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희는 악몽에서 깨어난 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구석에서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녀가 걱정되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 방에서 울음소리를 듣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불을 켜고 백지희를 본 순간 온지유는 깜짝 놀랐다. 온지유는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안으며 물었다.“악몽이라도 꿨어?”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온지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백지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물었다.“우리 전에도 아는 사이었어?”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리는 정말 친한 친구였어.”백지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궁금한 듯 되물었다.“예전에도 나를 이렇게 쓰다듬어 줬었어?”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온지유를 순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온지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다.백지희가 힘들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위로하곤 했었다.백지희는 지금 온지유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행동만큼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게 바로 조건 반사라는 걸까?온지유는 다시 백지희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어때?”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좋아. 여기도 좋아.”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좋다니 다행이다. 혹시 싫으면 꼭 말해. 절대 억지로 하지 않을게.”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지유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백지희를 Y국으로 데려가려면 법로가 필요하다.온지유는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직접 나설 수 없었다.지금의 문제는 백지희가 과연 법로를 받아들일지였다.온지유는 밤새 고민한 끝에 백지희를 며칠 더 머무르게 하며 법로에 대한 신뢰를 쌓게 한 후 Y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다음 날 오후 여이현은 법로를 데리고 돌아왔다.온지유는 그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설명했다.하지만 법로는 주저하며 말했다.“Y국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내가 여기 있으면 네 오빠가 힘들게 될까 봐
법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로 그거다. 의학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는... 아, 아니다. 너한테 말해도 이해 못 하겠네. 간단히 말하면 지희는 이곳에서 지내기엔 적합하지 않아. 하지만 본인도 이유는 모를 거야.”온지유는 백지희를 돌아보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버지가 많이 신경 써주세요.”법로는 이 일을 어려운 문제로 보지 않았다. 백지희가 그와 함께 떠나기만 해주면 Y국에 도착한 후에는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백지희의 사연을 들은 법로는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조용한 정원 같은 곳이었고 방 청소와 식사를 제외하고는 하인 한 명만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백지희가 휴양을 취하기에는 맞춤한 곳이었다.Y국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백지희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했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법로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더니 하인에게 그녀를 정원으로 데려가게 하고 방을 정리하는 동안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백지희는 아래로 내려와 법로를 보며 약간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법로는 그런 그녀를 맞은편에 앉히고 음식을 덜어주었다.백지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었고 잘못한 행동으로 법로를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법로는 도우미를 불러 그녀에게 소개하며 말했다.“이 아이는 레나다. 네가 이 아이의 주인이니,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시켜도 된다. 네 말은 무조건 따를 거야.”백지희는 이해한 듯하면서도 머리를 갸웃거렸다.법로는 다시 말했다.“너는 왕이고, 레나는 병사야. 알겠니?”백지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레나는 웃으며 말했다.“간단히 말하면 지희 씨는 공주님이고, 저는 하녀라는 의미예요.”백지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은 백지희와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이때, 다른 사람이 법로를 찾아왔다. 법로는 어쩔 수 없이 백지희를 레나에게 맡기고 일을 처리하러 갔다.법로가 떠난 뒤 백지희는 레나에게 조용히 물었다.“다시 오실까?”레나는
레나는 이야기책을 건네며 삽화를 가리켰다.“여기 있어요, 파란 태양. 너무 예쁘지 않아요?”백지희는 삽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파란 태양... 정말 예쁘게 그렸네.”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레나는 백지희가 보이지 않아 정원을 찾다가 한 구석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그녀의 그림은 아직 삐뚤삐뚤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레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법로에게 알려 그녀를 위해 그림 도구를 준비하게 했다.예전에도 그림을 그리던 그녀였기에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백지희에게 좋을 것 같았다. 백지희는 점점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녀의 방은 그림으로 가득 찼다.레나는 그림을 하나하나 액자에 넣어 전시했으며, 집 전체를 그녀의 작품으로 꾸몄다.멀리 경성에 있는 온지유는 백지희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더 빨리 그녀를 데려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그랬더라면 백지희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도우미를 시켜 그림 잡지를 구매해 Y국으로 보냈다.그러다 도우미의 말을 듣고 별이의 생일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그녀는 또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아이 생일도 잊은 걸까.’온지유는 친구도, 아들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도우미에게 생일 준비를 부탁했다.도우미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사모님,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사모님은 주어진 일을 잘해 나가고 있을 뿐이세요.”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위로에는 서툴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맞다, 오후 별이를 데리러 갈 때 친구들을 초대할 건지 물어봐 주세요. 초대 카드를 준비하기 쉽게요. 오는 길에 카드도 사주시고요.”이곳에서 처음 별이와 함께 보내는 생일이었기에 온지유는 기대가 가득했다.하지만 동시에 잘 준비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별이는 친구들의 놀림에 자존심이 상해 어른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바로 선물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단 한 줄의 구절만 적혀 있는 종이였다.여자아이가 글을 읽고 말했다.“더 많은 선물이 갖고 싶으면 정문으로 와.”글을 읽고 나서 여자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건 장난치는 거잖아. 우리 엄마가 그랬어. 선물은 진심으로 주는 게 맞는 거라고. 이렇게 장난치는 건 제대로 된 선물이 아니래.”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이에게 정문으로 가자고 소리 질렀다.별이는 아이들의 놀림에 화가 나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임수아, 너도 나랑 같이 갈래? 내가 선물을 고르게 해줄게. 네가 고른 건 전부 네 거야.”임수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여자애들은 원래 겁이 많잖아. 임수아는 못 갈걸!”임수아와 별이 둘 다 도발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임수아는 바로 별이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저택의 문밖은 고요했다.손님들이 세워둔 차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별이는 실망한 듯 돌아가려 했지만 임수아는 멀리서 흰색 차 옆에 놓인 커다란 봉제 인형을 발견했다.그녀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야! 저 차에서 선물을 준 거 같아. 저기 커다란 인형이 있잖아.”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차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두 아이는 흰색 차에 도달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다.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입이 막히고 곧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집 밖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케이크를 자르려던 온지유는 별이가 보이지 않자 적잖게 놀랐다.임수아의 부모 역시 딸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휩싸였다.부모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그나마 여이현이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전환되었다.그리고 감시카메라를 통해 두 아이가 차에 태워져 납치된 모습이 확인되었다.임수아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으며 그 자리
온지유는 말없이 머릿속으로 과거를 떠올리며 기억을 정리하고 있었다.그 순간 여이현이 말했다.“그 흰색 차, 감시 카메라로 확인한 결과 임상우 씨가 직접 운전해서 가져간 걸로 나왔어.”“임상우 씨?”온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임상우는 임수아의 아버지가 아닌가?오늘은 임수아의 생일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경성, 여이현의 사업 규모와 위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를 적으로 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임상우가 지금 같은 시점에서 자기 앞길을 짓밟는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곧 출산일이야. 난 여보가 이런 걱정거리 때문에 힘든 상태로 아이를 낳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약속한 대로 무슨 일이든 꼭 바로 여보한테 말해줄게.”“임상우 씨도 납치된 것 같아. 원래는 임상우 씨 원수가 그를 상대로 돈을 뜯어내려던 게 목적이었는데 우리 별이가 거기에 휘말려서...”여이현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을 멈췄다.온지유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원했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그녀는 희망을 담아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모든 비바람이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무지개가 뜨는 거겠지?”“그래, 맞아.”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속했다.“기다려. 내가 별이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올게.”그는 온지유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뒤 별이를 납치한 사람들과 협상하기 위해 떠났다.납치범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그들은 임상우와 임수아만 필요했다.별이는 원래 풀어줄 계획이었지만 문제는 별이가 너무 똑똑해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납치범들은 별이의 위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여이현이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시간을 끌며 협상을 이어갔다.“지금 경찰이 우리를 추적 중이다. 아들을 무사히 데려가려면 신고를 취소해라. 그리고 임상우의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우리 명의로 이전해. 그렇게 하면 아들은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 테니까.”
여이현을 보자 임상우는 마치 구세주를 본 듯 다급하게 외쳤다.“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별이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됐습니다. 아이들이 차 안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휴게소에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임상우의 원수는 그의 사업 경쟁자들이었다.그들은 임상우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한다고 여겨 이런 극단적인 일을 벌였다.여이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어느 휴게소였나요?”“원주 휴게소입니다.”임상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여이현은 배진호를 향해 말했다.“그놈들을 유령 별장으로 데려가라!”유령 별장, 경찰서가 아니라 고문이 가능한 그곳으로.여이현은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를 남기려 했다.그를 건드리는 자는 절대 무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한편, 별이와 임수아는 현재 건초를 싣고 가는 트럭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트럭에 건초가 반 정도만 실려 있었기에 두 아이는 뒤쪽에 공간을 만들어 숨을 수 있었다.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숨어 있었다.하지만 결국 고속도로에서 경찰에게 발견되었다.요금소에서 트럭이 멈춰 섰을 때 경찰이 차량을 조사하며 두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경찰을 보자 별이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별이는 여이현과 온지유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에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여이현은는 외지 번호가 뜬 전화를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바로 별이였다.“아빠.”“별아!”여이현은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숨소리마저 무거워졌다.별이는 임수아와 함께 무사히 구조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했다.“아빠, 경찰 아저씨들이 저희를 구해줬어요. 빨리 와서 데려가 주세요...”별이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이었다.별이는 전쟁의 공포를 겪어본 아이였다.이런 일은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신과 임수아가 다치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하고 있었다.그리고 별이는 이미 알
임수아의 부모님은 여이현에게 감사를 표했다.둘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그에게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태도로 말했다.“대표님, 이번 일은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고맙다는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에게는 그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었다.만약 별이가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굳이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임상우와 전수진은 이번 일을 좋은 계기로 삼았다.임수아와 별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며 부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반드시 여이현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이 기회는 임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일 뿐이 아니라 그들의 딸 임수아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라 확신했다.여이현은 임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별이를 봐서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시간이 흐르면서 임상우는 여진 그룹과의 사업 협력을 시작했다.임수아는 별이의 진정한 단짝 친구로 자리 잡았다.한 달 후.온지유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지만 출산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조급해 진 여이현은 온지유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예정일을 지나면 양수가 탁해지는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상태를 극도로 조심했다.온지유를 위해 VIP 병실을 예약했고 10명 이상의 의료진이 24시간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만큼 긴장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번째 출산이었고 아직 출산 징후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누워서 안심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의사가 구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온지유는 평소처럼 잘 먹고 잘 지내며 여유를 보였다.그러나!상황은 다소 괴로웠다. 낮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밤이 되면 진통이 시작되었다.출산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은 진통이었지만 그녀를 괴롭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며 가슴 아파하며 고통을 나누고 싶어
온지유가 자연분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아마 그녀에게 제왕절개를 하라고 설득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알게 된 여이현은 답답함과 걱정이 교차했다.그는 온지유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요즘은 무통 주사도 있다고 하지만 여보가 매일 밤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정말 속상해. 차라리 한 번만 아프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흉터가 걱정된다면 내가 최고의 미용 의료팀을 찾아서 완벽하게 처리해 줄게.”매일 밤 반복되는 통증에, 낮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고통.온지유가 고생을 하며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여이현은 그녀에게 출산할 힘이 남아 있을지 걱정됐다.수시로 반복되는 고통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하지만 온지유는 단호히 대답했다.“아니, 자연분만을 할 거야. 아이가 천천히 나오려는 것뿐이지 안 나온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의사들도 건강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하지 않았어?”“자연분만은 회복이 빨라. 제왕절개를 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건 정말 싫어.”온지유는 직접 제왕절개의 고통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최근 여러 정보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고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아프고 고생하는 게 너무 안타깝단 말이야.”여이현은 솔직하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온지유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픈 건 지나가면 끝이잖아. 그리고 아이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어. 지금 와서 그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힘들더라도 우리 아이를 맞아들여야지.” 3일 후, 온지유의 상태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간호사와 의사들은 병실을 돌며 그녀에게 요가 볼로 운동을 더 하거나 계단을 자주 오르내려 보라고 했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그날 밤, 온지유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자 양수가 갑자기 터졌고 이어서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여이현은 온지유 곁에서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