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딸이 더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나길 바란다.지금 배진호가 약간의 성과가 있는 이유는 여이현의 지원 덕분이다.만약 어느 날 여이현이 돕는 것을 멈춘다면?혹은 배진호가 창업에 성공한 뒤 새로운 여자를 만나 권다솔을 이용만 하고 차버린다면?그렇게 되면 권다솔은 너무나 불행하지 않겠는가?김영은은 이전부터 이런 점이 걱정되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딸의 행복을 막을 수 없었다.이번 다툼을 계기로 그녀는 더 확신하게 되었다.배진호는 절대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직접 진호 씨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봤거든요. 우리가 다시 화해하면 제가 뭐가 되는데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김영은은 처음에는 단순히 다툼 정도로만 알았지만 이 말을 듣자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참 기가 막히는구나. 지금부터 다른 여자랑 놀아났다면 나중에 창업 성공하면 두세 명씩 끌어안고 다니겠네? 이혼해라! 너희 둘, 내일 당장 가서 이혼하자. 이혼서류부터 받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권다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방으로 돌아간 뒤 달력을 보니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주말에는 법원이 문을 열지 않으니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권다솔은 휴대폰을 꺼내 배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다음 주 월요일 법원 앞에서 만나요.][다솔 씨, 법원에는 왜요?]배진호는 그녀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답장을 보냈다.그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사실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법원에 가자는 건 이혼증을 받으러 가자는 말이었다.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에게 매달려 보았다.[우리 둘이 먼저 한 번 만나요. 우리 사이에는 아직 오해가 많아요. 정말 이혼을 원한다면 오해를 풀고 나서 이야기해요.][둘이서 더 할 얘기는 없어요. 전에도 이혼 신고하러 가자고 했는데 당신은 나오지 않았죠.
아래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김영은과 마주쳤다.“어머님.”남태건은 정중하게 인사했다.김영은은 고개를 들어 남태건을 바라보며 점점 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권다솔에게로 향하자 눈에는 걱정이 어렸다.“다솔아,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다크서클이 심하니? 설마 어젯밤 한숨도 못 잔 거야?”생각해 보면 권다솔과 배진호는 서로 깊이 사랑했던 사이였다.지금 이혼을 결정한 것이 그녀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김영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래 끌며 고통받느니 짧게 끝내는 것이 낫다고 김영은은 생각했다.가슴 아프지만 딸을 위해 다시 그런 잘못된 관계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에요 엄마. 어젯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서 추워서 깼어요. 그래서 잠을 설친 거예요.”권다솔은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대충 변명을 했다.하지만 엄마인 김영은이 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딸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말했다.“오늘 주말이니까 둘이 밖에 나가서 좀 돌아다니렴. 가면서 내 스킨케어 제품 하나 사다 줄래? 마침 다 썼거든.”“네, 알겠습니다.”남태건이 웃으며 바로 대답했다.그는 김영은을 기쁘게 만드는 데 능숙했다. 몇 마디 말로도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김영은은 시계를 한번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래, 이제 너희 둘도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나가 놀아. 젊은 사람끼리 얘기 나눌 거리가 있잖아?”권다솔은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의 눈의 지울 수 없는 근심을 보며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자신이 잘못한 탓에 어머니까지 걱정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지금 남태건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또 그녀와 함께 연기를 해 준다니 권다솔은 굳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그럼 엄마, 저희 먼저 다녀올게요. 저녁에는 일찍 들어와서 같이 먹을게요.”“너희가 저녁을 안 먹고 들어와도 상관없어.
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사실 그녀도 아이를 정말 좋아했다.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기뻤다.그런데 결과는?아이를 잃었고 깊이 사랑했던 남편도 잃었다. 한때 행복했던 순간들은 마치 환상처럼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깨져버렸고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뿐이었다.“미안해. 내가 괜히 네 아픈 기억을 건드렸어. 다 내 잘못이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바보 같이...”남태건은 점점 초조해지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두 번째로 자신을 때리려 했지만 권다솔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지 마세요. 태건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건 태건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그녀가 아이를 잃은 건 남태건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게다가 방금 했던 말도 그녀에게 크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잃었다고 해서 주변 모든 사람이 그녀 앞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다.“그래도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다솔아, 기분이 안 좋으면 마음껏 화를 내.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써도 괜찮아. 난 널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남태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권다솔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끝없이 많은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보낸 메시지였다.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단 하나도 읽고 싶지 않았다.권다솔은 모든 메시지를 선택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의 휴대폰을 흘끗거렸다.각도상 화면의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 권다솔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한 사람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배진호다!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꼈다. 권다솔이 유산한 이후로 배진호는 남태건과 비교할 자격조차 없게 되었다.방금 일부러 떠본 결과 권다솔은 아직도 그 아이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무게가 가로막혀 있고 정미진이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둘이 다시 함께할
그와 권다솔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호구 짓’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다솔 씨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하거나 잘못한 적 없어. 오히려 내가 잘못했지. 그리고 어머니, 친아들한테 약을 먹이는 짓은 어머니밖에 못 할 겁니다.”배진호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그는 지금도 어머니가 자기에게 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픈 상황에서 아들로서 그 과거를 들추거나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결국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버틸 수밖에 없었고 그 기분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배성연은 약을 먹인 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처음 자신을 불렀을 때 이런 일까지 있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때 정미진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석규리는 급히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주머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지금 몸 상태로는 절대 화내면 안 된다고요. 일단 진정하시고 쉬셔야죠.”“규리야, 봤지?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못 하는데도 일부러 나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정미진은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시선은 아들을 향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아들이 병실에 있는 게 기분만 나빠진다면 차라리 나가는 게 낫겠어요. 그래야 어머니도 마음 편히 요양할 수 있겠죠.”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억눌린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계속된다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왜 자신은 이런 부모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가, 가려거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마. 네가 어릴 때 온갖 고생 다 하며 널 키웠는데 이젠 내가 늙고 병드니까 짐짝 취급을 받는구나. 됐다, 너희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내가 죽더라도 너는 부르지 않을 거야. 밖에서 네 맘대로 살고,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
“괜찮습니다. 전혀 번거롭지 않아요.”석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배진호와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더 함께 있고 싶은 마당에 어찌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겠는가?배성연은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오빠, 우리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규리 씨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배진호는 말없이 조용히 돌아서 나갔다. 어차피 다 정해진 상황이었다.그가 거절하기만 하면 불효자 취급을 당할 것이고, 그러면 정미진은 약도 주사도 거부할 게 뻔했다. 불효 소리를 듣는 건 상관없지만 정미진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긴다.‘정말로 이 길밖에 없는 건가.’석규리는 들뜬 표정으로 그를 뒤따랐다.쇼핑몰로 향하는 길 내내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지만, 배진호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형식적으로 나온 것일 뿐이었다. 대체 이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쇼핑몰 1층에는 다양한 화장품 매장이 있었다. 석규리는 무심코 립스틱 두 개를 골라 배진호에게 물었다.“진호 씨, 어떤 색이 더 괜찮아요?”배진호는 힐끗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똑같지 않아요?”“아니에요. 이건 토마토 레드고, 이건 자몽 레드라서 달라요.”“결국 다 빨간색 아니냐는 겁니다.”배진호는 전혀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석규리는 어쩔 수 없이 립스틱을 내려놓고 다른 제품을 골랐다.파운데이션을 고르던 중 그녀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권다솔과 낯선 남자가 함께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그 순간 석규리의 눈에 강렬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권다솔이 이렇게 빨리 다른 남자를 찾다니 말이다. 안 그래도 배진호 앞에서 권다솔을 깎아내릴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가 직접 확인하게 된 셈이다.‘좋아, 이걸로 변명도 못 하겠지.’석규리는 허둥지둥 돌아서서 배진호의 소매를 잡았다.“여긴 제가 원하는 게 없네요. 우리 다른 가게 한번 볼까요?”“정말 번거롭네요.”배진호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이 바닥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석규리의 손을 뿌
권다솔은 발걸음을 멈췄다.고개를 돌려 배진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배진호가 하는 말의 낱말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단어들이 합쳐진 문장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되묻듯 말했다.“진호 씨 말은... 어머님이 약을 썼다는 뜻이에요? 그것도 그런 종류의 약을?”“네.”배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참 창피했다. 하지만 반드시 권다솔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오해는 풀고 싶었다.그리고 무엇보다, 권다솔 눈에 그가 감정을 농락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했다.“솔직히 그 말 믿기 어려워요. 저... 저는...”권다솔은 당장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마침내 그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 순간 그녀는 잃은 아이를 떠올렸다.분명 아무 문제 없던 아이였다. 그녀의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정미진이 와서 돌봐주겠다고 한 뒤 이상하게도 아이를 잃었다.그때부터 의심은 있었지만, 동시에 그런 의심을 품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미진이 아무리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도 손주의 존재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 여겼다.하지만 오늘 배진호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진은 그들이 이혼하도록 어떤 수단이라도 쓰는 사람이었다. 친아들에게 약을 먹일 정도라면 무슨 못할 일이 있을까. 이젠 증거가 필요 없었다.권다솔은 배진호의 손을 뿌리쳤다.“어머님이 약을 썼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안은 걸 직접 봤어요. 진호 씨, 설마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없다 해도 앞으로 없으리란 보장은 없잖아요.”“다솔 씨! 저를 믿지 않는 거예요?”배진호의 눈빛에는 깊은 괴로움이 어렸다.권다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배진호를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결혼하
남태건은 배진호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배진호 씨, 한 회사의 대표로서 이렇게 질척거리는 모습 보이는 건 별로 좋지 않지 않나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배진호는 권다솔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명예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참이었다. 처음부터 회사를 키운 이유도 그녀에게 더 나은 생활을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태도가 권다솔에게 불편과 피로만 안긴다면 그건 그냥 자기중심적인 욕심일 뿐이었다.“됐어요. 저 피곤해요. 어머님께 드릴 화장품 얼른 고르고 돌아가고 싶어요.”권다솔은 마지막으로 배진호를 한 번 바라봤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은 지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이혼하게 된다 해도 다른 이가 배진호를 함부로 헐뜯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남태건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가까운 가게 들어가서 뭐라도 먹으면서 좀 쉬면 되잖아.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석규리는 다가와 배진호의 팔을 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진호 씨, 우리도 가서 밥 먹어요. 제가 찍어둔 립스틱 색상들이 있는데 성연 씨는 뭐가 좋은지 물어보고 싶어요.”“석규리 씨, 여긴 무대도 아니고 촬영장도 아니에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요.”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권다솔이 남태건과 함께 있어도 석규리와 유치한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둘 다 어른인데 이런 식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권다솔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진호 씨! 전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거예요.”석규리는 권다솔의 뒷모습을 가리켰다.“두 사람 아직 이혼 전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벌써 다른 남자랑 다니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요?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저 여자는 정말...”짝!석규리는 얼어붙은 듯 얼굴을 감쌌다. 믿기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저를 때린 거예요?”많은 사람이 오가는 쇼핑몰 한가운데서 배진호는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에
배진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방금 전 석규리 씨가 다솔 씨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요?”“당연히 기억하죠.”석규리는 왜 배진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번 말했으면 두 번도 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배진호가 먼저 물어본 것이다.“권다솔 씨는 진호 씨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난 거니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아까 진호 씨도 직접 봤잖아요.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계속 자신을 속일 순 없지 않나요?”석규리는 말을 하며 정미진 이야기를 꺼냈다.“만약 어머님께서 이걸 알면 분명 더 화낼 거예요.”“그래요. 다솔 씨랑 저 아직 이혼하지 않았어요. 석규리 씨, 저는 지금 기혼자예요. 이렇게 제 앞에서 이런 얘기 하는 걸 나서서 내연녀가 되려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나요?”석규리의 얼굴은 금세 붉었다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연녀라니, 얼마나 거북한 단어인가. 배진호는 어떻게 이렇게 불쾌한 표현으로 그녀를 묘사할 수 있을까?“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나요...?”“다솔 씨와 그 남자는 훨씬 더 결백해요. 둘은 서로 껴안거나 옷차림 흐트러진 채 한 방에 있은 적도 없고, 게다가 다솔 씨 어머니는 자식한테 약을 먹이는 짓 따윈 하지 않아요.”배진호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요즘은 반려동물을 키울 때도 동물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정미진은 정말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석규리는 여전히 자신이 내연녀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반박했다.“그렇다면 어머님께서 권다솔 씨를 싫어하는 건 분명 권다솔 씨한테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니에요? 아니면 왜 두 분 사이가 이렇게 험악해졌겠어요?”이건 전형적인 피해자 유죄 논리였다.“저는 석규리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논리대로라면 그건 전부 석규리 씨 탓이라는 얘기겠네요.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저랑은 좀 떨어져 지내줘요.”석규리는 한마디도
“별이 아주 잘했어! 좋은 걸 나눌 줄도 알고. 우리 아들 정말 잘 크고 있네.”온지유는 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부모로서 그녀는 아들과 딸이 화목하게 잘 지내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며 의지하길 바랐다.여하간에 부모를 제외한 두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여이현은 딸을 안고 거실을 두어 바퀴 걸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기 흔들이 의자에 눕혀 김명자에게 맡겼다.저녁은 이미 준비되었다.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으로 가서 즐겁게 저녁을 즐겼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고 심심해진 온지유는 핸드폰을 들었다.그러다가 우연히 권다솔이 보낸 답장을 보았다.[다음 주에 진호 씨랑 가정 법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이혼할 거거든요.]온지유는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볐다.‘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었나? 얼마 전만 해도 다솔 씨가 나한테 임신한 소식을 알려줬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혼한다고.?'그녀는 누군가 권다솔 핸드폰을 해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게임을 하다 져서 벌칙으로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농담이죠? 다솔 씨, 이런 농담은 재밌지 않아요. 이혼이란 단어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에요.][전 농담이 아니에요. 정말로 이혼할 거예요. 무조건 이혼할 거예요. 전 이미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누구도 절 말릴 수 없어요.]권다솔은 답장하면서도 답답한 가슴에 짜증이 솟구쳤다.만약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무조건 남태건을 칭찬하는 말만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찾아 상처만 준 배진호를 잊기를 바랄 테니까.하지만 친구들에게 털어놓기엔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결국 고민 끝에 온지유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온지유에겐 아이가 둘이나 있었으니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혹시 전화 통화 가능해요? 아니면 영상 통화라도 가능할까요?]온지유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 뒤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 영상
온지유는 지금 당장 모임을 할 마음이 없었다.조직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괜히 권다솔과 배진호를 만나면 그 조직의 눈길이 그들한테까지 옮겨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감사가 아니라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집에 가서 내가 진호 연락해 볼게. 마침 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해보고 싶었어.”여이현은 한편으로는 배진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성실한 인품을 믿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맡기면 제대로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됐어, 운전에 집중해. 내가 그냥 다솔 씨한테 문자나 보낼게. 이 시간대면 두 사람 다 일하고 있을 수 있어.”온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권다솔에게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자 더는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넣었다.곧 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온지유는 포장된 음식을 들고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별이가 후다닥 달려왔다.별이는 온지유 손에 든 음식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매달렸다.“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걱정했잖아요. 혹시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엄청 무서웠어요!”“엄마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치킨 사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 떨어졌었어. 그래서 새로 나오길 기다리느라 좀 늦어졌어.”온지유는 여이현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별이는 마치 어른처럼 깊은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됐어요. 하지만 엄마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이면 그냥 돌아와요. 굳이 거기서 기다릴 필요 없어요. 치킨 못 먹어도 상관없어요.”집에는 먹을 것도 많고 매일 식사도 푸짐하다. 굳이 치킨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우리 별이가 제일 착하네.”온지유는 별이를 번쩍 안아 한 바퀴 빙 돌았다.별이는 온지유에게 안겨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온지유도 미소 지었다.한편 여이현은 온하윤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손
여이현은 주변을 계속 돌며 온지유에게 전화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바로 이때, 그가 거의 절망하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온지유였다.여이현은 급히 돌아서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단숨에 안아 올렸다.“걱정했잖아. 널 찾을 수도 없고 전화해도 안 받고,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너무 무서웠어.”만약 온지유에게 큰일이라도 났다면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엄마를 잃으면 어떻게 건강히 자랄 수 있겠는가.“미안해, 방금까지 경찰서에서 진술하느라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놨어. 나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온지유는 부드럽게 달래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정말 괜찮아.”“근데 피가 묻었잖아.”여이현은 그녀를 놓고 위아래로 살펴보다 원피스 군데군데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디 다친 거야? 지금 당장 병원부터 가자.”“내가 다친 거 아니야. 이건 그 인간들 피가 묻은 거고 나는 멀쩡해. 믿기지 않으면 봐, 상처 난 데 있어 보여?”온지유는 일부러 소매를 걷어 올려 맨살을 보여주었다. 팔에는 약간의 멍 자국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그렇다 해도 여이현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저 자식들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분명 또 찾아올 텐데...”“물 들어오면 둑 막고, 적 오면 장수로 막는 거지. 난 안 무서워. 게다가 너도 있잖아. 네가 우릴 잘 지켜줄 거라고 믿어.”온지유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단단한 신념을 담아 말했다.어떤 조직이든 둘이 힘을 합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녀에게 있었다. 오늘도 결국 그녀가 괴한들을 제압하지 않았던가.“그놈들은 벌써 경찰서에 넘겼어. 아무 말도 안 하긴 했지만 내가 이걸 챙겨왔거든.”온지유는 가방을 열어 포장해 둔 주삿바늘을 꺼내 여이현에게 건넸다.“그놈들이 이걸 내 몸에 주사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도리어 내가 그중 한 놈한테 주사해 줬지. 여기 약물 조금 남았으니까 뭐가 들
여이현 쪽.회의를 마치고 나서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시간상 지금쯤이면 온지유는 이미 집에 돌아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여이현은 바로 집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벨이 몇 번 울리고 받아 든 건 별이였다. 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아빠!”“별아, 네 엄마는 지금 뭐 하고 있어?”여이현은 별이와 이야기할 때 한결 부드럽게 말하는 편이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 저는 아빠한테 묻고 싶었는데... 왜 엄마를 그렇게 오래 잡아줬어요?”별이는 살짝 불만스러운 듯한 톤으로 물었다.여이현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온지유는 서류를 전달한 뒤 회사에서 나갔다. 설령 잠깐 다른 일을 보더라도 이 시각이면 이미 집에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을까?“별아, 집에 무슨 일은 없어? 혹시 이상한 사람이 와서 문 두드린다거나 그런 거 없었어?”여이현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아무래도 집에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문제가 생기면 그라도 있어야 아이들이 안전했다.별이는 하품을 하며 휴대전화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집 안 모니터를 켰다. 화면 속 마당은 텅 비었고 경호원 두 명이 순찰 중이었다.“아무도 안 왔고 다들 괜찮아요. 동생도 방금 깨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우유를 줬고, 제가 잠깐 놀아줬어요. 지금 다시 자고 있어요.”상황을 전부 설명한 뒤 별이는 잠시 고민했다. 여이현은 절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는 예전에 소미를 대사관에 보낼 때 차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대화를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걸까 싶었다.그리고 집에는 아무 일이 없지만 온지유가 밖에 있었다.별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빠, 빨리 엄마를 찾아줘요. 저 엄마가 위험할까 봐 걱정돼요. 엄마가 치킨을 사 온다고 했는데... 한 번도 약속 어긴 적 없는데 이렇게 오래 안 돌아올 리 없어요. 분명 무슨 일
온지유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을 굴렸다. 두목은 잠시 기다리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하나 더 알려줄게. 보물과 관련된 비밀이 있어. 그 보물을 손에 넣으면 진정한 부귀를 누릴 수 있어. 온지유, 가까이 좀 와봐. 이 비밀은 너만 들을 수 있어.”엄청난 재물이 눈앞에 있다면 누구라도 솔깃하기 마련이다.역시나 온지유도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그를 향해 다가갔다. 두목은 타이밍을 재다가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 온지유 팔뚝을 향해 세게 찔러 넣었다.그는 정말 조직을 배신할 리가 없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여자일 뿐이고, 여자는 속이 얕은 존재라고 그는 믿었다. 그냥 허황한 보물 얘기만 하면 금세 넘어올 거로 생각한 것이다.이 약이 주사되고 나면 5분도 안 돼 약효가 나타나고, 그때가 되면 온지유가 매달려 빌게 될 것이다. 여이현이 그녀를 얼마나 아낀다고 했던가? 아내를 붙잡고 협박하면 결국 여이현도 고개를 숙일 거고 조직에 보고하면 실적금이 나올 게 뻔했다.그는 벌써 미래의 달콤한 보상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온지유는 재빨리 팔을 빼고 그가 다친 발가락을 세게 짓밟았다. 동시에 반격하듯 주사기를 빼앗아 순식간에 그의 팔에 꽂고 남아 있던 약물을 주입했다.그 모든 동작이 한 흐름처럼 매끄럽게 이어졌다. 두목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봤다.“어떻게 이럴 수가? 너, 넌 애초에 날 믿지 않았던 거지!”사람의 반응속도가 이렇게 빠를 리 없다. 딱 한 가지 가능성뿐이다. 처음부터 온지유는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그가 늘어놓은 말은 온지유 귀에 한 자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내가 너희 같은 놈들을 왜 믿어?”온지유는 냉소를 지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해 있던 네 부하들이 보물 얘기를 시작하니 갑자기 태연해지더라고. 이건 네가 거짓말을 하고
온지유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두목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엔 공포가 어렸다.온지유는 너무 강했다. 게다가 공격도 서슴지 않고 가차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와중에 특히 허리는 뼈라도 부러진 것처럼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너... 너 오지 마! 우리한테 손대면 조직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야!”온지유는 비웃는 얼굴을 했다.“내가 바보로 보여? 지금 너희를 풀어준다고 해서 조직이 물러날 것 같아? 게다가 너희들도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 같은데?”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조직의 개나 마찬가지였다. 명령받은 대로 더러운 일을 대신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일이 성공하면 서로 좋은 거겠지만 지금 상황은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내가 너희를 보내준들 살아서 갈 수나 있을 것 같아?”온지유가 되받아쳤다.두목은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온지유,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제발 우리를 놓아줘. 우린 조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대신 대가로 조직에 관한 비밀을 알려줄게.”“형님!”옆에 널브러진 부하들이 초조하게 외쳤다. 몸을 마음대로 쓸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지금 이 자리에서 조직을 팔아넘기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임무 실패 후 조직에 돌아가면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여지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직을 배신하면 그때는 진짜 죽음뿐, 가족이나 친구들까지 몰살당할 수 있었다.“당신 부하들은 생각이 다르나 보네.”온지유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이 근처에 경찰서가 있어. 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5분 안에 출동할 거야. 너희 신분증 같은 건 없겠지? 불법으로 들어온 조직원일 테니까.”온지유는 조직의 실체를 몰랐지만, 이전에 소미가 외국 아이였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아마 본거지는 해외일 가능성이 컸다. 이들 역시 비밀리에 들어온 범죄자일 가능성이 크다. 살인미수에 신분 미확인 불법입국자라면 잡혀도 결코
셋이 합세하면 온지유 하나 제압 못 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온지유는 한 팔로 두목의 팔을 낚아채 뒤로 돌더니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에 세게 차올렸다.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고 온지유가 팔을 꽉 잡아 허리를 펼 수도 없었던 두목은 독설을 퍼부었다.“놓지 못해? 안 놓으면 가장 독한 약을 주사할 거야. 그러면 넌 암캐처럼 땅바닥에 무릎 꿇고 구걸하게 될 거라고!”하지만 온지유는 이 말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지금 그들을 놓아주고 웃는 얼굴로 화해를 청한다고 해서 그들이 물러나기라고 할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이들은 목숨을 걸고 그녀를 잡으러 온 악당들이다. 이미 그녀를 납치해 약 실험을 할 생각인데 전력을 다해 저항해야 희미한 생존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울고불고 애원해 봤자 비참한 결말은 뻔하다. 차라리 부딪쳐보는 게 낫다.온지유는 몸을 홱 돌리며 두목의 팔을 놓아주고 동시에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강한 충격에 두목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날아들었고, 그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공격 태세를 취하던 중 그대로 두목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말았다.“멍청한 놈아!”두목은 화가 치밀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편을 때리다니 적이 무서울 게 아니라 이런 동료가 더 무서웠다.그러나 잘못된 부하를 둔 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다른 동료들이었으면 진작 온지유를 잡았을 것이고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굴까지 한 대 맞았으니 그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죄, 죄송해요, 형님. 저도 반사적으로 그런 겁니다. 뭐가 갑자기 날아오길래 밀쳐내려다 보니...”남자는 허둥지둥 변명했다.조직 내 위계질서가 분명한 이상 두목은 그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두목이 마음만 먹으면 그는 내일까지 살지 못할 수도 있었다.“쓸모없는 놈.”두목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방금 굴욕을 당한 이상 이 치욕을 배로 갚아주고 싶었다. 그는 온지유를 개만도 못한 상황에 몰고 가리라 결심했
“당신들 누가 보낸 거지?”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다섯 남자를 주의 깊게 살피며 이들의 전투력을 속으로 가늠했다.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이 골목만 빠져나가서 남쪽으로 백 미터 정도만 가면 경찰서가 있었다. 설령 이들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찰서까지 달려가기만 하면 안전해질 수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은 온지유의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저 그녀가 겁먹어 차 안에서 내리길 주저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냘픈 여자가 이렇게 덩치 큰 사내 다섯 명을 보고 겁에 질려 몸도 못 가눌 만했다. 얼굴색 안 변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반항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들은 남녀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 원래부터 승산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5:1이다. 온지유가 반항해 봤자 상대가 되겠냐는 식이었다.“누가 보낸 건지는 알 필요 없어. 조용히 내려오면 우리도 좀 부드럽게 대해줄 수 있어. 아니면 말이야...”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는 차창 너머로 온지유를 음흉하게 훑어봤다.창문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좋은 몸매에 남자들의 시선이 더욱 탐욕스러워졌다. 애 키운 여자로는 안 보였다. 게다가 밤이라 주변에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없고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이가 없었다.“형님, 좀 있다가 저희도 한몫 챙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들도 침을 흘렸다.두목은 크게 웃었다.“그래, 내가 먼저 놀고 끝나면 너희가 알아서 해. 단 숨은 붙여둬야 해. 조직에서 시킨 대로 살아 있는 상태로 데려가 약 실험해야 하잖아.”조직이라는 단어에 남자들의 얼굴에는 잠깐 긴장감이 스쳤다. 이 작은 표정 변화는 온지유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이들이 속한 조직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약 실험이라는 단어에서 온지유는 바로 소미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와 같은 조직이 보낸 듯했다.저번에는 온하윤을 노리더니 이번엔 그녀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다행히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돌아다닌 덕에 이들을 집으로 유인
온지유는 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좋아, 다 들어줄게. 집에서 얌전하게 기다려, 엄마 금방 올게.”그녀는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차고에 가서 아무 차나 골라 탄 뒤 빠른 속도로 회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온지유는 뒤따라오는 차량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거리를 지날 때 멀리서 뒤따라오던 차 한 대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고 있었다.곧 온지유는 회사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정중히 인사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바쁘신데 신경 안 쓰셔도 돼요.”온지유는 발걸음을 재촉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이현에게 서류를 건넸다.여러 사람 앞에서 둘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부부인 만큼 눈빛 하나로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작은 비밀이었다.회의실에서 나오는 길에, 온지유는 여이현이 새로 채용한 비서와 마주쳐 가볍게 인사했다. 그녀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회사를 나와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거기에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있었고 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도 가까웠다.주말이라 패스트푸드 가게에는 인파로 북적였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많았고 손님이 많으니 음식 나오는 속도도 더뎠다.종업원이 물었다.“손님, 에그타르트가 다 팔렸어요. 지금 굽고 있어서 2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별이는 에그타르트를 유난히 좋아하고 특히 이 집 것을 제일 좋아한다. 이미 온 김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괜찮아요. 다 되면 불러주세요.”온지유는 기다리며 옆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국제 뉴스를 훑어봤다.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초 만에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주위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 뿐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착각인가?‘하지만 그녀는 원래 직업상 위협에 민감하며 여성의 육감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