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희는 악몽에서 깨어난 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구석에서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녀가 걱정되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 방에서 울음소리를 듣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불을 켜고 백지희를 본 순간 온지유는 깜짝 놀랐다. 온지유는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안으며 물었다.“악몽이라도 꿨어?”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온지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백지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물었다.“우리 전에도 아는 사이었어?”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리는 정말 친한 친구였어.”백지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궁금한 듯 되물었다.“예전에도 나를 이렇게 쓰다듬어 줬었어?”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온지유를 순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온지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다.백지희가 힘들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위로하곤 했었다.백지희는 지금 온지유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행동만큼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게 바로 조건 반사라는 걸까?온지유는 다시 백지희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어때?”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좋아. 여기도 좋아.”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좋다니 다행이다. 혹시 싫으면 꼭 말해. 절대 억지로 하지 않을게.”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지유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백지희를 Y국으로 데려가려면 법로가 필요하다.온지유는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직접 나설 수 없었다.지금의 문제는 백지희가 과연 법로를 받아들일지였다.온지유는 밤새 고민한 끝에 백지희를 며칠 더 머무르게 하며 법로에 대한 신뢰를 쌓게 한 후 Y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다음 날 오후 여이현은 법로를 데리고 돌아왔다.온지유는 그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설명했다.하지만 법로는 주저하며 말했다.“Y국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내가 여기 있으면 네 오빠가 힘들게 될까 봐
법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로 그거다. 의학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는... 아, 아니다. 너한테 말해도 이해 못 하겠네. 간단히 말하면 지희는 이곳에서 지내기엔 적합하지 않아. 하지만 본인도 이유는 모를 거야.”온지유는 백지희를 돌아보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버지가 많이 신경 써주세요.”법로는 이 일을 어려운 문제로 보지 않았다. 백지희가 그와 함께 떠나기만 해주면 Y국에 도착한 후에는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백지희의 사연을 들은 법로는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조용한 정원 같은 곳이었고 방 청소와 식사를 제외하고는 하인 한 명만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백지희가 휴양을 취하기에는 맞춤한 곳이었다.Y국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백지희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했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법로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더니 하인에게 그녀를 정원으로 데려가게 하고 방을 정리하는 동안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백지희는 아래로 내려와 법로를 보며 약간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법로는 그런 그녀를 맞은편에 앉히고 음식을 덜어주었다.백지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었고 잘못한 행동으로 법로를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법로는 도우미를 불러 그녀에게 소개하며 말했다.“이 아이는 레나다. 네가 이 아이의 주인이니,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시켜도 된다. 네 말은 무조건 따를 거야.”백지희는 이해한 듯하면서도 머리를 갸웃거렸다.법로는 다시 말했다.“너는 왕이고, 레나는 병사야. 알겠니?”백지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레나는 웃으며 말했다.“간단히 말하면 지희 씨는 공주님이고, 저는 하녀라는 의미예요.”백지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은 백지희와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이때, 다른 사람이 법로를 찾아왔다. 법로는 어쩔 수 없이 백지희를 레나에게 맡기고 일을 처리하러 갔다.법로가 떠난 뒤 백지희는 레나에게 조용히 물었다.“다시 오실까?”레나는
레나는 이야기책을 건네며 삽화를 가리켰다.“여기 있어요, 파란 태양. 너무 예쁘지 않아요?”백지희는 삽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파란 태양... 정말 예쁘게 그렸네.”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레나는 백지희가 보이지 않아 정원을 찾다가 한 구석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그녀의 그림은 아직 삐뚤삐뚤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레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법로에게 알려 그녀를 위해 그림 도구를 준비하게 했다.예전에도 그림을 그리던 그녀였기에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백지희에게 좋을 것 같았다. 백지희는 점점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녀의 방은 그림으로 가득 찼다.레나는 그림을 하나하나 액자에 넣어 전시했으며, 집 전체를 그녀의 작품으로 꾸몄다.멀리 경성에 있는 온지유는 백지희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더 빨리 그녀를 데려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그랬더라면 백지희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도우미를 시켜 그림 잡지를 구매해 Y국으로 보냈다.그러다 도우미의 말을 듣고 별이의 생일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그녀는 또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아이 생일도 잊은 걸까.’온지유는 친구도, 아들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도우미에게 생일 준비를 부탁했다.도우미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사모님,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사모님은 주어진 일을 잘해 나가고 있을 뿐이세요.”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위로에는 서툴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맞다, 오후 별이를 데리러 갈 때 친구들을 초대할 건지 물어봐 주세요. 초대 카드를 준비하기 쉽게요. 오는 길에 카드도 사주시고요.”이곳에서 처음 별이와 함께 보내는 생일이었기에 온지유는 기대가 가득했다.하지만 동시에 잘 준비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별이는 친구들의 놀림에 자존심이 상해 어른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바로 선물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단 한 줄의 구절만 적혀 있는 종이였다.여자아이가 글을 읽고 말했다.“더 많은 선물이 갖고 싶으면 정문으로 와.”글을 읽고 나서 여자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건 장난치는 거잖아. 우리 엄마가 그랬어. 선물은 진심으로 주는 게 맞는 거라고. 이렇게 장난치는 건 제대로 된 선물이 아니래.”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이에게 정문으로 가자고 소리 질렀다.별이는 아이들의 놀림에 화가 나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임수아, 너도 나랑 같이 갈래? 내가 선물을 고르게 해줄게. 네가 고른 건 전부 네 거야.”임수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여자애들은 원래 겁이 많잖아. 임수아는 못 갈걸!”임수아와 별이 둘 다 도발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임수아는 바로 별이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저택의 문밖은 고요했다.손님들이 세워둔 차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별이는 실망한 듯 돌아가려 했지만 임수아는 멀리서 흰색 차 옆에 놓인 커다란 봉제 인형을 발견했다.그녀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야! 저 차에서 선물을 준 거 같아. 저기 커다란 인형이 있잖아.”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차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두 아이는 흰색 차에 도달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다.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입이 막히고 곧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집 밖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케이크를 자르려던 온지유는 별이가 보이지 않자 적잖게 놀랐다.임수아의 부모 역시 딸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휩싸였다.부모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그나마 여이현이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전환되었다.그리고 감시카메라를 통해 두 아이가 차에 태워져 납치된 모습이 확인되었다.임수아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으며 그 자리
온지유는 말없이 머릿속으로 과거를 떠올리며 기억을 정리하고 있었다.그 순간 여이현이 말했다.“그 흰색 차, 감시 카메라로 확인한 결과 임상우 씨가 직접 운전해서 가져간 걸로 나왔어.”“임상우 씨?”온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임상우는 임수아의 아버지가 아닌가?오늘은 임수아의 생일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경성, 여이현의 사업 규모와 위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를 적으로 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임상우가 지금 같은 시점에서 자기 앞길을 짓밟는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곧 출산일이야. 난 여보가 이런 걱정거리 때문에 힘든 상태로 아이를 낳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약속한 대로 무슨 일이든 꼭 바로 여보한테 말해줄게.”“임상우 씨도 납치된 것 같아. 원래는 임상우 씨 원수가 그를 상대로 돈을 뜯어내려던 게 목적이었는데 우리 별이가 거기에 휘말려서...”여이현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을 멈췄다.온지유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원했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그녀는 희망을 담아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모든 비바람이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무지개가 뜨는 거겠지?”“그래, 맞아.”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속했다.“기다려. 내가 별이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올게.”그는 온지유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뒤 별이를 납치한 사람들과 협상하기 위해 떠났다.납치범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그들은 임상우와 임수아만 필요했다.별이는 원래 풀어줄 계획이었지만 문제는 별이가 너무 똑똑해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납치범들은 별이의 위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여이현이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시간을 끌며 협상을 이어갔다.“지금 경찰이 우리를 추적 중이다. 아들을 무사히 데려가려면 신고를 취소해라. 그리고 임상우의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우리 명의로 이전해. 그렇게 하면 아들은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 테니까.”
여이현을 보자 임상우는 마치 구세주를 본 듯 다급하게 외쳤다.“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별이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됐습니다. 아이들이 차 안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휴게소에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임상우의 원수는 그의 사업 경쟁자들이었다.그들은 임상우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한다고 여겨 이런 극단적인 일을 벌였다.여이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어느 휴게소였나요?”“원주 휴게소입니다.”임상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여이현은 배진호를 향해 말했다.“그놈들을 유령 별장으로 데려가라!”유령 별장, 경찰서가 아니라 고문이 가능한 그곳으로.여이현은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를 남기려 했다.그를 건드리는 자는 절대 무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한편, 별이와 임수아는 현재 건초를 싣고 가는 트럭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트럭에 건초가 반 정도만 실려 있었기에 두 아이는 뒤쪽에 공간을 만들어 숨을 수 있었다.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숨어 있었다.하지만 결국 고속도로에서 경찰에게 발견되었다.요금소에서 트럭이 멈춰 섰을 때 경찰이 차량을 조사하며 두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경찰을 보자 별이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별이는 여이현과 온지유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에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여이현은는 외지 번호가 뜬 전화를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바로 별이였다.“아빠.”“별아!”여이현은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숨소리마저 무거워졌다.별이는 임수아와 함께 무사히 구조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했다.“아빠, 경찰 아저씨들이 저희를 구해줬어요. 빨리 와서 데려가 주세요...”별이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이었다.별이는 전쟁의 공포를 겪어본 아이였다.이런 일은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신과 임수아가 다치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하고 있었다.그리고 별이는 이미 알
임수아의 부모님은 여이현에게 감사를 표했다.둘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그에게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태도로 말했다.“대표님, 이번 일은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고맙다는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에게는 그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었다.만약 별이가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굳이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임상우와 전수진은 이번 일을 좋은 계기로 삼았다.임수아와 별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며 부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반드시 여이현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이 기회는 임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일 뿐이 아니라 그들의 딸 임수아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라 확신했다.여이현은 임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별이를 봐서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시간이 흐르면서 임상우는 여진 그룹과의 사업 협력을 시작했다.임수아는 별이의 진정한 단짝 친구로 자리 잡았다.한 달 후.온지유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지만 출산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조급해 진 여이현은 온지유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예정일을 지나면 양수가 탁해지는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상태를 극도로 조심했다.온지유를 위해 VIP 병실을 예약했고 10명 이상의 의료진이 24시간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만큼 긴장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번째 출산이었고 아직 출산 징후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누워서 안심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의사가 구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온지유는 평소처럼 잘 먹고 잘 지내며 여유를 보였다.그러나!상황은 다소 괴로웠다. 낮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밤이 되면 진통이 시작되었다.출산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은 진통이었지만 그녀를 괴롭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며 가슴 아파하며 고통을 나누고 싶어
온지유가 자연분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아마 그녀에게 제왕절개를 하라고 설득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알게 된 여이현은 답답함과 걱정이 교차했다.그는 온지유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요즘은 무통 주사도 있다고 하지만 여보가 매일 밤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정말 속상해. 차라리 한 번만 아프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흉터가 걱정된다면 내가 최고의 미용 의료팀을 찾아서 완벽하게 처리해 줄게.”매일 밤 반복되는 통증에, 낮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고통.온지유가 고생을 하며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여이현은 그녀에게 출산할 힘이 남아 있을지 걱정됐다.수시로 반복되는 고통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하지만 온지유는 단호히 대답했다.“아니, 자연분만을 할 거야. 아이가 천천히 나오려는 것뿐이지 안 나온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의사들도 건강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하지 않았어?”“자연분만은 회복이 빨라. 제왕절개를 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건 정말 싫어.”온지유는 직접 제왕절개의 고통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최근 여러 정보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고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아프고 고생하는 게 너무 안타깝단 말이야.”여이현은 솔직하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온지유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픈 건 지나가면 끝이잖아. 그리고 아이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어. 지금 와서 그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힘들더라도 우리 아이를 맞아들여야지.” 3일 후, 온지유의 상태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간호사와 의사들은 병실을 돌며 그녀에게 요가 볼로 운동을 더 하거나 계단을 자주 오르내려 보라고 했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그날 밤, 온지유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자 양수가 갑자기 터졌고 이어서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여이현은 온지유 곁에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웃은 더 큰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건 네가 꼴도 보기 싫다는 소리잖아! 핸드폰은 장식이냐? 문자 보낼 줄 몰라? 굳이 그렇게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겠어? 여기 너만 사냐? 이웃 배려할 줄 몰라?!”밖에서 싸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권다솔은 결국 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남태건이 문 앞에 서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웃 주민들에게 계속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빠르게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연 그녀는 결국 이웃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방금 너무 푹 잔 탓에 못 들었네요. 폐를 끼쳐져 정말 죄송해요.”“됐어. 커플인 것 같은데 싸울 거면 문 닫고 싸워. 괜히 우리까지 사정 알게 하지 말고!”이웃의 어투는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사나웠다. 권다솔의 진심 어린 사과에 더는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이웃이 문을 닫은 후 권다솔도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남태건이 빠르게 잡아버렸다.그는 권다솔에게 애원했다.“나 좀 들어가게 해줘. 안에서 얘기하자, 응? 내가 계속 이렇게 밖에 서 있으면 이웃 주민들이 날 신고할지도 몰라.”“방금 그 행동은 확실히 신고할 만한 행동이죠. 그러니 폐를 끼치지 말고 그만 가세요.”권다솔은 있는 힘껏 문을 당겼다.남태건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문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권다솔은 갑자기 손을 놓더니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버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다솔아, 그럼 나 들어가도 되는 거지?”남태건은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권다솔의 옆에 서서 또 지난번과 비슷한 말을 해댔다. 여하간에 이미 밤을 보냈으니 결혼하자는 뉘앙스였다.“남태건 씨, 그날 집으로 오고 나서 지금까지 생각해 봤어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를 말이에요. 그리고 이미 생각을 끝냈어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
온지유는 들고 있던 식칼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여보는 손도 씻어야 하니까 귀찮게 그러지 말고 내가 가서 꺼내서 줄게.”“내 핸드백 안에 있어. 지퍼 열면 바로 보일 거야.”온지유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켕길만한 일을 한 적 없었으니 여이현이 가방을 열어보아도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여이현은 주방에서 나와 별이와 함께 현관 쪽으로 갔고 대화를 하며 가방을 열려고 했다.“아들, 아빠한테 오늘 노래 대회 어땠는지 말해주면 안 돼?”“당연히 돼요! 오늘 엄마는 엄청 멋졌어요! 친구들 부모님들도 엄마한테 박수를 쳐줬어요!”별이는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바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온지유는 얼굴이 예뻤을 뿐만 아니라 온화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은 집에서 엄마한테 혼난 적이 있다고 했지만 별이는 혼난 적이 없었다.여이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랐다.온지유의 가방을 열자 바로 칭찬 스티커가 보였다.그는 그것을 꺼내 별이에게 준 뒤 가방을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던 중 별이가 실수로 옆에 있던 신발을 밟게 되었고 넘어질 뻔했다.여이현은 얼른 별이를 부축해주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온지유의 가방을 바닥에 떨구게 되었는데 안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소리를 들은 김명자가 얼른 별이를 안고 먼저 거실로 갔고 여이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다가 우연히 립스틱 옆에 있는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온지유의 물건을 함부로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쪽지는 열린 상태였고 그가 손을 뻗었을 때 마침 안에 쓰인 글씨를 보게 되었다.내용을 본 여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위에는 협박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줄엔 커다랗게 미스터리 조직 이름을 적어두었다.이건 도발이었다.그는 어떻게든 빨리 배후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과 온지유를 지킬 수 있었다.“저녁 준비 다 됐어. 얼른 와서 먹어.”바로 이때 온지유가 음식을 들고나오며 말했다.별이는 즐거운 얼굴로 달려간 뒤 자리
온지유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우리 여보가 날 이해해줄 줄 알았어. 우리 여보랑 같이 살 수 있는 건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야.”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러던 중 별이가 거실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우리 아들은? 방에서 자고 있는 건가.”“아니야. 지금 숙제하는 중이야.'여이현은 숙제하고 있다는 말에 만감이 교차했다.“우리 아들이 다 컸네. 막 태어났을 땐 아주 자그마했는데. 지금은 숙제도 할 줄 알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혼자 등하교도 할 수 있겠네.”“이건 좋은 일이야. 별이가 엄청 열심히 숙제하더라니까. 게다가 혼자 문제를 풀더라고.”온지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됐어. 그만해. 그냥 숙제만 하는 것뿐이잖아. 아직 장가가기엔 한참 멀었어. 뭘 그렇게 감동하고 그래?”온하윤은 작은 손을 뻗어 여이현의 턱을 만졌다. 그러더니 품에 안고 있던 장난감을 건넸다.그것은 온하윤이 아주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하지만 온하윤은 장난감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기에 장난감을 건네며 아빠랑 같이 놀자는 의미로 건넸다.여이현은 딸의 작은 손에서 장난감을 받은 후 눌렀다. 폭신폭신한 촉감이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서글펐다.“하윤이도 지금은 이렇게 내 품에 쏙 안기겠지만 빠르게 크겠지. 나중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면서 결혼하겠다고 하고 아이까지 낳을 생각 하니 뭔가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드네.”온지유는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만약 온하윤이 지금 성인이 되어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다면 그녀도 확실히 그런 감회가 들 것 같았다.“하지만 하윤이는 아직 한 살도 안 되었잖아. 시집가기엔 한참이나 멀었는걸.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얼른 가서 저녁이나 차려줘. 별이도 숙제 거의 다 했을 테니까 내가 가서 보면 돼.”온지유는 걸음을 옮겼다.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여이현은 출산하기 전날 고통스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부자이든 아니든, 설령 세계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산부인과라고 해도 출산할 때
어린이집에서 나와 차로 돌아온 후에야 온지유는 자신의 가방이 열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열린 지퍼를 잠그며 말했다.“별아, 이대로 집으로 갈래, 아니면 다른 데 구경하러 갈래?”“집으로 가요, 엄마. 조금 졸려요. 별이는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내일도 어린이집 가야 하는걸요.”별이는 알아서 척척 안전벨트를 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기사가 앞에서 부드럽게 운전해준 덕에 편하게 집까지 도착했다.집 안으로 들어간 별이는 평소처럼 거실에 앉아 놀지 않았다. 겉옷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온지유의 앞으로 달려갔다.“엄마, 전 방에서 숙제하고 있을게요. 아마 저녁 식사 전까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숙제하겠다고?”온지유는 숙제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별이는 아직 어렸던지라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아닌데 벌써 숙제가 있다니.물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숙제를 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선생님이 저희한테 지금부터 숙제하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했어요. 안 그러면 초등학생이 되면 힘들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숙제를 내주신 게 아니니 저는 빨리 완성할 수 있어요.”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비록 아이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온지유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어떤 숙제를 낸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다.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온 뒤 별이는 가방에서 어린이집에서 나눠줬다는 연습장을 꺼내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엄마, 선생님께선 저희에게 숙제를 두 개 내주셨어요. 하나는 글씨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에요.”온지유는 책을 넘기며 대충 훑어보았다. 책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단한 단어가 있었다. 아이들이 쓰기에도 쉬운 단어였다. 수학책에는 1부터 20의 숫자가 있었고 어떤 숫자가 더 큰지 적어넣는 문제가 있었다. 별이처럼 어린아이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는
온지유는 당연히 잘 불러야 했다. 1등을 차지해 별이에게 멋진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으니까.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에 온지유는 이어폰을 꽂고 어젯밤 생각해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차는 어린이집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별이의 반은 3층에 있었다. 다른 어린이들과 학부모들도 거의 도착해 있었다. 온지유가 안으로 들어가자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무리 학부모 중 온지유가 유난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그녀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걸음걸이마다 우아함이 돋보이며 굴곡진 몸매에 기품도 느껴졌다.이때 어린이 한 명이 별이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작게 물었다.“별이 엄마 진짜 예쁘다. 우리 엄마도 별이 네 엄마처럼 이뻤으면 좋겠다.”“우리 엄마들은 다 예뻐.”별이는 친구의 말을 바로잡아주었다.물론 별이의 마음속에 온지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었다.선생님들은 이미 학부모들이 앉을 의자를 준비해 주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모여있는 반이었던지라 학생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교실도 꽤나 컸기에 의자를 몇 개 더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비좁은 느낌은 없었다.온지유는 자리에 앉았다. 별이는 그런 온지유 옆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별이 엄마, 몸매가 아주 좋으시네요. 평소에 운동하시는 거예요? 저도 몸매 유지하는 비결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옆자리에 앉은 학부모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전 평소에 식사량이 많지 않은데도 뱃살은 빠지지 않더라고요.”여자들의 관심사는 전부 비슷했다. 그들은 미용이거나 몸매 관리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온지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준 뒤 핸드폰을 꺼내 저장해둔 영상을 몇 개 보여주었다.“전 집에서 요가를 하거든요. 이 영상들을 따라 해봤는데 효과가 꽤 있었어요. 평소에 적게 드신다면 살은 당연히 빠지겠지만 뱃살을 없애고 싶은 거라면 제 생각엔 운동은 필수인 것 같네요.”“저희 연락처 교환해요. 이 영상들을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