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야, 날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백시윤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자, 백지희는 깜짝 놀랐는지 손을 냉큼 빼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전 지희가 아니라 동생이라니까요?”말을 마친 뒤 소파 쪽으로 다가가 다시 테이블 위의 컵을 들고 물을 마시려 했다.저기에 물컵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마셨던 물인지 몰라 백시윤은 재빨리 그녀의 손에서 물컵을 뺏앗았다.그 모습에 백지희는 깜짝 놀란 나머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하여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물컵을 되돌려준 뒤 낮은 소리로 달래줬다.“자, 여기. 물 마시려고 그래? 내가 다시 부어줄게.”“물, 물 마시고 싶어요.”약간 어눌해 보이는 모습에 백시윤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그때 김다은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본인이라고 자책했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지희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던 그는 뭔가 결심이 섰다.바로 백지희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것이다.그러다가 재빨리 장민준에게 무조건 온지유가 돌아오기 전에 백지희를 데리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전하려 했다.하지만 이 시각, 예상 밖으로 장민준과 온지유가 의사 사무실에서 다투고 있었다.백시윤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는데 책상 위의 검사 결과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백시윤 씨, 지희를 저 꼴로 만들어 이제 속이 시원해요? 그러고도 지희 옆에 있고 싶다고요?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온지유는 지금 몸만 성했더라면 당장에라도 백시윤에게 달려들어 죽도록 패버리고 싶었다.백시윤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진단서를 읽어보고 또 읽어봤다.이 모든 게 다 사실이란 걸 인정하기 싫었지만 분명히 백지희가 정신적으로 문제 있다고 적혀있었다.너무 충격이 심해 미쳐버린 것이다.온지유는 보고서를 뺏어 들고 그에게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가증스럽게 지금 제 앞에서 연기하는 거예요? 일찍이 지희 곁을 떠났으면 일도 없었잖아요!”“미안해요...”백시윤은 고개를 떨구었다.사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시윤은 그를 무섭게 노려봐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다시 삼켰다.그는 더 이상 비겁한 방법이 아닌 진심으로 백지희를 자기 곁에 두고 싶었다.의사에게 몇 가지 더 물어본 뒤 백시윤은 밖에서 직접 미니 케이크 하나를 사 왔다.그리고 병실에 들어서자 온지유가 한창 백지희에게 밥을 먹여주려는데 계속 안 먹겠다고 투정 부리고 있었다.그 모습에 백시윤이 성큼성큼 다가가 앞에 있던 음식들을 전부 치워버린 뒤 자신이 사 온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았다.순간 백지희는 활짝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케이크다, 케이크!”백시윤은 덩달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동생이 좋아하는 케이크니까 많이 먹어.”이때, 온지유가 그를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차갑게 경고했다.“이러면 점점 밥 먹이기 힘들어진다는 걸 몰라요?”그러자 백시윤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세끼, 꼬박꼬박 챙겨줄 테니까.”말을 마친 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다시 백지희에게 다가가 케이크 한 입 떠먹여 줬다.“우리 동생, 혹시 오빠랑 같이 가지 않을래? 오빠랑 집에 갈까?”백시윤은 누구보다 백지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의사도 말했듯이 이런 경우 비록 지금 제정신이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했던 것들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그리고 정신연령이 어린애이기에 떼를 쓸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백시윤의 판단이 정확했다.그의 물음에 백지희가 손을 번쩍 들면서 답했다.“동생은 오빠랑 같이 갈래요.”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온지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지희야,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이 말이 백지희의 귀에 들릴 리 없었고 그저 백시윤을 향해 헤벌쭉 웃으며 케익을 떠먹었다.그렇게 백지희는 백시윤 따라 가게 되었고 온지유는 속으로 백지희의 안녕을 빌 수밖에 없었다.백지희를 돌봐주기 위해 백시윤은 특별히 시외에 별장 한 채를 샀고 또 안에 어린이 시설도 몇 개 마련해 거의 미니 놀이공
여이현은 순간 뭐라고 답해야할지 몰라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렇지는 않을 거야. 우리 둘도 서로 사랑하니까 지금 같이 있게 되었잖아.”“난 지금 백지희를 말하고 있어.”온지유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기 절친 백지희뿐이었다.여이현이 다시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백지희는 마치 백시윤을 말처럼 타고 있었다.“아무리 힘든 상황이라고 해도 이 모든 게 다 최선이었다고 생각하자.”여이현은 강태규 일가에서 백지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그쪽 태도를 고려해 보았을때, 백지희가 강씨 가문으로 시집가는 것보다 오히려 지금처럼 백시윤 곁에 있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백지희의 성격상 오지영을 상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그의 작은어머니는 더 말할 나위 없어 보였다.“꺅!”갑자기 백지희가 비명을 지르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바지를 벗기 시작했는데 덩달아 놀란 백시윤이 냉큼 그녀를 말리다가 어느새 바지가 축축해져 있는 걸 발견했다.어이없는 상황에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혹시 바지에 쉬했어?” 백지희는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백시윤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이제부터 쉬 마려우면 오빠한테 말해. 그러면 화장실에 데려다 줄게. 응?”그의 말에 백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온지유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오줌이라니.. 바지에 실례할 만큼 저능해진 거야?”“의사 말로는 이 정도도 많이 괜찮은 축이랬어. 여기서 더 심한 건 똥오줌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닌다고 했거든.”이런 모습을 더 봤다가는 온지유만 속상할 것 같아 여이현은 얼른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하지만 온지유는 단번에 여이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이현 씨, 나 화나려고 해.”그녀의 말에 여이현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여보, 이러면 나 약간 흥분되는데...”그의 말을 듣고 있던 운전기사가 자기도
하루 이틀, 날이 지나면서 백시윤은 회사로 출근해야 했지만, 백지희는 그 외에 다른 사람이 접근하는 걸 무서워했다.하여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회사에 데려가야 했다.그리고 백지희가 놀라지 않게 특별히 자기 사무실에도 어린이 시설을 만들어놨고 장민준 외에는 아무도 사무실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아침에 두 사람이 같이 출근하는 모습을 본 사람 중 누군가가 백지희를 알아봤다.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그녀의 모습을 보고 쉬쉬거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강서준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오늘 어렵게 강태구를 설득해서 사업에 대해 의논하러 왔는데 첫날부터 백지희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저런 모습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강서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고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싸우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더 이상 예전의 강서준이 아니었다.하여 애써 화를 참고 비서 따라 행정실로 올라갔다.담담한 얼굴로 합작 업무에 대해 논의하다가 계약서에 사인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이 말은 지금 바로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만약 이 몇몇 분은 아직도 세진 그룹에서 일한다고 하면 저희 화진 그룹에서는 협력할 생각이 없습니다. 동시에 다른 그룹과도 계약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고요.”눈치 빠른 부장은 어느 쪽이 회사에 더 유리한지 생각하다가 재빨리 백시윤에게 보고했다.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백시윤은 오늘 강서준이 처음으로 회사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CCTV를 돌려봤다.그러다가 화면에 나타난 그들의 얼굴을 본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백시윤은 책상 위의 파일들을 신경질적으로 전부 바닥에 쓸어버렸다.“그 부장한테 강서준이 제출했던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해.”그는 한 번에 이토록 많은 사람을 해고하기는 어려웠다. 근데 바이어는 괜찮아 보였다. 무려 화진 그룹이라는 빅 바이어라니.모든 일을 안배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백지희가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되새겨
그렇게 별 탈이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고 어느새 온지유가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하는 날이 돌아왔다.아침밥을 먹은 뒤 그녀는 별이가 혼자 준비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배가 불러오니 모든 행동이 불편했던 온지유는 소파에 앉아 전화로 별이에게 필요한 물건이 뭔지 자세히 알려줬다. 여이현도 사실 온지유 곁에서 그녀를 잘 돌봐주고 싶었지만 요즘 일이 너무 바빠 그러지 못했다.그런 그녀도 여이현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혼자 병원에 가려고 했다.30분 뒤, 별이가 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엄마, 저도 이제 컸으니까 많은 일들을 도와줄 수 있어요. 맞죠?”온지유는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우리 별이도 이젠 다 컸지.”별이는 활짝 웃더니 가방을 메고 휠체어를 가져와서 온지유를 태운 뒤 밀고 대문을 나섰다.당연히 휠체어는 자동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 작은 몸으로는 끄떡도 없을 것이다.운전기사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달려왔다.“사모님, 저를 부르시지...”온지유는 괜히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살짝 웃으며 말했다.“우리 아들이 도와줘서 괜찮아요.”이때 별이가 고개를 들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아빠가 지금 집에 없으니까, 제가 아빠 대신 엄마를 챙겨드려야 해요.”운전기사는 그런 별이가 너무 기특해 연신 칭찬해 줬다.그렇게 그들은 병원에 도착했고 여이현도 어느새 와있었다.별이는 여이현에게도 오늘 엄마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미주알고주알 말해줬는데 여이현은 단번에 눈치채고 그를 칭찬해 줬다.세 사람은 산부인과에 도착한 뒤 접수를 마치고 대기 순서를 기다렸다.이때, 백시윤과 백지희가 초음파실에 나오는 모습에 온지유는 그녀가 임신이라도 한 줄 알고 재빨리 그들을 불러세웠다.하지만 백지희는 온지유를 알아보지 못하고 백시윤만 멍하니 쳐다보았다.백시윤은 온지유와 대화하기 싫어 그저 멀리서 가볍게 인사한 뒤 재빨리 백지희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이때, 온지유가 여이현을 재촉했다.“빨리 저쪽
백시윤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건 당연히 그럴만한 원인이 있어서이고 또한 지금 백지희의 보호자가 자신인데 왜 자꾸 온지유가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몰랐다.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무슨 일은요. 제가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검진하러 왔을 뿐입니다.”백시윤은 말을 마친 뒤 몸을 돌려 백지희에게 물었다.“배고프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백지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다고 손뼉까지 쳤다.“그럼, 먼저 가볼게요. 지희한테 밥 먹여야 해서요.”하지만 온지유의 눈은 속이기 힘들었다.두 사람이 떠나가자마자 온지유는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여이현더러 오늘 병원에 왜 왔는지 알아보라고 했다.바로 이때, 마침 온지유 진료 차례가 되어 여이현은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로 들어갔다.그리고 그녀가 진료받는 사이에 여이현은 병원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런 일은 원장에게 부탁하면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온지유가 진료를 다 받고 나오니 원장 쪽에서 다시 전화가 왔는데 오늘 백시윤이 백지희에게 자궁 제거 수술을 시키려 했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온지유는 당장 백시윤을 찾아가고 싶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옆에 별이도 있으니 진정하라고 애써 그녀를 진정시켰다.온지유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니면 지희 아버님더러 지희를 데려가라고 할까? 지희가 또 다치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돼.”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이 일은 조급해 말고 일단 나한테 맡겨. 내가 알아보고 해결할게.”사실 온지유도 지금 자기 몸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도 뱃속의 아이만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란 걸 인지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잘 컨트롤하겠다고 그와 약속했다.백시윤도 빠르게 온지유가 자신의 목적에 대해 알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는 오랫동안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다시 백지희를 자기 앞으로 데려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동생은 오빠 곁을
시외의 한 루프톱 바에서 여이현은 백시윤에게 술 한잔을 따라주면서 말했다.“남자로서 백 대표님이 너무 이해가 안 돼요. 세상에 널린 여자가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백지희 씨인가요?”백시윤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그런 이현 씨는 왜 온지유 씨를 택했나요?”순간 여이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에 백시윤이 그에게 술 한잔을 따라주면서 차갑게 웃었다.“할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하세요.”순간 여이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지희 씨의 자궁까지 제거하고, 혹시 평생 저 모습으로 살길 바라나요?” 백시윤은 그저 고개만 젓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저녁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서 백시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강서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목소리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강서준이 웬 어여쁜 여자와 같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분위기를 보아하니 새로 사귄 여자 친구인 것 같았다.그 모습에 백시윤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여이현 씨, 솔직히 지희가 영원히 지금 상태로 지냈으면 좋겠네요. 그럼 강서준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가겠죠.”여이현은 그의 말을 동의할 수 없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이 모든 게 다 강태규가 계획한 일이고 그래야만 정을 뗀다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백지희 친구의 남편이자 온지유의 말을 대신하러 온 것뿐이다.여이현이 다시 답했다.“다른 사람의 일은 모르겠는데 백지희 씨 일이라면 제가 관여해야겠어요. 자궁 제거는 절대 안 돼요.”순간 백시윤이 큰 소리로 웃다가 다시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경고했다.“여이현 씨, 누가 뭐래도 백지희는 제 사람이고 제가 지희를 어떻게 대하든 이현 씨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여이현도 화가 치밀어 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지희 씨는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에요.”온지유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백시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절대로 용납할
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백시윤의 말을 잘 따라야 그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하여 조심스럽게 그에게 입을 맞췄는데 예전에 배운 대로 그의 입술을 살짝 물어보았다.기분이 좋아진 백시윤은 단번에 그녀의 어깨를 눌러 바닥에 눕혔다.거사를 치른 뒤, 백시윤은 약과 물을 가져와 백지희에게 건네줬다.왜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혹시나 그가 화낼까, 묻지도 못했다.고분고분 약을 먹은 뒤 다시 침대에 돌아가 누웠다가 그가 방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다시 침대에서 내려와 살며시 문에 귀를 대보았다.백시윤은 한참 동안 문밖에 서 있다가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그가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백지희는 다시 안심하고 자기 침대에 돌아가 잠을 잘 수 있었다.이튿날, 점심을 다 먹은 뒤 백시윤은 또다시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수술에 대해 여쭤봤다. 하지만 의사는 수술이 불가하다고 거절했는데 이는 여이현이 뒤에서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백시윤은 의사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면서 당장 수술 진행해달라고 협박했다.겁에 질린 의사는 어쩔 수 없이 간호사를 불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백지희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환자분께서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요. 혹시 제가 데리고 나가도 될까요?”하지만 쉽게 넘어갈 백시윤이 아니다.“허튼수작하지 말고 여기서 갈아입혀요.”간호사는 난감한 얼굴로 백지희를 데리고 진료실 안쪽으로 안내했다.그러나 백지희는 구석에 숨어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안 갈래요. 저 어디도 안 갈래요.”그 모습에 백시윤은 짜증이 몰려와 그녀에게 큰소리쳤다.“말 들어. 빨리 가서 옷 갈아입고!”“싫어요.”사실 백지희는 방금 백시윤의 행동에 겁을 먹었다.자기 때문에 지금 그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고 또 그녀를 쫓아낼 것이라 오해했다.순간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