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을 나선 비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회사 걱정하시는 걸 보면 대표님이랑 진짜 갈라서실 건 아닌가 보네.’한편, 혼자 남은 한유라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 김현숙에게 전화를 걸었다.자초지종을 들은 김현숙이 한동안 침묵하다 한 마디 물었다.“정말 가려고?”“네. 제가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이제 입지를 다져야죠. 엄마랑 남편 가문 그림자 아래에서 살 순 없는 거잖아요?”한유라의 말에 김현숙은 한숨을 내쉬었다.딸도 분명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그래. 가는 건 좋은데... 조심해. 엄마도 네가 성장하는 건 좋지만 위험해지는 건 싫으니까. 알겠지?”따뜻한 김현숙의 목소리에 한유라는 왠지 울컥하는 기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럼요. 그런데 심 서방이 아직 오케이를 안 해줘서. 어머님한테 부탁드려볼까 싶네요. 어머님이 허락하면 심 서방도 그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겠죠.”“음, 그래. 시율이한테는 내가 직접 얘기할게.”그리고 잠깐 멈칫하던 김현숙이 말을 이어갔다.“심 서방 전 여자친구란 사람이 나타났다면서? 너한테 해코지 같은 거 한 건 아니지?”김현숙의 질문에 한유라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럴 리가요. 다들 우리 부부가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닌지 그것만 신경 쓰던데 엄마는 왜 그게 궁금하신데요?”“엄마가 돼서 딸이 억울하게 사는 꼴은 못 보지. 어디까지나 정략결혼이고 내가 억지로 몰아붙이다시피 했던 결혼이라는 거 알아. 엄마도 고르고 또 고른 신랑감이고 인품 하나만은 괜찮겠다 싶어서 너랑 이어준 거야. 하지만... 여자 문제로 네 속 썩이면 얘기가 달라지지. 행여나 이혼하고 싶은 거면 집안 눈치 보지 말고 해. 엄마는 네 선택이라면 뭐든 존중할 거니까.”진심 어린 김현숙의 말에 참고 참았던 눈물이 정말 흘러내리고 말았다.수화기 너머, 김현숙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한유라는 김현숙에게 항상 못난 딸이었다. 성인이
복도에서 심강열이 보여주었던 행동은 한유라에겐 실망 그 자체였다.다른 사람들의 시선?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민하준도, 심강열도. 마음 가는대로 뜨겁게 사랑했고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마저도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어쩌면 심강열도 나름 억울해 하고 있을지도 몰라. 정말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말이지.’한유라가 피식 웃었다.심강열과 즐겼던 달콤한 신혼생활은 분명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영원히 그 달콤함에만 잠겨있을 수 없다는 걸 이번 기회에 한유라는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무능한 자신은 이런 불만을 토로할 자격 조차 없다는 것도 말이다.‘직원들이 내게 굽신대는 것도 어디까지나 내가 심강열 와이프기 때문이니까. 누굴 탓하겠어.’“후우...”마음을 다잡으며 심호흡을 내쉰 한유라는 C시 프로젝트 재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한편, 심강열은 한유라를 C시로 보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었다.한유라를 대신할 적임자를 찾기 위해 오전 내내 여러 임원들을 만났으니까.점심시간.한유라가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대충 점심을 때우려던 그때.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대표님께서 식사 준비하셨답니다. 대표 사무실로 모시겠습니다.”잠깐 멈칫하던 한유라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심강열이 먼저 손을 내민 이상, 언제까지고 애처럼 삐쳐있을 수만은 없는 법.‘심강열, 이제 달콤한 신혼은 끝이야. 이제부터 현실 결혼생활 시작이라고. 역시 사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니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구만.’한유라가 어깨를 으쓱했다.잠시 후, 한유라가 대표 사무실에 들어서고 소파에 앉아 배달 온 음식을 세팅하던 심강열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손은 씻었어?”‘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코웃음을 치던 한유라는 바로 대표 사무실 화장실로 향했다.“누구처럼 사무실에 화장실이 없어서 깜박했네.”한유라의 목소리에 심강열 역시 피식 웃었다.“여기가 마음에 드나봐? 그럼 나랑 사무실 바꿔. 난 상관 없으니까.”한유라의 비아냥거림에 심강열이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심강열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졌다.‘왜... 왜 저런 표정인 걸까? 예전이었다면 분명 좋아했을 텐데. 왜...’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유라야, 아직도 그 일 때문에 나한테 화난 거야?”이에 한유라가 눈을 흘겼다.“그 일? 어느 일 말하는 거야?”요 며칠 사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저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한 질문이기도 했다.한유라의 표정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심강열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유은진...에 관한 일 말이야.”하지만 한유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어차피 지난 일이잖아. 아니야?”심강열이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그냥 얘기해. 너 이러는 거 진짜 미칠 것 같으니까.”“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선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리고 당신이 엄한 짓 한 것도 아니고. 나 화난 거 없어. 그리고 나도 전 남자친구들은 많아. 과거 연애사 일일이 해명할 필요 없어.”전 남자친구...민하준을 떠올린 심강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만약 민하준이 갑자기 나타나 어차피 정락결혼이니 자기와는 연애만 하자고 말한다면 심강열 본인도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래서 한유라의 반응이 더욱 놀라웠다.누구보다 다혈질인 그녀가 화 한번 내지 않았는데 왜일까?안도감 대신 느껴지는 건 가슴이 턱 막힌 듯한 답답함이었다.“그럼 C시 프로젝트 때문에 그래? 말했잖아. 거긴 너무 위험하다고. 그쪽 상황은 네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야.”심강열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한유라를 설득하려 애썼다.하지만 한유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렇게 생각해? 해보기도 전에 내가 무조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잖아.”“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어쩌라고.”“내가 애야? 내가 알아서 조심할 거야. 그리고 나 혼자 가는 거야? 경호원이며 비서며 다 대동할 텐데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그것 봐. 그렇게 쉽
오후 근무시간이 끝나고 한유라와 심강열은 함께 하시율의 집으로 향했다.오늘따라 조용한 분위기에 운전기사도 가시 방식이었다.평소라면 한유라가 재잘거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심강열 역시 누구보다 그 얘기를 들으며 리액션을 해줄 텐데 모기소리 하나 들리지 않으니 요즘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사실인 건가 싶었다.그렇게 숨 막힐 듯한 드라이브가 이어지고 차량은 드디어 하시율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부지면적이 크진 않지만 정원이 유난히 아름다운 아기자기한 별장이었다.가장 먼저 두 사람을 맞이한 건 바로 별장에서 일하는 한씨 아주머니였다.“두 분 드디어 오셨네요. 사모님께서 하루 종일 얼마나 기다리셨는데요.”고개를 끄덕인 심강열과 한유라가 저택에 들어선다.역시 버선발로 마중나온 하시율이 한유라를 발견하고 화사하게 웃는다.“어머, 왔어?”한유라에게 뜨거운 포옹을 안긴 하시율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물었다.“아니, 너 왜 이렇게 말랐어?”엄마의 따가운 눈총을 느낀 심강열이 어깨를 으쓱했다.“전 모르는 일입니다. 저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이에 한유라가 미소를 짓더니 하시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어머님, 저 일부러 다이어트한 거예요. 아, 이건 선물이에요. 스카프랑 향수인데. 마음에 드세요?”하시율의 취향을 완벽히 반영한 선물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어머나,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는 또 어떻게 알았대? 우리 무뚝뚝한 아들놈... 무슨 복에 겨워 이렇게 착하고 예쁜 와이프를 만났나 몰라.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오버스러운 하시율의 표정에 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세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집안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아주머니가 다가왔다.“식사 준비 거의 다 되어 가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알겠습니다. 천천히 하세요.”이때 하시율이 한유라의 손목을 잡아끌어 소파에 앉혔다.“아참. 며칠 전에 내가 쇼핑하다 우리 유라한테 어울릴만한 백 몇 개 샀거든? 너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고.”“어머, 진
한유라의 가벼운 목소리에도 하시율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처음엔 하시율도 별일 아니겠거니 했는데 오늘 어딘가 소원해진 두 사람의 사이를 보아하니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하는 수밖에 없었다.‘유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강열이를 보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었는데... 오늘은 달라.’결혼생활에 있어선 선배였기에 하시율은 빛을 잃은 그 눈동자가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래. 유라 네 말이 맞긴 한데... 그 애 뭔가 노리고 나타난 것만은 사실이잖니? 미리미리 대비해 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너희 두 사람 정략결혼으로 이어진 사이이긴 하지만 그 누구보다 알콩달콩하게 살아가는 거 보면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래서 그런 애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엄마...”심강열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지만 하시율의 엄한 눈빛에 결국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엄마 말 끝까지 들어. 강열아, 네가 유은진 그 여자랑 사귈 때 내가 왜 그렇게까지 결혼을 반대했는 줄 알아? 집안 차이가 심해서?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었어. 솔직히 그때 우리 심해그룹도 위기였잖니? 그리고 이 엄마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너희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 결혼... 허락했을 거야. 하지만... 걔가 너 모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해? 네 인맥, 네 돈. 전부 다 이용하면서 뒤에선 회사 정보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있었어. 그때 프로젝트 입찰에서 왜 심해그룹이 번번히 실패했었는데... 정말 우리 그룹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니?”하시율의 말에 심강열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굳고 하시율은 기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나한테 들키고 나서 그 애가 한 짓은 더 가관이었지. 네 아버지랑 가장 친한 친구였던 유지승 대표... 우리 그룹이 가장 위험할 때 우릴 배신했었잖아. 왜 그랬는지 알아?”하시율의 말을 듣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유라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이게 다 무슨 소리야... 뭔가 대단한 비밀을
한숨을 푹 내쉰 하시율은 진지한 얼굴로 한유라를 돌아보았다.“그 애가 갑자기 나타나서 유라 너도 당황스럽고 상처 많이 받았을 거야. 내가 대신 사과하마. 그 아이...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정말 뻔뻔하더구나. 유학 명목으로 거액을 요구하는 걸 처음엔 거절했었는데 강열이랑 깔끔하게 헤어지겠다고 해서 돈으로 이 악연을 끊어낼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싶어서 받아들였어. 다시 한국엔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그 뻔뻔한 성격 어디 가겠니? 너희 두 사람이 알콩달콩 사는 걸 보니까 배가 아팠던 거겠지. 그래서 훼방이라도 놓으려고 나타난 것 같은데... 너희 두 사람이 또 그 여우 같은 애 손에 놀아나는 거 난 용납 못한다.”‘아, 어머님... 진짜 눈치채고 계셨구나...’한유라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한참 뒤에야 감정을 추스른 심강열이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그래도... 저한테만큼은 말씀해 주셨어야죠.”“홍경그룹이 소은정 대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우리 심해는 정말 무너졌을 거야. 네가 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얼마나 힘든지 내가 다 아는데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 그때 너 시간 날 때마다 회사 건물 옥상에 들락거린다는 얘기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니?”그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기분이 다시 떠오르며 하시율은 눈시울을 붉혔다.‘강열 씨... 그때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한유라가 고개를 돌려 심강열을 바라보았다.분노, 후회, 배신감. 지금 이 순간 치미는 감정을 꾹 참아내고 있는 고집스러운 입술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솔직히 심강열과 알고 지낸 시간을 결코 길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그가 강한 사람이라는 걸 보아내는 건 충분한 시간이었다.그런데 그런 그가 옥상에 올라갈 지경이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궁지에 몰렸던 걸까?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회사를 어떻게든 살려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아득한 옥상에 서서 그는 어쩌면 정말 이대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
“그래.”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대표 사무실.소파에 앉은 심강열의 표정은 중요한 담판을 앞둔 듯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했다.“앉아.”한유라가 소파에 앉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한편, 비서 역시 냉랭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그 죽일 놈의 호기심을 못 참고 결국 시키지도 않은 커피 두 잔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섰다.그러자 겨우 침착함을 지켜내던 심강열이 호통을 쳤다.“당장 나가요!”“아... 네, 네!”비서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서고 회사에서 이렇게 이성을 잃은 심강열의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한유라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왜 웃어?”“그냥. 사실 나한테 화내고 싶은 거면서 엄한 직원한테 성질 부리네 싶어서.”심강열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유라는 바로 말을 이어갔다.“나 진심으로 가고 싶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 아니야. 정말 내가 뭔가 해보고 싶어서 그래. 당신이랑 엄마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나 혼자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잠깐 침묵하던 심강열이 고개를 들었다.“누가 일하지 말래? 네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많고도 많아. 하지만 C시는 안 돼. 거긴 정말 위험하단 말이야.”하지만 꾹 다문 한유라의 입술을 보고 있자니 쏟아내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 콕 박힌 듯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지? 걔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절대... 절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두지 않았을 거야. 정말이야...”죄책감에 사로잡힌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한유라가 자리에서 일어서 심강열을 꼭 안아주었다.따뜻한 위로에 심강열도 팔을 뻗어 그녀를 더 힘껏 끌어안았다.“유라야, 나한테 화난 거 있으면 차라리 날 때리고 욕해. 하지만... 날 떠나는 건... 그것만은 안 돼.”이대로 한유라를 잃을까 진심으로 두려워진 심강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더
“알아. 당신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내가 더 잘 알아.”한유라가 심강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와 똑같은 향기를 풍기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한유라의 손가락을 간질였다.익숙한 향기 때문일까? 그녀의 마음도 살짝 풀어졌다.“하지만... 내 마음도 좀 알아줘. 언제까지 당신 뒤에 숨어있을 순 없잖아. 남자 하나 잘 물어서 속 편하게 산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당신이랑 결혼한 거 내 최고의 행운이야. 그래서 그 행운에 걸맞는 사람이 되려고.”말을 마친 한유라의 손가락이 잘생긴 심강열의 이목구비를 야릇하게 훑었다.“당신도 내가 무능력하다는 소리 듣는 건 싫지?”괜찮다고.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제발 내 곁에만 있어달라고...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달콤한 한유라의 목소리에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이젠 무슨 말을 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심강열은 직감했다.“정말... 기어이 가야겠어?”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심강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세 달. 딱 세 달만 줄 거야. 그 안에 해결 하든 못 하든 무조건 돌아오는 걸로. 더는 양보 못 해.”그제야 한유라도 활짝 웃으며 심강열의 얼굴에 찐한 뽀뽀를 날렸다.“그래.”‘일단 가는 건 오케이했으니까 됐어. 세 달? 흥. 그때 가서 더 버티면 되지롱. 자기가 날 납치라도 할 거야 어쩔 거야.’그날 오후부터 한유라는 인수 인계 작업을 시작했지만 심강열은 일단 떠나기 전에 친구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두라는 말만 했을 뿐, 정식 공문을 내리는 걸 이상하리만치 질질 끌었고 마음에 가득 찼던 기대감은 점차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심강열의 허락을 받아내고 며칠 뒤, SC그룹.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소은정은 자기 사무실인양 소파 상석에 앉은 한유라를 발견하고 헛웃음을 지었다.“왜 회사로 왔어! 새봄이부터 만나러 갔어야지! 네 얼굴 다 까먹겠다.”이에 한유라가 눈을 흘겼다.“걔 아직 돌도 안 지났어. 사람 얼굴 기억도 못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