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해가 짐을 들고 전동하가 휠체어를 밀었다.병실을 나서자 그들은 미리 준비해둔 담요로 그녀를 꽁꽁 감쌌다.아직 바깥 세상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미라처럼 담요에 꽁꽁 싸인 신세가 되었다.잠시 후, 든든한 팔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차에 올랐고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소은해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전동하는 말없이 뒷좌석에 올라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소은정은 놀란 사슴 같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전동하는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지금 상황에서 키스를 하려고 한다면 그녀가 크게 놀랄 수도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불편한 거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요.”소은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남편이라고 하면 그가 하는 이 모든 일이 당연한 것이었다.비록 조금 거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소은해는 백미러로 그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억을 잃은 소은정이 싫다고 난리를 칠까 봐 걱정했었다.그러면 전동하가 너무 불쌍할 것 같았다.차가 달리는 중에 운전기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대표님, 오피스텔로 가실까요? 아니면 사모님 친정으로 가실까요?”소은정은 살짝 인상을 쓰고 전동하의 눈치를 살폈다.바로 본가로 가는 게 아니었다고?그녀는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그 오피스텔이 그들의 신혼집이라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익숙할 것 같으면서도 낯선 신혼집.소은정은 울먹이는 눈동자로 소은해에게 구원의 요청을 보냈다.물론 이 남자와 부부 사이이기는 하지만 아직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는 그와 단둘이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소은해도 그걸 느꼈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전동하가 그녀를 데리고 집에 가고 싶다면 막을 수는 없었다.전동하가 그녀에게 나쁜 짓을 할 사람도 아니고.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전동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은
찬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날씨가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기가 느껴졌다.소찬식은 이런 방면으로 경험이 전무하기에 딸이 아직 산후조리 중이며 찬바람을 맞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놀라서 잠을 깬 소은정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그녀는 눈을 뜨고 약간 몽롱한 눈빛으로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아빠….”전동하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지만 이내 표정관리를 했다.그는 조심스럽게 소은정이 바람을 맞지 않도록 담요로 감싸주었다.장인어른이 사고를 쳤는데 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소찬식은 허약한 딸의 상태와 원망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전동하를 보고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전동하에게 말했다.“빨리 안고 들어와. 집 안은 따뜻해.”소은정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전동하는 표정이 밝아졌다.조금 전까지 숨 죽이고 눈치만 보던 운전기사와 소은해도 드디어 부담 없이 차에서 내렸다.어차피 남은 일은 전동하에게 맡기면 된다.전동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고 소은정도 습관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그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짙어졌다.기억을 잃었지만 그녀는 그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라는 사람을 처음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하지 않았을까?전동하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소은해는 소은정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실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하지만 그들은 모두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소은호는 동생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누군지는 기억나?”소은정은 소파에 앉아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오빠가 아끼던 피규어 그거 셋째 오빠가 망가뜨린 거야.”순간 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전동하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소은호의 차가운 눈빛이 소은해에게 닿았다.소은해는 시선을 피하며 동생을 쏘아보았다.“너 사람이야? 그게 언제적 일이라고 지금 얘기해? 내가 말하지 말라고 용돈까지 줬잖아!”소은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난 받은 적 없
소은호는 차갑게 코웃음 치며 동생을 노려보았다.“네가 한 짓이 있으니까 그렇지.”소은해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그게 언제적 일이라고. 형, 피규어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래? 정말 동생한테 너무하네!”소은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건 시연이가 출국하기 전에 나한테 선물한 거야. 난 보물처럼 다뤘는데 네 녀석이 망가뜨린 거라고!”그때 두 사람은 이별한 상태였다.소은호는 이 피규어로 긴 이별의 아픔을 견뎠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물건을 동생이 망가뜨렸다니.그때 당시 소은호는 집안을 발칵 뒤집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그런데 그 범인이 소은해였던 것이다!소은해는 어색한 표정으로 소찬식의 뒤에 가서 숨었다.소은호가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데 감당할 수 없었다.소은정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웃고 있었다.이때, 위층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소은정은 뭔가 떠오른 듯, 어깨를 움찔했다.‘내 아이?’소찬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위층으로 달려갔다.소은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우리 아버지 이제 손녀 돌보는 게 취미생활이 되셨네. 낚시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소은해도 웃으며 말했다.“형네 아들도 데려오지 그랬어? 새봄이랑 친구도 되고 얼마나 좋아?”소은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시연이가 회복하는 속도가 좀 느려.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애랑 떨어지기는 싫다고 하니까 우리가 돌봐야지 뭐.”소찬식이 쿨한 시아버지라서 참 다행이었다.소은해가 또 뭐라고 말하려 하는데 소찬식이 우는 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너희 부모라는 사람들이 아직 아기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순간 소은정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아이를 보지 못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그런데 왜 전동하마저 아이를 보려 하지 않았을까?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전동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앞으로 다가갔다.“장인어른이 고생 많으셨어요.”아이를 출산하기 전, 전동하는 소은정과 함께 아이 안는 법을 배운 적 있었다.그리고 마이크를
전동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그녀는 그의 외모가 자신의 취향이라고 말했다. 전동하는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그리고 그녀의 취향은 기억을 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첫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소찬식은 두 사람 사이에 변한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 채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너 병상에 누워 있을 동안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특히 동하는 계속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어. 잠도 제대로 안 자고. 힘든 때일수록 진심이 보인다고 하잖아. 너 기억을 잃었다고 우리 사위 모른 척하면 안 돼!”소찬식은 소은정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소은정은 전동하와 소찬식을 번갈아보다가 입을 다물었다.전동하가 웃으며 말했다.“장인어른, 걱정하지 마세요. 은정 씨 곧 기억을 되찾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 은정 씨 그런 사람 아니에요.”소찬식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지.”거실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아무도 소은정의 기억상실을 슬퍼하지 않았다.병상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을 때보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사실이 기뻤다.소은정은 텅 빈 자신의 품을 바라보며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하지만 소찬식은 아이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겼다.베이비시터가 웃으며 말했다.“아기가 울 때까지 분유를 기다렸다가 주면 안 돼요. 안 좋은 습관이거든요. 과학적인 수유 방법 때로 시간 정해서 수유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아기도 정서적으로 안정되거든요.”전동하는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마이크보다 더 사랑스러웠다.사실 조금 더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태어나자마자 관심을 주지 못하고 소찬식에게 모든 걸 맡겨버려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출산하기 전에 가기로 했던 산후조리원도 가지 못했다. 베이비시터 역시 소찬식이 직접 연락해서 고용했다.그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소은정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아이가 떠난 자리를 미련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어색해서 그런지 말은 하지 않았다.소찬식은
방은 소은정이 예전에 쓰던 방이었다. 전동하도 소은정을 따라 이곳에 자주 왔었기에 익숙했다.소은해는 미리 청소해둔 방에 짐을 옮겨놓았다. 소은정이 평소 좋아하는 디퓨저를 가져다 놓아 방 안에서는 청아한 향기가 풍겼다.전동하는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은 뒤,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배 안 고파요?”소은정은 고개를 흔들었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소은정은 또 고개를 흔들었다.그는 약간 절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불안해서 미치겠어요.”그는 혹시라도 소은정이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해 하고 있었다.항상 보이던 자신감은 그녀가 그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보일 수 있었다.소은정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우린 어떻게 만났어요?”전동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쉬었다.“기억상실이 일시적이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난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걸요. 좀 꿈만 같아요.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남편과 아이가 생겼어요. 너무 신기하잖아요!”전동하는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부드럽게 말했다.“은정 씨가 불안감을 느끼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게 현실 맞아요. 비록 은정 씨는 나를 잊어서 조금 슬프지만 안 좋은 기억도 같이 잊었다면 나쁘지만은 않죠.”“안 좋은 기억이요?”소은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건 모두 가졌다. 그런 그녀에게 안 좋은 기억이라니?전동하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고요.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고 했죠?”그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그녀에게 박수혁이라는 존재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가능하다면 그는 그녀가 그 사람을 완전히 잊기를 바랐다.안 그러면 그녀는 또 한번 아픈 기억을 더듬어야 할지도 모른다.이건 너무 잔인했다.소은정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만난 남자는 많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닿았다. 전동하의 진심 어린 미소를 보자 소은정은 가슴이 울컥했다.그녀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는 시선을 피했고 전동하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잠시 후, 고용인이 아이를 안고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아가씨, 회장님께서 아이가 울지 않을 때는 엄마랑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게 좋다고 해서요.”말을 마친 고용인은 아이를 전동하에게 넘겼다.전동하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았다. 아까보다는 확연히 절제된 동작이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러고는 자세를 숙여 소은정에게 아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애가 은정 씨를 많이 닮았어요.”소은정은 아이를 보자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내가 정말 엄마가 된 걸까?그녀는 손으로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이목구비는 정말 사랑스러웠다.하지만 얘가 정말 나를 닮았나?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그에게 말했다.“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얘보다는 훨씬 예쁘죠!”소찬식은 항상 그녀에게 엄마와 아빠의 예쁜 것만 빼다 닮았다며 최고 미녀라고 칭찬했다.하지만 지금 이 아기는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자신과 견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전동하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물론이죠. 은정 씨가 제일 예뻐요.”소은정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다시 아기를 바라보았다.옆에 있던 고용인도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꼬마 공주님은 제가 봤던 갓난아기 중에 가장 예쁘게 생겼어요. 태어날 때 피부가 쭈글쭈글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하얗게 변하더라고요. 앞으로 남자 좀 울리겠어요.”소은정은 손으로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사람들이 칭찬하는 소리가 싫지 않았다.전동하는 그녀의 옆을 계속 지키려 했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기에 소은정은 어서 가서 쉬라고 그를 쫓아냈다.소찬식의 말대로 병원에서 그녀를 간호하느라 아기 얼굴도 못 봤다는 사실이 은근히
소은정의 질문에 두 친구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소은정은 자신을 대하는 전동하의 자상한 태도로 어느 정도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들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김하늘과 한유라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웃었다.“그건 의심하지 마. 천하의 소은정이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겠어?”김하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그러니까. 전동하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추억을 잊었으면 다시 연애느낌 가져보는 것도 괜찮아.”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소은정이 가지고 있던 약간의 불안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나 이 사람하고만 연애했어?”그러자 두 친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그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침실에서 쉬고 있던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잠 자다가 일어났는지 전동하는 약간 몽롱한 상태였다.그는 거실에 모여 앉은 여자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가가서 소은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안 피곤해요? 집사님한테 디저트 좀 부탁했어요. 난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하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요.”그 모습을 본 한유라는 하고 싶었던 말을 도로 삼켰다.소은정과 꽃미남들의 스캔들, 그리고 박수혁과 있었던 과거는 얘기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기억하지 못해도 나쁠 건 없었다. 다시 기억난다고 해도 달리지는 건 없으니 그녀가 기분이 좋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소은정이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전동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두 친구한테 목례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소은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친구들을 재촉했다.“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야지. 나 다른 남자친구는 안 사귀었어?”김하늘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한유라가 말했다.“정말 꿈도 야무지셔. 전동하 씨 한 명으로 부족해?”김하늘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이 아는 한, 전동하는 최고의 연인이었다.그는 비록 소은정 앞에서 약간 비굴할 정도로 그녀에게 약
소은정은 원래 미남이나 미녀를 좋아했다.하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친 상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빛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거부반응을 느끼고 재빨리 뒤돌아섰다.어쩐 일인지 저 잘생긴 남자가 거슬리고 거북하게 느껴졌다.그런데 몇 걸음 가지도 못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소은정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고 뒤에는 아까 본 그 남자가 서 있었다.“은정이 너 맞구나. 저기….”소은정은 재빨리 손을 빼고는 차갑게 물었다.“당신 누구야?”그녀는 모르는 사람이 접근해 오자 더욱 큰 불쾌감을 느꼈다.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치 거대한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남자의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말했다.“대표님, 회의 곧 시작합니다. 아… 소은정 씨.”그 경호원은 두 사람을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소은정은 인상을 쓰며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이제 와서 혼자 나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그래서 인상을 쓰며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은정아, 아직도 내가 미워?”그는 그녀가 바라던 대로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졌다.하지만 날이 거듭할수록 괴로움에 울부짖었고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다.그리고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고 미련은 커져만 갔다.그녀를 놓아줬지만 잊는 것은 불가능했다.소은정은 그를 힐끗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글쎄? 그쪽이 느끼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비록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사람에게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이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느낌이었다.소은정의 말투가 너무 차가웠던 건지, 남자는 대답을 하지 못했고 소은정은 이 기회를 틈타 그곳을 빠져 나왔다. 박수혁은 저도 모르게 뒤따라가려고 했지만 이한석이 그를 말렸다.“대표님, 퇴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더 자극하면 안 좋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