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정말 죽은 거 맞아요? 제가 보기엔 아닐 수도 있을 거 같은데?”발걸음을 멈춘 전동하가 고개를 돌려 박수혁을 쳐다보며 말하자 박수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요? 또 전 대표님이 구해갔어요?”전동하는 무섭게 노려보는 박수혁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박 대표님, 제가 몇 번을 말해야 믿어줄 거예요? 그 사람은 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고요. 그 사람 존재 자체가 소은정 씨에게 위협이 돼요. 전 대표님보다 더 간절하게 그 사람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어요.”전동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으며 상냥한 말투 속에는 카리스마가 넘쳤다.전동하를 빤히 쳐다보던 박수혁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청소 도구를 챙겨온 하인들을 보며 말했다.“나중에 치워. 내 명령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마.”화들짝 놀란 하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 도구를 내려놓고 방을 나섰고 하인이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박수혁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소파에 앉았다.소은정이 언급되자 박수혁은 그제야 인내심이 생긴 것이다.“안진이 왜 소은정에게 위협이 되는 거죠?”“손재은과 구태정의 죽음은 전부 안진 그 여자 짓이에요. 제 추측이 맞는다면 안진의 목적은 은정 씨를 여론 몰이에 빠트리려는 거예요. 그래야만 저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제 정보원 말에 의하면 안진은 지금까지 계속 동남아에서 살고 있었어요.”전동하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자 박수혁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싸늘하게 변한 눈빛으로 전동하에게 물었다.“그럼 그 여자가 당신의 등잔 밑에서 도망갔다는 건가요?”전동하는 눈썹을 들썩이며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박 대표님, 안진과 그의 부하들은 얼굴을 살짝 뜯어고쳤어요. 짧은 시간 내에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탓에 제 부하들이 실수를 저지른 가장 큰 이유였어요. 안진은 희생양을 찾아서 본인 대신 죄를 인정했거든요. 모든 계획이 완벽했어요. 제가 지금 누구를 도우려는 게 아니에요
전동하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박수혁은 전동하의 잔머리에 경악에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예전부터 전동하를 교활한 여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여우보다 더 독한 면이 있었으며 왠지 성격이 온순한 늑대 같았다.이런 생각에 박수혁은 전동하가 더 싫어졌다. 모든 계획이 철저하고 명중률도 높았지만 그 계획에서 전동하만 쏙 빠진 것이다. 분명히 가장 사악한 놈인데 겉으로 보기엔 오점 하나 없이 깨끗했다.박수혁은 이를 꽉 깨문 채 전동하를 쳐다보았으며 눈빛에는 살기가 넘쳤지만 이와 반대로 전동하는 박수혁의 반응에 실실 웃으며 말했다.“물론 이 모든 건 제 의견에 불과합니다. 박 대표님도 본인만의 계획이 있을 거 같은데 한 번 얘기해 보세요.”물론 얘기해도 전동하의 계획보다 철저하고 훌륭하지는 못할 것이다.한참 지나서야 박수혁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의견에 찬성합니다.”남은 인생에서 안진을 다시는 보지 않기 위해 박수혁은 반드시 전동하의 뜻대로 해야 했다!“그래요. 제 부하들이 동남아 후방에서 지키고 있을 겁니다. 만에 하나 대표님의 계획이 실패하면 제가 아무런 변수도 안 생기게 잘 처리하겠습니다. 박 대표님, 그럼 완벽한 합작이 되길 바랍니다.”말을 하던 전동하는 엉망진창이 된 거실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이곳 별장은 처음 와보네요. 박 대표님이 이렇게 정이 많은 분인지는 몰랐네요. 제 아내는 이렇게 작은 집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박 대표님은 첫 번째 결혼에 신경을 많이 안 쓴 거 같네요. 남자가 쪼잔하게.”말을 끝낸 전동하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박수혁을 뒤로한 채, 별장을 나섰고 괜히 한 방 맞은 게 억울해서 박수혁의 마음에 칼을 꽂은 것이다.전동하의 입술에 피를 보게 했으면 박수혁의 마음에도 피눈물이 흘러야 공평한 법이다.박수혁은 전동하의 뒷모습에 구멍을 내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한편, 전동하가 차에 타자 이제 막 동남아에서 귀국한 임
박수혁과 전동하는 언젠가부터 서로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밖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전동하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지만 대부분 박수혁의 심기를 건드리는 도발적인 말들이었고 전동하는 박수혁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박수혁은 여전히 소은정에게 마음은 있었지만 끝까지 아닌 척 숨겼다. 두 집안이 본격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한 건, 박수혁이 안진이 사망했다는 걸 알게 된 그날부터였다. 몇 달 전, 안진은 동남아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을 했다. 소문에 의하면 국경 지대의 경찰이 밀입국자에 대해 검사를 했을 때 열 살 정도의 두 여자아이도 끼어 있었는데 차량의 공간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에게 들킬 무렵, 안진이 칼로 두 여자아이를 찌른 뒤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행동 때문에 안진은 사람들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그녀가 아이들에게 너무 잔인했던 이유도 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부터 걱정했던 것이다.박수혁이 보낸 사람이 손을 쓰기도 전에 안진은 한 고요한 밤에 누군가의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되었고 그녀를 죽인 사람은 바로 두 여자아이의 아버지였다.덕분에 전동하의 부하들도 손을 쓸 기회가 없었다. 그들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지만 마음만은 매우 홀가분했으며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 골칫덩어리를 해결했기에 통쾌하기도 했다.이한석은 박시준에게 안진은 동남아로 돌아간 거라고 거짓말을 했고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박시준도 저번에 있었던 일을 점차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말은 못 했다. 그날 아이의 울음소리는 마치 꿈같았다.이한석의 끈질긴 노력에 박시준은 드디어 학교로 돌아갔고 학교에서도 여전히 얌전하고 조용했기에 선생님들은 특별히 그가 조금 더 신경이 쓰였다.박시준의 등장에 가장 기쁜 사람은 소지혁이었고 그는 박시준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 있는 새봄이는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기에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되레 막무가내로 공격을 할 때도 있었지만 박시준은 달랐다. 그는 소지혁의 말이라
박시준은 이내 박수혁이 있는 층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걸어오는 이한석과 마주쳤으며 이한석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갑자기 회사에 나타난 박시준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작은 도련님, 여긴 어떻게 왔어요?”박시준은 이한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딱히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걸어갔고 이한석이 다급하게 그를 막아섰다.“작은 도련님, 대표님 만나러 오셨어요? 대표님은 지금 사무실에 안 계세요. 회의 중이라 만나고 싶으면 잠깐 기다려야 해요.”박시준은 고개를 들어 이한석을 힐끔 쳐다보다가 방향을 바꿔 회의실로 향했고 이한석의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며 박시준의 뒤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선생님, 시준 도련님이 왜 갑자기 혼자 학교에서 나온 거죠? 네? 고모요? 시준 도련님의 고모라고요?”전화를 끊은 이한석의 표정이 확 굳어졌지만 박시준은 이미 회의실 문을 열고 회의실에 들어섰다.회의실 분위기는 엄숙하고 진지했고 회사 관리자들은 분기 보고를 하고 있었다. 문이 갑자기 열렸고 박시준이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박수혁에게 다가갔고 박수혁은 차갑고 싸늘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아 다가오는 박시준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이한석, 밖에 있는 직원들 다 그만두고 싶은 거야?”박수혁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자 다급하게 걸어오던 이한석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작은 도련님을 모시고 휴게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말을 하던 이한석이 박시준의 손을 잡은 순간, 박시준이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으며 어린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힘에 이한석이 화들짝 놀란 듯했다.박시준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박수혁 앞에 다가가 고집스럽고 원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박수혁은 갑자기 예의 없게 행동하는 박시준을 보며 화가 나기 시작했다.“뭐 하고 싶은 거야. 말해 봐.”박수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며 최대한
아이의 말에 박수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 치다가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여자가 네 엄마인 건 맞는데 내 아내는 아니야. 나랑은 절대적인 원수 사이야. 내가 어떻게 그런 여자와 결혼을 하겠어?”망연자실하던 박시준은 이내 차분한 얼굴로 다시 한번 물었다.“엄마가 죽은 거 맞죠? 아빠가 죽였다고 고모가 그랬어요!”박수혁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박시준을 보며 낮게 깔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여자가 죽을 짓을 저지른 거야.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어. 너랑 난 아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아? 넌 그 여자가 윤이영으로 위장해서 나에게 접근한 걸 진작 알고 있었지?”박수혁의 물음에 아이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고집스럽고 뜨끔한 표정이었다.“맞아요. 엄마는 우리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어요.”박수혁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아이를 비웃듯 코웃음을 쳤고 이한석은 곁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역시 아이가 어려서 쉽게 속아넘어간 것이다. 박수혁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냉정하고 차가운데 그들 모자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그래서 네가 아프다고 병원에 입원한 것도 다 거짓말이고 연기한 거네?”박수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묻자 박시준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으며 박수혁이 갑자기 말을 돌려 그에게 책임을 물을 줄은 몰랐다.옛날 일들은 아이에게도 악몽이었다. 모든 건 안진이 박수혁의 눈길을 끌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또한 그녀가 박시준에게 무능하다고 욕설을 퍼붓는 핑계였다.순간, 박시준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아이가 안진에 대한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그녀가 늘 아이를 때렸기에 아이는 그녀가 무서웠지만 그녀가 아이의 엄마였기에 아이는 그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안진이 박시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박시준은 그녀가 멀리 떠나서 다시는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고 행복하게 살길 바랐을 뿐이지 절대 그녀의 사망 소식을 바란 건 아니었다.박시준에게 안진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박수혁은 박시준이 아무 말도 하지
박예리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오늘부터는 박수혁의 방해가 없을 것이기에 더 이상 소은정이 두렵지 않았다.눈앞의 소은정만 없었다면 박예리는 절대 지금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살진 않았을 것이다. 여우 같은 저 여자가 박수혁을 꼬시고 옆에서 부추긴 탓에 그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이토록 잔인했던 것이 분명했다.박예리의 모든 원망은 박수혁과 소은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저 두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예리가 소은정에게 따지려고 2층으로 향하려던 순간, 소은정 맞은편에 있던 남자를 보게 되자 발걸음을 멈추었다.전동하였다. 그는 싸늘하고 경고의 눈빛으로 박예리를 쳐다보고 있었고 윤재수가 누구에게 패배를 당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박예리는 덜컥 겁이 났다.박수혁은 단지 윤재수를 죽게 만든 마지막 칼날일 뿐, 진정으로 그 칼을 휘두른 사람은 전동하였다.어차피 앞으로 복수할 기회는 많을 거라고 생각한 박예리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서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카페를 나섰다.하지만 밖에 나서던 순간, 낯선 남자 몇 명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박예리 씨, 저희와 같이 갑시다.”“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감히 날 건드려? 당신들 누가 보낸 거야?”표정이 확 굳은 박예리의 물음에 남자가 덤덤하게 대답했다.“박 대표님이 보냈습니다. 가시죠.”“우리 오빠… 우리 오빠 사고 난 거 아니었어요?”흠칫 놀란 박예리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박예리 씨, 가시죠.”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던 박예리는 이내 차분해졌다. 만약 박수혁이 다치지 않았으면 구급차가 왔을 리가 없었기에 박수혁이 죽기 전에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예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다시 의기양양한 얼굴이었으며 이왕 이렇게 된 거 따라가서 박수혁의 죽기 전 비참한 모습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다.박예리는 가슴을 쫙 펴고 남자들을 따라갔고 커피숍 2층에서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 박예리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으며 눈빛에는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원망과 한이 서려 있었고 드디어 오늘 뼛속까지 박혀 있던 원망을 속 시원하게 내뱉은 것이다.그녀의 말에 흠칫 놀란 이한석은 이내 가엽고 할 말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박예리 씨, 당신은 대표님을 이토록 원망하고 그 일들에 한을 품고 있으면서 대표님이 없으면 당신이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해 봤어요? 대표님이 없었다면 박예리 씨가 이렇게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회사에 박예리 씨보다 어린 여자애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합니다. 대표님이 박예리 씨를 혼낸 것도 박예리 씨가 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일 뿐인데 그 마음을 그렇게 원망해요? 당신 뱃속에 있던 아이는 박 씨 가문의 원수의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나중에 어떻게 되고 박 씨 가문은 그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앞으로 영원히 다른 남자 안 만날 거예요? 더군다나 박 씨 어르신은 윤재수 손에 목숨을 잃으셨어요. 어르신이 박예리 씨를 그렇게 사랑해 주고 예뻐했는데 그건 다 잊은 거예요?”이한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예리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그만해요! 할아버지는 지영준 손에 목숨을 잃은 거예요! 그게 윤재수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그때 윤재수와 지영준이 손잡고 저지른 짓이에요…”이한석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박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그녀는 그런 악랄한 거짓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윤재수의 말만 믿었다.“그래서 뭐요? 내 뱃속의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오빠는 안진의 아이마저 받아주면서 왜 제 아이는 지워버린 건가요? 제가 만만하고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잖아요!”박예리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하며 사무실 창문 쪽으로 다가가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창밖을 쳐다보며 이한석에게 말을 이어갔다.“이한석 씨, 이런 쓸데없는 얘기 이제 하지 마요. 어차피 오빠는 죽었고 당신에게는 두 가
박수혁은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들어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처럼 그의 마음에도 감정 변화가 없이 잔잔했다.지금 이 순간, 박예리는 진심으로 겁이 났다.박수혁은 돌아서서 이한석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사무실을 나섰고 이한석이 차가운 눈빛으로 박예리를 쳐다보며 말했다.“박예리 씨, 나가주세요.”박수혁이 눈앞의 여동생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니 이한석도 더 이상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박예리는 예전부터 멍청하게 여기저기 사고를 치면서도 박수혁 곁에 있는 이한석을 무시하고 만만하게 여긴다는 걸 이한석도 잘 알고 있기에 그녀를 위해 박수혁을 설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박예리는 밀려오는 창피함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치마를 아래로 잡아당겼지만 생리 현상으로 젖은 부분은 가려지지 않았다.그녀가 평생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창피함에 또다시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렀고 차가운 표정을 한 이한석이 그녀를 잡아줄 생각도 없어 보이자 더욱 서럽고 짜증이 났다.짧은 몇 분 사이에 그녀의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된 것이며 박수혁이 떠난 지금도 그녀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겨우 휘청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의자에 기댔고 이한석은 그런 박예리를 쳐다보며 역겨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을 숨겼다.“옷을 갈아입고 싶으면 직원한테 탈의실로 안내하라고 할게요.”이한석은 박예리에게 절대 박수혁 사무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벽증이 있는 박수혁은 절대 그걸 참을 수 없을 것이다.“오빠가 저한테 왜 이래요?”박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한석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대표님은 더 이상 박예리 씨 오빠가 아닙니다. 박예리 씨가 대표님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던 순간부터 박예리 씨는 오빠가 없게 되었습니다.”“난 그저 잠시 원망에 이성을 잃은 거예요. 저도 잘못을 깨달았다고요. 저희는 친 남매예요. 오빠가 저를 평생 원망하진 않을 거예요.”움찔한 박예리가 다급하게 하는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