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에 소은정이 입꼬리를 올렸다.뭐야?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겁 먹은 것 좀 봐.윤시라와 이한채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게다가 이한채는 한 술 더 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소은정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소 대표님, 안녕하세요!”“풉!”그 모습에 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역시 마스크 팩을 떼어냈다.잔뜩 당황한 얼굴로 마른 침만 삼키던 양미라가 변명을 시작했다.“그게 제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대화에 맞장구만 치다 보니...”바로 손절하는 양미라의 모습에 윤시라가 매서운 눈초리를 날렸다.좋다고 같이 험담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한테 다 뒤집어 씌우시겠다?하지만 소은정은 애초에 두 엑스트라한테는 관심이 없었다.그녀는 윤시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나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리려면 이 두 사람만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애초에 이 바닥에서 이 두 여자는 아무 영향력도 없거든요. 기생충처럼 다른 사람한테 기대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기대하는 사람들이죠. 뭐 그러니까... 당신한테 들러붙은 거겠지만.”소은정의 팩폭에 양미라, 이한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박예리가 있을 때는 그 옆에 붙어 이런저런 파티에도 참석해 나름 대접을 받았지만 호구가 사라지니 덩달아 낙동갈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두 사람이었다.박수혁 같은 남자 하나 잡아 제대로 취집하는 게 두 사람의 목표였지만 그녀들에게 다가오는 건 그저 한 번 놀아보려는 어중이떠중이들 뿐.아니. 좀 논다 하는 재벌 2세들은 오히려 인플루언서들과 놀아나는 게 요즘 트렌드였다. 괜히 건드렸다가 정략 결혼으로 이어지면 골치 아파 질 테니까.물론 소은정에게 그깟 남자들 역시 벌레 같은 존재였지만.치졸한 마음이 들켰다는 생각에 윤시라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곧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나도 이제 재벌 2세야. 나도 부자 아빠 있다고... 예전과 달라...게다가 아빠는 30년 만에 날 만나고 내가 해달라는 건 다 들여줄 것 같은 눈
하지만 한유라는 여유로운 미소로 응수했다.“심한 말? 아직 진짜 심한 말은 시작도 안 했는데요? 당신 아버지가 지금 가진 재산 다 당신한테 물려줄 것 같아요? 아니요. 그 티끌만한 재산도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미 유서 공증까지 다 끝났답니다. 그러니까 당신 몫은 없다는 뜻이에요.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신포그룹 한국지사 지사장 후보까지 올랐다는 건 나름 실무 경험도 많다는 뜻일 텐데... 회사로 나가서 일하라는 말은 듣지도 못했죠?”한유라의 말에 윤시라가 몸을 움찔했다. 요염한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그래... 뭔가 이상하긴 했어. 회사일을 돕겠다고 말할 때마다 아빠도 말을 피하는 것 같았고... 언니, 오빠라는 사람들도 내 앞에서 회사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어.다들 친절하게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니 푹 쉬라”고만 말해서 진짜 내가 사랑받는 공주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설마...한유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그제야 한유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멍청한 것...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한편 이 의미없는 대화에 환멸이 난 소은정이 말했다.“됐어. 그런 거 말해 줘서 뭐하게. 윤시라 씨, 자기 주제 파악 똑똑히 하길 바랄게요. 아, 현실 파악에 도움이 될만한 선물 좀 할까요? 뒷담화에서 앞담화가 되긴 했지만 나에 대한 루머를 퍼트린 건 사실이니. 벌은 줘야겠죠?”소은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시라. 괜히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참고 또 참았는데 호의가 계속 되니까 정말 날 호구로 알잖아?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밟아줄 거야.동시에 휴대폰을 터치하던 소은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자리를 떴다.지금쯤이면 꽤 시끌벅적해졌겠는데?다시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볼 거야.소은정과 한유라가 탈의실로 향하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한유라가 물었다.“도대체 무슨 선물인데?”“SNS 확인해 봐.”한유라가 의아한 얼굴로 휴대폰을 켰고 소은정의 계정을 클릭했다.방금 전 그녀가 올린 영상이 게시되
이로서 다들 손호영이 SC그룹 신제품 CF 모델로 발탁된 것이 윤시라의 함정이었음이 밝혀졌다.소은정의 당당한 복수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손호영이란 인물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가정폭력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그렇게 비이성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적어도 윤시라와 함께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SNS에서 소은정을 팔로우한 사람들은 각 그룹 재벌 2세들이나 각 기업 엘리트들, 이제 다들 윤시라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윤시라의 집안과는 비즈니스적인 협력도 뚝 끊길 게 분명했다.소은정과 한유라가 여유롭게 에스테틱을 나서던 그때 이성을 잃은 듯한 윤시라가 달려들었다.“소은정, 너 미쳤어? 그 영상 뭐야? 감히 몰카를 해? 난 그렇다 치고 우리 집 체면은 어떡할 건데. 아니지. 너희 집안은 무사할 것 같아?”당황한 윤시라가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윤시라는 소은정의 자태에서 흘러나오는 우월감이 죽도록 싫었다. 비록 연예계 사람은 아니지만 영향력은 웬만한 톱 연예인들보다 더 대단했고 이런저런 스캔들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녀의 편을 드는 네티즌들도 미웠다.개돼지보다 못한 대중들... 도대체 저딴 애가 뭐가 좋다고...윤시라의 말에 소은정이 차갑게 웃었다.“아니요. 우리 집안은 멀쩡할 거예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그쪽 집안이겠죠. 아 아저씨와 아빠가 한때 막역한 사이였던 건 맞지만 지금은 그 조차도 과거 일에 불과하죠. 게다가 영상만 보면 우리 SC그룹이 피해자이니 아빠도 이해할 거라 믿어요.”소은정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윤시라의 휴대폰은 알림을 멈추지 않았다.가족들이 보낸 문자 테러였다. 30년만에 만난 딸, 동생이라며 오냐오냐 해주던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확 바뀐 태도에 윤시라는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여전히 여유로운 소은정의 모습에 윤시라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얼음장 같은 한기가 발가락 끝부터 몸 구석구석, 모공 하나하나를 침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나였으면 윤시라 그 여자를 납치를 하든 뭘 하든 아예 없애버렸을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나 몰라. 속도 좋지.아니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손호영... 윤시라 그 여자랑 함께 놀아나진 않았지만 정정당당하게 들어온 것도 아니고...”손호영의 이미지 세탁까지 하면서까지 CF 모델로 써야 하나?아직도 손호영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는 소은해였다.“CF 모델은 일단 교체하지 않는 게 좋겠어. 사실 우리 신제품과 손호영의 이미지... 은근 잘 들어맞는단 말이야. 진중한 스타일의 제품이라 상큼한 신인보다 손호영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 남자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신비로운 매력이 있어...”소은정이 설명하던 그때 집사가 우유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아가씨, 회장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회장님 옛 친구분이시라는군요. 회장님은 제가 모시고 오겠습니다.”하, 빨리도 왔네. 엔간히 급했나 봐?소은정과 소은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소찬식의 옛 친구라고 칭하는 이가 다른 사람이 아닌 윤시라의 친부, 천한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온 거래?”소은해가 코웃음을 치고 잠깐 망설이던 소은정이 휴대폰을 건넸다.“아저씨. 아빠한테 일단 이 영상부터 보여주세요. 보시고 나서 아마 만나실지 마실지 결정하실 거예요.”휴대폰을 받은 집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소찬식이 낚시 중인 정원으로 향했다.그리고 잠시 후 집사가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들고 돌아왔다.“회장님께서 화가 너무 많이 나셔서... 이걸 어쩌죠?”“아니에요. 이제 바꿀 때도 됐죠 뭐.”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아빠도 참... 화 많이 나셨나 보네. 이참에 신상으로 바꿔야겠다.이때 소찬식이 구시렁대며 집으로 들어왔다.“천한강 그 자식...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찾아와! 애 잃어버리고 마음이 어떨까 싶어서 친하게 지낸 건데... 그 딸은 또 뭐야? 감히 우리 그룹에 그딴 짓을 해?”“아빠, 아저씨도 아마 모르셨을 거예요. 정말 아셨다면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지
소은정이 소찬식을 힐끗 바라보았다.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소찬식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고 한숨을 내쉬었다.“은정이 말이 맞다. 혁신을 추구하는 나와 달리 천한강 그 사람은 가지고 있는 걸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 그래서 회사 상황이 어려워진 거기도 하고. 하지만 윤시라 그 여자는 천한강이 직접 기른 아이도 아니잖아? 되찾은 지 며칠밖에 안 되는 딸 때문에 체면 불구하고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비즈니스적으로는 복수하지 않는 게 좋겠어. 하지만 그래도 윤시라 그 여자에 대해서는 이대로 쉽게 넘어가면 안 돼.”소찬식이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천한강과는 그 동안 쌓은 정이 있으니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었지만 윤시라는 아니었으니까.아버지의 말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애초에 쉽게 놓아줄 생각도 없었어요, 아버지... 그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온 이상, 저도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요.잠시 후, 집사가 다시 돌아왔다.“손님분 돌아가셨습니다. 표정이 많이 안 좋으시더군요. 그리고 아가씨께서 뭘 좋아하시는지 물으셨습니다.”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도 눈치는 빠르네. 누가 실세인지 바로 알아채고...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빠도 오빠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흥, 남의 딸 취향은 왜 묻는대?”소찬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사실 천한강을 만나 윤시라의 악행을 낱낱이 밝히는 게 어떨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아버지의 옛 친구를 그것도 아버지 앞에서 난처하게 만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포기했지만 말이다.2층에 예비용 휴대폰이 있다는 걸 떠올린 소은정이 방으로 올라갔다.그리고 서버가 다운되어 버린 소호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베란다에 있는 그네에 머리를 올려둔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꼭 목을 매달아 죽은 호랑이 같았다.소은정은 다급하게 신나리에게 영상통화를 걸었고 신나리의 원격 조종 덕에 소호랑은 동그란 눈을 다시 뜰 수 있었다.“왜 갑자기 서버가 다운된 거죠?”“혼자
문이 열리고 소은정이 생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마이크를 내려다 보았다.“안녕!”마이크가 귀여운 잠옷을 입은 채 쪼르르 달려갔다.“예쁜 누나다! 누나가 오늘 날 보러 올 거라고 내가 그랬거든요? 그런데 아빠가 안 믿는 거 있죠? 그러면서 나더러 일찍 잠이나 자라고... 아빠 말 안 듣고 일찍 안 자서 다행이에요!”마이크의 머리를 쓰다듬던 소은정이 케이크 상자를 들어보였다.“누나가 케이크 사왔다? 조금만 먹어...”마이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마이크와 커플 잠옷을 입은 전동하가 방에서 걸어나왔다.방금 전에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는 젖어있고 항상 살짝 창백하다 싶던 얼굴에도 홍조가 살짝 올라있었다.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목선을 따라 쇄골에 맺히고 부드러움속에 섹시함까지 느껴지는...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그 모습에 소은정은 저도 모르게 그와의 뜨거웠던 키스를 떠올렸다.안 돼! 지금 뭐 하는 거야! 생각하지 마!고개를 살짝 흔들던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동하 씨도 케이크 먹을래요?”소은정이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전동하는 살짝 멈칫하다 바로 미소를 띄웠다.“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요?”“당연히 내가 보고 싶어서 왔겠죠!”마이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쩜 이렇게 귀여울까?소은정이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당연하지. 우리 마이크 너무 보고 싶어서 왔지.”그 모습에 덩달아 전동하도 미소를 지었다.소은정의 말이 꼭 그에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마이크는 잔뜩 흥분한 채 케이크 상자를 열더니 소은정에게 한 조각, 자기에게 한 조각을 덜어주었다.접시에 담긴 케이크를 바라보는 소은정이 반짝였다.수십 억짜리 계약서를 볼 때도 뛰지 않던 심장이 디저트 앞에서 콩닥대기 시작했다.두 사람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웃음을 터트렸다.케이크 한 조각에 두 사람 다 되게 좋아하네...그러던 도중...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낀 전동하가 마이크를 바라보았다.“아빠 거는 없어?”“아빠가 말했잖
소은정도 포크를 들어 케이크 한 귀퉁이를 콕 집었다.“다른 케이크보다 설탕이 덜 들어갔어요. 크림도 최대한 건강하게 만들었고요. 가끔씩 야식으로 이 정도는 괜찮다고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도 미소를 지었지만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았다.맛이 없진 않았지만 설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두 번은 먹고 싶지 않았다.소은정도 먹는 걸로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아 트집없이 마이크와 함께 케이크를 전부 해치웠다.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취향이 존재하는 법이니까.잠시 후, 야밤의 식사를 거하게 마친 마이크가 양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고 전동하는 웬일로 소파에서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마쳤다.별 생각없이 집문을 나섰지만 곧 휴대폰을 두고 온 걸 발견하고 소은정이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실 화장실에서 전동하가 가슴을 움켜쥔 채 토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설... 설마 케이크 때문에?소은정의 낯빛이 창백해졌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기 전에 인기척을 느낀 전동하가 고개를 들었다.순간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저 멀리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보고 곧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듯 피식 웃었다.변기 위에서 일어나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전동하의 눈동자는 핏발까지 선 상태였다.“놀랐어요?”“미안해요. 난 그냥 정말 장난으로 그런 건데... 알레르기까지 있는 줄은...”자신 때문에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에 둔기를 맞은 듯 욱신거렸다.그녀를 향해 한 발 다가가던 전동하가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아, 잠깐만요. 나 세수 좀 하고 올게요.”1분 뒤, 세수와 양치질을 마친 전동하의 눈에 여전히 죄책감 가득한 얼굴의 소은정이 들어왔다.“은정 씨 때문 아니에요.”하지만 고개를 숙인 소은정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나랑 상관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알레르기 아니에요. 설탕에 알레르기가 있었으면 다른 음식도 못 먹는 게 많았겠죠. 그냥... 케이크 자체에 트라우마가 있어서요.”소은정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전동하는 남의
누군가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준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너무 쉽게 얻은 이해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고 항상 지옥처럼 차가웠던 마음 속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순간, 온몸에 힘이 스르륵 풀리고 전동하의 눈시울 역시 붉어졌다.소은정을 살짝 껴안았던 전동하가 곧 그녀를 풀어주었다.“그게... 은정 씨가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까 바로 구토가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오늘은 안 가면 안 돼요?”순간 소은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자고 가라고?어제 방금 키스했는데 오늘... 자고 가라고?진도가 이렇게 빨라도 되는 거야?방금 전 전동하가 고통스럽게 토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무조건 개수작이라 생각했을 것이다.전동하를 홱 밀어낸 소은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일찍 자요. 위장약 꼭 챙겨먹고요.”전동하를 흘겨봐 준 소은정이 집을 나섰다.진지한 분위기에서 그게 할 소리야?내가 나갈 때도 헤실헤실 웃기만 하고...하지만 계단을 내려오던 소은정이 발걸음을 멈추었다.아... 그 사람... 내가 곁에 있으면 나까지 더 슬퍼질 테니까 일부러 날 화나게 만든 건가? 그런 장난을 친다면 내가 바로 갈 거라고 생각해서?젠장...그녀의 성향을 완벽하게 파악한 그 남자, 마지막까지 바보처럼 그녀 생각만을 해주는 그 남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다음 날 오전 SC그룹.어제 소은정이 SNS에 업로드한 영상은 퍼지고 퍼져 벌써 천한그룹을 배척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어떻게든 재벌 2세들 사이의 모임에 끼고 싶었던 윤시라도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며칠 전 알게 된 사람들도 모두 그녀의 연락처를 차단했으니까.이른 오전,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소은정의 시야에 지팡이를 짚은 모습의 천한강이 보였다.며칠 사이에 많이 늙은 듯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옆에는 화장기 없는 초췌한 낯빛의 윤시라가 서 있었다. 항상 요염한 분위기를 내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