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리가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자리를 뜨자 한유라가 바로 그녀의 카드를 빼앗더니 물었다.“네가 어떻게 이 카드를 가지고 있어?”“18살 생일에 은해 오빠가 준 거야. 항상 가지고 다니라고 말하더니.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네.”“왜 나한테는 그런 오빠가 없는 걸까?”한유라가 짐짓 소은정을 흘겨보며 말했다.“마음에 들어? 그럼 네가 쓸래?”싱긋 웃던 소은정이 카드를 건넸다.“에이, 이렇게 귀한 걸 어떻게 받아. 갖고 있어. 사고 싶은 물건 있으면 너한테 따로 부탁할게.”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드를 다시 집어넣었다. 원하는 대로 목걸이를 구매하고 다시 기분이 좋아진 한유라는 소은정을 끌고 이리저리 쇼핑몰을 누볐다. 기분 전환을 마친 소은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프로젝트 팀에 선발되지 않은 뒤로 몰래 뭔가를 꾸미는 것 같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한 소은정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차피 소은호가 모든 걸 컨트롤하고 있는 상황에서 임상희가 함부로 움직여 봤자 자멸을 일으킬 뿐이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퇴근시간, 퇴근 준비를 하던 소은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자마자 김하늘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은정아, 나 좀 도와줘. 오늘 밤 자선 파티가 있을 예정인데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 윤지섭와 함께 파티에 참석할 파트너가 필요해. 난 지금 해외라 안 되고 네가 대신 가주면 안 될까?”시계를 쳐다보던 소은정이 대답했다.“그래, 뭐 특별한 약속도 없고. 그러지 뭐.”“친구야, 네가 나 살렸다. 내가 크게 한턱 쏠게. 드레스는 윤지섭 매니저가 준비할 거야.”전화를 끊은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야? 거절하면 어쩌려고 미리 드레스까지 준비해 뒀대?우연준에게 자신의 일정을 알린 뒤 그녀는 바로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윤지섭은 신인이지만 나름 인지도를 쌓고 있는 연예인이라 괜히 회사 입구에 사람들이 모이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지금 상황에서 또 연예인인 윤지섭과 엮인다면 또 괜한 풍문이
10억? 순간 파티장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윤지섭도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게 뭐라고 10억을 불러요?”“딱 봐도 좋은 물건이잖아요. 안 그래요?”소은정이 입술을 씨익 올렸다.“글쎄요.”아무리 봐도 그냥 옥으로 만든 담뱃대일 뿐인데 뭐가 좋다는 걸까?이민혜와 박예리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소은정은 두 사람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소은정이 이 물건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걸 생각해낸 이민혜와 박예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과거 이민혜는 소은정더러 야밤에 사당을 청소하라고 시킨 뒤 일부러 담뱃대를 금고 안에 넣지 않고 높은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다. 혹시나 소은정이 “실수로” 이 물건을 깨트리기라도 한다면 가문에서 바로 쫓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사실 그녀가 직접 깨트리고 소은정에게 뒤집어 씌울까도 생각해 봤지만 담뱃대를 목숨보다 더 아끼는 박대한은 특별히 사당에 CCTV까지 설치해 둔 터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취 담뱃대에 대해서는 한동안 잊고 있던 이민혜였지만 박예리는 “아름다운 꿈” 목걸이로 마카오에서 도박을 한 사실이 알려지며 사교계에서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박예리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다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자선 파티 경매에 물건을 내놓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이미지는 물론, 물건을 다시 낙찰받았을 때 그녀의 재력까지 과시할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잃어버린 센터의 자리를 어떻게든 되찾으리라 박예리는 다짐하며 이민혜에게 한참을 졸라 겨우 비취 담뱃대를 경매품으로 훔칠 수 있었다.그리고 온르, 일단 마지막 경매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이목을 끌며 어깨가 으쓱해진 박대한의 보물이라는 걸 알아본 사람들은 감히 입찰에 뛰어들지 않을 테고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관심도 두지 않을 테니 자신의 완벽하게 계획에 감탄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자리에 소은정도 있을 줄이야.이민혜는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었다. 1
그녀의 곁에 있던 직원이 경매품을 소은정에게 건넸다. 담뱃대 밑부분의 붉은색 작은 반점을 확인한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진품이었다.“고맙습니다.”이민혜와 박예리 두 사람을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는 소은정의 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진 이민혜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소은정, 넌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래서 못 배우는 것들은...”그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이민혜가 이제 와서 어른 대접이라도 받고 싶은 건가?소은정은 정말 이제야 그녀를 발견했다는 듯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 사모님도 계셨어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당돌한 소은정의 모습에 이민혜가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너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호구 하나 물었다고 이제 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거야? 잊지 마! 난 네 시어머니였던 사람이야!”결혼생활 내내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한 적 없던 사람의 입에서 시어머니라는 단어가 나올 줄이야.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이혼 전, 소은정이 시댁을 찾을 때마다 이민혜는 그녀의 집안 사정으로 트집을 잡으며 궂은일을 시키는 건 물론 벌을 세우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는 다른 기업 사모님들을 일부러 불러 그녀를 조롱하기도 했다. 소은정은 이민혜의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사모님도 이제 많이 늙으셨나 봐요. 잊으셨어요? 전 그 댁 아드님과 이미 이혼했어요. 시어머니 노릇은 다음 며느리한테나 하세요.”“소은정, 너 우리 엄마한테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옆에서 듣고만 있던 박예리가 소리를 질렀다. 오늘은 무턱대고 덤비지 않기에 정신을 차렸나 했더니 또 몸이 근질거리나 보다.게다가 이민혜까지 곁에 있으니 더 무서울 게 없었다.박예리의 말에 방금 전까지 미소 지으며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네던 소은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왜요? 절 혼내기라도 하게요?”다시 떠오르는 악몽에 박예리는 뒤로 움츠러들었다. 사실 소은정의 기를 눌러버리고 담뱃대를 빼앗아갈 생각이었는데 소은정이 예상대로 나오지 않
박수혁이 나타나자 이민혜는 바로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갔다.“수혁아...”“오빠, 소은정이 우리 집안 가보를 빼앗아갔어.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는 물건이잖아. 이대로 가져가면 정말 끝이야!”박예리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하지만 차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박수혁이 단호한 말투로 소리쳤다.“닥쳐! 할아버지 물건을 건드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았어?”박수혁의 무시무시한 목소리에 박예리는 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이민혜의 뒤에 숨었다. 박수혁의 뒤를 따라 들어온 행사 주최자는 안절부절못하다 옆에 서 있는 직원을 향해 속삭였다.“절차는 이미 다 밟은 거야?”“네, 전부 다 끝났습니다.”직원이 조심스레 대답했다.이제 비취 담뱃대는 완벽하게 그녀의 물건, 소은정이 물러설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옆에 서 있는 윤지섭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가죠.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게 빠져주자고요.”인사도 없이 경매장을 나서려던 그때, 박수혁이 말했다.“소은정, 물건은 놓고 가.”차가운 아들의 목소리에 이민혜는 큰 지원군을 얻은 것마냥 거들었다.“그래, 수혁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참, 고상한 척 잘난 척은 다하는 분들이 어쩜 이렇게 막무가내이실까...소은정은 피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들어 보였다.“이것 봐. 이제 당신이랑 당신 가족들 말 한마디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담뱃대는 이제 법적으로 완벽하게 내 물건이야.”잔뜩 일그러진 박수혁의 표정을 보니 통쾌함이 밀려왔다.“사모님, 저한테 이러실 시간에 차라리 할아버님한테 어떻게 해명하실지 핑계나 생각하시는 게 어때요? 아끼는 보물이 자선 경매에 출품된 걸 보면 어떻게 나오실지 사모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이민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괜히 딸의 꼬드김에 넘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겉드리다니. 박대한이 이 사실을 안다면 화를 내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무일푼인 채로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수혁아...”이민혜는 지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고 박수혁을 바라보는 소은정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헌신적이던 그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차에 탄 뒤에야 윤지섭은 질문을 털어놓았다.“이 담뱃대가 그렇게나 대단한 물건이에요? 왜 다들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죠?”소은정은 고풍스러운 나무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천 년 전의 물건이에요. 누군가 궁에서 몰래 빼돌린 거죠. 박씨 가문에서 이 물건을 손에 넣은 게 아마 500년 전이던가? 어때요? 30억이면 싸게 먹힌 거죠?”소은정의 말에 윤지섭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뭐? 천 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물건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국가급 보물이었다.이런 물건을 경매에 내놔?이 정도면 백 억, 아니 그 이상의 가격도 훨씬 호가할 것이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윤지섭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소은정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은호인 걸 확인한 그녀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재잘거렸다.“오빠, 내가 오늘...”그러자 소은호가 피식 웃었다.“다 들었어. 겨우 30억에 그 담뱃대를 샀다고? 그쪽 집안에서 화가 단단히 났겠는데?”이민혜와 박예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상상하던 소은정이 웃음을 터트렸다.“어차피 이제 법적으로 이 물건은 내 거야. 절대 그냥 내주지 않을 거라고.”소은호도 동생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박씨 가문이라면 이제 치가 떨릴 텐데 이렇게라도 한풀이를 해야겠지. 그리고 소은호 본인도 동생이 행복하다면 상관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은정은 여느 때처럼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임상의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이미 약점이 잡힌 상태라 움직이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이때 사무실로 들어온 우연준이 그녀에게 파일을 건넸다.“본부장님, 임상희 팀장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었습니다.”우연준의 말에 소은정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오빠가 드디어 칼을 빼든
박수혁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불쾌함을 읽을 수 있었다. 소은정은 일부러 성강희의 팔짱을 끼며 받아쳤다.“그럼요. 아주 바쁘죠. 그런데 제가 몇 명을 만나든 강서진 씨랑 무슨 상관이죠? 아, 혹시 그쪽도 나랑 데이트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소은정의 말에 강서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항상 이 여자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작아지는 걸까?“뭐? 내가 뭐가 모자라서 당신 같은 여자랑 데이트를 합니까!”“뭐, 저도 사절이네요. 강서진 씨는 몸이 별로더라고요. 저는 남자 얼굴도 중요하지만 몸도 많이 보는 사람이라.”뭐? 몸매가 안 좋아?은연중에 그의 알몸 사진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강서진이 잔뜩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감히 날 협박해?“우리 은정이 안목이야 내가 인정하지. 뭐 딱 한 번 실수하긴 했지만. 강 대표님, 다들 식사하러 오셨을 텐데 그냥 조용히 밥이나 드시죠. 괜히 서로 심기 건드리지 말고요.”성강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소은정은 박수혁의 존재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룸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서진이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었다.“저 여자가 감히... 뭐? 몸이 별로야? 나 정도면 준수하지.”강서진의 자뻑에 박수혁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준수하다고? 거울이나 제대로 봐.”하지만 강서진에게 농담을 던진 박수혁의 표정은 또다시 차갑게 굳었다. 소은정과의 약속도 못 잡고 할아버지의 담뱃대를 되찾지 못한 일도 짜증 나지만 소은정이 강서진의 알몸을 봤다는 사실이 왠지 더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그의 말에 강서진은 혼자 중얼거렸다.왜 나한테 화풀이야...하긴, 오늘 점심 박수혁을 만나기 위해 태한그룹으로 향했던 강서진은 마침 그의 비서가 소은정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그런데 단호하게 거절할 줄이야. 언짢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기로 왔더니 하필 소은정과 성강희의 데이트 현장을 마주치다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겠지.이때, 강서진이 뭔가 생각난 듯 캐어물었다.“너희
말을 마친 소은정은 바로 룸으로 돌아와 성강희를 깨웠다. 차에 타려던 순간, 룸에 핸드백을 두고 온 사실을 떠올린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성강희가 그녀를 막아섰다.“내가 갈 테니까 먼저 타.”비틀거리며 들어가는 성강희가 왠지 걱정되어 뒤를 따르던 그때, 역시 레스토랑으로 나오는 강서진과 박수혁을 발견하고 분수대 뒤에 몸을 숨겼다.“민영이 곧 귀국이라면서?”강서진이 물었다.“그래.”“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민영이가 잘못한 건 맞지만 너도 너무 심했어. 이제 그만 용서해 줘. 미워도 서민영은 네 사람이잖아...”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떴다...그들의 차량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소은정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서민영은 박수혁의 사람이다라... 소은정은 박수혁에게 어떤 의미였을까?3년 동안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었던 서민영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다.얼마 전 파티에서 큰 망신을 당하고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소은정은 한동안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출국? 그게 벌이라고? 이렇게 쉽게 용서해 준다고? 3년 동안 뜨거운 피를 바친 그녀에게는 정작 진심 어린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조차 없는 남자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민영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던 소은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돌아온다고? 좋아. 큰 선물을 준비해 주지.가방을 가지고 나온 성강희는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성강희의 목소리에 소은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난 집에 가봐야겠다. 기사도 도착했대.”“내가 데려다줄게.”성강희는 억지로 그녀의 옆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의 억지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소은정을 바라보던 성강희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숙였다.어느새
처음 보는 성강희의 진지한 모습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3년 전, 장난기 많던 소년이던 그가 왠지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 성강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은정은 표정을 감췄다. 적어도 지금은 사랑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강희야, 못 본 사이에 여자 홀리는 스킬이 많이 늘었네.”성강희는 흠칫하더니 뒤로 물러섰다.“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안 해.”“하긴. 너 좋다는 여자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네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지.”소은정은 괜히 농담을 던졌다. 뭐, 성강희의 여성 편력은 친구들은 물론 재벌 2세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다 지난 일이야. 그리고 제대로 된 연애는 해본 적도 없었다는 거 알잖아...”“그래. 오늘 위로해 줘서 고마웠어. 그런데 지금은 너무 피곤해...”그녀는 순간적인 설렘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성강희와는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던 사이, 사랑이라는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좋은 친구를 잊고 싶지 않았다.다시 기운을 차린 듯한 소은정의 모습에 성강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푹 쉬어.”가벼움이 항상 묻어나던 행동에서 느껴지는 그녀에 대한 사랑, 여자라면 빠지지 않기 힘들었다. 이런 엉큼한 남자 같으니. 소은정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야에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올려둔 비취 담뱃대가 들어왔다. 입꼬리를 씩 올리던 소은정은 다가가 담뱃대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천천히, 얼굴에 핀 미소가 사라지고 소은정은 다시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올려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자신의 보물 1호가 이런 대접을 당하고 있다는 걸 박대한이 안다면... 아마 화가 치밀어 쓰러질지도 모르지.이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든 소은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느새 저녁 10시였다. 휴대폰을 확인한 소은정은 소은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일 때문에 며칠 동안 해외에 나가있을 거야. 회사 잘 보고 있어.오빠도 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