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는 네 사람만 남았다.매니저는 상자에서 약을 찾느라 바빠 보이니 매니저에게 한 얘기 같지는 않았다.소은정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아니나 다를까, 문상아가 고개를 들더니 소은정을 바라보고 있었다.문상아는 잠시 망설이더니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언니가 두 분을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어요. 정말 부러워요.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언니처럼 스스럼없이 누군가와 친해질 수 없거든요.”옆에 있던 매니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눈치 채고 다급히 의약품 상자를 가져왔다.“상아야, 나중에 다시 해명하고 일단 약부터 바르자.”문상아는 그녀를 제지하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일단 나가 있어요. 두 분이랑 할 얘기가 있어요.”매니저는 잠시 주저하더니 방을 나갔다.소은정은 팔짱을 끼며 문상아에게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예요? 이럴 시간에 언니한테 해명하는 게 낫지 않아요?”문상아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당연히 해명해야죠. 하지만 두 분이 전에 봤던 저랑 이상준 씨가 호텔에 출입한 장면은 정말 오해였어요. 우연히 만난 것뿐이라고요.”김하늘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니죠.”문상아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두 사람이 결혼한 뒤로는 저도 포기했어요. 억울한 적도 있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죠. 왜 저는 언니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언니만 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빠가 미웠죠. 둘이 결혼 얘기가 오갈 때 제가 몰랐을 것 같나요? 그때가 저한테는 일적으로도 힘든 시기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이상준에게 버림을 받았죠. 매일이 고역이었어요. 두 분은 제가 양심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집안에서 언니를 제외하고 양심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김하늘은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 말했다.“우리한테 이런 얘기를 왜 하는 거죠? 그렇게 억울하면 설아한테 가서 해명해요. 우린 우리가 본 것만 믿어요. 문상아 씨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입장이 달라지
말을 마친 문상아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일정대로면 오늘 다섯 시에 촬영이 끝나죠? 다른 연예인들 실수하는 건 모르겠고 어쨌든 저는 제 분량만 촬영하고 나갈 거예요. 감독님한테 잘 얘기해 줘요.”문상아는 기분이 좋을 때 다른 연예인들이 NG를 내고 반복해서 촬영해도 기다려 주었다.하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자신의 분량만 촬영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그리고 오늘 그녀는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았다.소은정과 함께 밖으로 나온 김하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문설아 이 바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소은정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달래주러 가야 하나?”김하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뻘쭘해하지 않을까? 이럴 때는 다들 혼자 있고 싶어하지 않나?”“전화 한번 해볼까?”소은정은 핸드폰을 꺼내 문설아의 번호로 전화를 걸며 말했다.“그냥 끊어버리면 가지 말자.”그런데 신호가 가고 얼마되지 않아 문설아가 전화를 받더니 다짜고짜 울며 말했다.“이쪽으로 오려고? 나 집에 있어! 바로 오면 돼!”말을 마친 문설아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김하늘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얘도 정상은 아니야.”소은정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동하 씨한테 부탁해서 좋은 투자항목을 소개해 줄 걸 그랬어. 지금쯤 돈이라도 많이 벌면 덜 속상해하지 않았을까 싶네!”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차로 갔다.소은정은 가는 길에 대략적인 상황을 전동하에게 문자로 보내고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전동하에게서는 바로 답장이 왔다. 도착하면 주소를 보내라는 얘기였다.날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하늘에 먹구름이 낀 것으로 보아 비가 내릴 징조였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문설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다 아빠, 엄마 때문이야! 왜 굳이 나를 그런 사람에게 시집보낸 거야? 두 사람 사이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그럼 나는 뭐야?”문 앞까지 도착한 소은정
사업 때문에 만났을 때는 소 대표라고 부르며 극존칭을 썼겠지만 오늘 소은정은 일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었다.문기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유문정에게 눈짓했다.유문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부담 갖지 말고 앉아요. 설아 친구라고 들었어요. 편하게 있다가 가요.”소은정과 김하늘은 함께 소파에 앉았다.문설아는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부모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빨리 가라고!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니까!”“설아야, 그만….”유문정은 담담한 목소리로 딸을 제지하려다가 퉁퉁 부은 딸의 얼굴을 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둘 사이가 어떤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때 이상준은 진심이 아니라고 했어. 이상준 측이 먼저 우리 가문과 정략결혼을 제안했다는 건 상아를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상준도 알고 있을 거야. 그놈이 널 속상하게 하면 우리도 절대 그놈을 용서치 않을 거라는거!”문기훈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아빠가 녀석을 혼내줄게!”문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상아도 문씨인데 왜 상아랑 결혼시키지 않았어?”유문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런 걸 살필 여유가 없었다.“넌 정말 너무 순진해!”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음침한 눈으로 문기훈을 쏘아보았다.문기훈은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문정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걔가 너랑 정말 피를 나눈 동생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어! 어차피 우리 가문의 모든 건 너한테 돌아갈 거야. 걔랑은 아무 상관없다고. 정략결혼 같은 양가의 이득이 달린 일을 신분도 불분명한 여자가 낳은 애를 어떻게 그 집에 보내? 아무나 다 그런 자격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야!”유문정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문기훈은 한숨을 쉬며 문설아에게 말했다.“다 아빠 잘못이야. 네 엄마 말이 맞아. 널 이상준에게 시집보낸 건
그 이름이 나오자 문설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상아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줘.”김하늘이 말했다.“상황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그애를 걱정해? 처음부터 그애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다른 여자였다면 네가 이렇게 화를 냈을까?”김하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문설아는 멍하니 김하늘을 바라보다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하다가 말했다.“그애가 우리 가문을 싫어하는 거 알아. 아빠랑 엄마는 그애한테 잘해준 적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애한테 잘하려고 했어.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겨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과거에 우리 사이에 나누었던 정은 전부 가짜였던 걸까?”“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무리 부모님한테 무시당했다고 해도 너한테까지 이러는 건 아니지 않아? 넌 그애를 홀대하지도 않았잖아.”김하늘도 고개를 끄덕였다.문설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을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됐어. 이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계속 그 사람이랑 같이 살라고? 계속 생각날 텐데 그건 내가 힘들어.”소은정은 이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문설아의 멘탈에 감탄했다.마침 이때, 전동하에게서 전화가 왔다.“여보세요.”“아직도 대화 중이에요? 문 앞에 다 왔는데….”전동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은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문설아는 불만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안 돼. 가지 마. 나랑 같이 밤새 술 마셔줘.”소은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봐, 문설아 씨. 난 돌아가서 애기도 봐야 해. 밤을 새우는 일은 이제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잘 하고 결정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잖아. 난 널 응원해!”김하늘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맞아! 나도 너 응원할게!”“의리도 없는 것들!”문설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김하늘은 웃으며 다가가서 그녀를 안아주었다.“잘 해결되길 바랄게.”소은정은 김하늘과 함께 그녀의 집
전동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그런데 예상했던 일 아닌가요?”소은정과 김하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미 알고 있었어요?”요즘은 드라마에도 이런 막장은 잘 안 나오는데?전동하는 여유롭게 우회전하고 속도를 줄이며 대답했다.“이상준 씨가 문상아 씨를 파트너로 데리고 미팅 장소에 나왔을 때부터 문설아 씨가 이 일을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죠. 이게 뭐 희한한 일인가요? 문설아 씨가 눈치 채지 못한 건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 성격 때문이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통하지 않고 처제와 가깝게 지내는 남편한테 경고라도 한마디 했을걸요?”전동하의 말이 끝나자 차 안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차 안에서는 은은한 말리꽃 향이 났다. 소은정이 전동하를 위해 추천한 차량용 디퓨저 향이었다.아주 편안한 향기였다.소은정은 김하늘과 시선을 맞추었다.우리가 일을 너무 크게 생각한 걸까?한편, 문설아의 집.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문설아는 나갔던 소은정과 김하늘이 돌아간 줄 알고 다급히 가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을 열자 이상준이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급격하게 식었다.“여긴 왜 왔어요?”이상준은 멈칫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과하러 왔어.”그가 여기로 오기 전까지 문기훈과 유문정에게서 수차례나 전화가 왔었다.사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고 애초에 책임질만한 일은 하지도 않았다.그들이 이혼하면 이상준 측은 손해가 별로 없지만 오히려 문씨 가문에서 타격을 입게 될 상황이었다.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이대로 이혼하거나 문설아가 사과하는 일.이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비록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지만 그녀와 같이 지내다 보니 그가 아는 재벌집 아가씨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상류사회의 고정적인 틀에서 교육받고 자란 여자가 아니었다.그녀는 순수하고 착했으며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고 믿었다.그녀는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돈을 위해 노력을
소은정은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뉴스 일면에 눈에 띄는 타이틀이 보였다.“무영 그룹 2세 이혼 발표. 남편의 잦은 외도로 부부 사이의 믿음에 금이 갔다고 밝히며 양심이 있다면 맨몸으로 나가라고 저격!”가장 충격적인 건 마지막 말이었다.양심이 있다면!정면 승부를 선택한 것이다!무수히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세상에, 아까 검색해 봤는데 무영 그룹은 제약 회사던데? 내가 어려서부터 먹던 약을 만드는 회사였어. 지금도 옛날 가격을 유지하고 효과가 좋더라. 그런 집안에서 자란 여자라 그런지 역시 쿨하네!”“나도 검색해 봤는데 안 좋은 기사는 하나도 없어. 문설아 씨 응원할게요!”“결혼한지 1년도 안 된 사이에 외도라니. 정말 뻔뻔하시네요. 이상준 씨!”“역시 재벌가 아가씨는 뭐가 달라도 달라. 너그러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네! 이 대표님도 나와서 해명 좀 해봐요!”“우리 소은정 여신님도 이런 면에서는 아주 쿨하게 응대했었지. 요즘에는 공식석상에 얼굴을 안 내밀던데 그리워요, 은정 여신님….”“빨리 이혼하고 새 출발하는 게 낫지.”소은정은 연예계 뉴스보다 더 핫한 댓글들을 조용히 읽어보았다.정말 평소에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전동하가 새봄이를 안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는 소은정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아이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엄마를 찾았지만 달래주는 사람은 아빠 혼자였다.그래서 분유를 충분히 먹고 잠시 놀다가 드디어 엄마한테 오게 된 것이다.그런데 엄마는 핸드폰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새봄이는 불만스럽게 팔을 흔들거리며 입을 삐죽였다.아이의 소리를 들은 소은정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생글생글 웃으며 전동하를 바라보았다.“좋은 아침이에요.”전동하는 새봄이를 잠시 내려놓고 소은정을 꼭 안아주었다.두 사람은 잠시 안고 있다가 아이가 울려고 하자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소은정은 새봄이를 안아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우리 아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칭찬을 들은 새봄이는 신이
문상아까지 끼어 있는데 모두가 문제를 회피한다?그렇다고 없던 일로 하고 지낼 수 있을까?문설아의 결정이 충동적으로 보여도 정확한 선택이었다.전동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아내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소외감을 느낀 새봄이가 빽 소리를 질러서야 대화가 끝이 났다.소은정은 얼른 아이에게 다가가서 안아주었다.이때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문설아였다.“내가 인터넷에 낸 공문 좋아요 눌러주고 응원해 줘! 그리고 멀리 퍼뜨려 줘!”소은정은 눈을 비비고 다시 문자를 확인했지만 틀림없었다.‘문설아는 이런 상황에도 참 대단하네.’그녀는 문설아가 의기소침해하고 슬픔에 빠져 허우적댈 줄 알았다.그런데 이렇게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다니?소은정이 답장이 없자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야, 너 괜찮아?”문설아는 목소리가 쉬어 있었지만 말투는 아주 밝았다.“당연하지. 아침내내 욕만 먹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를 욕할수록 난 내가 정확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잘못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충동적이라고 욕해? 난 정상인들이 이런 사건을 마주했을 때의 반응을 보고 싶어!”소은정은 그 말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네티즌들 중에 참고 그냥 살라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하지만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결정이 경솔했다고 말하고 있었다.“사실 나도 네가 좀 성급했다고 생각하지만 넌 옳은 일을 했어. 문설아, 넌 정말 대단해!”소은정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다른 사람이 이런 일을 마주했으면 그녀처럼 용기 있는 결정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문설아는 자랑스럽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나도 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 그러니 너도 실제 행동으로 나를 지지해 줘! 지금 인기 검색어에 올라가 있기는 한데 그거 다 내가 돈 주고 산 거야. 우리 가문과 이상준 가문이 나서서 돈으로 기사를 내리려고 한다면 난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만약 소은정이 이
한편, 문설아의 집.“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와? 너 때문에 네 언니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알아?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키워주고 재워주고 먹여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문상아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유문정의 욕설이 이어졌다.평소에는 항상 문상아의 존재를 무시하던 유문정이었다.그런데 문상아가 친딸의 이익을 건드리자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한 것이다.오랜 시간 쌓인 불만이 한순간에 폭발했다.문상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못들은 척, 위층으로 올라갔다.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유문정은 다가가서 문상아를 힘껏 밀치며 말했다.“귀가 먹었어? 당장 꺼지라고! 이곳은 널 환영하지 않아!”문기훈은 소파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는 유문정과 문상아 사이의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문상아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저는 그냥 언니를 보러 왔어요. 제가 다 해명할 거예요.”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감각한 목소리였다.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의기양양한 말투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런 무감각한 반응이 유문정을 더 화나게 했다.“해명? 너 때문에 네 언니가 이렇게 됐는데 해명은 무슨 해명? 넌 설아를 언니라고 생각한 적이나 있어? 그때 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개를 키우고 말지!”문상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유문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줌마, 저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저도 이 집에서 자라고 싶지 않았어요.”“너 방금 뭐라고 했니? 그러니까 널 데려다가 키운 우리 잘못이라는 거야? 문기훈 씨, 당신 딸이 뭐라고 하는지 좀 들어봐! 내가 처음부터 머리 검은 짐승은 들이는 게 아니라고 했지? 이제 어떡할 거야? 설아는 얘 때문에 이혼하게 생겼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 얘는 지금 뻔뻔하게도 우리 집에서 자란 거 후회한다잖아?”이성을 잃은 유문정은 모든 화를 문상아에게 쏟았다.몇십 년 동안 참았던 억울함과 분노가 분출구를 찾은 느낌이었다.문상아는 불안함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