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완은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그는 경민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연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 미혜야, 할아버지가 밥 사줄게.”연미혜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네.”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창완은 경민준에게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연미혜와 함께 자리를 떴다.경민준은 여전히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셨고, 두 사람을 따라 나가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연미혜와 고창완이 함께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임지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떡해...”경민준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괜찮아. 시
그날 오후, 연미혜가 회의 중이던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화면에는 ‘경다솜’의 이름이 떴다.연미혜는 화면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바로 끊었다.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경다솜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그러자 경다솜도 더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연미혜는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몇 분 뒤, 이번엔 경민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회의를 마친 그녀는 다시 전화를 켰다. 전원을 켜
연미혜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경민준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아마도 임지유에게서 온 전화였던 모양이었다.경민준은 전화를 받으며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 너무 걱정하지 마.”그가 전화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경다솜이 잠에서 깼다.경다솜은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 누운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아빠, 엄마...”그 순간 연미혜와 경민준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그래. 다솜아.”경다솜은 어지러운 듯,
도원시 과학기술협회 등 여러 기관이 공동 주최한 ‘과학기술 학술 포럼’은 이틀 전부터 본격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번 포럼은 한 달간 이어졌다.총 200여 회에 달하는 교류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으며, 과학기술계와 산업계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넥스 그룹 역시 이번 포럼에 초청받은 기업 중 하나였다.오늘 오후는 연미혜와 김태훈 모두 관심을 두고 있는 ‘첨단 소재’ 분야의 핵심 세션이 예정되어 있었다.연미혜는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김태훈, 그리고 넥스 그룹의 기술진 몇 명과 함께 포럼 현장으로 향했다.김태훈은 넥스 그
연미혜와 김태훈 주위엔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그런 가운데 하석진 자문위원과 정지원 교수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몇몇 참석자들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하석진은 손짓으로 막으며 웃었다.“쉿! 듣고 있자고요.”그들은 말없이 외곽에 서서 김태훈과 연미혜가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명문대 출신으로, 실력과 학식 모두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연미혜와 김태훈은 질문에 침착하게 답하면서도, 가끔은 몇몇 참석자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이들의 말에 완
며칠 사이, 연미혜는 시간을 쪼개 두어 번 더 기술 교류 행사에 참석했다.그중 두 번은 임지유와도 마주쳤지만, 이번엔 경민준이 동행하지 않았다.3월이 되자 비가 잦아졌다.이날도 행사장을 나서려던 참에 밖은 이미 빗물로 젖어 있었다.연미혜는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차에 둔 채로 내려온 터라 잠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생각으로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직 입구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바로 임지유였다.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연미혜를 본 순간, 말끝을 흐리며 웃음을 거뒀
식당에 도착해 룸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하승태가 물을 따르며 물었다.“이번 교류 행사에서 성과 있었어요?”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편이에요.”연미혜가 여러 교류 활동에 참여한 건, 얼마 전 유명욱이 자신과 김태훈에게 건넨 자료를 연구하기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몇 차례 참석하고 나니 그녀도 나름 새로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미혜가 물었다.“수연이는 요즘 어때요?”하승태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작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요. 올해부터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새
연미혜는 강혜원의 눈빛에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마침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매장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도대체 어디 갔던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전화도 안 받고 지금...”들어오자마자 강혜원에게 호통을 치던 임혜민은, 안쪽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연미혜를 보는 순간 목소리가 뚝 끊겼고, 순식간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때 직원이 다가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고객님, 주문하신 제품 모두 포장 완료되었습니다. 내역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총 11억..
노현숙의 생일이 끝난 뒤, 도원시 상류층 사회는 그야말로 술렁였다.경민준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데다가 여섯 살짜리 딸까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동안 임지유를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은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에 휩싸였다.임지유가 경민준과 연인 사이라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력’과 ‘자녀 존재’까지는 처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러 남성들이 세인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임지유를 붙잡고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설득하려 들었다.결국 장건식 등 측근들이 나서 겨우 임지유를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왔다.
정범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연미혜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하승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연미혜와 김태훈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그녀가 유명욱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 난 후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들 사이엔 남녀 간의 감정 따윈 없었다고 확신했다.이미연이 그런 말을 했던 건 정말로 김태훈과 이어지길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연미혜라면 설령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해도, 누구와
김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다솜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그 순간 김태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설 연휴쯤, 연미혜와 스피커폰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경다솜이 바로 옆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다솜이가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지.’하지만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랬구나?”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삼촌 목소리가 좀 흔한가 보네?”그 말을 듣고 있던 경민준은 가만히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노현숙의 생신날이 밝았다.경다솜은 아침이 되자마자 아빠에게 부탁해서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품에 안고 내려왔다.그리고 식탁에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레 선물을 건넸다.“증조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노현숙은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잡히도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우리 다솜이가 선물을 다 준비했어? 고맙다...”곧이어 경민준도 선물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이건 저랑 미혜가 함께 준비한 겁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노현숙은 잠시 그를 찬찬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김영수가 큰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어르신,
그날, 연미혜는 고씨 가문 저택에 머물며 고창완과 함께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오후를 보냈다.경다솜은 하루 종일 연미혜 곁에 붙어 있었고, 밤에도 함께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연미혜는 오후 늦게 잠시 자리를 비우고 경민준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다솜이 데리러 와줘.]답장은 없었다.연미혜는 그냥 못 봤겠거니 생각했다.그런데 저녁 식사가 끝난 직후, 경민준 본인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경다솜을 데리러 온 차량은 정확히 시간을 맞춰 고씨 가문 저택 앞에 도착했다.경다솜이 차에 오르고 나서야 연미혜도 자신의 차를
넥스 그룹 사무실.연미혜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데이터를 정리하던 중이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하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하승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수연이가 요즘 미혜 씨를 못 본 지 좀 됐다더라고요. 이번 주말 시간 괜찮아요? 잠깐 산책이라도 같이할래요?”연미혜는 화면 속 데이터 모델링 파일을 힐끔 보며 말했다.“이번 주는 일정이 꽉 차 있어요. 다음 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그녀의 대답에 하승태는 눈을 살짝 떨구며 대답했다.“그래요
경민준과 염성민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연미혜는 알지 못했다.김태훈과 함께 식사를 마친 그녀는 곧장 회사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이어갔다.수요일 오후, 고창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 들르지 않을래? 다솜이도 올 거야.”연미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금요일 오후.회의 중이던 연미혜의 휴대전화가 잠깐 진동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화면을 보려던 순간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회의 중이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발신자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전화를 건 사람은 강혜원이었다. 수요일부터 하원
말을 마친 연미혜는 더는 경민준을 상대하지 않았고 그저 돌아서 차로 향했다.경민준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지만, 바로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내려다본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연미혜가 차에 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태훈은 경민준이 또다시 연미혜에게 무슨 말을 꺼낼까 잠시 긴장하다가, 그가 스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말없이 연미혜가 탄 차량 반대편으로 돌아 올라탔다.차 안.조수석에 앉은 김
임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임혜민에게 말했다.“승태가 전화 받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아요. 좀 있다가 다시 걸어볼게요.”시간이 흐르고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 임지유는 다시 하승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이번엔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괜찮아?”임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응. 괜찮아.”하승태는 짧게 대답했다.사실 그는 임지유가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그때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무슨 일이야?”하승태가 묻자, 임지유는 가볍게 웃으며 강혜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지금 하원 그룹에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