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로 그거다. 의학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는... 아, 아니다. 너한테 말해도 이해 못 하겠네. 간단히 말하면 지희는 이곳에서 지내기엔 적합하지 않아. 하지만 본인도 이유는 모를 거야.”온지유는 백지희를 돌아보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버지가 많이 신경 써주세요.”법로는 이 일을 어려운 문제로 보지 않았다. 백지희가 그와 함께 떠나기만 해주면 Y국에 도착한 후에는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백지희의 사연을 들은 법로는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조용한 정원 같은 곳이었고 방 청소와 식사를 제외하고는 하인 한 명만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백지희가 휴양을 취하기에는 맞춤한 곳이었다.Y국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백지희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했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법로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더니 하인에게 그녀를 정원으로 데려가게 하고 방을 정리하는 동안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백지희는 아래로 내려와 법로를 보며 약간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법로는 그런 그녀를 맞은편에 앉히고 음식을 덜어주었다.백지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었고 잘못한 행동으로 법로를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법로는 도우미를 불러 그녀에게 소개하며 말했다.“이 아이는 레나다. 네가 이 아이의 주인이니,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시켜도 된다. 네 말은 무조건 따를 거야.”백지희는 이해한 듯하면서도 머리를 갸웃거렸다.법로는 다시 말했다.“너는 왕이고, 레나는 병사야. 알겠니?”백지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레나는 웃으며 말했다.“간단히 말하면 지희 씨는 공주님이고, 저는 하녀라는 의미예요.”백지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은 백지희와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이때, 다른 사람이 법로를 찾아왔다. 법로는 어쩔 수 없이 백지희를 레나에게 맡기고 일을 처리하러 갔다.법로가 떠난 뒤 백지희는 레나에게 조용히 물었다.“다시 오실까?”레나는
레나는 이야기책을 건네며 삽화를 가리켰다.“여기 있어요, 파란 태양. 너무 예쁘지 않아요?”백지희는 삽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파란 태양... 정말 예쁘게 그렸네.”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레나는 백지희가 보이지 않아 정원을 찾다가 한 구석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그녀의 그림은 아직 삐뚤삐뚤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레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법로에게 알려 그녀를 위해 그림 도구를 준비하게 했다.예전에도 그림을 그리던 그녀였기에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백지희에게 좋을 것 같았다. 백지희는 점점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녀의 방은 그림으로 가득 찼다.레나는 그림을 하나하나 액자에 넣어 전시했으며, 집 전체를 그녀의 작품으로 꾸몄다.멀리 경성에 있는 온지유는 백지희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더 빨리 그녀를 데려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그랬더라면 백지희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도우미를 시켜 그림 잡지를 구매해 Y국으로 보냈다.그러다 도우미의 말을 듣고 별이의 생일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그녀는 또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아이 생일도 잊은 걸까.’온지유는 친구도, 아들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도우미에게 생일 준비를 부탁했다.도우미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사모님,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사모님은 주어진 일을 잘해 나가고 있을 뿐이세요.”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위로에는 서툴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맞다, 오후 별이를 데리러 갈 때 친구들을 초대할 건지 물어봐 주세요. 초대 카드를 준비하기 쉽게요. 오는 길에 카드도 사주시고요.”이곳에서 처음 별이와 함께 보내는 생일이었기에 온지유는 기대가 가득했다.하지만 동시에 잘 준비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별이는 친구들의 놀림에 자존심이 상해 어른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바로 선물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단 한 줄의 구절만 적혀 있는 종이였다.여자아이가 글을 읽고 말했다.“더 많은 선물이 갖고 싶으면 정문으로 와.”글을 읽고 나서 여자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건 장난치는 거잖아. 우리 엄마가 그랬어. 선물은 진심으로 주는 게 맞는 거라고. 이렇게 장난치는 건 제대로 된 선물이 아니래.”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이에게 정문으로 가자고 소리 질렀다.별이는 아이들의 놀림에 화가 나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임수아, 너도 나랑 같이 갈래? 내가 선물을 고르게 해줄게. 네가 고른 건 전부 네 거야.”임수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여자애들은 원래 겁이 많잖아. 임수아는 못 갈걸!”임수아와 별이 둘 다 도발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임수아는 바로 별이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저택의 문밖은 고요했다.손님들이 세워둔 차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별이는 실망한 듯 돌아가려 했지만 임수아는 멀리서 흰색 차 옆에 놓인 커다란 봉제 인형을 발견했다.그녀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야! 저 차에서 선물을 준 거 같아. 저기 커다란 인형이 있잖아.”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차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두 아이는 흰색 차에 도달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다.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입이 막히고 곧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집 밖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케이크를 자르려던 온지유는 별이가 보이지 않자 적잖게 놀랐다.임수아의 부모 역시 딸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휩싸였다.부모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그나마 여이현이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전환되었다.그리고 감시카메라를 통해 두 아이가 차에 태워져 납치된 모습이 확인되었다.임수아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으며 그 자리
온지유는 말없이 머릿속으로 과거를 떠올리며 기억을 정리하고 있었다.그 순간 여이현이 말했다.“그 흰색 차, 감시 카메라로 확인한 결과 임상우 씨가 직접 운전해서 가져간 걸로 나왔어.”“임상우 씨?”온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임상우는 임수아의 아버지가 아닌가?오늘은 임수아의 생일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경성, 여이현의 사업 규모와 위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를 적으로 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임상우가 지금 같은 시점에서 자기 앞길을 짓밟는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곧 출산일이야. 난 여보가 이런 걱정거리 때문에 힘든 상태로 아이를 낳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약속한 대로 무슨 일이든 꼭 바로 여보한테 말해줄게.”“임상우 씨도 납치된 것 같아. 원래는 임상우 씨 원수가 그를 상대로 돈을 뜯어내려던 게 목적이었는데 우리 별이가 거기에 휘말려서...”여이현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을 멈췄다.온지유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원했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그녀는 희망을 담아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모든 비바람이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무지개가 뜨는 거겠지?”“그래, 맞아.”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속했다.“기다려. 내가 별이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올게.”그는 온지유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뒤 별이를 납치한 사람들과 협상하기 위해 떠났다.납치범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그들은 임상우와 임수아만 필요했다.별이는 원래 풀어줄 계획이었지만 문제는 별이가 너무 똑똑해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납치범들은 별이의 위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여이현이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시간을 끌며 협상을 이어갔다.“지금 경찰이 우리를 추적 중이다. 아들을 무사히 데려가려면 신고를 취소해라. 그리고 임상우의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우리 명의로 이전해. 그렇게 하면 아들은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 테니까.”
여이현을 보자 임상우는 마치 구세주를 본 듯 다급하게 외쳤다.“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별이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됐습니다. 아이들이 차 안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휴게소에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임상우의 원수는 그의 사업 경쟁자들이었다.그들은 임상우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한다고 여겨 이런 극단적인 일을 벌였다.여이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어느 휴게소였나요?”“원주 휴게소입니다.”임상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여이현은 배진호를 향해 말했다.“그놈들을 유령 별장으로 데려가라!”유령 별장, 경찰서가 아니라 고문이 가능한 그곳으로.여이현은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를 남기려 했다.그를 건드리는 자는 절대 무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한편, 별이와 임수아는 현재 건초를 싣고 가는 트럭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트럭에 건초가 반 정도만 실려 있었기에 두 아이는 뒤쪽에 공간을 만들어 숨을 수 있었다.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숨어 있었다.하지만 결국 고속도로에서 경찰에게 발견되었다.요금소에서 트럭이 멈춰 섰을 때 경찰이 차량을 조사하며 두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경찰을 보자 별이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별이는 여이현과 온지유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에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여이현은는 외지 번호가 뜬 전화를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휴대전화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바로 별이였다.“아빠.”“별아!”여이현은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긴장했고 숨소리마저 무거워졌다.별이는 임수아와 함께 무사히 구조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했다.“아빠, 경찰 아저씨들이 저희를 구해줬어요. 빨리 와서 데려가 주세요...”별이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이었다.별이는 전쟁의 공포를 겪어본 아이였다.이런 일은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신과 임수아가 다치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하고 있었다.그리고 별이는 이미 알
임수아의 부모님은 여이현에게 감사를 표했다.둘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그에게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태도로 말했다.“대표님, 이번 일은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고맙다는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에게는 그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었다.만약 별이가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굳이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임상우와 전수진은 이번 일을 좋은 계기로 삼았다.임수아와 별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며 부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반드시 여이현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이 기회는 임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일 뿐이 아니라 그들의 딸 임수아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라 확신했다.여이현은 임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별이를 봐서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시간이 흐르면서 임상우는 여진 그룹과의 사업 협력을 시작했다.임수아는 별이의 진정한 단짝 친구로 자리 잡았다.한 달 후.온지유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지만 출산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조급해 진 여이현은 온지유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예정일을 지나면 양수가 탁해지는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상태를 극도로 조심했다.온지유를 위해 VIP 병실을 예약했고 10명 이상의 의료진이 24시간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만큼 긴장하지 않았다.그녀는 두 번째 출산이었고 아직 출산 징후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누워서 안심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의사가 구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온지유는 평소처럼 잘 먹고 잘 지내며 여유를 보였다.그러나!상황은 다소 괴로웠다. 낮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밤이 되면 진통이 시작되었다.출산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은 진통이었지만 그녀를 괴롭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며 가슴 아파하며 고통을 나누고 싶어
온지유가 자연분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여이현은 아마 그녀에게 제왕절개를 하라고 설득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알게 된 여이현은 답답함과 걱정이 교차했다.그는 온지유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요즘은 무통 주사도 있다고 하지만 여보가 매일 밤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정말 속상해. 차라리 한 번만 아프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흉터가 걱정된다면 내가 최고의 미용 의료팀을 찾아서 완벽하게 처리해 줄게.”매일 밤 반복되는 통증에, 낮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고통.온지유가 고생을 하며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여이현은 그녀에게 출산할 힘이 남아 있을지 걱정됐다.수시로 반복되는 고통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하지만 온지유는 단호히 대답했다.“아니, 자연분만을 할 거야. 아이가 천천히 나오려는 것뿐이지 안 나온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의사들도 건강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하지 않았어?”“자연분만은 회복이 빨라. 제왕절개를 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건 정말 싫어.”온지유는 직접 제왕절개의 고통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최근 여러 정보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고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아프고 고생하는 게 너무 안타깝단 말이야.”여이현은 솔직하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온지유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픈 건 지나가면 끝이잖아. 그리고 아이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어. 지금 와서 그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힘들더라도 우리 아이를 맞아들여야지.” 3일 후, 온지유의 상태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간호사와 의사들은 병실을 돌며 그녀에게 요가 볼로 운동을 더 하거나 계단을 자주 오르내려 보라고 했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그날 밤, 온지유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자 양수가 갑자기 터졌고 이어서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여이현은 온지유 곁에서
아기의 얼굴은 작고 앙증맞았다.분홍빛의 얼굴은 약간 주름졌고 작은 주먹을 꼭 쥔 채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온지유는 아기를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움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별이를 낳았던 날이 떠올랐다.그토록 힘들게 낳은 아이를 겨우 한 번 스치듯 보고는 바로 데려가 버린 뒤 죽었다고 전해 들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번에는 꼭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우겠다고 다짐했다.“아이 이름은 뭐로 할까?”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여민하.”그녀는 그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렸다.하지만 여이현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여보, 딸아이 성은 당신 성으로 하면 어떨까?”“정말?”온지유는 믿기 어려운 듯 물었다.대개 아이의 성은 아버지를 따른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최근에서야 생겨난 일이었다.여이현이 먼저 그렇게 제안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여보를 속인 적 있어? 온... 온시유는 어때?”“이 아이는 긴 시간 기다려 온 아이야. 우리가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준 아이이고.”온지유는 이 이름을 조용히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녀는 갑자기 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빛나는 별, 윤별.“별이의 이름에 대해선 여태 물어본 적 없네. 당신이 지은 거야, 아니면 당신 아버지가 지은 거야?”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덧붙였다.“지금 와서 이런 걸 묻는 건 너무 늦었나?”“늦지 않았어. 당신은 항상 별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잖아. 내가 했던 말, 죽었다는 말도 믿지 않았고. 이 몇 년간 정말 고생 많았어. 경성으로 돌아와서도 정말 많은 노력을 했잖아.”여이현은 온지유의 헌신과 노고를 진심으로 인정하며 그녀를 위로했다.그러나 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아니다. 딸아이 이름이 시유라면 여보 이름과 발음이 너무 비슷해. 내 생각엔... 온하윤이 더 좋을 것 같아.”윤별은 빛나는 별, 하윤은 따뜻한 햇빛.“좋아.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