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이틀 동안 신무열은 일에만 열중했고 김혜연은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잠도 푹 잘 자니 혈색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그녀의 모습을 본 신무열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게 되었다.“지금 모습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네. 보기 좋다.”“그럼 전에 모습은 보기 싫었어요?”김혜연이 일부러 그에게 농담을 던지자 신무열은 더 짙은 미소를 지어버렸다.“그럴 리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거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다 좋아. 그래도 네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난 너와 오래오래 살고 싶거든.”김혜연도 당연히 같은 생각이었다.특히 법로가 간암 말기라는 사실만 떠올리면 인생에서 돈은 건강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역시 먼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었다.신무열은 미리 대기해 둔 전용기로 법로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들이 마침 도착했을 때 법로는 오늘의 항암 치료를 받고 나왔다.“할아버지, 많이 아파요?”별이는 법로의 곁에 꼭 붙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보았다.“할아버지 머리카락이 없어요.”“할아버지 모습이 많이 추하지?”법로는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머리를 만졌다.원래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한 가닥도 남지 않아 대머리가 되었다.법로의 말에 별이는 고개를 저었다.“할아버지는 저한테 영원히 멋진 할아버지예요. 하나도 추하지 않아요. 머리카락이 없으면 오히려 더 재밌어 보이는걸요. 할아버지, 저 머리 한번 만져봐도 돼요?”“당연하지.”법로는 별이의 작은 손을 잡은 뒤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촉감이 신기했던 별이는 저도 모르게 두어 번 쓰다듬게 되었다.“할아버지, 지금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별이는 너무 좋아요!”게다가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서 외할아버지가 병 치료 때문에 대머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었다.만약 치료하지 않으면 전처럼 머리카락은 남아있겠지만 빨리 그들의 곁을 떠나게 된다고 했었다.별이는 당연히 그것을 원치 않았고 법로의 곁에 찰싹 붙어 작은 팔로
“물론이지. 매일 바꿀 것도 없단다. 별이가 원하면 아침저녁으로 바꿀 수도 있어.”법로는 원래 탈모로 되어버린 대머리에 속상해하고 있었지만 별이와 대화를 나누며 눈빛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니 고민거리가 싹 사라지게 되었다.대머리인들 어떠하겠는가.가발이 있었으니 그는 언제든 사람들 속에서 제일 멋진 별이의 할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은가.“와, 할아버지 멋져요! 그럼 저녁에도 별이 데리러 와주실 수 있어요?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요! 별이 할아버지는 패셔니스타라고요!”별이는 상상만 해도 너무 즐겁고 흥분되었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온지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사람이 늙으면 아이처럼 변한다고 한 말도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온하윤도 옹알옹알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했지만 아직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별이와 법로도 아이의 옹알거림을 알아듣지 못했다.법로는 손을 뻗어 온하윤을 품에 안았다.“아이고, 우리 손녀. 이 할애비가 안아보자꾸나. 이틀 만에 우리 하윤이 포동포동해졌네?”온하윤은 입을 벙긋거리며 침으로 풍선을 만들어냈다.“그래, 그래. 할애비가 더 놀리지 않을게. 우리 하윤이는 하나도 안 통통해. 전보다 조금 더 자랐을 뿐이란다.”법로는 아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바꾸었다. 별이도 곁으로 다가와 온하윤과 놀아주면서 병실의 분위기는 화목해지고 있었다.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온지유는 의사가 온 것이라고 생각해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신무열과 김혜연이었다.“두 사람, 이렇게 빨리 온 거예요?”지난번 신무열에게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신무열이 얼마나 바쁜 나날을 보내는지 직접 보게 되었고 책상 위엔 수많은 서류가 있었다.그녀는 신무열이 한참 지난 후에야 올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얼른 들어와요. 아버지가 분명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법로는 고개를 들자마자 신무열과 김혜연
김혜연은 아주 조심스럽게 품에 안으며 나긋하게 동요를 불러주었다.온하윤은 하품을 하더니 그녀의 옷을 꼭 잡은 후 품에 안겨 잠들어 버렸다.온하윤이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한 김혜연은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행여나 아기가 잠에서 깨기라도 할까 봐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온지유와 말을 할 때도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를 내지 않았다.“하윤이가 잠을 자고 있어요!”그 모습을 본 온지유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김혜연이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수많은 공부를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기를 잘 달랬을 뿐 아니라 온하윤이 다른 아기들보다 얌전했기에 김혜연은 아기를 키우는 것이 더 좋게만 느껴졌다.그녀는 한참 안고 있고 나서 아쉬운 얼굴로 온하윤을 내려놓았다.법로는 아들과 안부 인사를 한 후 다시 쫓아내기 시작했다.“그래, 얼굴도 봤으니까 저녁까지 함께 먹고 잠시 쉬다가 내일 돌아가거라.”“아니, 저랑 혜연이가 그 먼 곳에서 이렇게 왔는데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벌써 쫓아내시려는 거예요?”신무열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법로는 그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법로는 두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뭐가 어찌 되었든 제 아버님이시잖아요. 이렇게 큰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바로 떠날 수 있겠어요. 지유 씨가 옆에 있다고 해도 저희가 그냥 갈 수 없는걸요.”김혜연도 다가와 법로를 설득했지만 법로는 고집스러웠다.그는 그 자리에 앉아본 적 있었기에 신무열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게다가 신무열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신무열은 전보다 더 바쁘고 힘들어졌을 것이었다. 아버지로서 도와줄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짐이 되진 말자고 생각했다.“게다가 너는 곧 아빠가 될 몸이 아니니. 육아를 하랴, 나라를 돌보랴 시간이 어디 남아돌겠니.”말을 하던 법로는 무의식적으로 김혜연의 복부로 시선을 돌렸다.김혜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무열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대충 시간을 계산해
법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VIP 병실로 옮겼기에 전에 지내던 병실보다 훨씬 더 넓었고 화장실도 따로 있었을 뿐 아니라 자그마한 주방도 있었다. 비록 가스는 없었지만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 먹을 수는 있었다.병실에는 칸막이 방도 있었는데 그곳에 너비가 1.5M인 침대가 있었다. 그것은 환자의 보호자를 위한 공간이었고 개인 프라이버시도 지켜주는 그런 방이었다.김혜연은 가져온 짐을 그곳으로 밀어 넣은 후 며칠 동안 병실에서 지내기로 했다.온지유는 그들을 도와 짐을 정리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법로 쪽에는 신무열과 김혜연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드디어 조금 마음이 놓였다.이젠 그 조직을 처리할 때가 되었다.사람을 해치는 짓을 많이 한 조직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정까지 망쳐버렸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주리라 생각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온지유는 품에는 온하윤을 안고 별이의 손을 잡은 채 병실을 나왔다.김혜연은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아들과 딸을 전부 바라지는 않았다. 심지어 아이의 성별에도 욕심이 없었지만 그저 자신에게도 아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신무열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채고 있었다.그들에게도 언제가 분명 아이가 있으리라 말이다....집으로 돌아온 온지유는 온하윤을 아기 침대에 눕혀놓았고 별이는 평소처럼 방으로 올라가 숙제를 했다.거기다 김명자가 옆에서 온하윤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조금 쉬려고 했다.이때 핸드폰이 번쩍 빛나며 여이현의 문자가 도착했다.[오늘은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 아마 8시가 되어야 도착할 것 같아.]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던지라 그녀는 방으로 올라가 잠을 조금 자두려고 했지만 눈을 뜨니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방으로 내
식탁에 모인 세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여이현은 일하면서 알게 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별이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별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나중에 별이도 크면 아빠처럼 회사를 운영할 거예요. 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 있잖아요.”“그래. 어느 정도 크면 아빠 회사로 와서 인턴으로 일해 봐도 되겠어.”아들의 꿈에 여이현은 응원하고 있었고 원래부터 회사를 별이와 온하윤에게 물려줄 생각 하고 있었다.회사를 이끌어 갈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와 온지유의 아기기만 하면 경영도 잘할 수 있고 회사를 물려받을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별이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전 저만의 회사를 만들 거예요. 아빠가 해낸 걸 저도 해내고 싶어요!”별이는 웃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는 별이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우리 별이 꿈이 멋지다! 엄마는 우리 별이가 꼭 꿈을 이룰 거라고 믿어!”온지유는 별이가 그녀와 여이현의 아이였으니 당연히 뭐든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아서 척척 빈 그릇을 정리해주며 거실로 가서 애니메이션을 보았다.온지유와 여이현은 설거지를 하면서 대책을 상의했다.“지금은 오빠랑 혜연 씨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당신은 언제 출국하려고?”온지유는 수도를 작게 틀며 나직하게 물었다.여이현은 여전히 먼저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이 문제를 얼른 해결하는 게 그 사람들에게 계속 감시당하면서 사는 것보단 낫지.”그 사람들은 목표에 달성하지 못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람이었다.계속 방어만 하면서 살 바엔 먼저 손을 대서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그럼 내일 움직이는 건 어때? 그 인간들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온지유가 몸을 돌리자 원래부터 가까이 있었던 여이현과 거리가 더 좁혀져 버렸다.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손을 그녀의 허리에 올리며
“그래도 다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준 덕분이죠.”온지유는 선생님과 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은 뒤 아침을 먹고 별이와 온하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신무열은 법로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고 온지유를 발견한 김혜연은 얼른 다가가 맞이했다.“하윤이는 저한테 맡겨요.”온지유는 먼저 법로의 상태를 물은 후 신무열에게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는 신무열은 온지유와 함께 칸막이 방으로 들어왔다.문을 닫은 후 온지유는 조직의 일에 관해 말해주었다.“전 이번에 이현 씨랑 함께 출국해서 암영이란 조직을 부숴버릴 생각이에요. 그 나쁜 놈들은 국제 범죄 조직인데 아이들까지 연루되어 일이 더 심각해질 수 있어요.”아이들은 한 나라의 희망이었고 소미처럼 친엄마가 키워주거나 복지원으로 가게 되면 적어도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린 나이에 나쁜 짓을 배우게 되었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얼마나 더 나쁜 짓을 하고 다니게 될 줄 모른다.“지유야, 난 우리 Y 국에 그런 사악한 조직이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 괘씸하군.”그녀의 말을 전부 들은 신무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이도 빠득 갈았다.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독살당할 뻔한 온하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 Y 국의 아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아이들도 하나의 살아있는 귀한 생명이었지만 그 조직에서는 대체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지유야, 나한테 거리낄 것 없단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도 돼. 아이들도 우리가 대신 돌봐줄 테니까.”신무열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온지유뿐만 아니라 지금 그도 온지유처럼 그 조직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그의 말에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이현 씨가 밖에서 저 기다리고 있거든요. 한 시간 뒤에 출국하는 거니까 시간이 빠듯하네요.”신무열은 직접 온지유를 배웅해주었다.법로는 온지유가 오자마자
등 뒤에 있던 남자는 가면남이 지시한 대로 케이지의 문을 연 뒤 거칠게 소미를 다루며 끌고 나왔다.소미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손을 들어 뺨을 때려버렸다. 머리가 어질거렸던 소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끄럽게.”가면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암일아,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어?”“네, 신무열은 이미 경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지유와 여이현은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암일은 알아낸 정보를 전부 말해주자 가면남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내가 준비하라고 하던 여자는 준비됐나?”확신의 답을 들은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한편 온지유는 몇 시간의 비행 끝에 온지유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었다.짐을 찾으러 가던 도중에 앞에서 소동이 벌어졌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여이현은 얼른 온지유의 손을 꽉 잡았지만 사람은 너무도 많았고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지라 손을 놓치고 말했다.짐을 든 여이현은 주위를 두리번대며 얼른 온지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눈앞엔 낯선 얼굴들뿐이었고 온지유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온지유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급하게 여이현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등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빠르게 그녀의 코와 입을 막으며 제압하면서 무언가가 든 주사기로 그녀의 몸에 찔러넣었다.주사기 안에 있던 약물이 전부 그녀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약효가 빠른 약이었던지라 그녀는 30초도 되지 않아 정신이 흐릿해지며 쓰러지게 되었다.곧이어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게 되었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그녀를 데리고 갔다.그들이 공항에서 나왔을 때 갑자기 몰려든 한 무리의 사람들도 흩어지게 되었지만 여이현은 여전히 온지유를 찾지 못했다.전화를 걸자 등 뒤로 익숙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이현 씨, 나 여기 있어.”고개를 돌리자 ‘온지유'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지만 여이현은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
여이현은 여자가 하자는 대로 전부 해주었다.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별이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고 별은 평소와 같은 신이 난 모습이었지만 화면 속에 있는 여자를 아무리 봐도 온지유로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다. 오늘따라 엄마가 왜 이렇게 낯설지?'여자는 끊임없이 별이를 걱정하고 있었고 수상한 티가 폴폴 났다.여이현은 간단히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호텔은 김혜연의 것이었고 그의 통제구역이기도 했다.방금 그는 이미 몰래 사람을 시켜 호텔 안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기에 지금은 일단 연기에 어울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고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굳이 그딴 헛짓거리를 하면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이유는 뭐지? 가면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흉측해서 그런가?”가면남은 그녀의 말에 큰 소리를 내어 웃더니 사진을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이 여자, 너랑 아주 닮은 것 같지 않아? 지금 이 여자는 네 남편이랑 같은 방에 있어. 남녀가 둘이 한 방에서 뭘 하겠어?”그는 상상만 해도 흥미롭고 즐거웠다.온지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눈앞에 있는 남자를 훑어보면서 등 뒤로 묶인 손을 부단히 움직이자 밧줄은 손쉽게 풀려버렸다.다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았고 이상하리만큼 냉정해 가면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게 되었다.“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 내가 이 여자를 네 남편 곁에 붙여두었다고. 여이현은 애초에 이 여자가 네가 아니라는 걸 눈치도 못 챘으니까 넌 얌전히 내 곁에 있어.”“고작 그걸로 내 남편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온지유는 대놓고 비웃으며 또박또박 말해주었다.“꿈. 깨!”“하,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할까? 정말로 못 알아본 거라면 넌 영원히 내 노예로 사는 거고, 눈치챈 거라면 내가 가면을 벗어서 누구인지 밝힐게. 어때?”가면남은 승부욕이 생겨났다.짝퉁 온지유는 그가 3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저 분위기를 몰 뿐 아무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하간에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있다고 해서 그 상대가 정말로 결혼할 상대인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놀다가 질릴 놀이 상대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다 그러했으니까.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하는 농담에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때 나도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웃음소리를 멈추게 했다.“최근에 확실히 있죠.”그 순간 그들은 목에 무언가라도 턱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큼, 큼큼...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분이 대표님께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웃음거리로 만들던 사람이 헛기침해대며 말했다. 양시은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때 나서준 나도현 덕에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기분이었다.비록 술자리라곤 했지만 사실상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였고 나도현의 위치와 성격 탓에 아무도 그에게 술을 잔뜩 따라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몇 잔 마시게 되었다.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양시은은 나도현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술 냄새를 맡게 되었다. 술에 박하잎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어딘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나도현, 내 목소리 들려?”양시은은 그가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정말로 취한 건가...”“안 취했어.”이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고 양시은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다음 순간 그녀는 시원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양시은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얼른 차창을 닫으려고 그를 밀어냈다.“이거 놔. 창문 안 올렸단 말이야.”“싫어.”나도현의 담담한 말에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나가더니 버튼을 눌렀고 창문이 스르륵 닫혔다. 양시은은 그제야 안도했고 입술 위로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박하 잎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시원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를 잡고는 다정한 키스를 쏟아부었고 차 안의 분위기
“잠시만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은 이미 제가 손에 넣었거든요.”이때 나태욱이 갑자기 손을 들며 끼어들었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양시은도 놀란 눈빛을 하며 그를 보았다.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을 나태욱이 이미 손에 넣었다니...다들 수군거리고 있던 때에 나태욱은 턱을 괴며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다들 모르셨어요? 아, 제가 말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래도 큰일이라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말을 하면서 그는 나도현을 보았다. 그 순간 회의실 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양시은은 걱정 어린 눈길로 나도현을 보았다.“그럼 다른 프로젝트를 논의하죠.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요.”나도현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고 심지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했다. 하지만 나태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번에 민망해진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방금 자랑을 했지만 무시를 당하지 않았던가. 민망한 사람은 나태욱이었다.회의가 끝나고 양시은은 서류 정리 때문에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도현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양시은이 그를 따라잡으려 할 때 나태욱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양 비서, 나한테 아직 일 잘하는 개인 비서가 없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형한테 말해서 나한테 오는 건 어때요?”또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려는 속셈이었다. 나태욱은 자신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괜찮아요. 전 이미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대표님 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네요.”그러자 나태욱이 픽 웃었다.“양 비서, 정말로 그렇게 붙어 있으면 형이 양 비서랑 결혼해줄 줄 알았어요? 그만 포기해요. 우리 고집 센 아버지는 절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까.”양시은은 걸음을
잘됐다며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화한 것이고 더는 변호사도 아니었던지라 변호사가 회사를 운영한다는 불만 가득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오성 구역은 재개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유진혁이 했던 짓에 관해서도 뭔가를 알아내게 되었다.“유진혁이 요즘 자주 도박장에 나타난다고 하더라고요.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현금을 들고 자주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제 생각엔 아마 그 배후가 계좌이체 하는 수단이 아닌 현금으로 거래하는 수단으로 유진혁과 연락하고 있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추측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도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비서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짚으며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또 제가 가요?”나도현의 확고한 눈빛에 비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고 신세 한탄했다. 이때 양시은이 끼어들었다.“저도 갈 수 있어요. 소식은 제가 알아낸 거니까 제가 가서 알아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시은이 나도현을 설득하려고 머리를 굴리던 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도현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너무 깊게 파지는 마. 알아볼 수 있는 것만 알아보고 안 되면 그냥 사람만 데리고 오면 돼.”아주 강압적인 어투에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를 그만둔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위압감이 넘치는 한 회사의 대표님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이내 그녀는 비서와 함께 알아보러 떠났고 뜻밖에도 너무도 순조로웠다. 돈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들은 유진혁을 잡게 되었다.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은 어느 한 수영센터에 있는 사물함이었다. 그들이 찾아갔을 때 마침 유진혁이 수상한 모습으로 돈을 세고 있었고 굳이 그들이 사물함을 열어볼 것도 없이 돈과 유진혁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붙잡힌 유진혁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난 두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 애
양시은은 당연히 고분고분 자리를 비워줄 사람이 아니었다.“안 가. 그러니까 쫓아내려고 하지 마.”창가에 서 있던 나도현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져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유난히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민이 곧 하원 할 시간이잖아. 네가 안 보인다면 하민이가 불안해할 거야.”그의 말에 양시은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결국 먼저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까지 걱정되었던 그녀는 비서에게 나도현을 잘 지켜봐달라는 말을 남겼고 비서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회사를 나섰다.하민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 하민이는 집안을 한번 둘러보다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엄마, 아저씨는 오늘 오지 않으신 거예요?”“아저씨는 바빠서 못 올 것 같대. 아마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오실 것 같은데 우리 조금 더 기다려볼까?”나도현이 자주 집으로 찾아와 양시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하민이 하원도 도와주면서 같이 식사도 했기에 하민이는 이미 그의 존재가 익숙해 져버렸다. 하민이는 떼를 쓰지도 않고 양시은의 말을 듣고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다행히 나도현은 밤에 돌아왔다. 어쩌면 하민이가 실망하는 것이 싫었는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도현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왔다.“늦었네. 하민아, 아저씨가 뭘 사 왔는지 알아?”하민이는 기쁜 얼굴로 그가 들고 온 것을 받았고 집안의 분위기도 화목하게 바뀌었다.양시은은 그런 나도현을 위아래 살펴보았고 정말로 괜찮아졌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사람은 보기 드물게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나도현도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생각해 봤는데 변호사가 될 수 없다면 나진 그룹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마침 너도 거기서 일하잖아.”양시은은 그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믿어지지 않는 듯 말했다.“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그녀는 나도현이 변호사를 포기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가 자신일
나용민이 정말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잘살기를 바랐다면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붙여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두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나태욱은 아주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거만하게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난 예전부터 형이 고귀한 척하는 게 싫었어. 어차피 형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거 누릴 뿐이잖아.”“할 말 끝났으면 나가.”나도현은 더는 나태욱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태욱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형은 예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더라.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내가 왔으니 나진 그룹은 더는 형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두고 봐.”나도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양시은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냉담한 표정을 보아 그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나태욱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양 비서, 우리 또 만났네요. 지난번에 내가 말했죠?”“나태욱 대표님.”너무도 대놓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모습에 나태욱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뒤를 슬쩍 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우리 형 따라다니느라 많이 힘들죠? 매일 저렇게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죠? 차라리 내 비서 하는 건 어때요? 마침 내 비서 자리가 비어있거든요.”나도현은 마치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태욱, 넌 내가 안 보이나 보다?”나태욱이 입을 열려던 순간 양시은의 공손한 거절이 들려왔다.“죄송해요. 딱히 관심은 없네요.”그의 체면이라곤 전혀 챙겨주지 않는 모습에 나태욱은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양시은은 서류를 나도현의 앞에 내려놓았다.“대표님, 이건 결재가 필요한 서류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고 오히려 나도현을 빤히 보았다. 나도현은 당연히 그 시선을 모를 리가 없었고 사인을 하면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해
양시은은 나도현의 낯빛이 한순간에 차가워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전 개인 비서예요.”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 설명했다. 그 말인즉 억측하지 말라는 의미였고 나태욱은 의외라는 눈빛을 하며 보았다.“우리 형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그런 거라면 미안해요. 난 두 사람이 이미...”“네 알 바가 아니잖아.”나도현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나태욱은 멈칫하더니 시선을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그는 웃음기 머금은 눈을 하면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난 형처럼 고집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버지는 무슨 수를 써서 라든 회사를 형에게 넘겨주려고 하지만 형은 계속 변호사로 살고 싶어 하잖아. 이런 부분에서는 난 형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지.”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도발하는 의미가 가득했고 나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버렸다.“내가 뭘 하든 네 알 바 아니야.”말을 마친 나도현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고 양시은도 얼른 따라갔다. 그러자 뒤에서 나태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 씨, 나중에 또 봐요.”차에 올라타고도 나도현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고 누가 봐도 잔뜩 화난 모습이었다. 나태욱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양시은은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은아, 앞으로 나태욱만 보면 피해 다녀.”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고 양시은은 멍해지게 되었다.“들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도현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양시은은 방금 본 남자의 신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나태욱이 바로 나도현이 말한 나씨 가문의 혼외자식인 것이다...양시은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태욱은 나진 그룹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앞으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바로 나태욱이 나진 그룹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은
그랬기에 나용민이 쉽게 나도현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나도현이 한 집안사람도 아닌 양시은을 데리고 온 것부터 불만이었기에 화를 내는 것이다.“나이가 들면서 머리도 녹이 슬어가나 봐요?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시은이는 더는 남이 아니라고요.”비꼬는 나도현의 어투에 나용민은 화가 치밀었고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뛰어내릴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지금 뭐라고 했냐?”나도현은 코웃음을 치면서 머리뿐만이 아니라 귀도 안 좋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모욕적인 표정에 나용민의 얼굴은 빨갛게 되어버렸고 씩씩대며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내가 왜 너처럼 말도 안 듣는 아들을 낳아서는...”나도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양시은은 나용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벨을 눌러 의사를 불렀다. 급하게 달려온 간호사는 어떻게든 나용민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고 그들에게 말했다.“환자는 안정이 필요한 상태에요. 그렇게 자극하시면 안 돼요.”나도현은 눈을 내리깐 채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양시은은 간호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주의할게요. 감사해요.”간호사가 나간 뒤 나용민은 침대에 누워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차갑게 픽 웃었다.“하마터면 화병으로 죽을 뻔했구나. 이 불효자식아.”“변호사 사무소에서 연락 왔었어요. “나도현이 갑자기 입을 열자 나용민은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나용민이 한 짓이라는 것을 눈치챈 나도현은 더욱 자신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정말로 나용민이 사주한 일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양시은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도현은 그동안 매일 회사에만 다니면서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 없었어요. 매일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지난번에는 열이 39도까지 올라갔는데도 이튿날 바로 출근했다고요. 대체 도현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건데요.”나용민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나도현이 아팠다는 얘기를 듣자 눈에 띄게 흔들
양시은은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감사합니다.”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얼른 검은색 차로 달려갔다.나도현은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양시은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양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현, 문 열어줘.”나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손을 뻗더니 문이 열렸다. 양시은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왜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여기 온 건데? 하민이 하원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비서님한테 이미 들었어.”나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누가 사주한 것인지.”그가 변호사 되기를 반대하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용민 뿐이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나용민은 나도현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현이 그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나진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병문안 갈까 고려하고 있었으니 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네.”“미안해. 다 내 탓이야...”양시은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네 잘못은 아니야. 내 잘못이지.”나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기대한 그의 잘못이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냉담한 어투로 기쁨을 느낄 리가 없었고 그가 냉담하면 할수록 더 안쓰러웠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도현이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꿈을 방해한다면 숨이 턱턱 막힐 것이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양시은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의 따듯한 체온으로 차가워진 그의 마음을 녹여주려 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나도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와 양시은은 멍한 눈빛으로 그
대체 누가 나도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싸늘해진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양시은도 협조적이었다.점차 그들의 분위기도 바뀌면서 룸 안은 열기로 가득해졌다. 이때 누군가 무심코 물었다.“양 비서님, 나중에 결혼 계획 있으세요?”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입을 연 사람을 보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서는 더 긴장하게 되었다.다행히 양시은은 대충 둘러 말했다.“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은 결혼 계획은 없네요.”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배불리 먹고 즐긴 후 돌아갔다.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던지라 해롱해롱한 상태였고 비서는 그들을 집으로 전부 돌려보랬다. 물론 양시은도 술을 마셨지만 두 잔만 마셨던지라 그저 얼굴만 불그스레한 상태였다.“양 비서님은 혼자 돌아갈 수 있죠? 혼자 갈 수 있으면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비서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직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직원은 비서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네. 전 혼자 갈 수 있어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얼른 자리를 떠나버렸다. 양시은이 위험할지 안 할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도현이 곁에 있는 한 양시은이 절대 위험할 리가 없었으니까.직원들이 떠나고 나니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나도현은 자연스럽게 양시은의 가방을 들어주며 말했다.“데려다줄게. 가자.”양시은은 자신의 가방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뒷좌석에 앉은 양시은은 뒤늦은 취기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나도현은 한참 지나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양시은은 손을 들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잠든 것 같았다.“대표님, 차가 좀 막힐 것 같습니다.”운전기사가 눈치 없이 말하자 나도현은 바로 눈치를 주었다.“목소리를 낮추세요. 길 막히면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