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주는 차로 가서 문을 열고 그가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차에 태웠다.운전기사는 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그는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고 그녀도 굳이 손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마음이 무겁고 두려웠다.그와 다시 엮이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잘난 사람이 자신 때문에 인생을 망칠 것 같아서 두려웠다.그렇게 자존심 강하고 잘난 멋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어찌 내 손으로 망칠 수 있을까?그녀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그의 신변 안전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유치함을 반성했다.그녀의 떨림이 느껴졌을까.박수혁은 손을 뻗어 남유주의 팔을 잡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긴장했어? 너무 겁먹지 마. 다친 사람이 남유주 당신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어. 책임지라고 하지도 않을 거야.”그의 말에 그녀는 침묵했다.자신의 이기적인 걱정이 들켰다는 생각에 그녀는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이런 걸 걱정할 대가 아닌데!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섬세하지?남유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박수혁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운전기사는 운전 도중에 빨간 등을 몇 번이나 지나쳐서 신속히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이한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남유주가 대신 입원절차를 처리해야 했다.그녀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이렇게 불안한 감정은 이형욱에게서 도망쳐 해외로 도주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예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형욱 때문에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불안에 떨던 때가 있었다.도망은 그녀의 마지막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그런 불안감이 다시 그녀를 엄습했다.온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입원 절차가 마무리되자 그녀는 응급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결과를 기다렸다.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녀는 과거와 최근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그녀가 여기까지 올
이한석에게서 간병인을 보낼 테니 조금만 거기 더 있어달라는 문자가 왔다.남유주는 가지 않고 이곳을 지키겠다고 답장했다.그녀는 직접 박수혁을 돌보고 싶었다.처음에 그의 간병인을 맡았을 때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받은 제안이었다면 지금은 달랐다.몇 시간 사이에 그녀에게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그녀는 얼굴에 붕대를 감고 병상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자 더욱더 괴로워졌다.예쁘던 눈동자는 어쩌면 다시는 광명을 못 볼지도 모른다.누군가는 그를 장애인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고 그도 예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을 잃을 수도 있었다.이게 다 그녀가 만든 결과였다.남유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한석이 도시락을 배달했지만 먹을 기분이 아니라 옆에 내버려 두었다.그녀는 그의 모습을 자세히 눈에 담았다.박수혁은 미간이 약간 좁은 편이라 더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하지만 사실 그는 무른 사람이라 조금만 말을 부드럽게 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그는 말이 거칠지만 속은 여린 사람이었다.남유주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렇게 박수혁이란 사람에 대해 잘 알면서 왜 그리도 쉽게 포기했을까?아마 그녀 자신의 뒤틀린 소유욕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만 바라봐야 한다는 집착.그리고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는 만큼 상대도 자신을 소중히 대해 줬으면 하는 마음.그녀는 그와의 관계에서 동등함에 집착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시작부터 동등한 위치가 아니었다.그래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지 못했다. 몰래 훔쳐보다가 들켰을 때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워서였다.그녀는 남녀관계에서 비굴하게 상대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싶지 않았다.차라리 포기하더라도 상처를 안 받는 쪽을 택했다.그녀에게 남은 건 자존심뿐이었다.그래서 자존심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남유주는 헤어지던 날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했다.정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남유주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화장실로 가서 젖은 수건을 가져와 그의 손과 발을 닦아주었
박수혁의 목소리는 많이 잠겨 있었다.남유주는 이마를 그의 이마에 맞대고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겁내지 마. 해외 전문가들이 오면 다 괜찮아질 거야.”박수혁의 차갑던 가슴에 다시 온기가 찾아왔다.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인지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다쳐서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도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다치면 그녀가 마음이 약해질걸 진작에 알았으면 차라리 더 맞아줄걸!그는 화를 내며 떠난 자신을 후회했다.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남유주.”이제 우리 화해한 거야?그가 가장 묻고 싶은 말이었다.하지만 부정적인 대답이 들려올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그는 요즘 부쩍 예민해진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미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에 습관이 되어버린 탓이었다.남유주는 혼란스러웠다.그녀는 다시 시작한다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돌아갈 수 없다면 점점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그래서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긍정적인 답을 줄 수는 없었다.바깥에서 밝은 햇살이 비쳐들어와 눈을 자극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그러고는 이한석이 가져온 도시락을 열었다.“배고프지? 일단 밥부터 먹자. 검진은 좀 늦어질 것 같아. 전문가들이 아직 도착을 안 했거든.”이한석은 일 처리가 참 빠른 부하직원이었다.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개인용 항공기도 준비했다.아침은 야채 샐러드와 전복죽이었다.남유주는 자극적인 입맛을 싫어하는 박수혁을 위해 김치를 치우고 그의 앞에 죽 그릇을 놓아주었다.박수혁은 그녀에게서 숟가락을 건네받고 다른 손으로 그릇을 더듬거렸다.남유주는 하얗고 긴 그의 손가락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그가 실수로 그릇을 쳐서 바닥에 떨군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뜨거운 죽이 그의 손에 쏟아지자 박수혁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치웠다.남유주는 벌떡 일어서서 그를 끌고 화장실로 갔다.찬물로 상처 부위를 식혀주자 그제야 굳었던 그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남유주는 노트북을 가져왔지만 비밀번호가 잠겨 있었다.박수혁은 주저없이 그녀에게 비밀번호를 말해주고는 한마디 덧붙였다.“금고 비밀번호도 이거야. 잘 기억해 둬.”남유주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금고 비밀번호까지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공유해?”그녀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박수혁은 그녀가 자신이 줬던 카드를 되돌려 보낸 사실을 떠올렸다.이 여자는 왜 금전에 흥미가 없을까?그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다행히 붕대가 표정을 가리고 있어서 남유주는 발견하지 못했다.“그건 아니지. 내가 믿는 사람에게만 공유해.”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남유주는 웃으며 메일을 열었다.아직 읽지 않은 메일이 몇 통 있었다.한국어와 영어, 프랑스어로 된 메일도 있었다.다행히 해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기에 읽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내용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단어는 분명히 그녀가 아는 단어인데 조합하면 알아듣지 못할 문장이었다.그녀는 기계적으로 읽기만 할 뿐, 해석을 해줄 수 없었다.남유주는 유창하지 못한 외국어로 메일을 읽었다. 다행히 박수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전혀 비웃거나 그러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그는 남유주에게 답장을 부탁하는 대신, 이한석에게 전화를 걸어 원하는 방향을 설명했다.내부 기밀 관련 얘기도 그녀가 듣는 앞에서 거리낌없이 했다.남유주가 오히려 불편했다.별로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그녀는 그들이 헤어진 이유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남유주가 그의 핸드폰을 몰래 봤는데 그 안에 회사 기밀이 들어 있다고 그가 화를 낸 게 화근이었다.그런데 그의 노트북과 우편함에 기밀이 더 많은 것 같았다.‘이런 걸 막 보여줘도 괜찮나?’하지만 입밖으로 묻지는 않았다.그때 일을 떠올려서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서로가 최선을 다해 그날의 일을 피해가고 있었다.박수혁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두 시간 정도 더 업무를 처리했다.방 안에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그도 분위기가 이
이한석도 긴장한 표정으로 입구만 살피고 있었다.“유주 씨, 너무 걱정 말아요. 세계에서 최고라고 인정받는 전문가들만 모셨으니까 괜찮을 거예요.”남유주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하지만 아무리 실력 좋은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도 있잖아요. 이러다가 정말 앞을 못 보게 될까 봐 걱정이네요.”이한석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전문가에게 여쭤봤는데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거래요. 하지만 망막이 손상되었으면 문제가 심각해요. 해외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어요. 국내는 기증자가 많지도 않고 치료가 너무 제한적이에요. 평생 앞을 못 보고 살 수는 없잖아요. 한쪽 눈이라도 살려야죠.”가장 높은 곳에 있다가 갑자기 앞을 못 보게 된다면 그는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남유주는 등골이 서늘했다.한참이 지난 뒤, 그녀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제 한쪽 눈을 그 사람한테 나눠줄 거예요.”이한석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저는 대표님이 다친 뒤에 유주 씨가 도망을 택할 줄 알았어요. 만약 대표님께서 이 말을 들었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거예요.”남유주는 벽에 등을 기대고 웃으며 말했다.“우리 화해했어요.”이한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축하해요.”이한석이 웃으며 말했다.그 역시 박수혁과 그녀의 화해를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두 사람이 헤어지고 박수혁은 점점 짜증이 많아지고 성격도 더 포악해졌다.드디어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축하할 일은 아니죠.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깐요.”남유주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이한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두 사람 헤어지고 회사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어요. 이번 달에 해고당한 직원만 셋이에요. 기획실 직원들만 죽어나죠. 유주 씨랑 만나면서 전에는 정말 직원들 실수에 관대했거든요. 두 사람이 화해해서 태한 직원으로써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남유주는 할
남유주가 대답하려는데 옆에 있던 강지민이 선수를 쳤다.“박 대표님이 얼마나 관대하신 분인데 설마 그러겠어요. 남유주 씨는 여기서 꽤 잘 지내는 것 같은데요? 불행한 사고가 오히려 기회가 된 케이스 아닌가요? 박 대표님 옆에서 간호할 수 있는 기회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잖아요.”남유주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지민 언니는 제가 부러운가 봐요. 이따가 박 대표님한테 얘기해 볼 테니 언니가 간병인 해볼래요?”강지민은 살짝 당황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남유주가 여기서 반박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인터넷 여론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고 연예계 사람들도 그녀를 치켜세우는 분위기였다.면전에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그런데 간병인을 해보겠냐니!강지민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싫은 게 아니라 소문이 나면 팬들이 떠날 것 같아 두려웠다.눈치 빠른 손호영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전부터 눈여겨 보아왔다.그가 끼어들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옆에 있던 곽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요. 왜 다투고들 그래요? 박 대표님 간병인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대표님만 원한다면 나도 할 수 있어요!”남유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참 재미 있는 사람이었다.곽 감독이 그녀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박 대표가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죠? 투자금 회수한다는 얘기는 없었어요?”남유주는 아직 그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괴롭히지는 않았고 여기서 간병인을 해달라고 했어요. 안 그러면 저 기소한다고 했는데 제가 무슨 돈으로 합의금을 내겠어요.”곽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심을 거두었다.‘확실히 특별한 관계는 아니야. 안 그러면 기소 얘기가 나왔을 리 없지.’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마 박수혁이 그녀를 물고 늘어지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부자들이 더 쪼잔하다더니!병실 입구에 도착하자 경호원들이 양측에서 지키고 있었다.그들은 남유주를 보고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어
그녀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핸드폰이 울리자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수화기 너머로 곽 감독의 목소리가 전해졌다.“유주 씨, 다음 달에 촬영 들어가는데 유주 씨가 맡은 엑스트라 씬을 첫 촬영으로 잡았어요. 잊지 말고 와요.”“이렇게 급하게요?”“빨리 다 찍고 병원에서 박 대표님을 돌보라고 일부러 일정을 이렇게 잡았는데 불편해요?”고작 엑스트라 배우에게 거절할 권한이 있을까?“아니요. 괜찮아요. 늦지 않게 갈게요.”남유주는 전화를 끊고 박수혁의 눈치를 살폈다.그는 살짝 인상을 쓰고 있더니 시선을 느꼈는지 표정을 풀었다.“정말 연예계에 발을 들이고 싶은 거야? 그 업계 지저분해. 당신 성격에 하루도 못 버틸걸.”그는 그녀에게 지저분한 환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여자 연예인들에 비하면 그녀는 아직도 순진했다.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투자금은 약속했던 대로 조달했다.사실 그녀가 아니었으면 곽 감독 드라마에 투자할 생각도 없었다.남유주는 자신을 얕잡아보는 듯한 그의 말이 거슬렸지만 자신과 연예계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알아. 그냥 엑스트라 배역이야.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특별히 부탁한 건데 당연히 가야지. 아마 이게 마지막 작품이 될 거야.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가게는 곧 문을 닫아야 하니까.”박수혁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이름을 불렀다.“유주야.”그녀는 다가가서 그의 무릎에 앉았다.“가게 문 닫게 한 것 때문에 화났어? 하지만 아주 예전부터 기획했던 프로젝트라서 어쩔 수 없었어. 보상금 금액이 마음에 안 들어? 8억은 기획팀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야.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내가 개인적으로 4억 더 챙겨줄까?”그는 그녀의 손을 입가로 가져가서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남유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박수혁은 기획팀에서 8억이라는 금액을 듣고 전원 반대했던 사실은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남유주의 요구가 너무 황당했지만 박수혁이 나섰기에 8억을 받을 수 있었다.남유주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품에 고개를
한수근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이렇게 하죠. 제가 가서 그쪽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고 다시 얘기해요.”남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우리 한 지배인은 믿음직하다니까!”한수근이 웃으며 말했다.“제 덕분에 사장 하기 편하죠? 월급이나 올려주세요!”“좋아! 문제없어!”서로 의견을 합친 두 사람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남유주는 올라가서 옷가지를 챙기고 반신욕까지 마친 뒤, 박수혁의 저택으로 갔다.미리 얘기해 뒀었기에 고용인들이 가져갈 옷을 포장까지 해서 준비해 놓고 있었다.“유주 씨, 최근 들어 작은 도련님이 유주 씨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고용인이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남유주는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연락처를 알고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건 시준이가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을 알고 일부러 연락을 안 했다는 얘기였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이따가 운전기사 시켜서 시준이 병원으로 보내요. 수혁 씨도 아들이 보고 싶을 테니까요.”“네, 지금 가서 얘기할게요.”남유주는 옷가지를 챙겨 저택을 나와 디저트 가게로 가서 디저트까지 샀다.병원에 돌아왔는데 1층 분위기가 이상했다.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고 경호 인력도 두 배로 추가했다.남유주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천천히 다가갔다.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이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곧장 병실로 달려갔다.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았다.못 보는 얼굴이었다.“누구시죠?”박수혁의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아무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안에서 노인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유주 씨죠? 들어오세요.”그제야 경호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남유주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안은 여전했는데 박수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그는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이쪽으로 와.”무덤덤한 목소리였다.그의 앞에는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흰머리에 볼이 푹 패여 있었지만 안색은 나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