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다솔은 발걸음을 멈췄다.고개를 돌려 배진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배진호가 하는 말의 낱말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단어들이 합쳐진 문장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되묻듯 말했다.“진호 씨 말은... 어머님이 약을 썼다는 뜻이에요? 그것도 그런 종류의 약을?”“네.”배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참 창피했다. 하지만 반드시 권다솔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오해는 풀고 싶었다.그리고 무엇보다, 권다솔 눈에 그가 감정을 농락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했다.“솔직히 그 말 믿기 어려워요. 저... 저는...”권다솔은 당장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마침내 그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 순간 그녀는 잃은 아이를 떠올렸다.분명 아무 문제 없던 아이였다. 그녀의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정미진이 와서 돌봐주겠다고 한 뒤 이상하게도 아이를 잃었다.그때부터 의심은 있었지만, 동시에 그런 의심을 품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미진이 아무리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도 손주의 존재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 여겼다.하지만 오늘 배진호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진은 그들이 이혼하도록 어떤 수단이라도 쓰는 사람이었다. 친아들에게 약을 먹일 정도라면 무슨 못할 일이 있을까. 이젠 증거가 필요 없었다.권다솔은 배진호의 손을 뿌리쳤다.“어머님이 약을 썼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안은 걸 직접 봤어요. 진호 씨, 설마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없다 해도 앞으로 없으리란 보장은 없잖아요.”“다솔 씨! 저를 믿지 않는 거예요?”배진호의 눈빛에는 깊은 괴로움이 어렸다.권다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배진호를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결혼하
남태건은 배진호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배진호 씨, 한 회사의 대표로서 이렇게 질척거리는 모습 보이는 건 별로 좋지 않지 않나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배진호는 권다솔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명예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참이었다. 처음부터 회사를 키운 이유도 그녀에게 더 나은 생활을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태도가 권다솔에게 불편과 피로만 안긴다면 그건 그냥 자기중심적인 욕심일 뿐이었다.“됐어요. 저 피곤해요. 어머님께 드릴 화장품 얼른 고르고 돌아가고 싶어요.”권다솔은 마지막으로 배진호를 한 번 바라봤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은 지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이혼하게 된다 해도 다른 이가 배진호를 함부로 헐뜯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남태건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가까운 가게 들어가서 뭐라도 먹으면서 좀 쉬면 되잖아.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석규리는 다가와 배진호의 팔을 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진호 씨, 우리도 가서 밥 먹어요. 제가 찍어둔 립스틱 색상들이 있는데 성연 씨는 뭐가 좋은지 물어보고 싶어요.”“석규리 씨, 여긴 무대도 아니고 촬영장도 아니에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요.”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권다솔이 남태건과 함께 있어도 석규리와 유치한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둘 다 어른인데 이런 식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권다솔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진호 씨! 전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거예요.”석규리는 권다솔의 뒷모습을 가리켰다.“두 사람 아직 이혼 전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벌써 다른 남자랑 다니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요?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저 여자는 정말...”짝!석규리는 얼어붙은 듯 얼굴을 감쌌다. 믿기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저를 때린 거예요?”많은 사람이 오가는 쇼핑몰 한가운데서 배진호는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에
배진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방금 전 석규리 씨가 다솔 씨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요?”“당연히 기억하죠.”석규리는 왜 배진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번 말했으면 두 번도 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배진호가 먼저 물어본 것이다.“권다솔 씨는 진호 씨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난 거니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아까 진호 씨도 직접 봤잖아요.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계속 자신을 속일 순 없지 않나요?”석규리는 말을 하며 정미진 이야기를 꺼냈다.“만약 어머님께서 이걸 알면 분명 더 화낼 거예요.”“그래요. 다솔 씨랑 저 아직 이혼하지 않았어요. 석규리 씨, 저는 지금 기혼자예요. 이렇게 제 앞에서 이런 얘기 하는 걸 나서서 내연녀가 되려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나요?”석규리의 얼굴은 금세 붉었다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연녀라니, 얼마나 거북한 단어인가. 배진호는 어떻게 이렇게 불쾌한 표현으로 그녀를 묘사할 수 있을까?“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나요...?”“다솔 씨와 그 남자는 훨씬 더 결백해요. 둘은 서로 껴안거나 옷차림 흐트러진 채 한 방에 있은 적도 없고, 게다가 다솔 씨 어머니는 자식한테 약을 먹이는 짓 따윈 하지 않아요.”배진호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요즘은 반려동물을 키울 때도 동물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정미진은 정말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석규리는 여전히 자신이 내연녀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반박했다.“그렇다면 어머님께서 권다솔 씨를 싫어하는 건 분명 권다솔 씨한테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니에요? 아니면 왜 두 분 사이가 이렇게 험악해졌겠어요?”이건 전형적인 피해자 유죄 논리였다.“저는 석규리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논리대로라면 그건 전부 석규리 씨 탓이라는 얘기겠네요.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저랑은 좀 떨어져 지내줘요.”석규리는 한마디도
“제가 무슨 서러울 게 있겠어요?”권다솔은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에 배진호를 본 건 맞지만, 본 건 본 거지 그렇게 넋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배진호를 천천히 잊으려 하고 있었다. 인생은 길고 한 남자 때문에 평생 슬픔에 잠길 순 없는 법이다.‘조금씩 잊으면 되는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원래는 너 호텔에 데려가서 밥 먹이려고 했는데, 네가 배고프다길래 그냥 이 상가에서 아무 가게나 들어왔어. 다솔아, 전에 네가 권씨 집안에 있을 때 이런 서러움 당한 적 있어?”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를 부추기는 말투를 이어갔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 모든 게 배진호 탓이라는 것이다.배진호의 가정형편은 평범했다. 그동안 돈을 꽤 모아두긴 했지만 집 사고 결혼하는 데 쓰고, 또 직접 회사를 운영해야 하니 형편이 팍팍했을 터였다.반면 오래 운영해 온 권씨 가문 같은 기업은 달랐다. 안정적인 현금 흐름과 배당금이 있고 집안에 고정 자산도 많았다. 상가 임대료만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니까.권다솔은 남태건의 속내를 알았지만 정말로 이게 서러울 일인지 의문이었다.“이 가게 생선이 아주 신선하고 손님도 많네요. 입맛 좀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저 가끔은 노상에서 파는 간식도 사 먹어요.”특히 그녀와 배진호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엔 더욱 그랬다. 둘은 정말 바빴고 돈도 별로 없었으며 밤늦게 퇴근하니 집에 가서 요리할 시간이 없었다.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간단히 사 먹곤 했다. 그 시절은 오히려 가볍고 한가로웠다. 지금 돌이켜봐도 권다솔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서러울 것도 없었다.‘그때가 훨씬 마음 편했어.’그녀는 속으로 담담히 생각했다.“노상 간식?”남태건의 눈가가 붉어졌다.“네가 나한테 시집오면 절대 이런 서러움 안 겪게 해줄게. 권다솔, 맹세하는데 너를 모두가 부러워할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마침 그때 종업원이 생선구이를 내왔다. 이들이 시킨 건 국물이 있는 생선구이였는데, 펄펄 끓는 국물에서 나온 뜨거
“생선구이 다 먹고 나서 1층 좀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네가 피곤해 보이네.”남태건은 권다솔의 눈 밑 다크서클을 보며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권다솔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제 잠을 잘 못 자서요. 집에 가서 좀 더 자지 않으면 너무 피곤할 것 같아요.”그러자 남태건은 미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도 결국 인정했다.“그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우선 편히 쉬어.”그들은 더 이상 화장품을 고르지 않았다. 남태건이 아예 중장년층용 세트 전부를 싹 쓸어 담았다. 에센스 제품까지 통으로 챙기니 점원의 입꼬리가 귀 뒤까지 넘어갈 듯했다.“손님 정말 통 크시네요. 이렇게나 많은 세트라면 세 사람이 써도 다 못 쓸걸요?”점원이 감탄을 흘렸다.“어머니께 드리고 싶은데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일단 다 사서 직접 써보시게 하려고요.”이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은 줄곧 권다솔에게 머물렀다.점원들은 눈치가 빨랐다. 입으로는 어머니라고 하지만 사실상 예비 장모님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남자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까?급기야 한 점원은 권다솔에게 다가와 치켜세웠다.“예비 신랑이 정말 좋네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신경 써주는 남자 찾기 힘들어요. 저도 애가 있지만 친정 갈 때 뭘 좀 챙기려 하면 남편은 내켜 하지도 않거든요.”그러자 권다솔이 고개를 저었다.“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세트들 제 카드로 결제할게요.”‘어차피 엄마한테 드릴 물건이니까...’점원 말대로라면 사위가 장모님을 위해 챙기는 선물이겠지만, 남태건과 그녀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 남의 돈을 이렇게 많이 쓸 수는 없었다.점원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너무 들떴나 싶었다. 그래도 누가 결제하든 상관없었다. 팔기만 하면 되는 법이니까.카드 결제는 금방 끝났다. 잠시 후 남태건이 세트 박스를 다 포장해 들고 왔을 때, 권다솔의 손에 영수증이 있는 걸 발견했다.“왜 네가 결제했어?”남태건은 의아해했다.“원래도 엄마한테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다.남태건과 권다솔이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오는데 멀리서부터 배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배진호는 누군가와 부딪힌 차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그쪽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게 맞고 사진도 찍었으니 보험 처리를 할게요.”“안 돼. 네가 보험 처리한다면 바로 넘어가 줄 것 같아?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이 차 뭔 줄 알아? 비싼 차야. 당장 1000만 원 물어내. 한 푼도 깎지 말고.”남자는 막무가내로 우겼다. 그는 심지어 옆에 서 있던 석규리에게까지 시비를 걸었다.“너희 둘 어디 결혼하러 가? 운전은 왜 그렇게 급하게 해? 제정신이야?”배진호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참고 견뎠다.“책임질 테니 말 좀 가려 해요. 인신공격도 삼가세요.”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권다솔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문득 회사가 막 출범하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배진호는 사업을 키우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에 나가야 했다. 아마 고객들을 대할 때도 지금처럼 불편해도 참고 화가 나도 웃어넘겼을 것이다.그녀 어머니가 말했던 것 중 하나는 틀렸다. 배진호가 정말 그녀를 이용하려 했더라면 고객 붙잡느라 고생할 시간에 차라리 그녀의 집안에 매달렸을 테니 말이다.“내 차를 망가뜨려 놓고 내가 한두 마디 하는 것도 못 참아? 너랑 네 마누라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라고!”남자가 계속 악담을 퍼부었다.“우린 부부 사이 아니에요.”배진호가 짧게 반박했다.“부부가 아니면 내연 관계냐? 아니면 왜 손을 잡고 다녀? 내가 보기엔 둘 다 멀쩡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분명 매일 밤 한 이불 덮고 잘 거 아냐?”남자는 목청을 높여 일부러 주위 사람들 귀에 들어가도록 비아냥댔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배진호가 경찰을 부르려 할 때, 그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남태건을 발견했다.“어이쿠, 남 대표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그는 태도가 싹 바뀌어 허리를 굽혔다.남태건은
“태건 씨? 두 사람 무슨 얘기 해요?”권다솔이 이쪽으로 다가왔다.남태건은 바로 배진호에게서 한발 물러나며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돌아가자. 어머니가 선물을 보면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등을 보이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자, 배진호는 순간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억지로 자신을 누르며 집안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진 권다솔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진호 씨, 봤죠? 권다솔 씨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방금도 두 사람이 저희 앞에서 자랑하듯 굴었어요.”석규리는 서둘러 흉을 보며 배진호와 팔짱을 끼려 했다.배진호는 티 안 나게 몸을 빼며 말했다.“차에 타요. 병원에 데려다줄게요.”“알겠어요. 얼른 돌아가죠. 어머님이랑 성연 씨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늦으면 안 좋잖아요.”석규리는 마지못해 그의 말에 따르며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배진호는 그녀를 힐끗 보고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뒷좌석에 앉아요.”“이미 앉았고 안전벨트도 맸는데 왜 또 내리라 하는 거예요? 어디 앉든 똑같아요. 얼른 출발해요. 여기서 병원까지 얼마 안 걸리잖아요.”석규리는 고개를 떨구며 눈에 못마땅한 기색을 감췄다.그가 이렇게까지 선을 긋고 멀리하니 답답하고 불쾌했다. 정미진에게 더 독하게 부탁해 그를 완전히 정신 잃게 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렇게만 했더라면 이후 무슨 말을 꾸며내든 마음대로였을 텐데 말이다.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만 석규리는 어떻게 하면 그가 권다솔을 완전히 잊을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계산했다.얼마 안 가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배진호는 혼자 문을 열고 내려섰고, 석규리는 그 뒤를 따라 병실로 향했다. 그는 병실에 들어가 손에 든 봉투를 배성연에게 건넸다.“이거 선물이야.”“고마워, 오빠.”배성연은 봉투 안을 살펴보고 환히 웃었다.“나랑 언니 취향이 진짜 비슷한 것 같아. 파운데이션 컬러까지 똑같네.”하지만 배진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배성연은 혼잣말처럼 몇 마디 하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일 있겠어? 너희도 알잖아, 나 원래 아프지도 않은데 그냥 진호 앞에서 쇼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안 하면 어쩌겠어? 지금쯤 그 애는 요물한테 완전히 세뇌당했을걸.”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꾀병을 부린다고 진짜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지금 정미진이 가장 신경 쓰는 건 배진호였다.“규리야, 아줌마가 부탁할게. 꼭 진호가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게 해줘. 내가 애를 간신히 정리한 것도 둘을 완전히 끊게 하려고 그런 거잖아.”배성연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선물을 힐끗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알겠어요, 어머님. 남자는 가장 약해졌을 때 여자의 위로를 거부하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권다솔 씨는 벌써 다른 남자까지 구했으니 저희가 힘 합치면 둘이 절대 다시 붙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석규리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녀는 오늘 남태건을 본 순간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바로 알아챘다. 어쩌면 그녀와 같은 부류일 지도 몰랐다.정미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잘 돌아가고 있군.’한편 병실 밖에서 배진호는 정미진의 검사 기록을 들고 의사를 찾았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였다.“에휴, 어머님 상태가 정말 심각하네요.”의사는 병록을 뒤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배진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어머님한테 잘해드려요. 자식으로서 효도하는 게 중요하죠. 괜히 화나게 했다가 정말 ICU라도 들어가면 그땐 후회해도 늦어요. 심장도 안 좋네요. 심장 수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요?”배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수술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의 마음 한구석에 부끄러움이 스쳤다.‘엄마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엄마 병까지 의심하다니...’“이 수술은 위험 부담이 커요. 어머님 몸 상태도 좋지 않아서 수술대에 오르면 무사히 끝날지 장담 못 해요.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하는 게 좋아요.”의사는 계속 효도를 강조했다. 사실 그와 정미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
온지유는 그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할 겨를도 없을 수 있어요?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들도 휴가가 있던데 명진 씨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요? 당신 생각도 잘 알아요.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괜찮지만 그래도 결국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할 에너지가 있으면 친자식을 낳으면 되잖아요.”지금은 좋은 마음으로 입양했다 하여도 커서 입양한 자녀들 간의 모순으로 불행하게 된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온지유의 걱정이 틀리진 않았다.인명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 말은 왜 해. 너의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내가 왜 다른 아이를 입양할 생각 하겠어? 법로가 나한테 너하고 별이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고 또 별이가 나중에 크면 이 삼촌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잖아. 그때가 서 별이가 날 너희 별장으로 데리고 가면 우린 또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온지유는 인명진의 이런 생각에 너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임무를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명진 씨 옆에는 반드시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온지유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명진의 자료를 만들었고 바로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분명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데 혹시나 인명진이 원하지 않으면 되려 부담이라도 될가봐 다시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그때 여이현은 집에 돌아와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 요즘 항상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온지유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인명진 씨 땜에 그래.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삶을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인명진 씨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냥 혼자 살고 있잖아. 금방 그의 자료를 만들어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 했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에게 빌붙어 사는 작은 변호사가 아니었고 심지어 임다혜와의 앙금도 풀고 둘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김혜연 쪽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온지유는 여름방학에 윤별을 데리고 Y 국으로 갈 계획이었고 인명진도 직접 나설 예정이었다.온지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결혼도 하고 홍혜주는 출산도 앞두고 있었고 양시은과 나도현도 이젠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인명진만 미혼에 아직도 혼자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만난 남자를 처음엔 좋게 보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자 안심되었다.심지어 나민우도 지난달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고 결국 이제 남은 건 인명진뿐이었다.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많이 도와준 인명진을 가족으로 생각한 온지유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어 하지 않으려던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명진 씨, 제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자기 행복 찾아 잘 살고 있는데 명진 씨도 이젠 그럴 때가 된 거 같아요. 명진 씨처럼 훌륭한 남자가 본인만 원한다면 좋은 사람은 많을 거잖아요.”인명진은 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전에 여이현이 죽었다고 생각한 5년 동안은 인명진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그 뒤로 인명진은 뒤에서 지켜주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온지유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네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나설 수 있어 좋고 더욱이 법로가 떠나시면서 옆에서 너를 잘 지켜주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하지만 저는 명진 씨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명진 씨도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셔야죠. 홍혜주 씨도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데 이젠 정말 명진 씨만 남았어요. 그러면...”온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명진은 말을 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인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건 아니잖아. 율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어.”인명진은 항상 온지유가 행복하
현민아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준 예물인데 나한테서 뺏어가려 하지 마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잖아요. 근데... 아빠는 사기꾼이야.”현민아의 끝없는 투정 부림에 현민아의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집 계약서도 돌려받았고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현민아의 아버지는 현민아가 원하든 하지 않든 일단 둘러메고 집으로 들어갔다.양시은은 옆에 서 있는 하민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니 이런 일로 어떤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돼. 유치원에서도 일부러 남을 냉정하게 대해서도 안 돼, 알았지?”“알겠어요.”하민은 양시은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최정숙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우리 귀염둥이 손자가 유치원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그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말했다.“집 계약서 8권이면 재산도 적지 않은데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양시은은 최정숙이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요즘 애들이 뭘 알겠어요. 애들끼리 뭔 생각을 못 하겠어요.”“엄마, 왜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만들어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에 정말 탄복해요. 집 계약서 8권이 뭐가 대단하다고, 우리 하민이랑 비기면 턱도 없는걸요. 그 여자아이는 단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지금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도 이십여 년이나 남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변할 것으로 생각한 나도현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혼약을 맺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와 같이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일은 귀찮다고만 생각되었다.최정숙은 나도현의 말에 변명하며 말했다.“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라고는 안 했잖아? 뭐가 그렇게 안 달아 할 지경이니?”“그럴 만도 했잖아요. 전에 저도 엄마가 벌려놓은 이런 일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는데 제 아들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죠.”나도현의 말에는 토하나라도
“제가 어제 집에 돌아와 하민이의 가방을 열어보니 이런 집 계약서들이 있었어요. 현민아가 가방에 집어넣었나 봐요.”알고 보니 하민이가 잘생겼다고 오랫동안 지켜본 현민아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하민이가 평소에 말을 잘 안 한 것 땜에 삼촌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었고 그런 행동이 귀여웠던 삼촌은 조롱하는 식으로 현민아에게 친구보다 결혼이 좋은 거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에 현민아가 몰래 집 계약서들을 학교에 가져가 예물이라면서 하민이의 가방에 넣어 준 것이었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말을 듣고 더욱 난처해졌다.“우리 꼬마 아가씨, 넌 아직 어려서 예물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 다음부터는 남의 책가방에 물건을 함부로 넣으면 안 돼.”현민아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난 하민이랑 친구 하고 싶단 말이에요. 친구가 되고 싶으면 뭐라도 보여줘야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잖아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시은도 현민아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하민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민아가 어디서 어떤 말을 듣고 저런 행동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에 두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현민아 아버님, 여기 집 현민아가 넣어 둔 계약서들입니다.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현민아의 아버지가 계약서를 확인하자 현민아는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전 돌려받기 싫어요. 아빠가 말했었잖아요. 이미 준 것은 곧 엎질러진 물이랑 같아 주워 담을 수 없다면서요. 그럼 책임을 져야잖아요. 이 물건들은 제가 이미 하민한테 줬고 하민이도 받아들이고 집에 가져갔으니 앞으로 제 사람이 될 건데 이렇게 다시 제가 준 예물을 회수하면 앞으로 저보고 어떻게 하민이랑 잘 지내라는 거예요? 아빠가 이렇게 하면 하민이 한테는 제가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현민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울어댔다.요즘 아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서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 현민아 아버지와 양시은도 현민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만 양시은이 예상치 못했던
“어젯밤에 집에 도착했는데 네가 없길래 전화하려고 하자 마침 여이현 씨가 널 데려다주셨어.”나도현은 어제 마음이 심란하여 술을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여기 비타민이라도 좀 먹어.”양시은은 나도현이 깨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고 비타민 한 알을 건네주었다.나도현도 어제 양시은과 잘 소통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심지어 양시은이 너무 바쁜 탓에 돌아오지 못하면 그녀가 간 도시를 찾으러 가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출장에서 돌아와 지금 옆에 있는 양시은을 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넌 이러는 내가 싫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넌 하나뿐인 내 남편인데 왜 싫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양시은은 항상 아이가 평안하고 나도현이 건강하고 그렇게 그들 세 식구가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매우 소박한 소원을 품고 지내왔다.“하지만 나...”“어제 여이현 씨가 널 데려왔을 때 나한테 둘이 잘 소통해 보라고 하길래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예측했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널 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양시은은 나도현의 옆에 앉아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이 심리 건강에도 안 좋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진심을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했다.양시은의 말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나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전날 술자리에서 여이현과 배진호가 양시은의 우수함을 부정하지 말고 더욱이 양시은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한 말이 생각나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내 생각이 좀 많이 유치했던 것 같아.”“아니야, 날 사랑하는 표현이라는 거 잘 알아. 만약 내가 너라면 너보다 더 했을지도 몰라. 나도현, 내가 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마.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네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양시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도현의 두 손을 잡고 말하자 그는 더 부끄러워졌다.나도현의 도움과 격려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착하게 자란 윤별은 초등학교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으며 여이현도 매우 기뻐했다.하지만 윤별은 항상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작은 빨간 꽃을 만들어 외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붙여놨다.온지유는 윤별의 행동을 눈치채고 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며 말했다.“별아, 너무 슬퍼하지 마. 외할아버지는 지금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셔서 우리를 보고 계실 꺼야. 그리고 내년이면 외숙모 집에서 별이 남동생과 여동생도 태어날 거야.”“그런데요 엄마, 외할아버지께서 제가 1학년이 되어 글자를 배우면 공부를 가르쳐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또...”윤별은 말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전에 윤별이가 브람을 따라갔을 때 브람은 매우 엄하게 대했지만, 온경준이 경성에 데려다 키우는 동안은 윤별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면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었다.그리고 윤별의 몸이 허약하니 온경준은 옆에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쓴 약도 잘 먹게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여 먹이면서 많은 추억을 쌓아 주었다.그때 윤별은 온경준에게 물었었다.“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온경준의 집은 Y 국이었고 윤별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다.“별이랑 엄마가 어디에 있으면 할아버지 집은 거기에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예전에 많은 잘못을 했고 그렇게 되어 너희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었어.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되였는데 할아버지가 어찌 Y 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겠어? 게다가 이쪽에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온경준은 그때 윤별이랑 함께 많은 수공예도 했고 병아리도 기르고 꽃을 심고 풀도 심었지만, 지금은 반 친구들 외에 하민 동생이 놀러 오고 평소에 윤별은 항상 혼자였다.온지유는 윤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외할아버지는 그저 우리보다 먼저 다른 세계로 가신 거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사명이라는 걸 가지고 와.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앞으로 때가
여이현이 추천해 주겠다는 의사는 인명진이었다.인명진의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당시 그와 지석훈이 하민에게 수술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하민은 지금처럼 이렇게 빨리 낫지 않았을 것이다.“난 병이 없거든.”나도현이 자신의 심병을 인정하지 않자 여이현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지난 4년 동안 치료해 온 걸 아니까 너의 이런 심리는 이해는 할 수 있어. 근데 넌 배 비서가 말했듯이 양시은 씨의 우수함을 부정하면 안 돼. 그녀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텐데 네 옆에만 가둬 두고 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게다가 네가 뭐 사랑을 강제로 시키는 대표도 아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지 마.”나도현은 여이현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답답하고 복잡한 이 심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는 양시은이 모두에게 존중받는 것도 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앞에서만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시다 보니 나도현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양시은은 오늘 저녁에야 출장에서 돌아왔고 여이현이 만취한 나도현을 데려온 것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여이현 씨, 저의 남편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둘이 잘 소통해 봐요.”여이현의 한마디에 양시은은 바로 눈치채고 나도현이 열일곱 살 난 아이 같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은은 도우미를 불러 나도현을 위층으로 옮기고 침대에 눕혀 신발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줬다.금방 출장 다녀온 탓에 힘들었지만 인내성 있게 나도현을 돌보았고 혹시라도 토할까봐 곁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나도현은 갑자기 양시은을 품에 안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시은, 나 정말 널 너무 사랑해. 그래서 또 잃을까 봐 두려워.”“너의 마음을 나도 다 알고 있어.”“니가 너무 우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볼까 봐 겁이 나, 그리고...”양시은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바보야, 너는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