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이틀 동안 신무열은 일에만 열중했고 김혜연은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잠도 푹 잘 자니 혈색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그녀의 모습을 본 신무열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게 되었다.“지금 모습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네. 보기 좋다.”“그럼 전에 모습은 보기 싫었어요?”김혜연이 일부러 그에게 농담을 던지자 신무열은 더 짙은 미소를 지어버렸다.“그럴 리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거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다 좋아. 그래도 네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난 너와 오래오래 살고 싶거든.”김혜연도 당연히 같은 생각이었다.특히 법로가 간암 말기라는 사실만 떠올리면 인생에서 돈은 건강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역시 먼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었다.신무열은 미리 대기해 둔 전용기로 법로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들이 마침 도착했을 때 법로는 오늘의 항암 치료를 받고 나왔다.“할아버지, 많이 아파요?”별이는 법로의 곁에 꼭 붙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보았다.“할아버지 머리카락이 없어요.”“할아버지 모습이 많이 추하지?”법로는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머리를 만졌다.원래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한 가닥도 남지 않아 대머리가 되었다.법로의 말에 별이는 고개를 저었다.“할아버지는 저한테 영원히 멋진 할아버지예요. 하나도 추하지 않아요. 머리카락이 없으면 오히려 더 재밌어 보이는걸요. 할아버지, 저 머리 한번 만져봐도 돼요?”“당연하지.”법로는 별이의 작은 손을 잡은 뒤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촉감이 신기했던 별이는 저도 모르게 두어 번 쓰다듬게 되었다.“할아버지, 지금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별이는 너무 좋아요!”게다가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서 외할아버지가 병 치료 때문에 대머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었다.만약 치료하지 않으면 전처럼 머리카락은 남아있겠지만 빨리 그들의 곁을 떠나게 된다고 했었다.별이는 당연히 그것을 원치 않았고 법로의 곁에 찰싹 붙어 작은 팔로
“물론이지. 매일 바꿀 것도 없단다. 별이가 원하면 아침저녁으로 바꿀 수도 있어.”법로는 원래 탈모로 되어버린 대머리에 속상해하고 있었지만 별이와 대화를 나누며 눈빛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니 고민거리가 싹 사라지게 되었다.대머리인들 어떠하겠는가.가발이 있었으니 그는 언제든 사람들 속에서 제일 멋진 별이의 할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은가.“와, 할아버지 멋져요! 그럼 저녁에도 별이 데리러 와주실 수 있어요?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요! 별이 할아버지는 패셔니스타라고요!”별이는 상상만 해도 너무 즐겁고 흥분되었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온지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사람이 늙으면 아이처럼 변한다고 한 말도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온하윤도 옹알옹알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했지만 아직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별이와 법로도 아이의 옹알거림을 알아듣지 못했다.법로는 손을 뻗어 온하윤을 품에 안았다.“아이고, 우리 손녀. 이 할애비가 안아보자꾸나. 이틀 만에 우리 하윤이 포동포동해졌네?”온하윤은 입을 벙긋거리며 침으로 풍선을 만들어냈다.“그래, 그래. 할애비가 더 놀리지 않을게. 우리 하윤이는 하나도 안 통통해. 전보다 조금 더 자랐을 뿐이란다.”법로는 아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바꾸었다. 별이도 곁으로 다가와 온하윤과 놀아주면서 병실의 분위기는 화목해지고 있었다.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온지유는 의사가 온 것이라고 생각해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신무열과 김혜연이었다.“두 사람, 이렇게 빨리 온 거예요?”지난번 신무열에게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신무열이 얼마나 바쁜 나날을 보내는지 직접 보게 되었고 책상 위엔 수많은 서류가 있었다.그녀는 신무열이 한참 지난 후에야 올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얼른 들어와요. 아버지가 분명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법로는 고개를 들자마자 신무열과 김혜연
김혜연은 아주 조심스럽게 품에 안으며 나긋하게 동요를 불러주었다.온하윤은 하품을 하더니 그녀의 옷을 꼭 잡은 후 품에 안겨 잠들어 버렸다.온하윤이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한 김혜연은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행여나 아기가 잠에서 깨기라도 할까 봐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온지유와 말을 할 때도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를 내지 않았다.“하윤이가 잠을 자고 있어요!”그 모습을 본 온지유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김혜연이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수많은 공부를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기를 잘 달랬을 뿐 아니라 온하윤이 다른 아기들보다 얌전했기에 김혜연은 아기를 키우는 것이 더 좋게만 느껴졌다.그녀는 한참 안고 있고 나서 아쉬운 얼굴로 온하윤을 내려놓았다.법로는 아들과 안부 인사를 한 후 다시 쫓아내기 시작했다.“그래, 얼굴도 봤으니까 저녁까지 함께 먹고 잠시 쉬다가 내일 돌아가거라.”“아니, 저랑 혜연이가 그 먼 곳에서 이렇게 왔는데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벌써 쫓아내시려는 거예요?”신무열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법로는 그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법로는 두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뭐가 어찌 되었든 제 아버님이시잖아요. 이렇게 큰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바로 떠날 수 있겠어요. 지유 씨가 옆에 있다고 해도 저희가 그냥 갈 수 없는걸요.”김혜연도 다가와 법로를 설득했지만 법로는 고집스러웠다.그는 그 자리에 앉아본 적 있었기에 신무열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게다가 신무열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신무열은 전보다 더 바쁘고 힘들어졌을 것이었다. 아버지로서 도와줄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짐이 되진 말자고 생각했다.“게다가 너는 곧 아빠가 될 몸이 아니니. 육아를 하랴, 나라를 돌보랴 시간이 어디 남아돌겠니.”말을 하던 법로는 무의식적으로 김혜연의 복부로 시선을 돌렸다.김혜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무열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대충 시간을 계산해
법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VIP 병실로 옮겼기에 전에 지내던 병실보다 훨씬 더 넓었고 화장실도 따로 있었을 뿐 아니라 자그마한 주방도 있었다. 비록 가스는 없었지만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 먹을 수는 있었다.병실에는 칸막이 방도 있었는데 그곳에 너비가 1.5M인 침대가 있었다. 그것은 환자의 보호자를 위한 공간이었고 개인 프라이버시도 지켜주는 그런 방이었다.김혜연은 가져온 짐을 그곳으로 밀어 넣은 후 며칠 동안 병실에서 지내기로 했다.온지유는 그들을 도와 짐을 정리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법로 쪽에는 신무열과 김혜연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드디어 조금 마음이 놓였다.이젠 그 조직을 처리할 때가 되었다.사람을 해치는 짓을 많이 한 조직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정까지 망쳐버렸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주리라 생각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온지유는 품에는 온하윤을 안고 별이의 손을 잡은 채 병실을 나왔다.김혜연은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아들과 딸을 전부 바라지는 않았다. 심지어 아이의 성별에도 욕심이 없었지만 그저 자신에게도 아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신무열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채고 있었다.그들에게도 언제가 분명 아이가 있으리라 말이다....집으로 돌아온 온지유는 온하윤을 아기 침대에 눕혀놓았고 별이는 평소처럼 방으로 올라가 숙제를 했다.거기다 김명자가 옆에서 온하윤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조금 쉬려고 했다.이때 핸드폰이 번쩍 빛나며 여이현의 문자가 도착했다.[오늘은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 아마 8시가 되어야 도착할 것 같아.]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던지라 그녀는 방으로 올라가 잠을 조금 자두려고 했지만 눈을 뜨니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방으로 내
식탁에 모인 세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여이현은 일하면서 알게 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별이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별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나중에 별이도 크면 아빠처럼 회사를 운영할 거예요. 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 있잖아요.”“그래. 어느 정도 크면 아빠 회사로 와서 인턴으로 일해 봐도 되겠어.”아들의 꿈에 여이현은 응원하고 있었고 원래부터 회사를 별이와 온하윤에게 물려줄 생각 하고 있었다.회사를 이끌어 갈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와 온지유의 아기기만 하면 경영도 잘할 수 있고 회사를 물려받을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별이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전 저만의 회사를 만들 거예요. 아빠가 해낸 걸 저도 해내고 싶어요!”별이는 웃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는 별이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우리 별이 꿈이 멋지다! 엄마는 우리 별이가 꼭 꿈을 이룰 거라고 믿어!”온지유는 별이가 그녀와 여이현의 아이였으니 당연히 뭐든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아서 척척 빈 그릇을 정리해주며 거실로 가서 애니메이션을 보았다.온지유와 여이현은 설거지를 하면서 대책을 상의했다.“지금은 오빠랑 혜연 씨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당신은 언제 출국하려고?”온지유는 수도를 작게 틀며 나직하게 물었다.여이현은 여전히 먼저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이 문제를 얼른 해결하는 게 그 사람들에게 계속 감시당하면서 사는 것보단 낫지.”그 사람들은 목표에 달성하지 못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람이었다.계속 방어만 하면서 살 바엔 먼저 손을 대서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그럼 내일 움직이는 건 어때? 그 인간들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온지유가 몸을 돌리자 원래부터 가까이 있었던 여이현과 거리가 더 좁혀져 버렸다.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손을 그녀의 허리에 올리며
“그래도 다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준 덕분이죠.”온지유는 선생님과 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은 뒤 아침을 먹고 별이와 온하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신무열은 법로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고 온지유를 발견한 김혜연은 얼른 다가가 맞이했다.“하윤이는 저한테 맡겨요.”온지유는 먼저 법로의 상태를 물은 후 신무열에게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는 신무열은 온지유와 함께 칸막이 방으로 들어왔다.문을 닫은 후 온지유는 조직의 일에 관해 말해주었다.“전 이번에 이현 씨랑 함께 출국해서 암영이란 조직을 부숴버릴 생각이에요. 그 나쁜 놈들은 국제 범죄 조직인데 아이들까지 연루되어 일이 더 심각해질 수 있어요.”아이들은 한 나라의 희망이었고 소미처럼 친엄마가 키워주거나 복지원으로 가게 되면 적어도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린 나이에 나쁜 짓을 배우게 되었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얼마나 더 나쁜 짓을 하고 다니게 될 줄 모른다.“지유야, 난 우리 Y 국에 그런 사악한 조직이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 괘씸하군.”그녀의 말을 전부 들은 신무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이도 빠득 갈았다.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독살당할 뻔한 온하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 Y 국의 아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아이들도 하나의 살아있는 귀한 생명이었지만 그 조직에서는 대체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지유야, 나한테 거리낄 것 없단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도 돼. 아이들도 우리가 대신 돌봐줄 테니까.”신무열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온지유뿐만 아니라 지금 그도 온지유처럼 그 조직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그의 말에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이현 씨가 밖에서 저 기다리고 있거든요. 한 시간 뒤에 출국하는 거니까 시간이 빠듯하네요.”신무열은 직접 온지유를 배웅해주었다.법로는 온지유가 오자마자
등 뒤에 있던 남자는 가면남이 지시한 대로 케이지의 문을 연 뒤 거칠게 소미를 다루며 끌고 나왔다.소미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손을 들어 뺨을 때려버렸다. 머리가 어질거렸던 소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끄럽게.”가면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암일아,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어?”“네, 신무열은 이미 경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지유와 여이현은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암일은 알아낸 정보를 전부 말해주자 가면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내가 준비하라고 하던 여자는 준비됐나?”확신의 답을 들은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한편 온지유는 몇 시간의 비행 끝에 온지유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었다.짐을 찾으러 가던 도중에 앞에서 소동이 벌어졌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여이현은 얼른 온지유의 손을 꽉 잡았지만 사람은 너무도 많았고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지라 손을 놓치고 말했다.짐을 든 여이현은 주위를 두리번대며 얼른 온지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눈앞엔 낯선 얼굴들뿐이었고 온지유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온지유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급하게 여이현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등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빠르게 그녀의 코와 입을 막으며 제압하면서 무언가가 든 주사기로 그녀의 몸에 찔러넣었다.주사기 안에 있던 약물이 전부 그녀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약효가 빠른 약이었던지라 그녀는 30초도 되지 않아 정신이 흐릿해지며 쓰러지게 되었다.곧이어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게 되었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그녀를 데리고 갔다.그들이 공항에서 나왔을 때 갑자기 몰려든 한 무리의 사람들도 흩어지게 되었지만 여이현은 여전히 온지유를 찾지 못했다.전화를 걸자 등 뒤로 익숙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이현 씨, 나 여기 있어.”고개를 돌리자 ‘온지유'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지만 여이현은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
여이현은 여자가 하자는 대로 전부 해주었다.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별이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고 별은 평소와 같은 신이 난 모습이었지만 화면 속에 있는 여자를 아무리 봐도 온지유로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다. 오늘따라 엄마가 왜 이렇게 낯설지?'여자는 끊임없이 별이를 걱정하고 있었고 수상한 티가 폴폴 났다.여이현은 간단히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호텔은 김혜연의 것이었고 그의 통제구역이기도 했다.방금 그는 이미 몰래 사람을 시켜 호텔 안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기에 지금은 일단 연기에 어울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고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굳이 그딴 헛짓거리를 하면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이유는 뭐지? 가면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흉측해서 그런가?”가면남은 그녀의 말에 큰 소리를 내어 웃더니 사진을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이 여자, 너랑 아주 닮은 것 같지 않아? 지금 이 여자는 네 남편이랑 같은 방에 있어. 남녀가 둘이 한 방에서 뭘 하겠어?”그는 상상만 해도 흥미롭고 즐거웠다.온지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눈앞에 있는 남자를 훑어보면서 등 뒤로 묶인 손을 부단히 움직이자 밧줄은 손쉽게 풀려버렸다.다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았고 이상하리만큼 냉정해 가면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게 되었다.“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 내가 이 여자를 네 남편 곁에 붙여두었다고. 여이현은 애초에 이 여자가 네가 아니라는 걸 눈치도 못 챘으니까 넌 얌전히 내 곁에 있어.”“고작 그걸로 내 남편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온지유는 대놓고 비웃으며 또박또박 말해주었다.“꿈. 깨!”“하,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할까? 정말로 못 알아본 거라면 넌 영원히 내 노예로 사는 거고, 눈치챈 거라면 내가 가면을 벗어서 누구인지 밝힐게. 어때?”가면남은 승부욕이 생겨났다.짝퉁 온지유는 그가 3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나도 엄마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몰라. 내가 발견했을 때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았어. 누더기를 입은 채 구석에서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있더라고.”말을 꺼내는 양시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양시은은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그해 아주머니가 실종되었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어. 하지만 아직 상태도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내일 인명진 씨를 불러 봐달라고 하자.”“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양시은은 문해미가 있는 방을 힐끗 보았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주려고 했다.“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쁜 일이잖아.”양시은은 그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오후, 인명진은 집으로 방문해 진찰해달라는 나도현의 부탁이 담긴 연락을 받게 되었다.비록 그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지만 난치병에 관해서는 계속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해미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양시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우리 엄마는 어떤 상태인 거예요?”“상태가 아주 나빠요. 거의 한계에 달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뇌 신경 쪽에 일정한 정도의 손상을 입은 것 같아요.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80, 90% 확신하고 있어요.”인명진이 솔직하게 말해주자 옆에 있던 테이블이 흔들렸다. 나도현은 얼른 양시은은 부축해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시은은 이미 테이블과 함께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테니까.“어떻게 그럴 수가...”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분명 애타게 찾던 문해미를 찾았건마는, 겨우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건마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응당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순간에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양시은은 행여나 그 사람이 사라지게 될까 봐 얼른 달려갔다.“엄마, 여기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그녀는 노인을 붙잡으며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가 자신을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녀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다.“때리지 마세요. 바로 자리를 옮길 거니까 때리지 말아 주세요.”“엄마, 제가 엄마를 왜 때려요. 저 시은이잖아요. 엄마 딸 양시은.”“전 그쪽을 몰라요...”양시은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모른다니... 어떻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절대 사람을 착각했을 리가 없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녀의 어머니였다.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자신을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다정하고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전 엄마를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제 얼굴 봐주세요.”그 말을 들은 뒤 한참 지나서야 상대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사실 세월의 흔적이 많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몸에 맞지 않는 남루한 옷 탓에 행색이 더러워 보였을 뿐이었다. 양시은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그녀의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다. 줄곧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지만 어머니의 행색과 상태를 보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상대는 양시은을 멍하니 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양시은, 시은아... 시은이니?”“네, 엄마. 저 시은이에요.”양시은은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택시를 잡자 기사는 옷차림이 초라한 그녀의 어머니 문해미를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아가씨, 대체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주워온 거예요? 이런 쓰레기는 내 차에 태울 수 없어요.”“왜 태울 수 없는 건데요. 이미 제 돈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태울 수 없다고요?”양시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운전기사를
양시은이 미간을 찌푸렸다.“말은 제대로 하셔야죠. 기세등등하게 쏘아붙이던 건 그쪽 아니었나요?”“그건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죠.”장이정이 힘을 세게 줘서 조금 아팠는지 유준이 투덜댔다.“엄마, 아파요.”그녀는 급히 손을 뗐고 얼굴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미안해, 유준아...”유준은 장이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운 목소리로 괜찮다고 했다.유준의 위로 덕분에 장이정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양시은은 그 틈을 타서 말했다.“저에 대해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네요.”“무슨 오해요? 유 할머니가 당신들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들처럼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건 너무 손쉬운 일이잖아요.”장이정이 비웃었다.역시 그 일 때문이었다.다행히도 양시은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병원을 떠날 때, 양시은은 병원 기록을 하나 가져갔다.“장이정 씨, 이걸 보고 얘기해 보세요.”양시은은 병원 기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장이정 앞으로 밀었다.장이정은 눈꺼풀이 살짝 떨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때 양시은은 장이정의 품에 안긴 유준이가 장이정이 옆에 놓은 과일과 우유에 시선이 꽂힌 것을 보았다.“먹고 싶어?”“아니요. 먹고 싶지 않아요. 이건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던 거예요.”유준은 고개를 저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가난한 집의 아이는 일찍 철이 든다.양시은은 한숨을 쉬고 죄책감을 느끼는 장이정을 보며 말했다.“먹어도 돼. 다 먹으면 또 있어.”“정말요?”유준은 장이정의 허락을 구했다.유준의 간절한 눈빛을 본 장이정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낡은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라 소비를 줄이기 위해 받은 선물은 다시 선물로 다른 사람에게 보내곤 한다.평소에도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어른들은 참을 수 있지만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장이정은 유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유준이 우유
양시은은 차준기에게 부탁해 그 집 사람들의 서류를 손에 넣었다.차준기는 그녀의 질문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이걸 왜 필요하신가요?”양시은은 대충 변명을 해버리고는 그 집 사람들의 주소를 받은 후,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그 집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건물에 살고 있었는데 이곳의 건물들은 벽지나 페인트가 벗겨지고 건물이 많이 낡아서 대부분 철거 예정이었다.그리고 또 이 동네에서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철문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양시은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양시은은 밖에서 기다리자 곧 앞치마를 입은 여성이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장이정이었다. 집 앞에 서 있는 낯선 사람을 본 장이정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양시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길에서 산 우유 한 상자와 과일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따뜻한 나눔 활동을 하고 있어서요.”그렇게 해서 여성이 문을 열었다.장이정은 그녀가 가져온 물건을 받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경계심도 조금은 풀린 듯했다.“아직도 이런 활동이 있군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 동네 사람들이라면 다 가질 수 있는 건가요?”“아직은 이곳만 있어요.”양시은이 그 집 안에 들어가 앉겠다고 제안하자 장이정은 그녀를 집 안으로 들였다.그녀는 앉자마자 집 안부터 훑어봤다.평범한 가정집의 인테리어에 벽에는 몇 층 벽지가 덮여 있었지만 심하게 낡은 벽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양시은은 감탄하며 눈길을 돌렸다.“지금도 이런 낡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좋은 집에 살 수 있다면 누가 이런 헌 집에 살겠어요.”장이정은 한숨을 쉬며 차를 따랐다.양시은은 고마움을 표한 후, 조금 더 신중하게 물어봤다.“그럼 왜 여기서 안 나가시나요? 요즘은 집 구하기도 쉽고 여기도 철거된다고 들었거든요. 철거가 성공하면 큰돈을 받을 수 있지 않나요?”“그 돈이 얼마나 된다고...”장이정은 말을 멈추고 양시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런 걸 묻죠?”양시은은 약간 당
양시은은 일단 속마음을 잠시 억누르기로 했다. 그리고는 먼저 유 할머니에게 간병인을 찾아주었다.유 할머니에 관한 일 처리를 끝내고 나서야 양시은은 경찰서로 향했다.오성 구역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들은 한 달 동안 계속 구속되어 있었고 아직도 풀려나지 않은 상태였다.회사로 돌아온 양시은은 나도현부터 찾았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양시은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나는 유진혁 뒤에 최종 보스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유진혁은 소란을 일으킨 주모자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부추긴 사람들이었다.나도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모든 일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 같았다. 주민들의 불만이 갑작스레 생겨나고 나서 유 할머니가 병을 앓자 갈등이 더욱 커졌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양시은은 오늘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전했다. 그리고 유진혁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유진혁의 최근 거래 내역을 확인해 봐. 만약 의심스러운 입금 내역이 있다면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돼.”“이미 확인했어.”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정리된 자료를 건네주었다.“이게 유진혁의 모든 자료야. 계좌는 모두 확인했는데 최근에는 큰 수입이 없더라고.”양시은은 빠르게 자료를 훑어봤다.자료는 매우 명확했다. 유진혁은 직업이 없는 백수였고 생계는 모두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는 소위 말하는 등골브레이커였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들은 대부분 정지 상태였으며 수입도 전혀 없었다.지출은 꽤 크고 가끔 큰 금액이 빠져나갔는데 전부 도박에 쓰인 돈이었다.양시은은 그 서류를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유 할머니께서 열심히 저놈을 먹여 살리는데 정작 그는 아픈 어머니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다니?”그녀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간호사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도 이해가 갔다.자신의 부모가 그런 대우를 받았으면 그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었
인명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성이 ‘나’이신 변호사분 얘기인가요?”양시은은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로 맞히자 조금 민망했다.다행히 인명진은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며 나도현에게도 조언해 주었다. “나도현 씨는 일중독을 빨리 고쳐야 해요. 이렇게 계속 가면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을 거예요.”인명진을 보내고 나서 양시은은 병실로 향했다.그 환자는 성이 유 씨였고 나이는 65세였다.이 나이에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건 매우 위험하다. 조금만 잘못하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나도현은 이 환자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병실도 최고급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의료비도 모두 가불해주었다.그렇기에 소란을 피우려던 그 남자는 정말로 뻔뻔한 사람이다.“보호자 대신 보살피는 간병인이세요? 보호자랑 연락을 해서 병원에 오시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어머니이신데 어떻게 이렇게 방치해두겠어요? 너무 불효인 것 같아요.”“전 간병인이 아닌데요...”간호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그러자 양시은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못 알아봤네요. 저는 보호자가 보낸 간병인인 줄 알고...”양시은은 그녀의 말투를 눈치채고 미묘하게 물어보았다. “그 보호자께서 자주 안 나오시나요? 제가 알기론 그분이 어머니의 병을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그가 어머니의 병을 걱정한다며 난리를 치면서 최근에는 몇 번이나 사람을 다치게 할 뻔했으니.“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짜 걱정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겠어요? 그냥 외면한 거죠, 그건 완전히 배은망덕한 사람이에요.” 간호사는 이 일을 말할 때,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양시은은 그 말을 통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조금씩 알아 나가게 되었다.그 말로는 어머니를 무척 걱정한다고 말했던 남자가 어머니가 입원한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어머니는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얼마나 슬펐을까...’“알았어. 내가 옆에 있어 줄게.”양시은은 마음이 약해졌다.그저 아픈 사람 한 명 돌보는 것뿐인데 나도현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내일도 회사에는 못 갈 것 같았다.그녀가 옆에 머무르겠다고 하자 나도현은 꽉 쥐고 있던 손에 조금 힘을 풀었다.양시은은 정말 말한 것대로 옆에 있는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고 그를 바라보았다.새벽이 되도록 나도현은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다음 날, 양시은은 소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떠보니 그녀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본능적으로 옆을 쳐다봤지만 나도현은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그때, 가정부가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아주머니, 제 옆에 있던 도현이 어디 갔는지 아세요?”양시은이 물었다.가정부는 아침 일찍부터 왔을 것이기에 나도현이 언제 나갔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되게 일찍 나가셨어요. 나가면서 아가씨를 깨우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하민이도 그분이 유치원에 데려다주신 거예요. 그리고 또 오늘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양시은은 핸드폰을 보면서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를 확인했다.현재 시각을 확인한 그녀는 순간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지금은 아침 10시였다. 출근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그러니까 나도현은 밤새 아팠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민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회사에 출근하기까지 했다는 건가?양시은은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나서 급히 아침을 먹고는 회사로 달려갔다.차준기는 그녀를 보고 매우 놀랐다.“양 비서님, 어떻게 오셨어요? 나 대표님 말로는 오늘 휴가 쓰셨다고 하셔서 안 오는 줄 알았거든요.”양시은도 이제 정식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를 ‘양 비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어디 나가시려고요?”아까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양시은은 대화 주재를 돌렸다.“저는 심장병 환자 병문안 때문에 병원에 가는 길에요.”그가 말한 심장병 환자는 오성 구역 그분이셨다.“맞다, 그리고 나 대표님께서 명령을 내리셨
양시은은 밤마다 자주 잠에서 깨는 습관이 있었다.오늘도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온 그녀는 거실에 있는 희미한 사람의 형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 정체가 나도현이라는 것을 알아봤다.“도현아, 왜 잠도 안 자고 여기 앉아 있는 거야?”나도현은 낮게 한숨을 쉬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양시은은 처음에 자기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양시은은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나도현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과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몸이 안 좋아?”“약 좀... 가져다줄 수 있어? 위가 좀 아픈 것 같아.”나도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그 속에 전에는 없던 허약함이 약간 섞여 있었다.양시은은 그제야 나도현은 위가 안 좋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위염에 자주 걸렸었는데 이는 모두 그가 너무 일에만 집중해서 생긴 문제였다.나도현이 걱정됐던 양시은은 당황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자기 방에 위약이 있다는 생각이 났다.“내 방에 있는 것 같아. 기다려봐. 내가 가져올게.”그녀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과 위약을 챙겨 가져다주었다.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나도현의 찡그렸던 눈썹도 조금 풀리는 듯했다.양시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좀 나아졌어?”나도현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양시은은 한숨을 쉬며 다시 따뜻한 물을 준비해 그 옆에 두고 핑크색 온수 팩까지 꺼내왔다.“이걸 배 쪽에 올리면 좀 나아질 거 같아. 해봐.”“이걸 올리라고?”나도현은 핑크색 온수 팩을 쳐다보면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지금은 색깔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빨리 꼭 안고 있어.”그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온수 팩을 배 위에 올렸다.그날 밤, 나도현이 갑자기 아픈 것 때문에 양시은은 그의 건강을 챙기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양시은은 오랫동안 그를 간호해 주다가 피곤해져서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자 잠에서 깬 그녀는 급히 나도현의 상태를
양시은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는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누구든 알 수 있었다. 나도현의 이 말들은 절대 가식이 아니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말이다.박은희는 이 장면을 보고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동시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몇 년 전만 해도 그녀는 나도현이 자기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게 될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자기도 인정하는 며느리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세 사람 중 둘은 양시은을 인정했지만 나용민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양시은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나도현에게 말했다.“이게 네가 다른 여자들을 거절한 이유냐? 이 여자가 뭐가 좋다고? 가문도 너랑 맞지 않고 직업도 그저 그렇잖아.”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회사에서 저를 감시하세요?”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은퇴한 나용민이 어떻게 이렇게 상세히 알 수 있을까?들통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용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감시라고? 그냥 네가 회사를 잘 운영하는지 걱정한 것뿐이야.”나도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용민을 노려보며 말했다.나용민은 위압적인 모습의 아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이제 이 아비도 네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거냐?”“저는 참견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감당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양시은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나용민은 극대노하며 소리쳤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그러나 나도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운전했다. 그리고는 차를 도로 한 쪽에 멈추었다. 나도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양시은은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마.”“시은아, 안고 싶은데...”나도현이 갑자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양시은은 잠시 망설였다.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