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별 탈이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고 어느새 온지유가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하는 날이 돌아왔다.아침밥을 먹은 뒤 그녀는 별이가 혼자 준비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배가 불러오니 모든 행동이 불편했던 온지유는 소파에 앉아 전화로 별이에게 필요한 물건이 뭔지 자세히 알려줬다. 여이현도 사실 온지유 곁에서 그녀를 잘 돌봐주고 싶었지만 요즘 일이 너무 바빠 그러지 못했다.그런 그녀도 여이현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혼자 병원에 가려고 했다.30분 뒤, 별이가 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엄마, 저도 이제 컸으니까 많은 일들을 도와줄 수 있어요. 맞죠?”온지유는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우리 별이도 이젠 다 컸지.”별이는 활짝 웃더니 가방을 메고 휠체어를 가져와서 온지유를 태운 뒤 밀고 대문을 나섰다.당연히 휠체어는 자동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 작은 몸으로는 끄떡도 없을 것이다.운전기사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달려왔다.“사모님, 저를 부르시지...”온지유는 괜히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살짝 웃으며 말했다.“우리 아들이 도와줘서 괜찮아요.”이때 별이가 고개를 들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아빠가 지금 집에 없으니까, 제가 아빠 대신 엄마를 챙겨드려야 해요.”운전기사는 그런 별이가 너무 기특해 연신 칭찬해 줬다.그렇게 그들은 병원에 도착했고 여이현도 어느새 와있었다.별이는 여이현에게도 오늘 엄마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미주알고주알 말해줬는데 여이현은 단번에 눈치채고 그를 칭찬해 줬다.세 사람은 산부인과에 도착한 뒤 접수를 마치고 대기 순서를 기다렸다.이때, 백시윤과 백지희가 초음파실에 나오는 모습에 온지유는 그녀가 임신이라도 한 줄 알고 재빨리 그들을 불러세웠다.하지만 백지희는 온지유를 알아보지 못하고 백시윤만 멍하니 쳐다보았다.백시윤은 온지유와 대화하기 싫어 그저 멀리서 가볍게 인사한 뒤 재빨리 백지희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이때, 온지유가 여이현을 재촉했다.“빨리 저쪽
백시윤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건 당연히 그럴만한 원인이 있어서이고 또한 지금 백지희의 보호자가 자신인데 왜 자꾸 온지유가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몰랐다.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무슨 일은요. 제가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검진하러 왔을 뿐입니다.”백시윤은 말을 마친 뒤 몸을 돌려 백지희에게 물었다.“배고프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백지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다고 손뼉까지 쳤다.“그럼, 먼저 가볼게요. 지희한테 밥 먹여야 해서요.”하지만 온지유의 눈은 속이기 힘들었다.두 사람이 떠나가자마자 온지유는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여이현더러 오늘 병원에 왜 왔는지 알아보라고 했다.바로 이때, 마침 온지유 진료 차례가 되어 여이현은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로 들어갔다.그리고 그녀가 진료받는 사이에 여이현은 병원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런 일은 원장에게 부탁하면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온지유가 진료를 다 받고 나오니 원장 쪽에서 다시 전화가 왔는데 오늘 백시윤이 백지희에게 자궁 제거 수술을 시키려 했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온지유는 당장 백시윤을 찾아가고 싶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옆에 별이도 있으니 진정하라고 애써 그녀를 진정시켰다.온지유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니면 지희 아버님더러 지희를 데려가라고 할까? 지희가 또 다치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돼.”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이 일은 조급해 말고 일단 나한테 맡겨. 내가 알아보고 해결할게.”사실 온지유도 지금 자기 몸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도 뱃속의 아이만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란 걸 인지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감정을 잘 컨트롤하겠다고 그와 약속했다.백시윤도 빠르게 온지유가 자신의 목적에 대해 알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는 오랫동안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다시 백지희를 자기 앞으로 데려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동생은 오빠 곁을
시외의 한 루프톱 바에서 여이현은 백시윤에게 술 한잔을 따라주면서 말했다.“남자로서 백 대표님이 너무 이해가 안 돼요. 세상에 널린 여자가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백지희 씨인가요?”백시윤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그런 이현 씨는 왜 온지유 씨를 택했나요?”순간 여이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에 백시윤이 그에게 술 한잔을 따라주면서 차갑게 웃었다.“할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하세요.”순간 여이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지희 씨의 자궁까지 제거하고, 혹시 평생 저 모습으로 살길 바라나요?” 백시윤은 그저 고개만 젓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저녁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서 백시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강서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목소리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강서준이 웬 어여쁜 여자와 같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분위기를 보아하니 새로 사귄 여자 친구인 것 같았다.그 모습에 백시윤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여이현 씨, 솔직히 지희가 영원히 지금 상태로 지냈으면 좋겠네요. 그럼 강서준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가겠죠.”여이현은 그의 말을 동의할 수 없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이 모든 게 다 강태규가 계획한 일이고 그래야만 정을 뗀다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백지희 친구의 남편이자 온지유의 말을 대신하러 온 것뿐이다.여이현이 다시 답했다.“다른 사람의 일은 모르겠는데 백지희 씨 일이라면 제가 관여해야겠어요. 자궁 제거는 절대 안 돼요.”순간 백시윤이 큰 소리로 웃다가 다시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경고했다.“여이현 씨, 누가 뭐래도 백지희는 제 사람이고 제가 지희를 어떻게 대하든 이현 씨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여이현도 화가 치밀어 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지희 씨는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에요.”온지유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백시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절대로 용납할
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백시윤의 말을 잘 따라야 그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하여 조심스럽게 그에게 입을 맞췄는데 예전에 배운 대로 그의 입술을 살짝 물어보았다.기분이 좋아진 백시윤은 단번에 그녀의 어깨를 눌러 바닥에 눕혔다.거사를 치른 뒤, 백시윤은 약과 물을 가져와 백지희에게 건네줬다.왜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혹시나 그가 화낼까, 묻지도 못했다.고분고분 약을 먹은 뒤 다시 침대에 돌아가 누웠다가 그가 방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다시 침대에서 내려와 살며시 문에 귀를 대보았다.백시윤은 한참 동안 문밖에 서 있다가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그가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백지희는 다시 안심하고 자기 침대에 돌아가 잠을 잘 수 있었다.이튿날, 점심을 다 먹은 뒤 백시윤은 또다시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수술에 대해 여쭤봤다. 하지만 의사는 수술이 불가하다고 거절했는데 이는 여이현이 뒤에서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백시윤은 의사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면서 당장 수술 진행해달라고 협박했다.겁에 질린 의사는 어쩔 수 없이 간호사를 불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백지희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환자분께서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요. 혹시 제가 데리고 나가도 될까요?”하지만 쉽게 넘어갈 백시윤이 아니다.“허튼수작하지 말고 여기서 갈아입혀요.”간호사는 난감한 얼굴로 백지희를 데리고 진료실 안쪽으로 안내했다.그러나 백지희는 구석에 숨어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안 갈래요. 저 어디도 안 갈래요.”그 모습에 백시윤은 짜증이 몰려와 그녀에게 큰소리쳤다.“말 들어. 빨리 가서 옷 갈아입고!”“싫어요.”사실 백지희는 방금 백시윤의 행동에 겁을 먹었다.자기 때문에 지금 그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고 또 그녀를 쫓아낼 것이라 오해했다.순간
백지희는 악몽에서 깨어난 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구석에서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녀가 걱정되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 방에서 울음소리를 듣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불을 켜고 백지희를 본 순간 온지유는 깜짝 놀랐다. 온지유는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안으며 물었다.“악몽이라도 꿨어?”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온지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백지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물었다.“우리 전에도 아는 사이었어?”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리는 정말 친한 친구였어.”백지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궁금한 듯 되물었다.“예전에도 나를 이렇게 쓰다듬어 줬었어?”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온지유를 순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온지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다.백지희가 힘들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위로하곤 했었다.백지희는 지금 온지유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행동만큼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게 바로 조건 반사라는 걸까?온지유는 다시 백지희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어때?”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좋아. 여기도 좋아.”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좋다니 다행이다. 혹시 싫으면 꼭 말해. 절대 억지로 하지 않을게.”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지유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백지희를 Y국으로 데려가려면 법로가 필요하다.온지유는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직접 나설 수 없었다.지금의 문제는 백지희가 과연 법로를 받아들일지였다.온지유는 밤새 고민한 끝에 백지희를 며칠 더 머무르게 하며 법로에 대한 신뢰를 쌓게 한 후 Y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다음 날 오후 여이현은 법로를 데리고 돌아왔다.온지유는 그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설명했다.하지만 법로는 주저하며 말했다.“Y국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내가 여기 있으면 네 오빠가 힘들게 될까 봐
법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로 그거다. 의학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는... 아, 아니다. 너한테 말해도 이해 못 하겠네. 간단히 말하면 지희는 이곳에서 지내기엔 적합하지 않아. 하지만 본인도 이유는 모를 거야.”온지유는 백지희를 돌아보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버지가 많이 신경 써주세요.”법로는 이 일을 어려운 문제로 보지 않았다. 백지희가 그와 함께 떠나기만 해주면 Y국에 도착한 후에는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백지희의 사연을 들은 법로는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조용한 정원 같은 곳이었고 방 청소와 식사를 제외하고는 하인 한 명만 그녀를 돌보도록 했다.백지희가 휴양을 취하기에는 맞춤한 곳이었다.Y국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백지희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했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법로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더니 하인에게 그녀를 정원으로 데려가게 하고 방을 정리하는 동안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백지희는 아래로 내려와 법로를 보며 약간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법로는 그런 그녀를 맞은편에 앉히고 음식을 덜어주었다.백지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었고 잘못한 행동으로 법로를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법로는 도우미를 불러 그녀에게 소개하며 말했다.“이 아이는 레나다. 네가 이 아이의 주인이니,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시켜도 된다. 네 말은 무조건 따를 거야.”백지희는 이해한 듯하면서도 머리를 갸웃거렸다.법로는 다시 말했다.“너는 왕이고, 레나는 병사야. 알겠니?”백지희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레나는 웃으며 말했다.“간단히 말하면 지희 씨는 공주님이고, 저는 하녀라는 의미예요.”백지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두 사람은 백지희와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이때, 다른 사람이 법로를 찾아왔다. 법로는 어쩔 수 없이 백지희를 레나에게 맡기고 일을 처리하러 갔다.법로가 떠난 뒤 백지희는 레나에게 조용히 물었다.“다시 오실까?”레나는
레나는 이야기책을 건네며 삽화를 가리켰다.“여기 있어요, 파란 태양. 너무 예쁘지 않아요?”백지희는 삽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파란 태양... 정말 예쁘게 그렸네.”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레나는 백지희가 보이지 않아 정원을 찾다가 한 구석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그녀의 그림은 아직 삐뚤삐뚤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레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법로에게 알려 그녀를 위해 그림 도구를 준비하게 했다.예전에도 그림을 그리던 그녀였기에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백지희에게 좋을 것 같았다. 백지희는 점점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녀의 방은 그림으로 가득 찼다.레나는 그림을 하나하나 액자에 넣어 전시했으며, 집 전체를 그녀의 작품으로 꾸몄다.멀리 경성에 있는 온지유는 백지희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더 빨리 그녀를 데려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그랬더라면 백지희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도우미를 시켜 그림 잡지를 구매해 Y국으로 보냈다.그러다 도우미의 말을 듣고 별이의 생일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그녀는 또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아이 생일도 잊은 걸까.’온지유는 친구도, 아들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도우미에게 생일 준비를 부탁했다.도우미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사모님,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사모님은 주어진 일을 잘해 나가고 있을 뿐이세요.”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위로에는 서툴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맞다, 오후 별이를 데리러 갈 때 친구들을 초대할 건지 물어봐 주세요. 초대 카드를 준비하기 쉽게요. 오는 길에 카드도 사주시고요.”이곳에서 처음 별이와 함께 보내는 생일이었기에 온지유는 기대가 가득했다.하지만 동시에 잘 준비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별이는 친구들의 놀림에 자존심이 상해 어른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바로 선물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단 한 줄의 구절만 적혀 있는 종이였다.여자아이가 글을 읽고 말했다.“더 많은 선물이 갖고 싶으면 정문으로 와.”글을 읽고 나서 여자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건 장난치는 거잖아. 우리 엄마가 그랬어. 선물은 진심으로 주는 게 맞는 거라고. 이렇게 장난치는 건 제대로 된 선물이 아니래.”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이에게 정문으로 가자고 소리 질렀다.별이는 아이들의 놀림에 화가 나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임수아, 너도 나랑 같이 갈래? 내가 선물을 고르게 해줄게. 네가 고른 건 전부 네 거야.”임수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여자애들은 원래 겁이 많잖아. 임수아는 못 갈걸!”임수아와 별이 둘 다 도발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임수아는 바로 별이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저택의 문밖은 고요했다.손님들이 세워둔 차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별이는 실망한 듯 돌아가려 했지만 임수아는 멀리서 흰색 차 옆에 놓인 커다란 봉제 인형을 발견했다.그녀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야! 저 차에서 선물을 준 거 같아. 저기 커다란 인형이 있잖아.”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차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두 아이는 흰색 차에 도달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다.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입이 막히고 곧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집 밖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케이크를 자르려던 온지유는 별이가 보이지 않자 적잖게 놀랐다.임수아의 부모 역시 딸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휩싸였다.부모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그나마 여이현이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전환되었다.그리고 감시카메라를 통해 두 아이가 차에 태워져 납치된 모습이 확인되었다.임수아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으며 그 자리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