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때문에 만났을 때는 소 대표라고 부르며 극존칭을 썼겠지만 오늘 소은정은 일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었다.문기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유문정에게 눈짓했다.유문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부담 갖지 말고 앉아요. 설아 친구라고 들었어요. 편하게 있다가 가요.”소은정과 김하늘은 함께 소파에 앉았다.문설아는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부모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빨리 가라고!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니까!”“설아야, 그만….”유문정은 담담한 목소리로 딸을 제지하려다가 퉁퉁 부은 딸의 얼굴을 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둘 사이가 어떤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때 이상준은 진심이 아니라고 했어. 이상준 측이 먼저 우리 가문과 정략결혼을 제안했다는 건 상아를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상준도 알고 있을 거야. 그놈이 널 속상하게 하면 우리도 절대 그놈을 용서치 않을 거라는거!”문기훈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아빠가 녀석을 혼내줄게!”문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상아도 문씨인데 왜 상아랑 결혼시키지 않았어?”유문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런 걸 살필 여유가 없었다.“넌 정말 너무 순진해!”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음침한 눈으로 문기훈을 쏘아보았다.문기훈은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문정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걔가 너랑 정말 피를 나눈 동생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어! 어차피 우리 가문의 모든 건 너한테 돌아갈 거야. 걔랑은 아무 상관없다고. 정략결혼 같은 양가의 이득이 달린 일을 신분도 불분명한 여자가 낳은 애를 어떻게 그 집에 보내? 아무나 다 그런 자격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야!”유문정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문기훈은 한숨을 쉬며 문설아에게 말했다.“다 아빠 잘못이야. 네 엄마 말이 맞아. 널 이상준에게 시집보낸 건
그 이름이 나오자 문설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상아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줘.”김하늘이 말했다.“상황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그애를 걱정해? 처음부터 그애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다른 여자였다면 네가 이렇게 화를 냈을까?”김하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문설아는 멍하니 김하늘을 바라보다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하다가 말했다.“그애가 우리 가문을 싫어하는 거 알아. 아빠랑 엄마는 그애한테 잘해준 적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애한테 잘하려고 했어.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겨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과거에 우리 사이에 나누었던 정은 전부 가짜였던 걸까?”“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무리 부모님한테 무시당했다고 해도 너한테까지 이러는 건 아니지 않아? 넌 그애를 홀대하지도 않았잖아.”김하늘도 고개를 끄덕였다.문설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을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됐어. 이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계속 그 사람이랑 같이 살라고? 계속 생각날 텐데 그건 내가 힘들어.”소은정은 이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문설아의 멘탈에 감탄했다.마침 이때, 전동하에게서 전화가 왔다.“여보세요.”“아직도 대화 중이에요? 문 앞에 다 왔는데….”전동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은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문설아는 불만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안 돼. 가지 마. 나랑 같이 밤새 술 마셔줘.”소은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봐, 문설아 씨. 난 돌아가서 애기도 봐야 해. 밤을 새우는 일은 이제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잘 하고 결정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잖아. 난 널 응원해!”김하늘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맞아! 나도 너 응원할게!”“의리도 없는 것들!”문설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김하늘은 웃으며 다가가서 그녀를 안아주었다.“잘 해결되길 바랄게.”소은정은 김하늘과 함께 그녀의 집
전동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그런데 예상했던 일 아닌가요?”소은정과 김하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미 알고 있었어요?”요즘은 드라마에도 이런 막장은 잘 안 나오는데?전동하는 여유롭게 우회전하고 속도를 줄이며 대답했다.“이상준 씨가 문상아 씨를 파트너로 데리고 미팅 장소에 나왔을 때부터 문설아 씨가 이 일을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죠. 이게 뭐 희한한 일인가요? 문설아 씨가 눈치 채지 못한 건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 성격 때문이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통하지 않고 처제와 가깝게 지내는 남편한테 경고라도 한마디 했을걸요?”전동하의 말이 끝나자 차 안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차 안에서는 은은한 말리꽃 향이 났다. 소은정이 전동하를 위해 추천한 차량용 디퓨저 향이었다.아주 편안한 향기였다.소은정은 김하늘과 시선을 맞추었다.우리가 일을 너무 크게 생각한 걸까?한편, 문설아의 집.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문설아는 나갔던 소은정과 김하늘이 돌아간 줄 알고 다급히 가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을 열자 이상준이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급격하게 식었다.“여긴 왜 왔어요?”이상준은 멈칫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과하러 왔어.”그가 여기로 오기 전까지 문기훈과 유문정에게서 수차례나 전화가 왔었다.사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고 애초에 책임질만한 일은 하지도 않았다.그들이 이혼하면 이상준 측은 손해가 별로 없지만 오히려 문씨 가문에서 타격을 입게 될 상황이었다.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이대로 이혼하거나 문설아가 사과하는 일.이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비록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지만 그녀와 같이 지내다 보니 그가 아는 재벌집 아가씨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상류사회의 고정적인 틀에서 교육받고 자란 여자가 아니었다.그녀는 순수하고 착했으며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고 믿었다.그녀는 표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돈을 위해 노력을
소은정은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뉴스 일면에 눈에 띄는 타이틀이 보였다.“무영 그룹 2세 이혼 발표. 남편의 잦은 외도로 부부 사이의 믿음에 금이 갔다고 밝히며 양심이 있다면 맨몸으로 나가라고 저격!”가장 충격적인 건 마지막 말이었다.양심이 있다면!정면 승부를 선택한 것이다!무수히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세상에, 아까 검색해 봤는데 무영 그룹은 제약 회사던데? 내가 어려서부터 먹던 약을 만드는 회사였어. 지금도 옛날 가격을 유지하고 효과가 좋더라. 그런 집안에서 자란 여자라 그런지 역시 쿨하네!”“나도 검색해 봤는데 안 좋은 기사는 하나도 없어. 문설아 씨 응원할게요!”“결혼한지 1년도 안 된 사이에 외도라니. 정말 뻔뻔하시네요. 이상준 씨!”“역시 재벌가 아가씨는 뭐가 달라도 달라. 너그러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네! 이 대표님도 나와서 해명 좀 해봐요!”“우리 소은정 여신님도 이런 면에서는 아주 쿨하게 응대했었지. 요즘에는 공식석상에 얼굴을 안 내밀던데 그리워요, 은정 여신님….”“빨리 이혼하고 새 출발하는 게 낫지.”소은정은 연예계 뉴스보다 더 핫한 댓글들을 조용히 읽어보았다.정말 평소에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전동하가 새봄이를 안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는 소은정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아이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엄마를 찾았지만 달래주는 사람은 아빠 혼자였다.그래서 분유를 충분히 먹고 잠시 놀다가 드디어 엄마한테 오게 된 것이다.그런데 엄마는 핸드폰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새봄이는 불만스럽게 팔을 흔들거리며 입을 삐죽였다.아이의 소리를 들은 소은정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생글생글 웃으며 전동하를 바라보았다.“좋은 아침이에요.”전동하는 새봄이를 잠시 내려놓고 소은정을 꼭 안아주었다.두 사람은 잠시 안고 있다가 아이가 울려고 하자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소은정은 새봄이를 안아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우리 아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칭찬을 들은 새봄이는 신이
문상아까지 끼어 있는데 모두가 문제를 회피한다?그렇다고 없던 일로 하고 지낼 수 있을까?문설아의 결정이 충동적으로 보여도 정확한 선택이었다.전동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아내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소외감을 느낀 새봄이가 빽 소리를 질러서야 대화가 끝이 났다.소은정은 얼른 아이에게 다가가서 안아주었다.이때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문설아였다.“내가 인터넷에 낸 공문 좋아요 눌러주고 응원해 줘! 그리고 멀리 퍼뜨려 줘!”소은정은 눈을 비비고 다시 문자를 확인했지만 틀림없었다.‘문설아는 이런 상황에도 참 대단하네.’그녀는 문설아가 의기소침해하고 슬픔에 빠져 허우적댈 줄 알았다.그런데 이렇게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다니?소은정이 답장이 없자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야, 너 괜찮아?”문설아는 목소리가 쉬어 있었지만 말투는 아주 밝았다.“당연하지. 아침내내 욕만 먹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를 욕할수록 난 내가 정확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잘못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충동적이라고 욕해? 난 정상인들이 이런 사건을 마주했을 때의 반응을 보고 싶어!”소은정은 그 말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네티즌들 중에 참고 그냥 살라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하지만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결정이 경솔했다고 말하고 있었다.“사실 나도 네가 좀 성급했다고 생각하지만 넌 옳은 일을 했어. 문설아, 넌 정말 대단해!”소은정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다른 사람이 이런 일을 마주했으면 그녀처럼 용기 있는 결정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문설아는 자랑스럽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나도 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 그러니 너도 실제 행동으로 나를 지지해 줘! 지금 인기 검색어에 올라가 있기는 한데 그거 다 내가 돈 주고 산 거야. 우리 가문과 이상준 가문이 나서서 돈으로 기사를 내리려고 한다면 난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만약 소은정이 이
한편, 문설아의 집.“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와? 너 때문에 네 언니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알아?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키워주고 재워주고 먹여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문상아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유문정의 욕설이 이어졌다.평소에는 항상 문상아의 존재를 무시하던 유문정이었다.그런데 문상아가 친딸의 이익을 건드리자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한 것이다.오랜 시간 쌓인 불만이 한순간에 폭발했다.문상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못들은 척, 위층으로 올라갔다.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유문정은 다가가서 문상아를 힘껏 밀치며 말했다.“귀가 먹었어? 당장 꺼지라고! 이곳은 널 환영하지 않아!”문기훈은 소파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는 유문정과 문상아 사이의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문상아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저는 그냥 언니를 보러 왔어요. 제가 다 해명할 거예요.”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감각한 목소리였다.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의기양양한 말투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런 무감각한 반응이 유문정을 더 화나게 했다.“해명? 너 때문에 네 언니가 이렇게 됐는데 해명은 무슨 해명? 넌 설아를 언니라고 생각한 적이나 있어? 그때 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개를 키우고 말지!”문상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유문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줌마, 저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저도 이 집에서 자라고 싶지 않았어요.”“너 방금 뭐라고 했니? 그러니까 널 데려다가 키운 우리 잘못이라는 거야? 문기훈 씨, 당신 딸이 뭐라고 하는지 좀 들어봐! 내가 처음부터 머리 검은 짐승은 들이는 게 아니라고 했지? 이제 어떡할 거야? 설아는 얘 때문에 이혼하게 생겼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 얘는 지금 뻔뻔하게도 우리 집에서 자란 거 후회한다잖아?”이성을 잃은 유문정은 모든 화를 문상아에게 쏟았다.몇십 년 동안 참았던 억울함과 분노가 분출구를 찾은 느낌이었다.문상아는 불안함으
문기훈은 문상아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혐오스러워 미칠 것 같은 표정이었다.“다행히 하늘이 도왔는지 네 엄마가 일찍 죽었지. 그 일이 없었으면 내가 널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왔는 줄 아니? 난 한 번도 네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지 않았어. 어차피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까. 나한테 딸은 설아뿐이야. 우리가 널 키워준 건 설아가 혼자 외로울까 봐 둘이 친구나 하라고 키워준 거라고. 넌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될 아이야. 애초에 네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오늘 같은 일도 없었어!”문기훈은 똥 씹은 얼굴로 오랜 시간 감췄던 자신의 과거를 다 들추어냈다.죄 없는 아이에게 상처가 될 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가정이 떠안은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그는 뭘 잘못했을까?문기훈은 유문정을 사랑했다. 하지만 하룻밤의 실수 때문에 그들은 평생을 괴로워했다.문상아는 계단에 서서 계단 손잡이를 꽉 잡았다. 손가락마저 하얗게 질리고 손에 땀이 났다.그녀는 자신이 이 집에서 정말 괴리감이 드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싫어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문설아만 챙기고 예뻐하는 유문정이 싫었다.그리고 너무도 쉽게 모두의 사랑을 받는 문설아도 싫었다.그녀는 줄곧 문기훈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대놓고 자신에게 애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 그래도 속으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문기훈도 그녀를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문기훈이 그녀에게 잘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매일 회사일로 바빴다. 그래도 돌아오면 가장 먼저 문설아의 숙제를 점검했다.문상아는 항상 만점 시험지를 가져왔지만 그걸 볼 때마다 심드렁하게 고개만 끄덕여 줄 뿐이었다.문설아는 태어나서부터 빛이 나고 사랑을 받는 존재였고 문상아는 항상 그녀의 그늘에 갇혀 살았다.문설아는 공부도 못하고 장난도 심해서 사고도 많이 쳤지만 그런 건 하나도 상관없었다.귀족 가문에서 누가 성적을 신경 쓸까?문상아는 태어날 때부터
문은 안에서 잠겨 있지 않았다.문설아는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애착 인형을 품에 안고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노트북에는 주식 사이트가 열려 있었다.문상아는 잠시 언니를 바라보았다. 문설아에게는 기분이 안 좋을 때 주식 사이트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주가는 올랐다.오늘 그녀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평소에 그렇게도 아끼던 동생 때문이었다.문상아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문설아는 고개를 들고 동생을 힐끗 바라보았다.“오늘은 촬영 안 해?”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똑 같은 말투였다.문상아는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루 휴가 냈어. 원래는 어제 찾아올 생각이었는데 연기가 집중이 안 돼서 촬영이 늦게 끝났어.”이건 그녀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문상아는 거의 NG를 내지 않는 배우였는데 이번에는 계속 집중하지 못하고 힘들게 촬영했다.감독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고 일부는 그녀가 프로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문상아의 실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하지만 그녀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그렇게 촬영 일정은 새벽 3시까지 연기되다가 어거지로 통과했다.시간이 늦었기에 문상아는 바로 집으로 오지 않고 밴에서 쪽잠을 잤다.다음 날 아침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인터넷은 이미 문설아 이혼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비록 문상아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문상아는 누구한테 귀뺨을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문설아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포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그녀는 심지어 해명도 듣지 않았다.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기에 해명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문설아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는 프로 정신이 투철했잖아. 연기보다 중요한 건 없는 것처럼 굴더니 왜 그랬어?”문상아는 비꼬는 말인 걸 알면서도 다가가서 문설아와 마주 앉았다.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나한테는 연기 빼고는 아무것도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