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일 있겠어? 너희도 알잖아, 나 원래 아프지도 않은데 그냥 진호 앞에서 쇼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안 하면 어쩌겠어? 지금쯤 그 애는 요물한테 완전히 세뇌당했을걸.”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꾀병을 부린다고 진짜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지금 정미진이 가장 신경 쓰는 건 배진호였다.“규리야, 아줌마가 부탁할게. 꼭 진호가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게 해줘. 내가 애를 간신히 정리한 것도 둘을 완전히 끊게 하려고 그런 거잖아.”배성연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선물을 힐끗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알겠어요, 어머님. 남자는 가장 약해졌을 때 여자의 위로를 거부하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권다솔 씨는 벌써 다른 남자까지 구했으니 저희가 힘 합치면 둘이 절대 다시 붙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석규리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녀는 오늘 남태건을 본 순간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바로 알아챘다. 어쩌면 그녀와 같은 부류일 지도 몰랐다.정미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잘 돌아가고 있군.’한편 병실 밖에서 배진호는 정미진의 검사 기록을 들고 의사를 찾았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였다.“에휴, 어머님 상태가 정말 심각하네요.”의사는 병록을 뒤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배진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어머님한테 잘해드려요. 자식으로서 효도하는 게 중요하죠. 괜히 화나게 했다가 정말 ICU라도 들어가면 그땐 후회해도 늦어요. 심장도 안 좋네요. 심장 수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요?”배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수술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의 마음 한구석에 부끄러움이 스쳤다.‘엄마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엄마 병까지 의심하다니...’“이 수술은 위험 부담이 커요. 어머님 몸 상태도 좋지 않아서 수술대에 오르면 무사히 끝날지 장담 못 해요.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하는 게 좋아요.”의사는 계속 효도를 강조했다. 사실 그와 정미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정미진은 다시 석규리와 함께 권다솔을 헐뜯는 말을 이어갔다. 둘이 한마디씩 주고받을 때마다 병실 안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지는 듯했다.그러다 문이 열리고 배진호가 들어왔다. 그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병실 안 사람들을 바라봤다.“다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왜 모두 권다솔을 헐뜯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 주제는 죄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음해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진호 씨, 어머님 몸도 안 좋은데 들어오자마자 왜 그렇게 언성을 높여요?”석규리가 부드러운 척하며 그의 손등을 잡았다.“진호 씨가 싫다면 얘기 안 할게요. 안 하면 되잖아요.”“그만해요. 연기 너무 어색하네요.”배진호는 바로 그녀를 밀어내듯 말했다.그는 문밖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 석규리와 정미진이 서로 딱딱 맞춰가며 권다솔을 비난하는 모습이 너무나 노골적이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정미진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 마음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그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진호야, 왜 들어오자마자 소란이니? 네가 계속 이런 태도면 다음부터 오지 마. 내가 죽어도 안 와도 돼.”정미진은 아까 의사가 보낸 문자를 떠올리며 배진호를 자극했다. 의사가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말해두었으니, 지금쯤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맞서지 못하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배진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어머니, 이 병실 하루 입원비가 40만 원이 넘어요. 제가 한 달 치를 미리 냈고 집에 돌아가면 중개인을 통해 간병인을 구해서 어머니를 잘 돌볼게요. 제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직접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진호 씨,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빠요?”석규리가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회사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어머니보다 중요할 순 없죠.”배진호가 오지 않으면 둘이 만날 기회가 줄어든다. 그러면 석규리가 호감을 쌓을 여지도 없었다. 이미 회계자료를 통해 배진호 회사가 곧 크게 성장할 것임을 파
그들은 정말 거짓말조차 제대로 못 했다. 아니면 속으로 배진호가 그들의 아들이기만 하면 혈연관계가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자식이 되어서 어떻게 부모랑 진심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따지면 불효자라는 딱지를 씌우면 그만이니, 자식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잊지 마요. 다솔 씨는 권씨 가문의 귀한 딸이고, 저랑 결혼했다고 해서 신분이 낮아지는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사람은 더욱 아니고요!”정미진이 처음 배상준과 결혼했을 때, 둘은 시골에 살았다. 배상준의 어머니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날마다 별의별 방법으로 트집을 잡았다. 나중에 두 사람이 힘들게 도시에 집을 마련해 따로 살게 된 뒤에야 상황이 나아졌다.정미진이 시어머니에게 시달린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권다솔은 다르다.이 점을 떠올리자, 정미진의 얼굴빛이 확 바뀌었다.“배진호, 너 도대체 누구 아들이야? 설마 남을 위해 나랑 싸우겠다는 거야?”“제 아내는 당연히 저와 한 식구고 가장 가까운 사이예요. 남이니 뭐니 할 것 없어요. 그 말대로라면 어머니도 누군가의 아내이니 우리 집에서 남인 거네요?”배진호는 이런 낡고 뒤떨어진 생각에 진저리가 났다.이제야 그는 권다솔이 결혼 생활 동안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참았는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그는 모든 정력을 회사에 쏟았다. 그동안 정미진은 언제나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했고 권다솔은 고자질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 배진호는 지금까지 완전히 속아 넘어간 셈이다. 이제야 정미진의 진짜 모습을 깨달았다.세간에서는 고부갈등이 남자가 중간에서 방관할 때 생긴다고 하는데, 그게 그의 잘못이라면 인정하고 고쳐야 한다.“너!”정미진은 얼굴이 벌게지고 가슴이 다시 욱신거렸다.‘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하지만 돌아서 나가려는 배진호를 보자 그걸 따질 틈도 없었다. 정미진은 서둘러 배상준에게 말했다.“당신, 병원 뒷문으로 나가서 빨리 집에 있는 홍경천 버려. 반드시 진호보다
“별아, 엄마랑 정원에 잠깐 나갈까?”온지유는 별이 곁에 앉으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섯, 일곱 살 아이는 가장 활발한 나이였다. 온지유도 계속 별이를 집에만 가둬두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었다.만약 별이가 또 위험한 상황을 겪는다면, 어린 나이에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겠는가. 그 조직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절대 어린 나이라고 봐줄 녹록한 이들이 아닐 터였다.“알겠어요, 엄마.”별이는 손에 들고 있던 블록을 내려놓고 일어났다.별이는 흔들 침대에 누워 있는 온하윤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동생이 빨리 자라면 좋겠어요. 그럼 동생이랑도 같이 놀 수 있을 텐데요.”지금 온하윤은 울고 웃는 것밖에 못 하고 대부분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별이는 온하윤이 쉬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아빠가 그 나쁜 사람들을 다 잡으면, 그때 다시 예전처럼 친구들이랑 마음껏 밖에서 놀 수 있어. 동생도 조금씩 자라날 거야.”온지유는 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온하윤은 집에 있는 도우미에게 맡겼다.지금 계절엔 정원에 꽃이 많이 피어 있었고 한쪽에는 작은 흔들의자도 있었다. 온지유와 함께라서 별이는 한껏 즐겁게 놀았고 두 시간쯤 지나 모든 체력을 다 소진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는 걸 받아들였다.“엄마, 아까 엄청 예쁜 꽃을 봤어요. 그거 사진 찍어서 나중에 제가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고 싶어요.”별이는 들뜬 목소리로 일상을 온지유에게 전했다. 이런 사소한 일들도 모이면 행복을 이루는 조각들이었다.거실로 돌아오자, 별이는 한참 떠들어 목이 마른 듯했다. 마침 도우미가 물을 내밀며 말했다.“별아, 목마를 테니 이거 좀 마셔.”“감사합니다, 아주머니.”별이는 공손히 인사한 뒤 물을 받아 마셨다.그때 온지유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아직 잠든 온하윤을 깨우지 않으려고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 이 시간에 전화한 거 보니 조직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거야?”“조직 이름을 알아냈어.
온지유는 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좋아, 다 들어줄게. 집에서 얌전하게 기다려, 엄마 금방 올게.”그녀는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차고에 가서 아무 차나 골라 탄 뒤 빠른 속도로 회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온지유는 뒤따라오는 차량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거리를 지날 때 멀리서 뒤따라오던 차 한 대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고 있었다.곧 온지유는 회사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정중히 인사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바쁘신데 신경 안 쓰셔도 돼요.”온지유는 발걸음을 재촉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이현에게 서류를 건넸다.여러 사람 앞에서 둘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부부인 만큼 눈빛 하나로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작은 비밀이었다.회의실에서 나오는 길에, 온지유는 여이현이 새로 채용한 비서와 마주쳐 가볍게 인사했다. 그녀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회사를 나와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거기에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있었고 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도 가까웠다.주말이라 패스트푸드 가게에는 인파로 북적였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많았고 손님이 많으니 음식 나오는 속도도 더뎠다.종업원이 물었다.“손님, 에그타르트가 다 팔렸어요. 지금 굽고 있어서 2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별이는 에그타르트를 유난히 좋아하고 특히 이 집 것을 제일 좋아한다. 이미 온 김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괜찮아요. 다 되면 불러주세요.”온지유는 기다리며 옆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국제 뉴스를 훑어봤다.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초 만에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주위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 뿐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착각인가?‘하지만 그녀는 원래 직업상 위협에 민감하며 여성의 육감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는
“당신들 누가 보낸 거지?”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다섯 남자를 주의 깊게 살피며 이들의 전투력을 속으로 가늠했다.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이 골목만 빠져나가서 남쪽으로 백 미터 정도만 가면 경찰서가 있었다. 설령 이들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찰서까지 달려가기만 하면 안전해질 수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은 온지유의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저 그녀가 겁먹어 차 안에서 내리길 주저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냘픈 여자가 이렇게 덩치 큰 사내 다섯 명을 보고 겁에 질려 몸도 못 가눌 만했다. 얼굴색 안 변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반항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들은 남녀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 원래부터 승산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5:1이다. 온지유가 반항해 봤자 상대가 되겠냐는 식이었다.“누가 보낸 건지는 알 필요 없어. 조용히 내려오면 우리도 좀 부드럽게 대해줄 수 있어. 아니면 말이야...”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는 차창 너머로 온지유를 음흉하게 훑어봤다.창문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좋은 몸매에 남자들의 시선이 더욱 탐욕스러워졌다. 애 키운 여자로는 안 보였다. 게다가 밤이라 주변에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없고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이가 없었다.“형님, 좀 있다가 저희도 한몫 챙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들도 침을 흘렸다.두목은 크게 웃었다.“그래, 내가 먼저 놀고 끝나면 너희가 알아서 해. 단 숨은 붙여둬야 해. 조직에서 시킨 대로 살아 있는 상태로 데려가 약 실험해야 하잖아.”조직이라는 단어에 남자들의 얼굴에는 잠깐 긴장감이 스쳤다. 이 작은 표정 변화는 온지유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이들이 속한 조직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약 실험이라는 단어에서 온지유는 바로 소미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와 같은 조직이 보낸 듯했다.저번에는 온하윤을 노리더니 이번엔 그녀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다행히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돌아다닌 덕에 이들을 집으로 유인
셋이 합세하면 온지유 하나 제압 못 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온지유는 한 팔로 두목의 팔을 낚아채 뒤로 돌더니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에 세게 차올렸다.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고 온지유가 팔을 꽉 잡아 허리를 펼 수도 없었던 두목은 독설을 퍼부었다.“놓지 못해? 안 놓으면 가장 독한 약을 주사할 거야. 그러면 넌 암캐처럼 땅바닥에 무릎 꿇고 구걸하게 될 거라고!”하지만 온지유는 이 말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지금 그들을 놓아주고 웃는 얼굴로 화해를 청한다고 해서 그들이 물러나기라고 할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이들은 목숨을 걸고 그녀를 잡으러 온 악당들이다. 이미 그녀를 납치해 약 실험을 할 생각인데 전력을 다해 저항해야 희미한 생존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울고불고 애원해 봤자 비참한 결말은 뻔하다. 차라리 부딪쳐보는 게 낫다.온지유는 몸을 홱 돌리며 두목의 팔을 놓아주고 동시에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강한 충격에 두목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날아들었고, 그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공격 태세를 취하던 중 그대로 두목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말았다.“멍청한 놈아!”두목은 화가 치밀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편을 때리다니 적이 무서울 게 아니라 이런 동료가 더 무서웠다.그러나 잘못된 부하를 둔 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다른 동료들이었으면 진작 온지유를 잡았을 것이고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굴까지 한 대 맞았으니 그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죄, 죄송해요, 형님. 저도 반사적으로 그런 겁니다. 뭐가 갑자기 날아오길래 밀쳐내려다 보니...”남자는 허둥지둥 변명했다.조직 내 위계질서가 분명한 이상 두목은 그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두목이 마음만 먹으면 그는 내일까지 살지 못할 수도 있었다.“쓸모없는 놈.”두목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방금 굴욕을 당한 이상 이 치욕을 배로 갚아주고 싶었다. 그는 온지유를 개만도 못한 상황에 몰고 가리라 결심했
온지유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두목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엔 공포가 어렸다.온지유는 너무 강했다. 게다가 공격도 서슴지 않고 가차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와중에 특히 허리는 뼈라도 부러진 것처럼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너... 너 오지 마! 우리한테 손대면 조직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야!”온지유는 비웃는 얼굴을 했다.“내가 바보로 보여? 지금 너희를 풀어준다고 해서 조직이 물러날 것 같아? 게다가 너희들도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 같은데?”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조직의 개나 마찬가지였다. 명령받은 대로 더러운 일을 대신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일이 성공하면 서로 좋은 거겠지만 지금 상황은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내가 너희를 보내준들 살아서 갈 수나 있을 것 같아?”온지유가 되받아쳤다.두목은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온지유,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제발 우리를 놓아줘. 우린 조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대신 대가로 조직에 관한 비밀을 알려줄게.”“형님!”옆에 널브러진 부하들이 초조하게 외쳤다. 몸을 마음대로 쓸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지금 이 자리에서 조직을 팔아넘기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임무 실패 후 조직에 돌아가면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여지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직을 배신하면 그때는 진짜 죽음뿐, 가족이나 친구들까지 몰살당할 수 있었다.“당신 부하들은 생각이 다르나 보네.”온지유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이 근처에 경찰서가 있어. 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5분 안에 출동할 거야. 너희 신분증 같은 건 없겠지? 불법으로 들어온 조직원일 테니까.”온지유는 조직의 실체를 몰랐지만, 이전에 소미가 외국 아이였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아마 본거지는 해외일 가능성이 컸다. 이들 역시 비밀리에 들어온 범죄자일 가능성이 크다. 살인미수에 신분 미확인 불법입국자라면 잡혀도 결코
인명진의 말에 은서우는 잠시 멍해 있다가 곰곰이 생각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그냥 여기 있을래요.”이번에는 인명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건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그 당시 경성을 떠나온 건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사람들이 날 뭐 어찌하겠어요?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그저 내가 귀찮아서 도망쳐 온 거예요.”가정은 한 사람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소씨 가문에 자란 그녀는 늘 일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귀찮아했다. 그러나 많은 일을 겪고 나니 이젠 두렵지가 않다. 귀찮은 게 뭐가 어때서?결국은 다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인데.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렸다.잠시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당신의 마음을 저버린 건가요?”“아니요.”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웃음소리가 처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봄날의 바람처럼 따뜻하고 연인의 목소리처럼 다정했다.“그렇게 생각하다니 나도 기뻐서요.”이 일은 그렇게 지나갔고 인명진은 더 이상 전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녀는 시험을 마쳤다. 시험 당일 인명진은 추천서를 메일로 보냈다.성적이 나오기 전에 뭐 하러 이리 급히 보냈냐고 했더니 그가 그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르긴요. 언젠가는 쓰게 될 텐데.”그녀는 살짝 혀를 내둘렀다.왠지 모르게 인명진이 그녀보다 더 자신이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다시 말길을 돌렸다.“요즘 많이 바빠요?”“왜 갑자기 그걸 물어요?”“그냥... 오랜만에 통화하는 거 같아서요.”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통화했었다. 두 사람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고 익숙하다 못해 그가 옆에 없어도 항상 곁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게 점점 더 익숙해졌다. 그래서 연락을 안 하게 되면 왠지 모르게 적응이 잘 안됐다. 오늘 이 전화도 그녀가 먼저 한
그의 말을 들었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저항하는 인명진이 있다고 생각하니 전혀 외롭지가 않았다. 돌아온 후, 이혜성은 협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은서우는 일부분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혜성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세상에. 그래서 정말 거절했단 말이야? 너 진짜 대단하다. 존경심이 막 생겨.”그녀는 이혜성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그만해. 그만 놀려. 나 정말 긴장돼 죽는 줄 알았어.”은서우는 한숨을 내쉬며 겉옷을 벗더니 의자에 힘없이 기대어 앉았다. “왜 그래? 조금 전까지 내가 그렇게 칭찬했는데. 왜 갑자기 김이 빠진 거야? 들어올 때 그 패기는 다 어디 갔냐?”“패기는 무슨.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어.”은서우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비웃었다. 옛날 사람들이 툭 하면 무릎을 꿇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긴장이 안 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돌이켜 보니 아까 겉으로는 괜찮은 척 보였지만 사실은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그날 저녁, 인명진은 이미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도 별일 없었죠?”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우는 전화를 받으며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정리했다.“뭐 늘 똑같죠. 당신도 병원에서 근무하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매일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이 병원에는 외과의사가 몇 명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교대로 당직을 설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툭하면 그녀를 외과로 불렀다. 그녀는 혼자 내과와 외과 사이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전화기 너머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잘못 들은 줄 알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누가 웃었어요?”웃은 사람이 인명진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있는 누군가 웃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신석림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인명진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를 폄하할 가능성이 더 컸으니까. 다행히 은서우는 남들보다 침착하고 잘 참는 성격이었다.“절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병원에 할 일이 남아서요. 빨리 말씀해 주시죠.”신석림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드는가 보군.”“네. 전 제가 하는 일이 좋거든요.”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주먹을 하도 꽉 쥐고 있어서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있었다. 최대한 참으려고 노력했다. 이 상황에서는 참아야 했으니까. 인명진도 자리에 없고 이 사람들은 그녀가 감히 미움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준서한테는 차갑게 대할 수 있지만 신석림 같이 신분이 높은 자에게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신석림이 미심쩍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이렇게 보니까 낯이 익은데...”순간 멈칫했다.그녀가 묻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어.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한 그 수술 나도 알고 있네. 잘했어. 인명진이 자네를 신경 써서 잘 가르쳤다는 생각이 드네.”“협회에서는 그 어떠한 인재도 낭비하지 않아. 특히 자네 같이 젊은 사람은 더더욱 말일세.”협회에 들어오라는 그의 뜻은 명확했다. 은서우는 한껏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풀었다. 그가 이렇게 말을 하니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오면서 그가 왜 자신을 만나자고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추측으로도 자신을 그의 사람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추측이 사실이 되자 한시름 놓게 되었다. 그녀는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신 선생님께서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대로라면 은서우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거절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전 협회에 들어올 생각이 없습니다. 전 직업도 있고 그렇게 큰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인명진을 향해 환하게 웃던 모습, 얼마나 순수하고 밝았는지 모른다.그러나 이준서 그를 향한 그녀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차 키를 누르던 그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쳐다보았다.“좀 웃으면 안 됩니까? 무뚝뚝한 얼굴이 얼마나 보기 흉한지 모르죠?”은서우는 그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전 의사이지 웃음을 파는 여자가 아니에요. 웃는 여자가 보고 싶다면 술집에 가서 찾아봐요. 돈 주면 실컷 볼 수 있을 테니까.”말문이 막힌 그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인명진을 제외하고 그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은 은서우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이준서의 마음속에 이미 인명진과 같은 혐오스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도 상관없었다. 전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니까. 다만 서로에게 싫은 사람 일뿐. 협회는 생각한 것과 거의 비슷했다.딱 봐도 일반인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전문적으로 접대하는 고급 클럽처럼 보였다. 인테리어는 거의 대리석으로 되어있었고 으리으리했다. 프런트 데스크에는 사무직처럼 정장 차림을 한 여성이 있었고 이준서가 건네준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 박사님, 어서 오세요.”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은서우는 온몸이 불편할 정도였다. 이준서가 잠시 잡담을 나누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재촉하기 시작했다.“신 선생님은 어디 계시나요?”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석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녀의 말투에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은서우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냥 빨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끝내고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이준서는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화를 내지 않았다.“뭐가 그리 급합니까?”은서우의 눈빛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직원과 이야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고급스러운 곳은 엘리베이터도 으리으리했다. 엘리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문 앞에 있다고 하니 한 번은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은서우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서는 사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은서우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창턱에 있는 화분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박사님, 그건 제가 키우고 있는 화분이에요. 떨어뜨리지 마세요.”그러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화분이 창턱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은서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실내 쪽으로 떨어졌고 창문 밖으로 떨어진 게 아니었다. 아니면 화분이 떨어져서 사람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박사님,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은서우는 벌컥 화를 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화분이 떨어졌으니 이건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없다.이준서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얼마예요? 내가 배상해 줄게요. 원하는 만큼 배상해 줄 테니까 말만 해요.”은서우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어쩐지 성격이 차분한 인명진도 싫은 티를 팍팍 내더라니. 정말 꼴 보기 싫은 인간이야.’“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살 거예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더 이상 긴말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방금 당신을 찾아간 사람이 이미 명확하게 말했을 거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세요.”이준서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를 내밀었고 검은색 귀걸이가 살짝 빛을 반짝였다.은서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신 선생님께서 저를요? 왜죠?”그녀는 자신이 신석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준서와도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게 다였다고 생각했다. 이준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별일은 아니고요. 그냥 단순히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어쨌든 엄청난 수술을 성공시켰고 이제는 유명인이 되었잖아요. 안 그래요?”그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아 은서우는 그냥 포기하고 솔직하게 말했다.“그럼 돌아가서 전해요.
인명진은 눈 깜짝할 사이 죽 두 그릇을 먹었다. 배가 부르고 나서야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죽 맛있네요.”가사 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서우 씨가 만든 거예요. 전 영양사라는 사람이 이런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오늘은 서우 씨가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은서우는 어색하게 웃었다.“이건 그저 보통 가정집에서 먹는 방법이에요.”“어렸을 때 집안 형편이 별로였거든요. 입맛이 없으면 이런 죽을 만들어 먹었죠. 그래서 한번 만들어 본 건데 뜻밖에도 입맛에 잘 맞았나 보네요.”가사 도우미는 겸손하다고 연신 그녀를 칭찬했다.인명진은 테이블 위에 놓은 음식들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5성급 호텔의 요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만들어준 사람의 마음이 잔뜩 들어있는 음식들이었다. 은서우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고마워요.”그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그녀가 급히 입을 열었다.“별거 아니니까 고마워할 것 없어요.”인명진이 자신을 도와준 데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일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말은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대학원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후, 몸이 괜찮아진 인명진은 경성으로 돌아갔다.경성 쪽에는 아직 많은 일들이 그가 처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떠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노트를 은서우에게 건넸다. “이건 그동안 내가 적어두었던 노트예요. 내 생각들도 적어두었으니 시간 되면 한번 봐 봐요.”의사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내어주면서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깃털처럼 가벼운 물건도 아닌데 말이다. 은서우는 깜짝 놀랐다. 손에 쥐고 있는 노트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렇게 중요한 걸 나한테 그냥 주는 거예요? 안 돼요. 이건 받을 수가 없어요.”말을 하면서 그녀는 노트를 돌려주려고 했다.그러나 인명진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막아섰다.“대학원에 들어가겠다면서요? 그냥 해본 소리입니까? 아니라면
그러나 협회의 사람들한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명진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들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어떻게든 되겠죠 뭐.”그녀의 모습을 보니 예상대로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럴 줄 알았어요. 내가 이미 생각해 둔 게 있거든요. 추천서가 필요하다면 나중에 내가 써줄게요.”“정말요?”그녀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사실 인명진을 찾아오려고 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었고 협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도 인명진 한 사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한테 너무 폐를 끼친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많이 도와준 사람한테 추천서까지 써달라고 한다면 너무 뻔뻔스러울 것 같았다. 그녀는 기뻐하다가 이내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건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요?”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한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으니 우리도 친구 아닌가요? 이런 사소한 일은 별거 아니에요.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그제야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추천서를 써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남아서 인명진을 돌봤고 가사 도우미의 일도 발 벗고 나서서 했다.주방 밖, 가사 도우미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려는 그녀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정말 직접 하시게요?”은서우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인명진이 아직 아프고 위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녀 또한 함부로 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은서우의 가는 손가락을 보면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은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한마디 한 것이었다. “제가 할게요. 아가씨처럼 젊은 사람은 기름기가 많은 주방과는 어울리지 않아요.”은서우는 머리를 묶으면서 대답했다.“아니에요. 이런 일에 익숙하거든요.”그 말 한마디에 어린 시절의 억울함과 수많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그 일들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
“방에 있으면서 할 일이 없어서요.”뜻밖에도 그가 한마디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을 안 하기보다 못했다.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방안에서 할 일이 없다니요?”안색이 어두워진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아프면 푹 쉬어야죠. 책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얼른 가서 쉬어요.”누군가에게 이렇게 쫓기는 일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물론 은서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은서우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나 인명진은 침대로 가지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방금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협회에서 나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나도 조금 전에 확인한 거고요. 시간 되면 한번 왔다 가라고 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명진의 얼굴을 살폈다. 협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그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분명 불쾌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방법을 생각해 그를 달래주려 했다.“뭐 하러요?”아니나 다를까 그는 듣자마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협회에서 몰래 은서우를 찾아가다니. 그것도 그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는 인명진이 화가 난 이유를 오해했다. 그가 자신이 협회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자신은 협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난 갈 생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조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왜요? 협회에 들어가면 좋은 점이 많을 텐데.”협회가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초보 의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초보 의사들의 입장에서 협회는 기를 쓰고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다. 의학계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고 수많은 의료 서적들을 볼 수 있으니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은서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난 가지 않을 거예요.”“나 때문인가요?”그가 미간
은서우는 협회에서 왜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편지 끝에는 협회에 오라는 초대까지 있었다.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협회의 호의가 아니라 상대방이 또 이런 방식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인명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었다. 이혜성은 내키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고 싶지 않아? 이건 협회의 초대야. 우리처럼 풋내기 신인은 평소에 이렇게 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하지만 협회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당분간은 그럴 생각 없는데.”“그럼 지도 교수는...”“그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 설득하지 마. 협회에 대해 좋은 인상이 있는 게 아니라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혜성은 그녀가 협회에 들어가길 바랬지만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친구를 보며 은서우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마음속의 걱정은 여전했다.한편, 인명진은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고 내일은 그가 경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은서우는 마침 그의 집으로 가서 이 일을 그에게 전해주려고 했다.결국 혼자서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인명진이 병이 날 줄은 몰랐다.가사 도우미한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아프다고요? 그럴 리가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인명진 같은 사람도 아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에요. 꽤 심한 모양이더라고요. 급성 장염 때문에 아직도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살펴보고 가셨고요.”“지금은 2층 침실에서 자고 계십니다.”그녀한테 인명진은 뭐든 해내는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고 화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