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통로를 빠져나오니 사람들 틈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심강열이 보였다.그는 전보다 살이 많이 빠졌는지 옷도 평소보다 많이 헐렁해 보였다.한유라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그리웠던 감정과 서러웠던 감정이 뒤엉켜 당장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 같이 할 사람.한유라가 웃으며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려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을 툭 쳤다.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녀는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그 상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그 순간 한유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방시혁….”방시혁은 식지를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그러더니 음침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반대방향으로 끌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심강열도 그녀를 발견했는지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다시 주저앉았다.한유라는 방시혁의 손길을 뿌리치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악스러운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한유라, 사람들 많은데서 남편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그는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그녀를 협박했다.한유라는 당황한 얼굴로 방시혁을 바라보았다.자세히 보니 외투 안쪽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병원에서 몰래 도망친 모양이었다.방시혁은 짜증스럽게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압박했다.평소에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주방장의 모습은 더는 없었다.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한유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지금 뭐 하는 거지? 여기 공항이야!”형사들도 근처에 있었다.살려달라고 소리치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였다.방시혁은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바닥에 패대기치며 말했다.“한유라, 널 죽일 생각이었어.”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방시혁, 나한테 총 맞아서 복수하러 온 거야?”방시혁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그거 민하준 향해 쏜 거야. 너랑 아무 상관없다고!”한유라는 눈물을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고 서로를 제외한 모든 게 모자이크로 보였다.한유라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살아 숨쉬는 심강열을 빤히 바라보았다.기분이 좋았다.비행기에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게 현실이 되었다.그녀는 과거의 자신이 참 다채롭게 살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순간에야 제대로 보였다. 결혼한 뒤로 자신이 얼마나 안정감 있는 삶을 살았는지.그들은 서로를 시험하다가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그리고 그 호감이 커져서 사랑이 되었다.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오는데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입을 열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옆을 보니 다시 중심을 잡은 방시혁이 사람들을 제치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그녀와 심강열은 3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방시혁이 총을 들었다.한유라는 다시 몸을 돌려 방시혁이 총을 겨눈 방향을 향해 뛰었다.탕!아찔한 비명소리가 현장에 울렸다.도망치는 사람,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람들이 도망치면서 방시혁의 시야를 가렸다.다시 총을 쏘고 싶었지만 더 이상 기회는 없었다.공항을 지키던 형사들이 달려와서 방시혁을 제압했다.바닥에 쓰러진 한유라는 눈을 크게 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심강열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처를 보듬었다.피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정말 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좀 부딪히고 까져도 아프다고 울고 짜증을 부리던 사람이었는데 그를 대신해 총을 맞았다.심강열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유라야, 정신 차려. 의사가 곧 도착할 거야. 조금만 참아.”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한유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죽기 전에 말을 정말 많이 하던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아쉽고 한탄스러웠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안아보고 싶었고 내일은 뭐 할지 의논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어버렸다
영감은 당황한 것처럼 오랫동안 중얼거렸다. 평생 동안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딸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죄를 받았다.형사가 그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했다.영감은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서 파란만장한 삶을 겪은 김현숙을 바라보는데 온통 후회와 자책의 눈빛으로 가득하다.“미안해, 평생 그 아이를 만나지도 인정하지도 않겠다고, 당신 삶에 끼어들지도 않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결국 오늘 이 지경까지 되다니, 미안해.”그녀를 바라보는 영감의 눈빛에는 절제된 감정이 짙게 배어 있지만 감히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김현숙의 눈에서 혐오와 불쾌함이 느껴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그러나 상대방은 반응이 없다.눈을 감고 그는 형사를 따라갔다.심강열은 그곳에 서서 한유라를 그윽이 바라보았다.분위기가 싸늘하고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심호흡을 하던 김현숙이 겨우 입을 열었다.“강열아, 돌아가, 넌 좋은 아이니까 유라가 널 꼭 기억할 거야. 앞으로 꼭 잘 살아.”그녀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등을 돌리는데 소은영과 김하늘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떠나갔다.가랑비 속에 서 있는 심강열을 보고 있는 소은영은 갑자기 안쓰러워졌다.그때 스튜어디스한테서 가져온 물건이 생각나서 그녀가 앞으로 다가갔다.“이건 유라가 귀국하면서 비행기에서 남긴 것인데 스튜어디스가 이걸 버리지 않았대요. 보관하세요.”심강열은 멍한 안색으로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아갔다.소은정은 마지막으로 한유라를 한 번 더 보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그들은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심강열의 무거운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그 가시지 않은 슬픔이 가랑비와 함께 뼈속까지 스며들었다.(한유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그들이 한유라의 죽음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어쩌면 그들은 한유라가 죽지 않고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한유라가 소은정에게 보낸 택배는 세관에 거의 한 달 동안 묶여있었다. 그 택배를 받은
장욱은 그들이 협력하기로 한 프로젝트를 얘기한 뒤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사실 다른 프로젝트를 지켜보고 있는데 아직 성사될지는 모르겠네요.”이 말에 소은정이 한번 대꾸했다.“말해봐요.”그러자 장욱은 한번 혀를 차더니 얼굴에 붙인 팩도 무시하고 말을 꺼냈다.“패왕산에서 온천을 파냈다는 찌라시를 내가 입수했는데, 만약 그곳에 온천산장이나 리조트를 세운다면 반드시 돈이 될 걸요.”소은정은 상기된 그의 표정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찌라시라고요?”그 말에 장욱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내 남동생, 충실한 클라이밍 애호가인데요, 패왕산에 수십 번 갔는데 이번에 돌아와서 나한테 알려주더라고요.”소은정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관련 부서에서 보고가 나왔나요?”이에 장욱은 웃으며 답했다.“나왔다면야 찌라시가 아니죠. 다만 거리가 멀어서 제가 좀 긴가민가이긴 한데 소 대표님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약속 잡아 함께 가보시죠? 진짜가 아니더라도 등산도 하고 기분전환도 할 수 있잖아요!”처음에 소은정은 별로 관심 없었지만 얘기하면서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전동하와 새봄이를 데리고 같이 휴가를 가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출국은 시간을 오래 잡아야 해서 겨를이 없을 것 같으니 지방으로 가는 것 또한 괜찮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좋죠.”그러던 와중에 얼마 안 되어 전동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마중 온 그가 이미 문 앞에 도착했던 것이다.소은정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마무리 짓고는 환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뒤따르던 장욱이가 웃으면서 입을 뗐다.“소 대표님, 피부가 진짜 좋으시네요. 혹시 외국에 나가서 정기적으로 성형이라도 하십니까?”그 말에 소은정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타고난 미모라서 어쩔 수 없네요.”그녀도 장욱이의 말이 다소 과장된 건 알지만 어떤 여자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다.이때 문 앞에 서
김하늘은 요리에 재능이 없다.소은해도 천부적인 재능이 전혀 없다. 소은정이 갔을 때 그들이 만든 요리가 고작 오이무침과 양파무침이 전부였으며 옆에는 타버린 몇몇 해산물이 달랑 놓여 있었는데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김하늘이 웃으며 소은정을 끌어당겼다.“내가 방금 만국호텔에서 네가 좋아하는 해산물이랑 회를 시켰으니까 우리 가만있어도 돼.”소은정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예전에 요리를 좀 연구한 편이기는 하나 전동하와 함께 한 뒤로는 별로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지라 진작에 서먹서먹해졌던 것이다.당장 뭐라도 하는 게 벅찼던 그 또한 공감을 표시하며 음식 배달이 오기를 기다렸다.그러던 와중에 나오다가 전동하를 걱정하는 소찬식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소은해는 헛기침을 하며 불만을 토했다.“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친아들은 저라고요!”소찬식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꼭 그렇지는 않지, 병원에서 잘못 데려왔을 수도 있으니까.”그 말에 소은해가 반박했다.“저요, 집에서 태어났다고요!”소찬식도 질세라 대답했다.“오오오, 내가 깜빡했네......”이에 김하늘은 허리를 못 펼 정도로 웃고 있다.소은정도 입을 가리고 몰래 웃고 있다.한시연이 꽃잎으로 장식된 예쁜 케이크를 들고 나오는데 소은호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보필했다.무슨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어서.“아저씨, 잘 만들지는 못했으니까 개의치 마세요.”집사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너무 예뻐서 입에 넣기조차 아까운데요.”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밖에서 주차하는 기척이 들렸다.그때 전동하가 일어서며 말했다.“새봄이랑 준서가 왔네요.”과연 그 순간 새봄이가 신이 나서 뛰어 들어왔고, 문준서가 뒤따라 뛰어들어오는데 손에 작은 가방 두 개를 들고 힘겹게 숨을 헐떡거렸지만 짜증 나는 기색이라고는 없다.“집사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집사 아저씨가 즐거워하며 빙그레 웃었다.“고마워요, 새봄이 어린
옆에 있던 문준서가 털썩 일어섰다.“새봄아, 목마르거나 배고프거나 피곤하면 말해, 내가 대신 업어줄 테니까.”그 말에 새봄은 이내 대답했다.“응!”전동하는 마음속으로 가식적인 놈이라고 외쳤다.문준서는 즐겁게 웃으며 위로 올라갔다. 작은 몸매가 비록 말랐지만 소은정이 잡아줄 필요 없이 아주 날랬다.그는 피곤하지 않은 데다가 그저 새봄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곧 목적지에 도달하기 직전이라 계속하는 건 당연한 거다!전동하는 어이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새봄이한테 심각하게 세뇌당하고 말았다.이따금씩 뽀뽀하며 껴안고, 또 전동하의 땀도 닦아주면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라고 하며, 자기 아빠가 너무 잘 생긴 게 문준서보다도 더 잘 생겼다면서 앞으로 자기도 엄마처럼 아빠와 같은 남자친구를 찾겠다고 재잘거렸으니까. 잠시 후, 새봄을 안은 전동하의 흥은 처음보다 많이 고조되었다.심지어 피곤하다는 말도 없이 활기 있는 게 소은정이 봐도 고개를 흔들 정도다.새봄이, 어린 게 앞날이 창창한데!하지만 2/3쯤 갔을 무렵,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소은정은 전동하에게 한사코 새봄이를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내려와서 애들 데려가라고 미리 도착한 비서를 호출했다.그렇게 그들은 불과 40분 만에 산에 도착했다.새봄이는 대충 보고 나서 그냥 자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소은정은 부득불 사람을 시켜 새봄이와 문준서를 호텔로 데려가도록 했다.그 시각 전동하는 외투까지 벗고, 심플하고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데, 키가 크고 훤칠해서 보는 사람이 눈을 뗄 수가 없다.피곤해서 서 있는 소은정도 정상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노라니 마음속의 초조함이 싹 가셔졌다.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엷은 구름이 산꼭대기를 덮고 있고 짙푸르고 울창한 산간은 끊임없이 기복을 이루는 게 마치 선경과도 흡사했다.거기 서서 내려다보면 아슬아슬함은 느껴지지 않고 순간적으로 마음이 차분해지면서후련하고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눈을 감고 긴장을 풀고 있는 소은정을 보는 전동하의
지진의 심한 흔들림 때문에 그녀는 미처 피하지 못했고 머리 위의 어슴푸레한 등불이 순식간에 꺼져 어두컴컴해졌다.순간 적응되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엄마......”그녀는 흠칫 놀라며, 흥분해서 떨면서 새봄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이때 비서들이 아이 한 명씩 안고 나왔다.“대표님, 얼른 나가요. 여기 뒤쪽이 이미 내려앉았다고요.”비서가 초조해하며 입을 열었다.어둠에 적응되면서 그녀는 여비서가 품에 새봄이를 안고 있는데 무언가에 맞은 듯이 이마에 멍이 들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소은정은 다급히 새봄이를 훑어보는데 다행히 아이는 여비서가 품으로 보호해줘서 그저 많이 놀랐을 뿐이다. 소은정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비서를 한번 쳐다보았다.“고마워, 얼른 가자.”그녀는 손을 뻗어 비서의 품에서 새봄이를 안아온 후,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문준서도 얌전히 남비서의 품에 안겨있었는데 많이 놀란 모양이다.남비서는 별일 없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들은 돌아서서 뒤로 되돌아갔다.소은정은 새봄이를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다만 모퉁이를 막 지나려고 할 때 여진이 덮쳐왔다.이번 충격은 이전보다 몇 배 더 강하게 느껴졌다.사람이 거의 바닥에 서 있을 수 없는 정도라 그들은 피할 곳을 찾지 못했고 방안의 벽이 반쯤 무너지다가 순간 폐허가 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비명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살려달라는 소리 또한 귀청이 터질 듯하다.1초 전까지만 해도 앞에서 뛰던 사람이, 1초 뒤엔 떨어지는 뭔가에 맞아 쓰러졌다.이 시점에서, 그녀가 어떻게 새봄이를 버리고 모르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그녀는 심장이 심하게 조여오는데 그런 공포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동하 씨가 안 와서 다행이지, 그래, 밖에 있어서 다행인 거지.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갑자기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머리 위의 시멘트가 떨어진 것이다.뒤에 있던 사람이 막혔지만 다행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 속에 소은정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늘이 무너질 듯한 절절한 울음소리와 비명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극도의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들이 느끼는 슬픔은 말로 형용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보이지 않는 벽이 그녀를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창백한 얼굴을 한 그녀가 눈앞의 폐허 더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장욱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구조를 도왔던 그는 온몸이 먼지투성이여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도로 삼켰다. 그의 처진 눈에는 많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지진이 시작되면서 바닥이 갈라졌고 제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마침 여기에 서 계셨던 전 대표님과 3명의 일행분들이 모두 아래로 떨어졌어요.”너무 가혹한 말이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었다.소은정의 얼굴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저 사라진 단면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그곳은 여전히 약간의 흔들림이 남아있었고 많은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조금 전까지도 그는 멀쩡했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줬었다. 그의 따뜻했던 온기를 아직 느낄 수 있었다.어찌 이럴 수 있는가?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녀는 도무지 어떤 단어로 자신의 기분을 형용해야 할지 몰랐다.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급기야 공포로 점점 변했다. 작디작은 신경 세포까지도 모조리 마비시키며 그녀를 아프게 했다.그것은 마치 목을 조르며 생명을 위협하는 것 같아 그녀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재차 확인하려 그곳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를 장욱이 막았다.“안 돼요. 아직 여진이 남아있으니 위험해요.”머릿속이 하얀 백지가 된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더 가까이에 가서 상황을 보고 싶었다. 혹시라도 전동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