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실장의 상태는 아까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변명도 포기했는지 물어보는 대로 털어놓고 있었다.형사의 질문은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유정한 씨, 불법도박시설 사장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입니까? 거기 처음 갔을 때, 혼자 갔나요? 아니면 누군가를 따라 갔나요?”유 실장은 모든 걸 체념한 눈빛으로 심강열을 바라보았다. 처음 기획실장이라는 자리에 승진했을 때 다졌던 각오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짓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게 그 각오와 상반된 것들이었다.그리고 이제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혼자 갔습니다. 기획실장으로 승진하고 고객사와의 미팅이나 접대가 많았어요. 모두가 떠받들어 주니까 조금 들떴던 것 같습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어요. 그날도 술에 취해 머리도 좀 식힐 겸 거리를 걷다가 한 건물 지하에 들어갔어요. 아마 화장실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고 거기가 불법 도박시설이라는 것을 알았죠.”유 실장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말을 이었다.“그 뒤로는 뭐… 통제가 되지 않았죠. 처음에 돈을 많이 땄거든요. 그래서 거기 직원 추천으로 큰판에 뛰어들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액수가 크니까 재미 있었어요. 그런데….”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건 함정이었고 그는 함정에 스스로 뛰어들었을 뿐이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여태 말이 없던 심경열이 입을 열었다.“그 사람들은 유 실장이 어디 출근하는지 알아요? 공금 횡령은 유 실장이 주도적으로 진행한 거예요? 아니면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유도했어요?”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유 실장을 바라보았다.아마 형사들은 유정한이라는 남자가 단순히 도박에 빠져 공금을 횡령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하지만 심경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동종업계가 일부러 유 실장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심해그룹은 송화시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큰 자본으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군침을 흘
형사들은 별거 아닌 것처럼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유 실장은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돈을 추적해서 돌려받는다고 해서 그의 죄명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심강열이 그에게 관대한 것도 아직 돈을 돌려받지 못해서 그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유정한도 그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요구에 전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형사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사람들이 나가자 한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400억이라….”심강열은 못내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회사 운영에 신경 쓰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그가 어떤 말로 칭찬해 줄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저 돈이면 명품백을 몇 개나 살 수 있지?”심강열은 다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가방 살 돈은 충분해.”한유라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가가서 그의 팔짱을 끼고 흔들었다.“우리 남편 부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고!”심강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유 실장 횡령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어?”심강열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난 이 사건 배후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유 실장을 조종했다고 생각했어. 유 실장이 맡은 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중요하거든. 투자금을 유 실장이 빼돌리고 누군가가 그 기회를 악용해서 우리 회사에 불리한 짓을 한다면 돈이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 알아내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한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착잡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러니까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거네? 그런데 왜 나를 위해….”그녀가 갑자기 승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가 계획을 바꿔 유 실장을 내쳤다는 얘기였다.‘모든 게 나를 위해서였다고?’한유라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하지만 심강열은 그녀를 위해 원래 계획을 수정했다는
소문의 중심에 있는 두 남녀가 같은 공간에 있으니 물론 그들이 부부라고 해도 직원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남 얘기가 가장 재미 있다고 했던가.심강열은 그녀의 이상한 웃음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냈다.그의 의도를 눈치챈 한유라가 입을 열었다.“알아볼 필요 없어. 그거 물어보면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생각할걸?”“그게 무슨 말이야?”한유라는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웃으며 말했다.“우리가 사무실에서 안고 있는 장면을 본 당신 비서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다른 직원들에게 뭐라고 했나 봐. 이미 우리가 사무실에서 그 짓을 했다고 소문 다 났어!”심강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그리고 몇 초 사이에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한유라는 그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이렇게 재미난 반응을 보일 줄 알았으면 진작 얘기할걸.’조금 전까지 저 소문을 어떻게 잠식시켜야 하나 고민했는데 지금 보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어차피 뒤처리는 그에게 맡기면 된다.심강열은 음침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이 비서가 이상한 소문 냈다는 거지? 그냥 해고해야겠네!”이렇게 눈치 없고 입이 가벼운 비서가 자기 비서실에 있었다니! 심강열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한유라는 손으로 턱을 괴고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그러다가 말겠지. 게다가 우리는 결혼식까지 올린 부부인데 부끄러워 할 일도 없잖아.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라고 해!”심강열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그가 이 일로 많이 화가 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부하 직원이 자신과 한유라에 대해 그런 소문을 냈는데 어찌 화를 안 낼 수 있을까?‘점점 직원들 군기가 빠지고 있어!’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한유라는 한가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뒤처리는 그의 몫이다.어차피 심강열이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 그녀는 자기가 할 일만 하면 된다.카드게임이 끝난 뒤, 하시율은 한유라 모친을
직원은 한참 고민했지만 도대체 뭐가 다른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하시율과 한유라 모친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 중간 층에서 직원 두 명이 탔다.그들은 계속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고 있었다.“그거 사실이야? 직접 봤어? 대표님이랑 한 비서님이 사무실에서 불타올랐다고?”그들은 너무 흥분한 탓인지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하시율과 한유라 모친은 굳은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또 다른 직원이 말했다.“나야 못 봤지. 대표님 비서실 직원이 말해줬어. 직접 봤다고 하더라고. 코피를 쏟을 뻔했다지 뭐야!”“아직 신혼이잖아. 참, 아까 인사발령 난 거 봤어. 유 실장이 공금횡령으로 경찰에 잡혀 가고 한 비서님이 새로운 기획실장으로 승진했대. 앞으로 호칭에 주의해야겠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신다더라. 한 실장님이라고 불러야겠어!”“맞아. 한 실장님 대단하시네. 그냥 비서로 만족하실 줄 알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기획실 실장으로 발령 나다니.”“누가 예상했겠어. 대표님은 매사에 엄격하고 평소에 잘 웃지도 않으시잖아. 그런데 여자를 만나고 많이 변하셨네. 베개머리 송사라도 했나 봐.”“그러니까. 예전에 대표님 미팅이나 파티에 참석하실 때 고객사 여직원 한 명이 일부러 대표님 옷에 술을 쏟았다가 대표님이 옷 배상하라고 하셨잖아. 그 여직원 그날 실수로 300만 원을 배상했어. 한 달 월급이 사라진 거지.”“그런 일도 있었어?”엘리베이터가 위층에 도착하고 두 직원은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남겨진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엘리베이터에서 이런 특종을 접할 줄 누가 알았을까.가장 당황한 사람은 한유라 모친이었다. 사위와 딸이 사무실에서 그런 낯부끄러운 짓을 벌이다니.게다가 그 사실을 회사 직원들 전체가 알고 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하시율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괜한 걱정을 했네요. 둘이 사이가 정말 좋나 봐요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바쁜데 괜히 찾아온 건 아닌가 모르겠어. 그냥 얼굴 보고 싶어서 왔으니 신경 쓰지 말고 일해.”하시율은 약간 차가운 눈빛으로 아들을 쏘아보았다.‘장모 앞에서 꼬리 치는 것 좀 봐. 아들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심강열은 둘을 사무실로 안내했다.사무실에 들어선 하시율은 이곳 저곳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휴게실, 화장실 할 것 없이 구석구석 확인했다. 한유라 모친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심강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엄마에게 물었다.“엄마, 지금 뭐 찾아요?”“유라는? 둘이 같이 있었던 거 아니야?”심강열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그녀에게 말했다.“유라는 자기 사무실에 있죠. 옷장은 왜 열어요? 설마 유라가 제 사무실 옷장에 있겠어요?”그는 무슨 불륜 현장을 잡으러 온 것처럼 행동하는 자신의 엄마를 이를 악물고 쏘아보았다.‘장모님도 있는데 왜 저러시는지….’하시율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유라 없으면 없다고 진작 얘기하지.”심강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한유라 모친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우리 유라 요즘은 사고 안 치고 다니지?”심강열은 한유라에게 문자를 보내며 질문에 대답했다.“당연하죠. 유라 일 잘해요. 뭐든 빨리 배우고요. 다 장모님이 교육을 잘 시킨 덕분이죠.”그 말에 한유라 모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사위가 자기 딸을 칭찬하는데 당연히 기분 좋았다.비록 그녀가 보기에 조금 과장된 면도 있었지만.그래도 심강열이 딸을 많이 아끼고 보호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둘이 언제 저렇게 사이가 좋아졌지?’한유라 모친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내 딸은 내가 잘 알지. 그래도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어. 아까 직원들이 얘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유라를 기획실장으로 승진시켰다면서?”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무실 문이 열렸다.한유라는 대범하게 안으로 들어오며 엄마에게 물었다.“제가 기획실장 되면 안 되는 이유라
심강열의 말에 조금 전까지 걱정이 많았던 한유라의 모친은 드디어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여태 한유라가 기획실장 자리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고 낙하산 신분 때문에 회사 직원들이 불만이 많을까 봐 걱정했었다.그런데 심강열의 말을 듣자 괜한 걱정을 했다 싶었다.모두에게 좋은 선택이라고 하니 더 걱정할 것 없었다.하지만 한유라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무슨 거짓말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해? 내가 해달라고 해서 해준 건데 뭘 저렇게 당당하게 말해?’게다가 임원회의 때 사람들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만장일치로 통과한 게 아니라 심강열이 반대 의견을 받지 않았기에 통과할 수 있었던 건데.하지만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다.한유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심강열을 바라보았다.말을 마친 심강열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유라는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고 그 모습을 본 심강열은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다시 장모와 대화를 나누었다.그 모습을 포착한 하시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둘 사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아 보였다.집안에서 추진한 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여느 연인들보다 더 사이가 좋아 보였다.심강열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외식을 제안했다.원래대로면 오후에 미팅이 있었지만 장모가 방문했는데 성의 없이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미팅도 다음으로 미뤘다.한 가족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쳤다. 한유라가 있는 자리는 언제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저녁 아홉 시, 한유라의 모친은 노래방에 가자는 딸의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갔다.하시율은 못내 아쉬워하며 한유라의 손을 잡고 말했다.“강열이 저 놈이 섭섭하게 하면 때려도 돼. 절대 간섭하지 않을게. 심심하면 나한테 연락하고. 알았지?”한유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머님. 어머니는 이 가문에서 저랑 가장 대화가 잘 통하는 분인 것 같아요. 어머님 아니었으면 강열 씨랑 사이 좋게 지낼 수도 없었을 거예요!”심강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가 먼저 한유라를 안은 것도 아니고 입 싼 비서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강열은 속으로 이 비서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하시율은 무미건조한 웃음을 지었고 딱 봐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그냥 해본 말이야. 앞으로 주의 좀 하라고.”그녀는 헛기침을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그만 돌아가. 유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심강열은 엄마를 거리에 두고 떠날 수 없었기에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하지만 하시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싫어!”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포르쉐 차량이 달려오더니 뒤에 멈춰섰다.하시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운전기사 도착했으니 이만 가봐.”심강열은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차에 올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차를 돌렸다.그러고 보니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다.집에 도착한 그는 차를 주차하고 인사부에 문자를 보냈다.그날 저녁, 이 비서는 지원팀으로 전근 명령을 받았다.한편, 먼저 집으로 돌아온 한유라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모든 게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반신욕을 하며 소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은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언제는 아침에 전화하더니 오늘은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한유라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나 기획실장으로 승진했어! 앞으로 바빠서 전화도 못 할 거야!”수화기 너머로 소은정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말? 이렇게 갑자기? 언제 승진했어?”사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기쁜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으려니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가장 친한 소은정에게 연락했던 것이다.“오늘. 지금 보니까 강열 씨 사람이 참 괜찮고 믿음직한 것 같아.”한유라는 신이 나서 오늘 있었던 일을 소은정에게 이야기해 주었다.소은정도 심강열이 책임감 있고 자상한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하지만 생각보다 더 파격적인 행보에 조금은 놀란 반응을 보였다.“심강열 씨 고지식한 사람인 줄 알
한유라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동하 씨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설마 처음부터?”‘설마 우리가 대화한 내용을 다 들은 건가?’소은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야. 방금 들어왔어.”한유라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넌 몸은 좀 어때? 배 속의 아기가 말썽부리지 않아?”아기 얘기가 나오자 소은정은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아직 아무 반응 없어. 출근하는데는 전혀 문제 없어!”한유라는 소은정과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급급히 전화를 끊었다.소은정이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전동하는 냉큼 다가가서 핸드폰을 빼앗았다.“심 대표가 돌아왔겠죠. 유라 씨 아마 다시 전화 안 올 거예요.”소은정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유라 이 나쁜 녀석, 사랑을 만났다고 친구를 소홀히 하다니!’전동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전복죽 다 끓었는데 가져올까요?”소은정이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아니요.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이 시간에 먹으면 살 쪄요.”전동하도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하는 사이, 그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서 전복죽을 가져왔다.“따뜻할 때 맛만 봐요. 이거 한 숟가락 먹는다고 살 안 쪄요.”요즘 소은정의 식단은 전문 영양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전동하는 저녁 때는 꼭 자신이 직접 요리를 했고 그들의 집에는 기숙하는 가정부를 두지 않았다.전동하가 바빠서 야근이 잦을 때를 제외하고 가정부는 이 집에서 밤을 새우지 않았다.반면 소은정은 이런 사소한 것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전동하와 소찬식, 그리고 오빠들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기에 전혀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다.처음에 그녀는 임신해서 전동하가 이렇게 자상하게 자신을 대한다고 생각했다.물론 임신 전에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은 없지만 임신한 뒤로 감수성이 풍부해져서 그런지 잡생각이 많아졌다.하지만 점차 그런 생각은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날 그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