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가 시선을 멈춘 방향을 따라가던 김태훈도 곧 경민준과 임지유를 발견했다.김씨 가문과 경씨 가문은 예전부터 교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김태훈 역시 경씨 가문 본가에 가본 적이 없었고, 그 본가가 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경민준과 임지유를 본 그는 입꼬리를 비틀듯이 씰룩이며 말했다.“쟤네 둘은 왜 또 우리 눈앞에 나타난 거야? 여긴 또 왜 왔대?”연미혜는 시선을 거두며 덤덤히 말했다.“저기가 경씨 가문 본가로 들어가는 유일한 진입로예요.”연미혜가 무심히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김태훈은 순간 멈칫하더니
경민준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그래. 알겠어.]토요일 아침.연미혜는 차를 몰아 고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고씨 가문의 가족 대부분은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저택에는 도우미 몇 명만 있을 뿐, 고창완 혼자 머무르고 있었다.연미혜가 도착하자, 고창완은 직접 현관까지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우리 미혜 왔구나?”“할아버지,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려요!”연미혜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그의 얼굴에 여전히 기운이 있어 보이자 마음이 놓였지만 문득 걱정이 앞섰다.“많이 야위셨어요.”고창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좀 빠지긴
고창완은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그는 경민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연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 미혜야, 할아버지가 밥 사줄게.”연미혜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네.”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창완은 경민준에게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연미혜와 함께 자리를 떴다.경민준은 여전히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셨고, 두 사람을 따라 나가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연미혜와 고창완이 함께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임지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떡해...”경민준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괜찮아. 시
그날 오후, 연미혜가 회의 중이던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화면에는 ‘경다솜’의 이름이 떴다.연미혜는 화면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바로 끊었다.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경다솜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그러자 경다솜도 더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연미혜는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몇 분 뒤, 이번엔 경민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회의를 마친 그녀는 다시 전화를 켰다. 전원을 켜
연미혜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경민준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아마도 임지유에게서 온 전화였던 모양이었다.경민준은 전화를 받으며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 너무 걱정하지 마.”그가 전화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경다솜이 잠에서 깼다.경다솜은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 누운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아빠, 엄마...”그 순간 연미혜와 경민준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그래. 다솜아.”경다솜은 어지러운 듯,
도원시 과학기술협회 등 여러 기관이 공동 주최한 ‘과학기술 학술 포럼’은 이틀 전부터 본격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번 포럼은 한 달간 이어졌다.총 200여 회에 달하는 교류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으며, 과학기술계와 산업계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넥스 그룹 역시 이번 포럼에 초청받은 기업 중 하나였다.오늘 오후는 연미혜와 김태훈 모두 관심을 두고 있는 ‘첨단 소재’ 분야의 핵심 세션이 예정되어 있었다.연미혜는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김태훈, 그리고 넥스 그룹의 기술진 몇 명과 함께 포럼 현장으로 향했다.김태훈은 넥스 그
연미혜와 김태훈 주위엔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그런 가운데 하석진 자문위원과 정지원 교수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몇몇 참석자들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하석진은 손짓으로 막으며 웃었다.“쉿! 듣고 있자고요.”그들은 말없이 외곽에 서서 김태훈과 연미혜가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명문대 출신으로, 실력과 학식 모두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연미혜와 김태훈은 질문에 침착하게 답하면서도, 가끔은 몇몇 참석자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이들의 말에 완
며칠 사이, 연미혜는 시간을 쪼개 두어 번 더 기술 교류 행사에 참석했다.그중 두 번은 임지유와도 마주쳤지만, 이번엔 경민준이 동행하지 않았다.3월이 되자 비가 잦아졌다.이날도 행사장을 나서려던 참에 밖은 이미 빗물로 젖어 있었다.연미혜는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차에 둔 채로 내려온 터라 잠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생각으로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직 입구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바로 임지유였다.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연미혜를 본 순간, 말끝을 흐리며 웃음을 거뒀
월요일 아침, 연미혜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I 학술지에서 그녀의 논문이 정식 게재 승인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잠시 후, 김태훈이 업무 관련해서 찾아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논문 게재 승인되었어요.”“난 예상했어.”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유명욱 교수가 검토하고 좋다고 한 논문이라면 당연히 통과됐을 거라 믿고 있었다.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연미혜가 시계를 흘끗 보며 물었다.“점심 같이 드실래요?”김태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오늘은 안돼. 약속 있어.”“무슨 약속이요?”“소개팅.
연미혜는 김태훈의 말을 듣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김태훈은 이력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력서는 깔끔하게 잘 만들었네. 실력은 어때?”“수준급이었어요. 인공지능 쪽에 입문한 지는 2년도 안 됐는데, 이미 대부분 박사급 개발자보다 뛰어나요.”“오... 그 정도야?”김태훈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타고났네. 마음에 들어?”“후보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며칠 못 가고 훌쩍 떠날까 봐 걱정이지?”“맞아요...”물론 CUAP이든 Infinite-CM이든, 구진원은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봐야죠. 면접 끝까지 봐야죠.”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구진원입니다. 진실의 진, 원할 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연미혜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력서 봤어요.”연미혜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제부터 제가 구진원 씨를 면접해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해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인가요?”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전 뭐, 둘 다 괜찮습니다.”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알고리즘에 강점을 둔다고 했다.연미혜는 그가 데이터 정제, 특성 엔지니어링, 하이퍼파라미터
경민준이 말을 이었다.“할머니한테 네가 직접 말씀드릴래?”연미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할머니는 내가 무일푼으로 이혼하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연미혜는 되물었다.“그러면 협의서 내용을 안 건드리면 이혼 절차는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올해 안엔 가능할 거야.”이제 갓 3월이 시작됐으니, 연말까지는 아직 한참 많이 남아있었다. 차분히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우리 이혼에 대해 또 궁금한 거 있어?”연미혜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끝낸 지 얼마 되지
배지호는 연미혜의 말에 흠칫 놀랐다.“진짜 전부 포기하실 거예요?”배지호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경민준이 연미혜에게 약속한 이혼 합의 재산은 그녀가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금액이었다.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겠다는 말에, 배지호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확실해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애초에 그의 재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경민준이 뭘 주든 안 주든, 받아도 미련 없고 안 받아도 아쉬울 게 없었다.‘다만...’예전에 노현숙이 갑
연미혜, 김태훈과 전현재, 세 사람은 따로 소통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었다.오늘 벌어진 일은 워낙 충격적인 데다 화제성도 커서, 전현재는 특유의 ‘소문 레이더’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채 가장 먼저 그 내용을 공유했다.임지유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줄을 서 있는지, 그 남자들이 그녀를 두고 얼마나 광기를 부리는지 일일이 ‘브리핑’했다.하지만 연미혜와 김태훈은 그 얘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오후, 전현재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참, 아까 경 대표님 딸이 회사에 와서 임 이사님을 찾아왔었어요. 전에 임 이사님이 다솜
노현숙의 생일이 끝난 뒤, 도원시 상류층 사회는 그야말로 술렁였다.경민준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데다가 여섯 살짜리 딸까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동안 임지유를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은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에 휩싸였다.임지유가 경민준과 연인 사이라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력’과 ‘자녀 존재’까지는 처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러 남성들이 세인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임지유를 붙잡고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설득하려 들었다.결국 장건식 등 측근들이 나서 겨우 임지유를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왔다.
정범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연미혜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하승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연미혜와 김태훈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그녀가 유명욱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 난 후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들 사이엔 남녀 간의 감정 따윈 없었다고 확신했다.이미연이 그런 말을 했던 건 정말로 김태훈과 이어지길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연미혜라면 설령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해도, 누구와
김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다솜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그 순간 김태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설 연휴쯤, 연미혜와 스피커폰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경다솜이 바로 옆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다솜이가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지.’하지만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랬구나?”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삼촌 목소리가 좀 흔한가 보네?”그 말을 듣고 있던 경민준은 가만히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