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는 이 말이 분명 자기에게 한 것이 아닐 거로 생각했다.두 사람이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됐지만, 경민준은 한 번도 그녀를 이렇게 안고 잔 적이 없었다.아침 인사는커녕, 입맞춤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그렇기에 연미혜는 그가 자기를 임지유로 착각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입술을 꾹 다문 채 눈가가 붉어졌지만, 정작 경민준은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조차 없었다.그를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듯 깊이 숨을 들이마시곤 조심스레 몸을 뒤로 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하지만 서로 맞닿은 채 너무 가까웠기에 아무리 조심해도
“할머니, 괜찮아요.”연미혜가 노현숙의 말을 끊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뗐다.“괜찮아요. 민준 씨가 바쁘다니, 저랑 다솜이만 다녀올게요.”“너...”노현숙이 뭔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연미혜의 태도엔 강요도, 애써 붙잡으려는 기색도 없었다. 정말로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담담해 보였다.하지만 노현숙은 그걸, 그녀가 경민준을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 여겼다. 아직도 그를 위해 참고 이해해 주는 거로 생각한 것이었다.그저 그런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서 마음이 더 복잡해졌고 결국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렇게 일이 정
다음 달이면 허미숙의 칠순 생신이었다.연미혜와 연창훈은 어떻게 준비할지 의논했지만, 노현숙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그런 형식적인 거 말고, 그냥 가족끼리 편하게 밥 한 끼 먹으면 돼.”하여진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그래도 칠순인데, 간단하게라도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연미혜와 연창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허미숙은 손사래를 쳤지만, 손주들이 정성껏 준비하려 하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다음 날 학교에 가야 했던 경다솜을 위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연미혜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집 앞에 도착하자,
그 말은 주말 동안 경다솜을 연미혜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지난 2년 동안 경민준이 경다솜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개인적인 일정이 있든, 업무상 회식이 있든, 혹은 딸을 데리고 다니기 어려운 상황이든 그가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자연스럽게 연미혜가 맡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연미혜는 경다솜을 돌보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갔다.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딸에게 주말에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물었다.경다솜은 한참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어요.”연미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단순히 정말 원하는 곳
마장을 떠나며 운전하던 연미혜는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차예련과 김태훈은 각자의 일이 있었고,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려 해도 경다솜이 없는 집으로 혼자 가는 건 괜히 노현숙을 걱정하게 할 것 같았다.그렇게 고민하던 중, 길가에 자리한 습지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그곳에는 아이들과 함께 캠핑을 온 부부들, 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를 나온 젊은이들이 가득했다.서로 다정하게 어울리는 가족들의 모습.행복하고 평온해 보이는 그 분위기에, 연미혜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희미한 부러움과 씁쓸함이 스쳤다.차를 몰아 한참 달리던
연을 성공적으로 날리자 연미혜와 수연은 기쁨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하승태가 깊은 눈빛으로 미소짓는 연미혜를 바라보자 그 시선을 알아챈 연미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연미혜는 더는 묻지 않고 수연을 데리고 조금 더 멀리 걸어갔다. 하승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연날리기에 질리면 연미혜는 수연과 함께 호숫가에서 낚시하거나 작은 수조 앞에서 물고기를 관찰하며 작은 그물로 잡기도 했다.이내 점심이 되었다.수연을 데리고 산책하러만 나왔던 하승태였기에 다른 사람들
경민준을 바라본 하승태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말했다.“고마워.”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신 뒤 이야기를 나누었다.잠시 후 경민준이 하승태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하승태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왜?”정범규가 대답했다.“너 오늘... 좀 이상해.”경민준이 정범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하승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정범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니야?”하승태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와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그 사람이
하승태가 아무 말이 없자 정범규는 두 사람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하승태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정범규는 웃으며 수연에게 다가가 물었다.“수연아, 점심에 너랑 같이 밥 먹은 이모, 몇 번이나 만났어? 이름이 뭐야?”잔을 쥔 하승태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범규야!”하지만 어린 수연이 어른들의 생각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비록 녀석이 정범규와 친하지 않지만 연미혜에 대해 물어보자 잠깐 생각해 보더니 아무런 생각 없이 말했다.“세 번! 이모 이름은...”오늘 하승태와 연미혜가 만났
연미혜와 연유라는 불꽃놀이를 끝내고, 할머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문밖으로 나갔다.연미혜와 연유라는 도원시의 타워로 갔다.타워는 밤에 도원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훌륭한 장소였다.새해 전야 밤, 특별히 기획한 멋진 라이트 쇼와 기타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였다.타워에 막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라이트 쇼가 시작되지 않았다.연이찬과 몇몇 반 친구들은 오늘 밤 타워에서 함께 새해맞이를 하기로 약속했다.잠시 후 연이찬은 친구들을 만났다.연미혜와 연유
하승태가 전화를 막 끊었을 때 수연은 초롱을 들고 다시 그에게 달려와 외쳤다.“삼촌, 다솜이랑도 영상통화 하고 싶어요!”하승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영상통화를 걸자 곧 연결되었고, 화면에 다솜의 얼굴이 나타났다..“다솜아, 이것 좀 봐, 초롱이야!”영상에서 잘 보이지 않을지 걱정된 수연은 하승태에게 휴대전화를 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그러고는 초롱을 흔들며 조금 멀리 달려가 예쁘게 밝혀진 초롱을 경다솜에게 자랑했다.하승태와 수연은 작은 정원에 있었고, 주변이 어스름해진 덕에 초롱의 불빛은 한층 더 설
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통화했어요.”경민준은 그녀를 껴안고 손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과 비슷한 눈썹과 눈꼬리를 바라보며 물었다.“근데 표정이 왜 안 좋아?”경다솜은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행복해요. 하지만.”엄마랑 전화 통화한 지 정말 오랜만이었고 통화한 후에도 행복한 기분은 여전했다.경민준이 물었다.“그런데?”경다솜은 머뭇거렸다.“근데 또 기분이 좀 이상해졌어요.”“뭔가 속상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경민준은 턱을 치켜들고 웃으며 말했다.“엄마도 다솜이 보고 싶을 거야. 일 끝나면
심여정 그들은 집에 도착해 연미혜를 보지 못했고, 모두 그녀가 경민준과 함께 공항에 간 줄 알고 있었다.현재 경민준과 경다솜 둘 다 집에 도착했지만, 연미혜 혼자 없는 것을 발견한 그들은 이 상황이 상당히 이상하다고 느껴졌다.하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 없는 연미혜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일이 아직 안 끝났대.”경준혁은 아무 의심도 없이 다솜과 놀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노현숙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 식사 후 경다솜은 한동안 혼자 놀다가 지루함을 느꼈는지 연미혜에게 전화를 걸었다.비록 휴
“아빠, 지유 이모!”공항을 나와 경민준과 임지유를 본 경다솜은 아주머니의 손을 놓아주고 재빨리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가 두 사람의 품에 안겼다.차에 타자마자 경다솜은 작은 책가방을 뒤적이더니 여행 중 사왔던 장신구를 꺼내 아빠와 이모에게 내밀었다.“아빠, 지유 이모, 제가 선물 사 왔어요.”임지유는 그것을 받아 경다솜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다솜아, 고마워.”오늘 할머니는 퇴원했고 경민준과 경다솜은 저녁 식사를 위해 본가 저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공항에서 나와 임지유를 집으로 돌려보낸 후에야 경민준
김태훈은 직접 연씨 가문 본가로 가서 폭죽을 전달했다.불필요한 문제를 피하고자 연미혜는 하승태에게 연씨 가문 근처의 별장 주소를 알려주었다.오후 두 시쯤, 연미혜는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하승태는 다른 사람이 폭죽을 건네줄 거라 전화로 연미혜에게 알렸다.하지만 차를 주차한 후 연미혜의 눈앞에는 하승태가 서 있었다.“왔어요?”“네.”“트렁크를 열어봐.”연미혜는 트렁크를 열었고 하승태는 폭죽과 설 선물 일부를 트렁크에 옮겼다.연미혜는 선물을 보곤 잠시 말없이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선물은 필요 없을 텐데
그럴 경우 경다솜은 경씨 가문에서 새해를 보내야 할 확률이 높았다.허미숙은 마음속으로 경다솜을 떠나보낼 수 없었지만, 동시에 연미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연미혜는 침착하게 할머니에게 말했다.“할머니, 솜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전 괜찮아요.”허미숙은 연미혜가 자신이 걱정할까 봐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다고는 걸 느꼈다.허미숙은 한숨을 쉬며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마친 연미혜와 하여진은 함께 새해 선물을 사러 나섰다.밖은 조명으로 장식되고 친숙한 새해 노래가 곳곳에서 들리며 새해 전야의 분위기가 풍기고
넥스 그룹의 리셉션은 사흘 뒤에 열렸다.그날 저녁, 하승태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주변에 임지유, 경민준, 염성민 등이 보이지 않아서였는지, 이번 리셉션은 별다른 소란 없이 차분하게 흘러갔다.그날 밤, 참석자는 많았고 연미혜와 김태훈은 쉴 틈 없이 바빴다. 그래서인지 하승태에게 특별히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리셉션 중간에 연창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하승태를 보고서야 그들은 그가 일찍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필이면, 오늘 밤은 임씨 가문 쪽에서도 리셉션이 열리는 날이었다.하승태가 이렇게 일
염성민은 무심하게 물었다.“둘이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죠?”경민준은 웃었다.“아직 할 얘기가 더 있긴 합니다만...”염성민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인사할 기미가 전혀 없었던 연미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그를 지나쳐 자리를 떴다.염성민은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연미혜에게 시선을 거두었고 경민준이 들고 있는 두 잔의 와인을 발견하고는 물었다.“이게 뭐죠?”“특별 제작한 와인이라고 할 수 있죠. 염성민 씨도 한잔 마셔보시겠어요?”염성민이 물었다.“다른 한 잔은 임 대표를 위한 건가요?”“네.”염성민이 말하려던 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