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해는 매우 조심스럽게 검은 박스를 가지고 들어왔다.김하늘은 별 감흥 없이 ‘왔어?’하더니 대충 거실에 가서 앉아 이모님에게 커피를 내달라고 했다.소은정보다는 확실히 더 서먹해 보였다.소은해는 그다지 눈치 채지 못한 채 검은 박스를 내려 놓았다.옅은 미소를 띤 채였다.“이거 봐. 이 옥은 네 그 옥 팔찌랑 99%정도 비슷한 거야. 산지가 같아서 무늬만 봐서는 구분도 안 돼. 내가 이걸 갈아서 다시 하나 만들어 줄게. 모양은 어떻게 해줄까?”소은정은 단호박 스프를 홀짝거렸다.‘머리가 어떻게 됐나? 이게 어디 단순히 옥의 문제냐고?아무리 좋은 옥을 들고 와도 하늘이 속상한 건 해결 못한다고.아오, 저 멍청이!’김하늘은 박스에 든 옥을 흘끗 보았다. 최고급 원석이 아니었다. 그러나 깨진 팔찌와 꽤나 비슷했다.‘이 정도로 비슷한 옥을 찾느라고 시간과 공과 돈을 꽤 많이 들였겠는데?’소은해를 올려다 보며 웃었다.“됐어요. 아무리 비슷해도 가짜는 가짜지. 내가 날 속일 수는 없다고요.”소은해는 움찔해서 소은정을 흘끗 쳐다보았다.소은정이 벌떡 일어섰다.“화상 회의 있는 걸 깜빡 했네. 먼저 가볼게.”소은해의 뜻을 몰라서였겠는가?피하려는 것이었다!보아하니, 무슨 일이 벌어질 모양이었다.이모님도 적당히 거실에서 나갔다.소은해가 김하늘을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기념품이니까 마음만 담겨있으면 되지. 진짜니 가짜니 그런 게 뭐 그렇게 중요해?”김은해가 싸늘한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상관 있거든요.”영 마땅치가 않았다.소은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마를 문질렀다.“그래, 내가 생각 좀 해볼게. 일단 쉬어라.”그러면서 일어나 쌩하니 나가 버렸다.******박수혁은 태한 그룹으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서 사람 하나 데려와야겠어.”‘그 망할 놈의 짝퉁 자식을 드라마 팀에서 내보내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손 봐주지 않겠다고는 안 했거든.그 자식, 진작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밤, 쌀쌀하고
채태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동자에 당황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아, 아닙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순간 박수혁이 포식자와 같은 자세로 채태현을 내려다 보았다.그 순간의 분위기가 채태현과 박수혁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듯했다.얼굴이 닮았다고 다가 아니었다. 최소한 박수혁 앞에서 채태현은 비천하기 그지없었다.스폰서를 잡아서 어떻게 해보려던 마음은 가루도 남지 않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다.‘날 대신해?네 놈이 그럴 자격은 된다고 생각하나?’“오해라?”박수혁의 입꼬리에 냉소가 걸렸다. 휴지 뭉치가 채태현의 얼굴로 날아갔다.“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데뷔하겠다고 그 돈을 들여 성형을 해? 채태현, 난 네 놈의 성형 내역을 하나하나 찾아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있어, 알아?”채태현은 하얗게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대표님, 그것만은….”‘나의 제일 큰 비밀인데 그게 알려지면 어쩌라고? 잘 숨긴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안 거지?’차 사고로 수술을 하게 되어 의사가 샘플 이미지를 가져오라고 했을 때 채태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박수혁을 골랐다. 박수혁은 국내 금융권의 큰손으로 아무리 잘나가는 배우라 해도 그의 발치에도 미칠 수 없었다.박수혁은 잘나가는 사업가인데다 사람들은 성형한 얼굴에 대해서는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자신이 일부러 박수혁을 닮은 얼굴로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완전히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채태현은 거의 애걸하다시피 무릎으로 기어 박수혁 앞으로 가 꿇어 앉았다.“절대 그것만은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무슨 일을 시키셔도 좋습니다. 소은정 씨는 생각도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이제 겨우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박수혁의 차가운 시선이 채태현을 비웃듯이 내려다 보았다.채태현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소은정이 자신을 좀 남다르게 대해주는 것은 다 얼굴이 박수혁을 닮았기 때문이었다.어차피 결국은 소은정에게 버림받을 것이 뻔했다.박수혁이 물어다.“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
소은정의 집소은정은 커피를 마시며 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박수혁에게서 온 톡 알람이 떴다. 내용을 보고 소은정은 마시던 커피를 뿜었다.‘이게 정말 미쳤나?’소은해는 바쁜 와중에도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무슨 짓이니? 다 큰 애가 지저분하게.”소은정이 뭐라고 대응하기도 전에 맞은 편에 있던 소찬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 아무 데나 뿜지 마라.”“……”‘뭐, 지가 자초한 거니까’소은정은 피식 웃더니 전화기를 꺼버렸다. 그 따위 톡을 보고 눈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소은해를 보고 눈을 굴리더니 김하늘의 깨진 팔찌를 수리하는 데 집중했다.“고칠 수 있겠어?”소은해는 튜토리얼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당연하지. 이제 손에 익어서.”소찬식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서재에 있던 옥을 한두 개 깨트렸어야지. 그래 놓고 매번 그렇게 수리를 해 놓더니 그게 다 걔 좋으라고 한 짓이었구먼?”소은정은 ‘아, 그런 거였어?’싶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빠, 김하늘도 좋아하는 거 아냐?”김하늘이 새언니가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소은해가 분주하던 손길을 뚝 멈추더니 경고의 시선을 날렸다.“헛소리 하지 마.”소찬식은 옆에서 남 얘기 듣듯 앉아 있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김하늘’도’라니 무슨 소리야? 내가 봤을 때는 큰 애랑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옆에서 소호랑에게 뭐라 하며 커피를 마시던 소은호가 놀라서 손을 떨었다.“전 걔를 잘 알지도 못 하는데요.”소은해도 당황했다.“어울린다니 무슨 말씀이에요? 큰형은 여자한테 관심도 없는데. 김하늘이 형을 따라다니다가는 열 받아 죽는 거 아니야?”소찬식은 눈을 끔뻑거리며 소은정을 쳐다보았다.소은정은 헛기침을 했다.“그냥 해본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소은해는 자신이 오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게까지 정색하지 않았거든!”소은정이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내가 대신 따라다녀 줘?”소은해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됐
소은정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신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신나리는 뭔가 신난 듯한 목소리였고 주변에서 다른 소리도 들려왔다.소은정이 웃었다.“지금 회사인가요?”“아뇨. 지금 은찬 님 연구실인데요. 제가 휴가를 받았거든요. 연구실 참관 오라고 하시길래 와봤는데 너무 근사하네요….”“휴가라고요?”소은정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네. 대표님이 2주 간 휴가를 주셨거든요. 좀 이상하긴 하죠?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인데 핵심 기술은 아직 꽉 막혀서 진전이 없고….”그렇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연구원의 휴가에 엄격한 규정이 적용된다. 연구원들이 돌아가며 휴가를 받거나 보너스로 보상을 해주며 일을 시켜야 한다.그런데 2주간 휴가라니….소은정의 표정이 눈에 드러나도록 변했다.“임 대표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겠네요. 일단 끊을게요.”전화를 끊었다.남종석의 얼굴도 좋지 않아졌다. 임춘식이 연구원에게 휴가를 주었는데, 그런 큰 일을 어째서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대, 대표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소은정의 목소리가 살짝 싸늘해졌다.“저쪽에서 우리가 모르도록 감추었으니 당연히 알 수가 없죠.”남종석은 갑자기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쩐지 너무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싶더니….신입사원 주제에 중임을 맡게 되고, 임춘식과 박수혁 쪽 사람들은 다들 예우를 갖추어 대해주었다. 소은정이 있으니 내내 삼자협력이라 내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사고라고 할 법한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소은정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나갔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소은정은 아무 티도 내지 않고 미소로 답했다.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그 길로 소은해의 사무실로 향했다.비서는 소은정을 보더니 살짝 의아한 표정이었다.“대표님, 갑자기 어쩐 일로….”소은정은 빙긋 웃었다.“임 대표 있나요?비서가 끄덕였다.“계십니다.”소은정은 끄덕이고는 비서가 미처 통지를 하기도 전에 웃음기를 싹 거두고는 그대로
사무실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소은정의 기세를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임춘식은 문득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중간에서 무너지는 것은 전동하뿐만 아니라 1차 협력자인 SC그룹도 포함되는 것이었다.SC그룹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데 소은정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그러나 박수혁을 팔아 넘겼다가는 그들의 관계뿐 아니라 삼자 협력도 끝장이 난다.임춘식이 잠시 머뭇거리자 소은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를 알아챈 듯했다.“누굽니까?”임춘식은 입술을 축였다. 표정도 한껏 긴장되었다.“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생각이 좀 짧았나 봅니다. 바로 휴가를 취소하고 돌아오라고 하겠습니다.”“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진 않을 겁니다.”소은정이 차분하게 바라보았다.“잠시 후에 법무 팀에서 계약서를 갖고 올 겁니다. 개발 기한에 제한을 두고 우리 쪽에서 TF팀을 파견해 개발 결과를 정기적으로 체크하도록 하겠습니다.못 하시겠다면 언제든 계약은 종료할 겁니다. SC그룹에 거성이라는 선택지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임춘식의 눈이 어두워졌다.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후회막급이었다.소은정의 냉정한 모습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정말이지 내내 너무 소은정에 대해 방심하고 있었다.현재 거성의 볼륨으로는 SC에 전혀 위협이 될 수 없다. 특히나 소은정의 오빠인 소은찬은 과학계의 거물인 것이다.하긴, 이번에 SC그룹에 좀 실수를 했다고 정말 소은정이 손바닥 뒤집듯 모든 것을 뒤집지는 않을 것이다.홍경그룹을 다루던 솜씨로 보았을 때 거성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만 해도 특별히 시혜를 베푸는 셈이 될 것이다.그러나 정말 그런 순간이 오게 되면 박수혁이 자신을 구해줄지는 미지수다.임춘식이 헛기침을 하더니 태도가 부드러워졌다.“그 문제는 식사라도 하면서 다시 좀 논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소은정이 입 꼬리를 올렸다. 입가에 사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논의할 게 뭐 있나요? 우리가 아직 회사의 이윤을 두고 농담할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며칠
인춘식은 어이가 없어 그저 창 밖의 흰 구름을 바라 보았다. 너무나 억울하고 마음이 답답했다.‘뭐야, 나더러 다 뒤집어 쓰라는 거야!’......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소은정은 박수혁의 전화를 받았다.보고서 바로 끊어버리려고 했으나 잠시 생각해 보고 그냥 받았다.“할 말 있어?”박수혁은 말투가 밝은 것으로 봐서 굉장히 기분이 좋은 게 분명했다.소은정에게 스폰을 받는 셈이긴 해도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는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었으니 조만간 다시 사귈 수 있을 것이다!“방금 임춘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들었어. 정말 너무했네. 난 거성의 이사인데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 내가 아주 강력하게 경고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프로젝트 진행시키는데 문제 없을 거야.”소은정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잠시 후에야 웃었다.“아주 내가 호구인줄 아나 봐?”‘임춘식 그 쫌생이가 감히 프로젝트를 지연시킨다고? 말도 안 되지.분명 배후에서 지시한 인물이 있는 거라고!’박수혁도 잠시 아무 말이 없었더니 곧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무슨 뜻이야? 임춘식이 혼자서 결정한 게 아니라 내가 지시했다는 말이야? 내가 어떻게 그렇게 공사 구분 못하는 짓을 하겠어?”박수혁은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이 되었다. 소은정이 정말 화가 났다면 둘의 관계는 다시 해빙 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두근두근!소은정이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 동안 박수혁은 0.1초 단위로 날카로운 고통에 심장을 찔리는 것만 같았다.그러다가 마침내 소은정이 풋 하고 웃었다. “정말 뭘 상상하든 당신은 항상 그 이하구나.”그러더니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박수혁은 완전히 다급해졌다.“자기야, 자기야!”소은정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이 굳어졌다.‘귀가 잘못 됐나?환청인가?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박수혁, 정신 똑바로 차릴래? 다시는 그딴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자기라니 개뿔!’우리 사이에 ‘자기’라니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소은정은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갔다.우연준이 보고를 하러 왔다가 빨갛게 달아 오른 소은정의 얼굴을 보니 걱정스러웠다.“열 나는 거 아니에요? 병원 가보실래요?”소은정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얼른 목청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답했다.“됐어요.”소은정은 곧 서류에 집중하더니 사인을 해주고 우연준을 쳐다보았다.“법무 팀에 거성 소유권 합의 빨리 이행하라고 재촉해요. 거성 쪽에서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응해주지 말고.”이렇게 과감하게 협상의 여지를 끊어버리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라 우연준은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알겠습니다.”더는 묻지 않고 법무 팀으로 가서 소은정의 의사를 전달했다.이번에는 거성에서 피해를 입힌 것이라 소은정의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칠 지나지 않아서 도준호에게서 채태현이 그만 두었다는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상대에게 맞은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잘 나가고 있어서 제가 다른 사람에게서 리소스를 끌어다가 채태원에게 주었거든요. 그래서 원한을 산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맞았는지 갈비가 석 대나 나갔어요.”내색은 안 했지만 소은정은 헉 했다.“누가 한 짓인지는 아나요?”도준호가 웃었다.“굳이 캐보진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쪽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면 딱히 손 쓸 수도 없고요. 어쨌든 채태현이 쫄아서 경찰에 신고도 못했습니다. 일단 한동안 그냥 저렇게 가만히 둘까요?”소은정은 잠깐 망설였다.“알아서 하세요. 일 시킬 수 있으면 시키시고, 안 되면 말고요.”도준호가 소은정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냥 놔주라는 건가?’전화를 끊고 난 소은정은 아무래도 채태현 폭행 사건이 의심스러웠다.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니 채태성의 성격으로 봤을 때 박수혁이 한 짓이라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일렀을 것이다.말을 하지 못한다는 건 분명 채태현도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는 뜻이었다.‘됐어. 맞으면 맞은 거지 뭐!누가 그렇게 맞을 짓을 하고 다니래?’이때 톡 알람이 울렸다.
전동하는 즉시 화제를 바꾸었다.두 사람은 한참 잡담을 나누었다. 소은정은 마이크가 어찌 지내는지 물어보았다.소은정이 문제집을 한 박스나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이크는 화가 나서 밤새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달래도 달래지지 않았다고….분위기는 차츰 꽤 가벼워졌다. 한참 웃고 떠드는데 직원의 ‘어서 오세요’하는 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어왔다.곧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음산한 시선이 와 닿았다.소은정은 등 뒤에서 한기를 느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차가운 팔이 갑자기 어깨를 누르더니 피할 새도 없이 허리를 감으며 옆에 앉았다.소은정은 깜짝 놀랐다. 박수혁이 웃음을 띠고 그윽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있나, 베이비!”말 한 마디, 아니 단어 하나가 분위기를 완전히 싸하게 만들어 버렸다.소은정이 싸늘하게 노려보았다.“놔!”“소은정!”박수혁은 거친 눈빛을 억누르며 낮은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지?’아침, 점심, 저녁 어느 때라도 밥 한 끼 하려고 그렇게 불러 내도 거절하던 소은정이었다.그런데 갑자기 전동하와는 어떻게 이렇게 나와서 밥을 먹을 시간이 생겼단 말인가?‘그러니까, 그냥 나랑만 밥 먹기 싫었던 거냐고?으아, 짜증나!참을 수가 없어!’맞은 편에 앉아 있던 전동하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웃음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다.“사람들이 봅니다. 소은정 씨가 뭐가 됩니까?”박수혁이 밥을 먹으러 나왔으니 당연히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나왔다.그런데 우연히도 여기서 둘을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박수혁의 눈이 얼음조각처럼 차가워졌다. 소은정의 허리에 놓인 손을 스르르 풀었다.소은정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버티고 있었다가는 분위기 파악 잘하는 전동하와 완전히 비교될 판이었다.“전 대표는 참 한가하군요. 자기 비즈니스는 내버려 두고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곳에 신경을 쓰고 있네요.”말 속에 뼈가 있었다.“박 대표님은 워낙 하시는 일이 많은 분 아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