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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작가: 향원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서율이 도착하자마자 지옥순과 효연은 대화를 멈췄다.

“어르신,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시죠?”

지옥순은 의자에 앉아 서율을 평가하듯 쳐다보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재수 없는 여자가 없었다면, 내 손자는 이미 육씨 집안의 딸과 결혼했을 텐데.’

서율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단조로운 생머리 대신, 와인빛으로 염색한 머리와 세련된 드레스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지옥순은 그런 화려한 차림새를 혐오했다. 결국 지옥순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집안 며느리가 이렇게 천박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다니! SH그룹의 명성을 완전히 짓밟고 있어! 3년이 넘게 시집와서는 아이 하나 없으니, 우리 집안에 필요 없는 암탉 같은 존재야!”

지옥순은 거칠게 명령했다.

“어서 조상님들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해라!”

옆에서 지켜보던 효연은 차갑게 웃으며 덧붙였다.

“문서율, 너 같은 여자는 예전 같았으면 돼지 우리에 던져졌을 거야. 할머니가 너한테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게 얼마나 자비로운 줄 알아?”

서율은 차분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르신, 아이를 갖는 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결혼 전에 제 몸을 검사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잖아요. 지금까지 아이가 없는 건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지옥순은 더욱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럼 우리 손자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냐?”

서율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 말하며 지옥순을 자극했다.

“변도혁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안 되는 겁니다.”

효연은 충격에 휩싸여 말했다.

“도혁 오빠는 그저 너를 거들떠보지 않았을 뿐이야! 안 될 리가 없다고!”

서율은 냉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효연 씨, 도혁과 내가 3년 동안 부부로 지냈어요. 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알죠. 게다가 지민 씨가 돌아온 지 반년이 넘었는데, 매일 같이 들어가면서도 아무 변화가 없는 걸 보면...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않나요?”

서율은 고개를 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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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 서율은 비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매일 집안일을 하고, 가정법을 적용받으며 규칙에 얽매여 사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게 있을까?” “난 그동안 할머니의 심술을 견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머니들의 모욕까지 버텨야 했어. 할머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도 못 먹고, 감금되거나 맞고 혼나는 게 일상이었지.” 서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한기만이 서려 있었다. “할머니께서 기분 좋을 때는 아주머니들이 남긴 음식을 나에게 주셨어. 내가 그걸 먹지 않으면, 낭비라며 가문의 수치를 안긴다고 비난하셨지.” 그럼에도 서율은 모든 걸 참아냈다. 지옥순이 언젠가 자신을 받아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내는 더 큰 학대를 불러왔다. 도혁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서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그는 지옥순이 서율에게 어떻게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서율은 도혁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변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는 자리가 아주머니보다 나을 게 없어. 만약 네가 나였다면, 사과를 할 수 있었을까?” 서율은 방금 샤워를 마쳤기에, 은은한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그 향기는 도혁을 자극했다. 서율의 눈빛은 강렬하고 도전적이었다. 도혁의 깊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점점 더 깊어졌다. 그는 지금까지 싫어했던 서율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 수밖에 없었다. “이게 네 목적이야?” 도혁은 서율의 턱을 잡고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나를 유혹하려는 거야?” 서율은 비웃으며 말했다. “자제하지 못하는 걸 남 탓하다니, 참 남자답지 않네.” 도혁의 눈이 가늘어지며 위험한 기운이 퍼졌다. 그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머니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게 도발이 아니었나?” 도혁은 서율을 벽에 밀치며 그녀의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그게 네 목적이라면.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14화

    밤 8시, 도혁은 지옥순, 지민, 효연과 함께 육경남의 초대를 받아 연회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지옥순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도혁에게 말했다. “육경남이 이번 연회에 여동생을 데려온다고 들었어. 오늘 네가 잘해야 그 아가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지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도혁도 눈살을 찌푸렸다. “할머니, 전 이미 결혼했어요.” 지옥순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결혼이 무슨 대수냐? 서율과 이혼할 거잖아. 겨우 3개월이면 끝날 일인데, 그 전에 그 아가씨와 친해져야지. 이혼 후에 그 아가씨를 집에 들여오면 되는 일 아니야?” 지옥순의 태도는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듯 확신에 차 있었다. 효연은 슬쩍 지민을 쳐다보았다. 이에 도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할머니, 제가 이혼하더라도, 그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옥순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정말 어리석구나! 육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알기나 해? 네 능력은 알지만, 여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전략이란다. 네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잡아야 해.” “그 아가씨와 결혼하면, 육씨 가문이 우리를 도와줄 테고, 네 능력에 더해지면 SH그룹도 5년 안에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절약되겠니?” “게다가 그 아가씨도 네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해.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해.” 도혁은 답답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저는 그 아가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분이 저를 좋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지옥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 아가씨가 널 보지 않았다는 건 아니야. 이번 SH그룹과 LJ그룹의 협력 프로젝트가 어떻게 생긴 것 같니?” 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LJ그룹의 협력 제안은 의상할 만큼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지옥순은 말을 이었다. “도혁아, 육경남이 직접 여동생을 위해 SH그룹과의 협력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15화

    “아!” 그 순간, 지민이 갑작스러운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도혁은 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아, 무슨 일이야?” 지민은 눈가가 붉어지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혁아, 나... 발목을 삐끗했어.” 도혁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민의 발목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지민은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혁아, 나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육경남 씨랑 여동생에게 가서 인사해.” 그러나 도혁은 지민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먼저 네 발목부터 치료하러 가자.”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지옥순은 인상을 찌푸리며 개입했다. “도혁아...” 도혁은 지옥순의 말을 막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할머니, 지금은 지민이를 돕는 게 먼저예요. 게다가 지금 이 연회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인사하러 가더라도 제대로 다가갈 수 없을 겁니다.” 지옥순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이 없으면 혼자 인사하러 가는 것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모르는 이들에게 오해를 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지민의 발목 치료를 마친 후, 도혁과 지옥순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경남과 그의 여동생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경남은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곧 돌아온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지옥순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도혁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그들이 떠난 후, 효연은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나섰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효연이 조심스럽게 방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문 밖에서 남녀의 대화 소리를 엿듣게 되었다. “서율아, 본사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처리하고 다시 올게.” “알겠어. 다녀와.” 여자의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16화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모님께서 물에 빠지신 것 같은데, 이 아가씨는 그게 연기라고 하네요... 그런데 방금 보니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 같아서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도혁의 얼굴은 단번에 굳어졌다. 그는 망설임도 없이, 외투를 벗을 새도 없이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을 가르며 서율을 구해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을 감은 채로 기척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순간 숨을 죽이며 긴장에 휩싸였다. 도혁은 급히 서율의 숨결을 확인하고, 곧바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나자 서율은 물을 많이 토해내며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다. 그제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긴장했던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서율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눈을 뜨며,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서율, 괜찮아?” 도혁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서율은 겨우 입술을 움직일 뿐이었다. 기침을 하며 또다시 물을 토해냈다. 도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구급차는 불렀어?” 주변의 누군가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직 안 불렀습니다...” 도혁은 더욱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장 구급차 불러.”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했고, 도혁은 서율을 안아 구급차에 태웠다. 서율과 도혁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난 후, 지민은 효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효연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문서율이 갑자기 물에 빠진 거야?” 효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뭐긴 뭐겠어? 그 여우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그런 거지! 도혁 오빠가 널 챙기는 걸 보고 질투심에 불타 일부러 물에 뛰어든 거야.” 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기를 했다고?” 효연은 과장된 몸짓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말했다. “맞아, 아까 후원에서 서율을 마주쳤는데, 도혁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17화

    도혁은 오랜 침묵을 깨며 서율을 향해 물었다. “문서율,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나 서율이 대답하기도 전에, 의사는 도혁의 무심한 태도에 불만을 드러내며 경멸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내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는데, 당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의사의 눈빛에는 은근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서율 씨는 과다출혈로 긴급 수혈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그때 병원의 혈액이 긴급히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해 수혈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닿은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죠.” 도혁은 그 말을 듣고 충격에 얼어붙은 채 서율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심각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그의 표정은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도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혼란과 후회가 섞여 있었다. 서율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빛을 잃었고, 그녀는 도혁의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병원에 있다고 말했으면 믿었을까? 아니면, 내가 또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고 생각했겠지?” 도혁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율의 말은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이다.의사는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는, 서율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한 후 병실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병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도혁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입원하게 된 거지?” 서율은 마치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듯 마음속 깊이 아픔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도 도혁이 지민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도혁을 응시했다. “널 따라가다가 계단에서 굴렀어.” 서율은 도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발견됐을 때는 이미 출혈이 심했고,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18화

    “수영장 쪽에는 CCTV가 없어서, 정확한 상황을 확인할 수는 없었어. 하지만 이미 사람을 시켜서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어.” 도혁의 차분한 말에 서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롭게 물었다. “조사? 어떻게 조사할 건데?” 도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감시 카메라가 없으니 목격자를 찾아야겠지.” 서율은 물에 빠졌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이 물속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칠 때, 물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조롱하며 구경만 했을 뿐, 아무도 구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해줄까?’ 서율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졌고,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추운 날씨에 심심해서 내가 스스로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도혁은 여전히 차분했다. “정효연은 네가 내가 지민에게 약을 발라주는 걸 보고 질투해서 일부러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너는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거라고.” 서율의 눈빛은 냉소로 가득 찼다. “고작 그것 때문에 내 목숨을 담보로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고? 그 애가 그만한 가치가 있나?” 서율의 말에는 깊은 경멸과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도혁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냉정하게 말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결론을 내리진 않겠어. 네 몸 상태도 아직 좋지 않으니 너무 무리하지 마.” 서율의 눈빛이 갑자기 번뜩였다. 그녀는 도혁의 차가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변도혁, 설마 정효연 편을 들 생각은 아니겠지?” 서율은 도혁이 늘 지민과 효연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효연의 편을 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녀는 항상 도혁의 마음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네가 회복하는 게 먼저야.” 서율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도혁은 한동안 병실에 머물다가, 전화가 걸려오자 자리를 떠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19화

    경남은 원래 연회에서 서율의 신분을 공개해, 변씨 가문과 서율을 깔보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서율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율은 경남의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깊은 눈빛을 띠며 대답했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도혁에게 말하지 마. 지옥순은 이익에만 눈이 먼 사람이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아마 쉽게 도혁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서율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이어서 말했다. “도혁은 주식 지분 때문에 나와 3년이나 결혼 생활을 이어간 사람이야. 그가 그 정도로 헌신적일 리 없지. 굳이 알릴 필요도 없어.” 경남은 최근 들려오는 소문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혁과 서율이 아직 이혼하지도 않았는데, 지옥순은 벌써 변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혼인을 성사시키겠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지옥순의 뻔뻔한 성격을 고려하면, 서율의 진짜 신분이 밝혀질 경우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경남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율아, 밖에서는 네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 사람들은 네가 변씨 가문의 돈을 노리고 결혼했다고 비웃고 있어. 신분을 공개하지 않으면 그들의 비난은 계속될 거야.” 서율은 물에 빠졌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비웃음 가득한 얼굴들을 떠올렸다. “내 신분을 알게 된다고 해서 그들이 변할 것 같아? 오히려 더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겠지. 하지만 그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그녀는 경남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육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신분 없이도 난 그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어. 오빠, 난 내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거야.” 경남은 서율의 확고한 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며칠 후, 서율의 몸 상태는 점차 회복되었다. 도혁은 의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나서인지, 아니면 서율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 때문인지, 거의 매일같이 병문안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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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연은 도발적인 눈빛을 번뜩이며 오만하게 말했다. “너 도혁 오빠한테 일렀겠지? 하지만 오빠가 널 믿었을까? 문서율, 넌 도혁 오빠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어도, 오히려 이혼 문제까지 깔끔하게 해결될 테니 상관없겠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율은 옆에 있던 물컵을 들어 힘껏 효연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서율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창백한 입술 사이로 차가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가.” 그러나 효연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내가 한 말이 맞았나 보네?” 효연이 더 말을 잇기 전에,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도혁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에 잠시 머물렀고, 그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서율을 바라보았다. 요즘 서율은 눈에 띄게 야위었고, 혈색 없는 얼굴은 그녀를 더욱 병약해 보이게 했다. 도혁은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서율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변도혁, 뻔히 알면서도 묻는 거야? 누군가 날 불쾌하게 만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도혁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이 지민을 좋아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지민을 비난했으리라 짐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효연과 지민에게 말했다. “너희는 먼저 나가 있어.” “도혁아...”“나가서 이야기하자.” 지민은 잠시 서율을 바라보고는 병실을 떠났다. 도혁은 서율을 향해 짧게 말했다. “난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병실 밖에서 효연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불평했다. “문서율이 분명 도혁 오빠에게 내가 밀었다고 고발했을 거야! 물에 빠진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어. 지금 연약한 척하면서 도혁 오빠의 관심을 다 끌어가고 있잖아! 정말 얄미운 여자야!” 효연은 멈추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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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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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98화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97화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96화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95화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94화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93화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 이혼 후 쓰는 왕관   제92화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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