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용민이 정말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잘살기를 바랐다면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붙여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두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나태욱은 아주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거만하게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난 예전부터 형이 고귀한 척하는 게 싫었어. 어차피 형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거 누릴 뿐이잖아.”“할 말 끝났으면 나가.”나도현은 더는 나태욱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태욱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형은 예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더라.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내가 왔으니 나진 그룹은 더는 형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두고 봐.”나도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양시은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냉담한 표정을 보아 그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나태욱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양 비서, 우리 또 만났네요. 지난번에 내가 말했죠?”“나태욱 대표님.”너무도 대놓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모습에 나태욱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뒤를 슬쩍 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우리 형 따라다니느라 많이 힘들죠? 매일 저렇게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죠? 차라리 내 비서 하는 건 어때요? 마침 내 비서 자리가 비어있거든요.”나도현은 마치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태욱, 넌 내가 안 보이나 보다?”나태욱이 입을 열려던 순간 양시은의 공손한 거절이 들려왔다.“죄송해요. 딱히 관심은 없네요.”그의 체면이라곤 전혀 챙겨주지 않는 모습에 나태욱은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양시은은 서류를 나도현의 앞에 내려놓았다.“대표님, 이건 결재가 필요한 서류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고 오히려 나도현을 빤히 보았다. 나도현은 당연히 그 시선을 모를 리가 없었고 사인을 하면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해
양시은은 당연히 고분고분 자리를 비워줄 사람이 아니었다.“안 가. 그러니까 쫓아내려고 하지 마.”창가에 서 있던 나도현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져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유난히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민이 곧 하원 할 시간이잖아. 네가 안 보인다면 하민이가 불안해할 거야.”그의 말에 양시은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결국 먼저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까지 걱정되었던 그녀는 비서에게 나도현을 잘 지켜봐달라는 말을 남겼고 비서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회사를 나섰다.하민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 하민이는 집안을 한번 둘러보다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엄마, 아저씨는 오늘 오지 않으신 거예요?”“아저씨는 바빠서 못 올 것 같대. 아마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오실 것 같은데 우리 조금 더 기다려볼까?”나도현이 자주 집으로 찾아와 양시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하민이 하원도 도와주면서 같이 식사도 했기에 하민이는 이미 그의 존재가 익숙해 져버렸다. 하민이는 떼를 쓰지도 않고 양시은의 말을 듣고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다행히 나도현은 밤에 돌아왔다. 어쩌면 하민이가 실망하는 것이 싫었는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도현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왔다.“늦었네. 하민아, 아저씨가 뭘 사 왔는지 알아?”하민이는 기쁜 얼굴로 그가 들고 온 것을 받았고 집안의 분위기도 화목하게 바뀌었다.양시은은 그런 나도현을 위아래 살펴보았고 정말로 괜찮아졌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사람은 보기 드물게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나도현도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생각해 봤는데 변호사가 될 수 없다면 나진 그룹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마침 너도 거기서 일하잖아.”양시은은 그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믿어지지 않는 듯 말했다.“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그녀는 나도현이 변호사를 포기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가 자신일
잘됐다며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화한 것이고 더는 변호사도 아니었던지라 변호사가 회사를 운영한다는 불만 가득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오성 구역은 재개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유진혁이 했던 짓에 관해서도 뭔가를 알아내게 되었다.“유진혁이 요즘 자주 도박장에 나타난다고 하더라고요.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현금을 들고 자주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제 생각엔 아마 그 배후가 계좌이체 하는 수단이 아닌 현금으로 거래하는 수단으로 유진혁과 연락하고 있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추측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도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비서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짚으며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또 제가 가요?”나도현의 확고한 눈빛에 비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고 신세 한탄했다. 이때 양시은이 끼어들었다.“저도 갈 수 있어요. 소식은 제가 알아낸 거니까 제가 가서 알아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시은이 나도현을 설득하려고 머리를 굴리던 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도현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너무 깊게 파지는 마. 알아볼 수 있는 것만 알아보고 안 되면 그냥 사람만 데리고 오면 돼.”아주 강압적인 어투에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를 그만둔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위압감이 넘치는 한 회사의 대표님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이내 그녀는 비서와 함께 알아보러 떠났고 뜻밖에도 너무도 순조로웠다. 돈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들은 유진혁을 잡게 되었다.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은 어느 한 수영센터에 있는 사물함이었다. 그들이 찾아갔을 때 마침 유진혁이 수상한 모습으로 돈을 세고 있었고 굳이 그들이 사물함을 열어볼 것도 없이 돈과 유진혁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붙잡힌 유진혁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난 두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 애
“잠시만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은 이미 제가 손에 넣었거든요.”이때 나태욱이 갑자기 손을 들며 끼어들었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양시은도 놀란 눈빛을 하며 그를 보았다.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을 나태욱이 이미 손에 넣었다니...다들 수군거리고 있던 때에 나태욱은 턱을 괴며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다들 모르셨어요? 아, 제가 말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래도 큰일이라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말을 하면서 그는 나도현을 보았다. 그 순간 회의실 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양시은은 걱정 어린 눈길로 나도현을 보았다.“그럼 다른 프로젝트를 논의하죠.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요.”나도현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고 심지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했다. 하지만 나태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번에 민망해진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방금 자랑을 했지만 무시를 당하지 않았던가. 민망한 사람은 나태욱이었다.회의가 끝나고 양시은은 서류 정리 때문에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도현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양시은이 그를 따라잡으려 할 때 나태욱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양 비서, 나한테 아직 일 잘하는 개인 비서가 없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형한테 말해서 나한테 오는 건 어때요?”또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려는 속셈이었다. 나태욱은 자신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괜찮아요. 전 이미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대표님 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네요.”그러자 나태욱이 픽 웃었다.“양 비서, 정말로 그렇게 붙어 있으면 형이 양 비서랑 결혼해줄 줄 알았어요? 그만 포기해요. 우리 고집 센 아버지는 절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까.”양시은은 걸음을
그저 분위기를 몰 뿐 아무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하간에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있다고 해서 그 상대가 정말로 결혼할 상대인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놀다가 질릴 놀이 상대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다 그러했으니까.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하는 농담에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때 나도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웃음소리를 멈추게 했다.“최근에 확실히 있죠.”그 순간 그들은 목에 무언가라도 턱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큼, 큼큼...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분이 대표님께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웃음거리로 만들던 사람이 헛기침해대며 말했다. 양시은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때 나서준 나도현 덕에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기분이었다.비록 술자리라곤 했지만 사실상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였고 나도현의 위치와 성격 탓에 아무도 그에게 술을 잔뜩 따라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몇 잔 마시게 되었다.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양시은은 나도현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술 냄새를 맡게 되었다. 술에 박하잎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어딘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나도현, 내 목소리 들려?”양시은은 그가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정말로 취한 건가...”“안 취했어.”이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고 양시은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다음 순간 그녀는 시원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양시은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얼른 차창을 닫으려고 그를 밀어냈다.“이거 놔. 창문 안 올렸단 말이야.”“싫어.”나도현의 담담한 말에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나가더니 버튼을 눌렀고 창문이 스르륵 닫혔다. 양시은은 그제야 안도했고 입술 위로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박하 잎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시원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를 잡고는 다정한 키스를 쏟아부었고 차 안의 분위기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그저 분위기를 몰 뿐 아무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하간에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있다고 해서 그 상대가 정말로 결혼할 상대인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놀다가 질릴 놀이 상대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다 그러했으니까.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하는 농담에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때 나도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웃음소리를 멈추게 했다.“최근에 확실히 있죠.”그 순간 그들은 목에 무언가라도 턱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큼, 큼큼...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분이 대표님께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웃음거리로 만들던 사람이 헛기침해대며 말했다. 양시은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때 나서준 나도현 덕에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기분이었다.비록 술자리라곤 했지만 사실상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였고 나도현의 위치와 성격 탓에 아무도 그에게 술을 잔뜩 따라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몇 잔 마시게 되었다.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양시은은 나도현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술 냄새를 맡게 되었다. 술에 박하잎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어딘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나도현, 내 목소리 들려?”양시은은 그가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정말로 취한 건가...”“안 취했어.”이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고 양시은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다음 순간 그녀는 시원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양시은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얼른 차창을 닫으려고 그를 밀어냈다.“이거 놔. 창문 안 올렸단 말이야.”“싫어.”나도현의 담담한 말에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나가더니 버튼을 눌렀고 창문이 스르륵 닫혔다. 양시은은 그제야 안도했고 입술 위로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박하 잎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시원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를 잡고는 다정한 키스를 쏟아부었고 차 안의 분위기
“잠시만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은 이미 제가 손에 넣었거든요.”이때 나태욱이 갑자기 손을 들며 끼어들었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양시은도 놀란 눈빛을 하며 그를 보았다.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을 나태욱이 이미 손에 넣었다니...다들 수군거리고 있던 때에 나태욱은 턱을 괴며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다들 모르셨어요? 아, 제가 말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래도 큰일이라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말을 하면서 그는 나도현을 보았다. 그 순간 회의실 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양시은은 걱정 어린 눈길로 나도현을 보았다.“그럼 다른 프로젝트를 논의하죠.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요.”나도현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고 심지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했다. 하지만 나태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번에 민망해진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방금 자랑을 했지만 무시를 당하지 않았던가. 민망한 사람은 나태욱이었다.회의가 끝나고 양시은은 서류 정리 때문에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도현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양시은이 그를 따라잡으려 할 때 나태욱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양 비서, 나한테 아직 일 잘하는 개인 비서가 없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형한테 말해서 나한테 오는 건 어때요?”또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려는 속셈이었다. 나태욱은 자신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괜찮아요. 전 이미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대표님 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네요.”그러자 나태욱이 픽 웃었다.“양 비서, 정말로 그렇게 붙어 있으면 형이 양 비서랑 결혼해줄 줄 알았어요? 그만 포기해요. 우리 고집 센 아버지는 절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까.”양시은은 걸음을
잘됐다며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화한 것이고 더는 변호사도 아니었던지라 변호사가 회사를 운영한다는 불만 가득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오성 구역은 재개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유진혁이 했던 짓에 관해서도 뭔가를 알아내게 되었다.“유진혁이 요즘 자주 도박장에 나타난다고 하더라고요.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현금을 들고 자주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제 생각엔 아마 그 배후가 계좌이체 하는 수단이 아닌 현금으로 거래하는 수단으로 유진혁과 연락하고 있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추측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도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비서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짚으며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또 제가 가요?”나도현의 확고한 눈빛에 비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고 신세 한탄했다. 이때 양시은이 끼어들었다.“저도 갈 수 있어요. 소식은 제가 알아낸 거니까 제가 가서 알아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시은이 나도현을 설득하려고 머리를 굴리던 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도현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너무 깊게 파지는 마. 알아볼 수 있는 것만 알아보고 안 되면 그냥 사람만 데리고 오면 돼.”아주 강압적인 어투에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를 그만둔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위압감이 넘치는 한 회사의 대표님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이내 그녀는 비서와 함께 알아보러 떠났고 뜻밖에도 너무도 순조로웠다. 돈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들은 유진혁을 잡게 되었다.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은 어느 한 수영센터에 있는 사물함이었다. 그들이 찾아갔을 때 마침 유진혁이 수상한 모습으로 돈을 세고 있었고 굳이 그들이 사물함을 열어볼 것도 없이 돈과 유진혁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붙잡힌 유진혁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난 두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 애
양시은은 당연히 고분고분 자리를 비워줄 사람이 아니었다.“안 가. 그러니까 쫓아내려고 하지 마.”창가에 서 있던 나도현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져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유난히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민이 곧 하원 할 시간이잖아. 네가 안 보인다면 하민이가 불안해할 거야.”그의 말에 양시은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결국 먼저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까지 걱정되었던 그녀는 비서에게 나도현을 잘 지켜봐달라는 말을 남겼고 비서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회사를 나섰다.하민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 하민이는 집안을 한번 둘러보다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엄마, 아저씨는 오늘 오지 않으신 거예요?”“아저씨는 바빠서 못 올 것 같대. 아마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오실 것 같은데 우리 조금 더 기다려볼까?”나도현이 자주 집으로 찾아와 양시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하민이 하원도 도와주면서 같이 식사도 했기에 하민이는 이미 그의 존재가 익숙해 져버렸다. 하민이는 떼를 쓰지도 않고 양시은의 말을 듣고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다행히 나도현은 밤에 돌아왔다. 어쩌면 하민이가 실망하는 것이 싫었는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도현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왔다.“늦었네. 하민아, 아저씨가 뭘 사 왔는지 알아?”하민이는 기쁜 얼굴로 그가 들고 온 것을 받았고 집안의 분위기도 화목하게 바뀌었다.양시은은 그런 나도현을 위아래 살펴보았고 정말로 괜찮아졌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사람은 보기 드물게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나도현도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생각해 봤는데 변호사가 될 수 없다면 나진 그룹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마침 너도 거기서 일하잖아.”양시은은 그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믿어지지 않는 듯 말했다.“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그녀는 나도현이 변호사를 포기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가 자신일
나용민이 정말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잘살기를 바랐다면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붙여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두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나태욱은 아주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거만하게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난 예전부터 형이 고귀한 척하는 게 싫었어. 어차피 형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거 누릴 뿐이잖아.”“할 말 끝났으면 나가.”나도현은 더는 나태욱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태욱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형은 예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더라.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내가 왔으니 나진 그룹은 더는 형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두고 봐.”나도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양시은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냉담한 표정을 보아 그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나태욱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양 비서, 우리 또 만났네요. 지난번에 내가 말했죠?”“나태욱 대표님.”너무도 대놓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모습에 나태욱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뒤를 슬쩍 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우리 형 따라다니느라 많이 힘들죠? 매일 저렇게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죠? 차라리 내 비서 하는 건 어때요? 마침 내 비서 자리가 비어있거든요.”나도현은 마치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태욱, 넌 내가 안 보이나 보다?”나태욱이 입을 열려던 순간 양시은의 공손한 거절이 들려왔다.“죄송해요. 딱히 관심은 없네요.”그의 체면이라곤 전혀 챙겨주지 않는 모습에 나태욱은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양시은은 서류를 나도현의 앞에 내려놓았다.“대표님, 이건 결재가 필요한 서류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고 오히려 나도현을 빤히 보았다. 나도현은 당연히 그 시선을 모를 리가 없었고 사인을 하면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해
양시은은 나도현의 낯빛이 한순간에 차가워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전 개인 비서예요.”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 설명했다. 그 말인즉 억측하지 말라는 의미였고 나태욱은 의외라는 눈빛을 하며 보았다.“우리 형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그런 거라면 미안해요. 난 두 사람이 이미...”“네 알 바가 아니잖아.”나도현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나태욱은 멈칫하더니 시선을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그는 웃음기 머금은 눈을 하면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난 형처럼 고집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버지는 무슨 수를 써서 라든 회사를 형에게 넘겨주려고 하지만 형은 계속 변호사로 살고 싶어 하잖아. 이런 부분에서는 난 형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지.”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도발하는 의미가 가득했고 나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버렸다.“내가 뭘 하든 네 알 바 아니야.”말을 마친 나도현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고 양시은도 얼른 따라갔다. 그러자 뒤에서 나태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 씨, 나중에 또 봐요.”차에 올라타고도 나도현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고 누가 봐도 잔뜩 화난 모습이었다. 나태욱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양시은은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은아, 앞으로 나태욱만 보면 피해 다녀.”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고 양시은은 멍해지게 되었다.“들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도현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양시은은 방금 본 남자의 신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나태욱이 바로 나도현이 말한 나씨 가문의 혼외자식인 것이다...양시은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태욱은 나진 그룹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앞으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바로 나태욱이 나진 그룹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은
그랬기에 나용민이 쉽게 나도현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나도현이 한 집안사람도 아닌 양시은을 데리고 온 것부터 불만이었기에 화를 내는 것이다.“나이가 들면서 머리도 녹이 슬어가나 봐요?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시은이는 더는 남이 아니라고요.”비꼬는 나도현의 어투에 나용민은 화가 치밀었고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뛰어내릴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지금 뭐라고 했냐?”나도현은 코웃음을 치면서 머리뿐만이 아니라 귀도 안 좋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모욕적인 표정에 나용민의 얼굴은 빨갛게 되어버렸고 씩씩대며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내가 왜 너처럼 말도 안 듣는 아들을 낳아서는...”나도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양시은은 나용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벨을 눌러 의사를 불렀다. 급하게 달려온 간호사는 어떻게든 나용민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고 그들에게 말했다.“환자는 안정이 필요한 상태에요. 그렇게 자극하시면 안 돼요.”나도현은 눈을 내리깐 채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양시은은 간호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주의할게요. 감사해요.”간호사가 나간 뒤 나용민은 침대에 누워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차갑게 픽 웃었다.“하마터면 화병으로 죽을 뻔했구나. 이 불효자식아.”“변호사 사무소에서 연락 왔었어요. “나도현이 갑자기 입을 열자 나용민은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나용민이 한 짓이라는 것을 눈치챈 나도현은 더욱 자신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정말로 나용민이 사주한 일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양시은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도현은 그동안 매일 회사에만 다니면서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 없었어요. 매일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지난번에는 열이 39도까지 올라갔는데도 이튿날 바로 출근했다고요. 대체 도현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건데요.”나용민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나도현이 아팠다는 얘기를 듣자 눈에 띄게 흔들
양시은은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감사합니다.”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얼른 검은색 차로 달려갔다.나도현은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양시은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양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현, 문 열어줘.”나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손을 뻗더니 문이 열렸다. 양시은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왜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여기 온 건데? 하민이 하원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비서님한테 이미 들었어.”나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누가 사주한 것인지.”그가 변호사 되기를 반대하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용민 뿐이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나용민은 나도현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현이 그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나진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병문안 갈까 고려하고 있었으니 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네.”“미안해. 다 내 탓이야...”양시은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네 잘못은 아니야. 내 잘못이지.”나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기대한 그의 잘못이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냉담한 어투로 기쁨을 느낄 리가 없었고 그가 냉담하면 할수록 더 안쓰러웠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도현이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꿈을 방해한다면 숨이 턱턱 막힐 것이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양시은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의 따듯한 체온으로 차가워진 그의 마음을 녹여주려 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나도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와 양시은은 멍한 눈빛으로 그
대체 누가 나도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싸늘해진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양시은도 협조적이었다.점차 그들의 분위기도 바뀌면서 룸 안은 열기로 가득해졌다. 이때 누군가 무심코 물었다.“양 비서님, 나중에 결혼 계획 있으세요?”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입을 연 사람을 보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서는 더 긴장하게 되었다.다행히 양시은은 대충 둘러 말했다.“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은 결혼 계획은 없네요.”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배불리 먹고 즐긴 후 돌아갔다.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던지라 해롱해롱한 상태였고 비서는 그들을 집으로 전부 돌려보랬다. 물론 양시은도 술을 마셨지만 두 잔만 마셨던지라 그저 얼굴만 불그스레한 상태였다.“양 비서님은 혼자 돌아갈 수 있죠? 혼자 갈 수 있으면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비서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직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직원은 비서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네. 전 혼자 갈 수 있어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얼른 자리를 떠나버렸다. 양시은이 위험할지 안 할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도현이 곁에 있는 한 양시은이 절대 위험할 리가 없었으니까.직원들이 떠나고 나니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나도현은 자연스럽게 양시은의 가방을 들어주며 말했다.“데려다줄게. 가자.”양시은은 자신의 가방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뒷좌석에 앉은 양시은은 뒤늦은 취기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나도현은 한참 지나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양시은은 손을 들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잠든 것 같았다.“대표님, 차가 좀 막힐 것 같습니다.”운전기사가 눈치 없이 말하자 나도현은 바로 눈치를 주었다.“목소리를 낮추세요. 길 막히면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