면 아마 저한테 드레스값을 배상하라고 했을 거예요. 제 형편에 그건 턱도 없는 일이죠. 정말 감사드립니다.”문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에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탈의실로 향했다.“바로 여기입니다. 들어가시죠.”그녀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탈의실 안에는 아주 좋은 향이 났고 옷장에는 깨끗한 새 옷이 걸려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미가 넘치는 옷들이었다. 손을 뻗어 옷들을 어루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연한 파란색의 긴 드레스를 선택했다. 입고 있던 드레스의 지퍼를 여는데 손이 지퍼에 잘 닿지가 않았다.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곳은 사람이 흔히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지퍼를 열려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도와줄까?”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음흉한 얼굴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딱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순식간에 그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여긴 여자 탈의실이에요. 당장 나가시죠.”말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몸이 나른해지면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를 남자가 번쩍 안아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많이 예뻐해 줄게.”아직 약간의 의식이 남아 있던 그녀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파티장 안, 엄우정은 일부러 무심코 한마디 했다.“방금 탈의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파티장에서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다른 여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았다. “설마요. 혹시 방금 문...”순간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사람들은
지석훈은 밖으로 나온 뒤 그녀를 놓아주었고 문지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뭐 하는 거예요? 이번 협력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그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뭐 대단한 프로젝트도 아니잖아.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그렇게 모욕을 주는 데도 왜 가만히 있는 건데?”그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순간 당황한 지석훈은 얼른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왜 울어?”방금 엄우정한테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지석훈의 말 몇 마디에 그녀는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나도 뭐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문정 그룹은 이번 협력이 필요하고 난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내가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줄 테니까 나한테 의지해.”그가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 그 말에 문지원도 그도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엄우정과의 협력을 내가 망쳤으니 당연히 내가 보상해 줘야지.”“준비하고 있어. 저녁에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해.”말을 마치고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문지원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고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그날 저녁, 문지원은 지석훈을 따라 파티 장소로 향했다. 서먹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팔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팔짱 껴.”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팔짱 안 끼고 나 혼자 들어가게 둘 거야? 사람들이 날 비웃을 텐데?”입술을 오므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저도 모르게 본인이 웃었다는 사실조차 그는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파티장에 들어간 뒤, 지석훈은 그녀를 데리고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멀지 않은 곳, 강윤슬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지원, 이 여우 같은 년.”“지석훈이 문지원한테 푹 빠진 모양이네요.”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는 그녀의 모습에 엄우정은 엄청 통쾌했다.“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기회를 줘야죠. 하지만...”잠시 말을 멈추던 엄우정은 끝내 뒷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반면, 그 어떠한 기회도 놓치기 싫었던 문지원은 이내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하지만요?”엄우정은 악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카톡의 모든 남자 친구에게 당신이 다른 여자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나쁜 여자라고 문자를 보내요.”그 순간, 문지원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그녀에 대한 모욕이었다.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이 된 그녀는 분노가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엄 대표님, 협력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대표님께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장난을 치시면 안 되죠. 사적인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면 되겠습니까?”“그래요?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문지원의 말에 엄우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문지원, 네까짓 게 뭔데...’“문성 그룹에서 이번 기회를 놓친 건 오롯이 당신 문지원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둬요.”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문지원이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팔목을 잡고 있는 문지원의 눈빛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방금은 제가 감정 조절이 잘 안됐습니다.”“그 뜻은 문자를 보내겠다는 말인가요?”그녀의 요구는 악랄했고 이번 협력에 대해 장난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억지로 이 굴욕을 삼켰다. 그녀한테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보내는 것일 뿐,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진실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피식 웃던 엄우정은 조롱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문지원 씨,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설마 달랑 문자 하나
최지후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여자가 순수하고 귀여웠다. “여울 씨 생각은?”여울은 그가 최주하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최주하에 비하면 어리석고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손에 잡히다니, 너무 시시한데...’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떨며 치마 뒤에 있는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반쯤 내리자 매끄럽고 하얀 등이 훤히 드러났고 그가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말고.”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으니 여기서 대충 관계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 나갔다. 한편, 최주하는 핸드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최지후가 이렇게 쉽게 걸려들 것이라는 건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사생아의 신분이니 좋은 여자를 만나봤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최지후 자신보다 최지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캐슬 호텔.룸 안, 문지원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숙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약속된 시간을 이미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미팅을 하기로 했던 협력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얼마 후, 문 앞에서 자물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차가운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 대표님,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네요.”문지원은 바로 고개를 들었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협력은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사람이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문지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말을 하면서 문지원은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문지원 씨, 저랑 협력하고 싶은 거예요?”
방 안에 들어온 여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예외 없이 눈빛 속에 욕망이 가득했다.최지후는 여자들을 한번 스쳐본 후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여자들은 흔히 보던 사람들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그는 차가운 태도로 매니저를 쳐다보며 물었다.“이게 네가 말한 새로 온 애들이야?”술집 매니저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지후는 그의 중요한 고객이었기에 실수하면 큰일 날 수 있었다.“도련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술집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최지후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매니저의 얼굴에 확 뿌렸다.“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감히 이런 것들로 대충 넘기려고?”술집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얼굴을 닦으며 더욱 기를 쓰고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바로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 드릴게요.”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802호 맞나요?”최지후는 그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 눈길이 멈췄다.여자는 흰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었지만 자연스러우며 청순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하고 긴장된 기색이 가득했다.그녀는 신임임이 분명했다.최지후는 술집 매니저를 놓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에 데려왔어야지. 왜 이제야 데려왔어? 좀 더 일찍 데려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술집 매니저는 최지후가 눈앞의 여자를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가 데려온 사람 중에 이 여자가 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최지후가 만족하면 그게 제일 중요했다.그는 재치 있게 말했다.“좋은 건 항
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최주하가 너무 많은 금액에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주하가 말을 끊었다. 그는 다소 불쾌한 듯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2억만 있으면 뭐든지 할 거야?”여자는 그 말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뭐든지 할 수 있어요.”최주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 도와줄 수는 있어. 그런데 너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해.”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서 최주하의 옷을 풀려고 손을 뻗었다.최주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뭐 하는 짓이야?”그의 눈에 드러난 혐오감에 여자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이건 서로가 알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여자의 의도는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여자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주하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이 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확실히 네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야.”그렇게 말하며 최주하는 휴대전화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주하와 어느 정도 닮아 보였다.“내 동생이야. 내 동생을 유혹해서 그 옆에 남아있는 거야.”최주하는 간결하게 설명했다.여자는 혼란스러워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꺼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목표는 분명 최주하였기 때문이다.최주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어.”“저 할게요. 하겠습니다.”여자는 곧장 마음을 다잡으며 간절히 말했다.최주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실망하게 하지 마.”최주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휴대전화에는 1억이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