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면서 이혜성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고개를 돌리는데 은서우가 인명진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남자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인 채 눈앞의 여자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은서우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한눈에 봐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같은 시각,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방금 본 우스운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보안 검사를 할 때, 한 승객이 우유 한 병을 들고 왔더라고요. 신선한 우유 같아 보였는데 보안 요원이 한 모금 마시라고 했어요.”“그런데 그 사람이 그 큰 병에 든 우유를 단번에 다 마신 거예요. 다 마시고는 계속 해서 딸꾹질을 했어요.”인명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곧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었다.“얼른 자리에 가서 앉아요. 짐은 내가 올려둘게요.”고개를 끄덕이던 은서우는 그제야 이혜성의 생각이 난 건지 사방을 둘러보았다.“이제야 내 생각이 난 거야? 난 두 사람이 날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 줄 알았네.”뒤에서 이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우는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혜성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따가 맛있는 거 사줄게.”이혜성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인명진과의 관계에 대해 은서우한테 묻지 않았다. 묻더라도 비행기에서 내린 뒤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그녀도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뜻밖에도 은서우의 자리가 바로 인명진의 자리와 붙어있을 줄은 몰랐다. 반면, 이혜성의 자리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자리에 착석하고 나면 더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은서우는 뒤를 돌아보았고 비행기가 아직 이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도에는 아직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혜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상하다. 왜 저 뒤에 앉아 있지?”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그가 흠칫하더니 시선을 피했다.그 모습을 봤더라면 아마 그가 켕기는 것이 있다는 걸 눈
당연히 일어날 수 있었다. 비행기 멀미가 난 것이지 장애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이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처음 봤다.가까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 같아서는 손을 뻗어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혼자 할 수 있어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따뜻한 물에 약을 먹었다.약 효과는 그리 빨리 나타나지 않았다. 약을 먹고 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다시 누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토하고 싶어서 누워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그도 그녀가 지금 많이 괴롭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힘이 없는 은서우를 보며 그가 다정하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졸음이 쏟아졌던 그녀가 어렵게 눈을 떴다.“담요는 어디서 난 거예요?”아주 부드러운 담요였다. 덮고 나니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승무원한테 부탁했어요. 서우 씨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요.”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녀는 이내 눈을 감았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비행기는 아직 착륙 전이었다. 주위가 어두컴컴한 것이 커튼이 닫혀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살짝 움직이는데 옆에 있던 사람도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뜬 그가 멍해 있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물었다.“깼어요? 괜찮아요?”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담요를 위로 당겨주었다. 이미 여러 번 해본 사람처럼.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렸다. 두 자리가 딱 붙어 있었고 그녀가 자고 있을 때 그도 잠을 청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저도 모르게 붙어서 잠을 잤다.마치 한 침대에 있는 사람들처럼.그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
그가 먹여주기까지 하면 정말 어색할 것 같아서 그랬다.물론 이런 걸 원하는 여자들도 있겠지만 은서우는 그게 싫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파스타를 다 먹어버렸다.아마도 엄청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러나 허겁지겁 먹지는 않았다. 옆에 있는 인명진과 똑같이 품위를 유지하면서 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언뜻 보면 판박이였다. 거의 다 먹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그가 휴지 한 장을 집어 입가를 닦아주었다.“묻었어요.”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냥 입가만 닦아주려고 했는데 자신의 향한 그녀의 시선이 너무 강해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였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불편한 것 같아요. 접시 좀 치워줄래요?”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의자에 누워 방금 그의 행동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일부러 그런 걸까? 아니면 내 착각인가?’비행기는 저녁 9시가 다 되어서 착륙했다. 그들은 공항에서 바로 호텔로 향했다.다행히 인명진이 오기 전부터 묵을 호텔을 예약해 놓았고 은서우와 이혜성이 묵을 방은 인접한 방이었다. 이혜성은 기분 좋은 눈치였고 은서우는 왠지 모르게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옆방이니까 밤에 너한테 가기도 편하겠다.”이혜성은 은서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친구의 웃는 얼굴을 보니 은서우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자신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룸 안으로 들어와 짐 정리를 하는데 속옷을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은 걸 발견했다. 순간, 멍해졌다.‘지금 사러 가야 하나? 이 시간이면 다 문을 닫았을 텐데.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그렇고... 해외는 배송이 빠르지가 않으니.’침대 앞에 서서 한참
좁은 욕실 공간에 뜨거운 물이 가득 차올랐고 은서우는 빌린 속옷 세트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즈가 커서 입으면 헐렁했고 어깨끈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아무리 끈을 조절해 봐도 여전히 몸에 맞지 않았고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속옷을 사야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서 그녀는 목욕 가운을 두르고 욕실을 나섰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어깨에 걸쳐져 있었고 물방울이 머리끝을 따라 미끄러져 카펫 위로 떨어졌다.머리를 닦고 있을 때, 갑자기 초인종이 맑게 울렸고 그녀는 흠칫했다.‘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혜성인가?’그녀는 슬리퍼를 끌고 빠른 걸음으로 문 앞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인명진이 꼿꼿한 자세로 문밖에 서 있었고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목욕 가운을 단단히 감싼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긴장한 탓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원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쳐다보던 그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가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건네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급하게 짐을 싸느라고 아마 깜빡하고 못 챙긴 물품이 있을 것 같아서요. 마침 한 벌 더 준비했으니까 아마 쓸모가 있을 거예요.”그녀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확인해 보니 속옷이었고 사이즈는 평소 그녀가 입던 사이즈였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어색한 분위기에 발가락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꺼냈다.“정말 고마워요. 방금 혜성이한테서 빌렸어요.”약간 얼굴을 찡그리던 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마음속으로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고 생각했다. 은서우가 한발 먼저 남에게 도움을 청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받아요. 하나 더 준비해도 나쁠 게 없잖아요. 내일 사러 나가기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혜성 씨의 사이즈가 당신
이혜성은 그제야 하품을 하며 입을 열었다.“알았어. 10분만 기다려.”두 사람은 곧 호텔을 나와 길을 따라서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이국적인 거리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다양한 가게들로 가득했다.마침내 길모퉁이에서 속옷 가게를 찾았고 은서우는 이혜성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 속옷을 골라 입어본 후 마침내 몸에 맞는 속옷을 샀다.계산하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인명진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전화기 너머로 낮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 있어요? 호텔 로비에 나왔는데 서우 씨가 안 보여서요. 오전에 화성 제약 쪽 사람들과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약속 시간 거의 다 되었어요.”은서우는 황급히 대답했다.“뭐 좀 사러 나왔어요. 금방 들어갈게요. 죄송해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이혜성을 끌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고 뛰어가면서 이번 미팅이 자신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은 이미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저 멀리 로비 중앙에 서 있는 늘씬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갔고 숨이 차오르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정말 죄송합니다.”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표정이 환해졌다. 붉어진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니 마음속의 불쾌함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괜찮아요. 얼른 차에 타죠. 밖에 차 대기 중입니다.”이혜성은 뒤를 따라가면서 몰래 인명진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평소에는 침착하고 냉담해 보였는데 왜 서우와 연관된 일이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거지? 재미있네...’세 사람은 황급히 차에 올라탔고 바로 화성 제약으로 향했다.차 안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은서우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프로젝트 자료를 되짚어 보면서 컨디션
인명진의 표정이 진지해지고 수시로 옆에 있는 은서우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며 약 성분을 토론하고 있었다. 임상시험에서 발견한 문제에 관해서도 토론을 하며 호흡이 척척 맞았다.옆에 앉아 있던 이혜성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곤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아 묵묵히 화성제약에서 나온 직원들의 안색을 관찰했다.그러다가 무심코 그녀는 임성한의 비서가 인명진과 은서우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그들의 열띤 토론 끝에 초보적인 방안이 점차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임성한은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오늘 토론 덕에 그래도 뭔가 성과를 얻은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끝내요. 다들 쉴 사람은 쉬고 점심 식사할 사람은 식사하고 오후에 다시 구체적으로 연구해 봐요.”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임성한은 일부러 은서우 앞으로 다가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말했다.“은 선생님은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세요. 뭐든 척척 이해하시고 앞으로의 협력에서도 티키타카를 기대하고 있을게요.”은서우는 겸손하게 웃기만 할 뿐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임성한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점심이 되자 건물 최상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선 퀄리티가 높은 음식들이 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프로젝트에만 신경이 쏠렸던 은서우는 입맛이 없었던지라 대충 몇 젓가락 집어 먹다가 내려놓고 다시 연구 자료를 훑어보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이 나직하게 말렸다.“너무 열심히 해도 안 좋으니까 쉬면서 해요. 그래야 오후에 다시 연구할 힘이 나죠.”은서우는 고개를 들자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느덧 오후가 되고 회의는 계속 이어갔다. 임상시험 표본 앞을 둘러싼 그들은 중요한 부분만 계속 관찰하며 토론했다. 토론이 길어질수록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고 분위기가
그러나 임상시험에서 제일 중요한 단계로 들어갈 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실험 표본에 갑작스럽게 혼동이 생기면서 여러 개 팀의 데이터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곧이어 실험 기기가 고장이 나는가 하면 수리 기사님은 실험 기기 고장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은서우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매일 실험실에 박혀 두 눈이 충혈될 때까지 자료를 훑어보았고 인명진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조절해보려고 애썼다.이날은 은서우가 혼동이 생긴 표본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다급하게 들어온 인명진의 표정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이건 분명 우연이 아닐 거예요. 누군가 일부러 우리 임상시험을 망치고 있는 거예요. 반드시 배후에 있는 그 사람을 잡아서 우리 프로젝트에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막아야 해요.”은서우는 입술을 틀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다가 최근에 방문한 적 있는 직원부터 하나씩 배척해보기로 했다. 말하고 있던 와중에 임성한이 몇몇 비서들과 함께 들어오며 미소를 지었다.“인 원장님, 은 선생님. 지금 상황에 관해 전해 들었어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인명진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임 대표님, 갑자기 문제들이 줄줄이 생겨나서요. 뭔가 의심스러워서 그러는데 임 대표님 직원들을 하나씩 조사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히 우리의 프로젝트에 더 큰 문제라도 생기면 안 되는 거잖아요.”임성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헛웃음 지으며 말했다.“하하, 당연하죠. 이미 하나씩 조사해보고 있으니까 뭔가를 발견하면 두 분께 꼭 먼저 알려드리죠.”말을 마친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기 옆에 서 있는 비서를 보았다. 비서는 빠르게 시선을 피하며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예민한 은서우는 당연히 비서의 그런 모습을 포착했고 인명진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무언가 알아낸 듯한 모습이었다.임성찬과 그들이 떠나자 인명진은 나직하게 말했다.“비서를
인명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러네요. 그대로 혜성 씨 덕분에 병원 일도 많이 해결되고 고맙네요. 이번에 돌아가면 확실히 제대로 보답을 해야겠어요.”말을 하면서 그는 손을 들어 은서우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두 손은 따스했다.“가요. 돌아가기 전 시간이 조금 남으니까 내가 아는 좋은 곳으로 가요.”은서우는 그에게 끌려다니며 궁금한 얼굴로 보았다. 인명진을 쫄래쫄래 따라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어느 한 오래된 거리로 왔다. 길가엔 아기자기한 물건을 파는 가게가 많았고 창가엔 독특한 디자인과 문양이 새겨진 예쁜 옷들이 전시되었다.인명진은 고개를 돌려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은서우를 보았다.“그동안 프로젝트로 엄청 바쁜 시간을 보냈잖아요. 쇼핑할 시간도 없이 바삐 보냈으니까 한번 골라봐요. 마음에 드는 거 전부 골라도 돼요. 서우 씨한테 예쁜 옷 선물하고 싶어서 그래요.”그의 말에 은서우는 얼굴이 붉어졌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옷가게로 들어갔다.인명진은 옆에 서서 옷 고르는 은서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은서우는 연하늘색의 원피스를 고르더니 거울 앞으로 가 몸에 대보았다. 치맛자락이 휘날리고 거울 보며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인명진은 감탄했다.“정말 예뻐요. 서우 씨한테 아주 잘 어울려요.”그의 칭찬에 은서우는 민망해져 웃었다. 이번엔 심플한 셔츠를 몇 개 골랐다. 인명진은 하나씩 전부 담아주며 전부 계산했다.가게에서 나온 인명진의 두 손엔 쇼핑백이 가득했지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모아 전부 다 들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행여라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놓칠까 봐 말이다.길을 걷다가 우연히 빈티지 사진관을 발견한 은서우는 빤히 보았다. 사진관에 걸린 사진들은 전부 나무로 만든 액자 속에 있었고 세월의 흔적이 있어 보였다.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인명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우리도 들어가서 몇 장 찍
“네, 이 산속이 맞습니다. 정 그렇게 믿기 어려우시다면 직접 가보시죠. 하지만 다른 정보는 저희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다른 상황에 비해 지금 이 상황이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았다.“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이 정보로는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네요.”문지원은 탐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사실 여전히 걱정되었다.“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에 있었던 일을 제외하곤 이번 조사에서는 충분히 알아보고 말씀드리는 것이니까요.”탐정이 말을 마쳤을 때도 그녀의 표정은 전보다 더 심각하게 일그러졌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문지원은 다소 조급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전에는 준비가 된 상태라 긴장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조금 불안했다.“무슨 일이야?”“아, 우리 오빠예요. 우리 집안의 상황을 석훈 씨도 잘 알잖아요. 그동안 오빠와 연락이 안 되기에 탐정사무소로 찾아가 의뢰했는데 방금 그쪽에서 연락 온 거예요. 어느 산 쪽에서 오빠 소식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가야 할까 고민 중이었어요.”만약 다른 때였다면 문지원은 이렇듯 고민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상황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만약 그럴싸한 정보라면 바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거나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해볼 텐데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해서요.”지석훈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문지원을 보았다.“정말로 산속에서 찾았다면 더 많은 소식이 들려왔어야 했을 텐데 왜 탐정이 고작 연락 한 통으로 위치만 알려준 거지? 그 탐정 믿을 만한 사람은 맞아?”지석훈이 이렇게 물으니 문지원은 다소 확신할 수 없었다.“네가 네 오빠를 걱정하고 있다는 거 알아. 다른 사람이었어도 너처럼 가족을 걱정했을 거야.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게 누군가 파 놓은 함정이라면? 내가 보기엔 분명 뭔가가 있어.”같은 시각 강윤슬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석훈이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분명 나한테 푹 빠졌을 때는 그딴 일에 관심이 없었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다른 사람 편을 들어주면서 일부러 이런 말로 나를 화나게 하는 거냐고!
“수술 일정이 이것밖에 없어서 바로 퇴근해도 돼. 가서 물어봐야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그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고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잠시 후,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차가 클럽 앞에 멈춰 섰다.문지원은 조마조마했다.이미 붕대를 감고 있긴 했지만 지석훈이 손을 살펴보는 도중에도 통증이 몰려왔다. ‘누구한테 관심을 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손이 밟혔을 때, 그녀는 단순히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고 자신이 괜히 다친 건 아닌지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석훈의 관심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나랑 강윤슬이 어떻게 되든 이 일은 나랑 관련된 일이잖아.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당하는 꼴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말을 마친 그가 그녀를 데리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보니 룸 안에는 강윤슬과 임혁수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한창 즐겁게 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갈 때, 강윤슬과 임혁수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역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까. 이제 좀 그만해.”“그러니까. 그리 오래 만났으면 이젠 뜸할 때도 됐잖아.”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던 지석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젯밤까지도 울며불며 그한테 매달리던 강윤슬이, 그를 좋아한다고 하던 강윤슬이...이런 싸구려 진심이라니, 그가 테이블 위의 컵을 덥석 집어 바닥에 던졌다.신나게 놀던 사람들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지석훈은 룸 안의 음악을 끄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뭐 하나만 물어볼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지석훈은 문지원을 손을 들어 올리며 강윤슬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이전의 애틋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분노만 가득했다. “뭐 하는 거야? 여자 친구의 억울함이라도 풀어주려고 온 건가? 그런 거라면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네 여자 친구는 사업 때문에 스스로 다친 거야.”“그게 다른
“당신이 원하는 사과가 이런 거예요?”문지원은 통증이 몰려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저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별다른 반응이 없어 보였다. 이미 이런 일이 몸에 밴 듯 익숙해 보였다. “묻고 있잖아요.”문지원은 아직도 반쯤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손은 여전히 강윤슬의 발밑에 밟혀 있었다.“뭐 비슷해요.”엄우정은 문지원이 이렇게까지 고집이 셀 줄은 몰랐고 결국 계약서에 대충 사인을 해줬다.이번에는 어떻게든 회사가 잘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문지원은 두 사람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난 두 사람 사이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나랑 석훈 씨는 서로 원해서 그런 거예요.”“당신이랑 석훈 씨의 일에 대해 뭐라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진심을 얻을 수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문지원은 계약서를 들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엄우정은 벌컥 화를 냈다. “그냥 이대로 끝낼 거예요? 지석훈은 원래 윤슬 씨한테 충성을 다했어요. 일편단심 당신만 바라보던 사람이 문지원이 나타난 이후부터 딴사람이 되어버렸다고요.”그 말에 강윤슬은 가여운 척 연기를 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예요. 그리고 문지원은 이미 벌을 받았잖아요.”화가 난 엄우정은 펄쩍 뛰었다. “왜 그렇게 착해요? 지석훈이 보는 눈이 없네요. 윤슬 씨 같은 여자를 두고 어떻게...”두 사람은 한동안 계속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한편, 문지원은 계약서를 회사에 가져다준 뒤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병원에 오자마자 수술하러 가는 지석훈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문지원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몇 마디밖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왜 이래? 일단 가서 치료받고 있어. 수술 끝나면 바로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석훈은 이미 의사들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그녀는 접수를 마치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손에 난 상처를 치료하였다. 조용한 곳을 찾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
그 말을 들으니 침착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꼭 나서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방법이 없고 난 이쪽의 책임자니까요.”그녀가 자신의 입장을 똑바로 밝히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더욱 날뛰게 될 것이다.그러나 상대 쪽의 명단을 확인했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엄우정이었기 때문이다. 지석훈과 이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아니었을 때, 그녀는 엄우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 엄우정은 첫 만남에서 그들을 모욕했었다.지석훈에게는 강윤슬을 좋아한다면 선을 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고 문지원한테는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알아차리라고 했다. 뭣도 모르고 날뛰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는 게 없이 비참해지지 말라고 했는데 그 당시 문지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이상 이런 사람들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다.약속 장소로 가니 엄우정 뿐만 아니라 강윤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죠. 그 프로젝트에는 사인을 못할 것 같아요.”엄우정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문지원을 쳐다보았다. “왜요? 왜 사인을 할 수 없는 건데요? 뭐 문제라도 있나요?”문지원은 문 앞에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두 사람과 괜히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강윤슬도 엄우정도 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강윤슬의 처지가 딱해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건 지석훈과 강윤슬 두 사람 사이의 일이지 그녀의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안 좋아서요. 기분이 안 좋으면 프로젝트에 큰 영향이 있거든요.”“지석훈이랑 윤슬 씨의 사이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지석훈과 관계를 가져요? 이렇게 급한 일이면 차라리 지석훈을 찾아가지 그랬어요?”“이번 협력은 꼭 나를 찾아와야 한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고분고분하지도 않았겠죠.”문지원은 화가 치밀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정말 조사해 보고 싶다면 개인 물품이라도 확보해야 해.”“다 검사해 봐야 해. 일상생활을 담은 동영상이 있으면 가장 좋을 거야.”“그래야 판단할 수 있거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다 소용없어.”지석훈은 몇 마디 하고는 바로 최주하를 돌려보내려고 했다.“날 놀리려고 온 거냐? 넌? 그쪽 상황은 어떤데?”지석훈도 사람을 비웃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그 말에 최주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떠하긴. 당연히 다 정상이지. 나처럼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드물잖아.”최시후와의 싸움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만 가. 나 이제 쉴 거야.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 얘기는 나중에 하자.”그는 귀찮은 듯 손을 저었다. 최주하도 별다른 얘기가 없이 어이없는 웃음만 지으며 돌아섰다.최주하가 떠난 후, 지석훈은 일어나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했다.아까 문지원이 있을 때, 그는 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 최주하가 들이닥쳐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결국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였다.이제는 사람들이 다 갔으니 드디어 조용히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강윤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보았다.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마음이 쓰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건지?그러나 무엇이 됐든 강윤슬이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이 순간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한편, 문지원은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고 마침 비서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표님, 지금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얼른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저도 뭐라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리가...”전화기 너머로 비서는 우물쭈물했다.난감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집안에 문제가 생긴 바람에 회사는 지금 그녀 혼자 돌볼 수밖에 없었다.사실 문지원은 원래 회사의 임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회사를 짊어지
그녀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최주하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이내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문지원의 모습을 보고 최주하는 참지 못하고 지석훈을 놀리기 시작했다.“너 이 자식, 상상도 못 했어. 이렇게 여자랑 같이 있을 줄은...”“쓸데없는 얘기 그만해. 왜 찾아온 거야? 전화에서 말했던 그 사람은 또 누구고?”지석훈은 최주하와 실없는 장난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남녀 관계의 일에 대해서는 그도 확실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강윤슬에 대한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건 사실이다. 가슴이 아팠고 그녀를 품에 꼭 껴안고 달래주고 싶었다.그러나 오랜 시간 상처를 받고 나니 이젠 강윤슬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래서 빨리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달라진 그의 표정을 보고 최주하는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래. 그만 놀릴게.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찾아온 이유는 최지후 때문이야. 전에 최지후의 곁에 사람을 붙였었잖아?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최주하는 여울 쪽의 상황에 대해 그한테 대충 말해주었다. 그 당시 여울은 최지후의 변화에 대해 그한테 자세히 얘기했었다. 최지후의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어떤 때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도 있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다른 생각이 들었거나 잠시 고민해 봤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그래서 네 뜻은 최지후가 조현병을 앓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고 검사를 받아야 해.”“다만 검사를 받으려면 많은 절차가 필요하고 본인이 직접 가야 해.”지석훈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그 얘기에 최주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최지후의 약점을 잡게 된다면 최지후를 처리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최지후가 직접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의 사람이 가까이 다가간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울을 최지후에게 보내 그의 일
최주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어.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그의 말에 지석훈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내 직업이 뭔지 잊었어? 나 의사야. 이런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물어야 나도 상황에 맞는 약을 처방할 거 아니야?”“그런 그렇지만 자세하게 확인이 안 돼.”여울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최주하는 최지후에 대해서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석훈은 이 방면에서 전문가였다. 그래서 일부러 전화를 걸어 물어본 것이었지만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아직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전화로 얘기할 문제가 아니야. 지금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 얘기에 지석훈은 고개를 돌리고 옆에 있는 문지원을 쳐다보고는 결국 별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웬일이냐? 별장에서 휴식을 다 하고?”지석훈은 최주하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한쪽에 던져버리고 담담한 얼굴로 문지원을 쳐다보았다.“이런 얘기 말고 나한테 할 얘기 더 없어?”그가 강윤슬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강윤슬한테 끌려다닌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한테 매력이 없는 남자는 아니었고 그동안 그한테 다가오는 여자들도 많았었다. 다만 강윤슬을 위해 여자들을 함부로 만나지 않았고 다른 여자는 눈에조차 넣지 않았다.그런데 문지원의 모습에 그는 조금 놀랐다. “내가 한 말은 다 진심이에요. 이 관계에서 내가 손해를 본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우리 둘 다 성인이잖아요.”“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나 먼저 씻을게요.”문지원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지석훈의 욕실로 들어갔다. 한편, 지석훈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사실 담배를 한 대 피울 생각이었는데 방금 강윤슬이 들이닥친 바람에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음에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여자인데... 그러나 그동안의 굴욕과 상처로 인해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가끔은 사실 지금 이대로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도 없고 혼자만의
“지후 씨라고 불러.”여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화를 내며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뜻에 따랐다.“지후 씨, 걱정하지 말아요. 약속은 반드시 지킬게요. 그리고 나 얌전히 있을 거고 당신 화나게 하는 일 없도록 할게요.”갑자기 그가 그녀를 내동댕이쳤고 갑작스러운 힘에 여울은 바닥에 쓰러졌다.그는 익살스러운 광대라도 보듯 웃음을 터뜨렸다. “날 화나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며칠 동안은 손도 치료할 생각 말고. 당신은 좀 아파야 해.”“알았어요.”여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최시후는 빠르게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최지후는 사람이 아니었고 앞으로 그녀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최주하한테 2억이라는 돈을 받고 최지후의 옆에 있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앞으로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녀는 억지로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한편, 최주하는 지석훈을 찾아갔고 지석훈은 문지원과 함께 있었다.지석훈은 여전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고 담배를 계속 피웠다.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강윤슬 씨한테 가봐요. 강윤슬 씨가 먼저 당신한테 고개를 숙였잖아요. 난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찾아간다면 강윤슬 씨도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서로 오해를 풀고 한 걸음 다가선다면 강윤슬 씨는 분명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두 사람한테는 좋은 결과예요.”문지원은 그한테 많은 얘기를 했다. 그를 설득하고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이 말을 할 때 문지원은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지석훈은 피식 웃었다.“우리 조금 전까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야. 당신의 생각대로라면 내가 당신한테 책임을 져야지. 그런데 강윤슬을 찾아가라고? 문지원,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나랑 이렇게 헤어져도 좋아?”이 세상에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여울은 최주하에 대해 자신의 태도와 충성을 표했다.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본 최주하는 반신반의하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나한테 충성하는 거 맞아? 돈에 충성하는 거 아닌가?”그의 말에 그녀는 조금 난감해졌다. 처음에는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주하를 봤고 그녀는 그한테 애원했다.어쩔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다면 최주하에게 애원하지도 않았을 거고 자존심까지 다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한테 2억을 줬으니 당신은 저한테 은인이에요. 은인한테 충성을 다하는 건 제가 해야 할 일이고요.”여울은 최주하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표명했다.그녀를 힐끗 쳐다보던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됐어.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지. 최지후의 옆에 가 있어. 필요하면 내가 부를 테니까.”“알았어요.”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여울이 막 돌아서려 할 때 그가 갑자기 그녀를 붙잡았다.“필요한 게 있거나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긴다면 바로 연락해. 숨기지도 말고 참지도 마.”“알았어요.”조금 의외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흔쾌히 대답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여울은 최지후의 곁으로 돌아왔다. 최지후는 그녀가 나갔다 온 걸 진작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녀는 순순히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 갔다 왔어?”“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요.”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최지후의 앞에서 지금 그녀의 모습은 착하기만 한 강아지 같았다. 그러나 최지후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이내 그가 그녀의 손을 부러뜨렸다.“아악!”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내심 불안했다. 최지후가 이렇게 묻고 그녀의 손을 부러뜨린 건 최주하를 만나러 간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정말 최지후한테 들켰다면 오늘 그녀는 끝장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울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최지후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