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믿어라”, “괜찮을 거다” 이런 말은 어차피 그냥 하는 말이라는 생각에 소은정은 그저 싱긋 웃어보였다.뭐, 그녀에겐 전동하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든든했기에 가능한 미소였다.이때 전동하의 휴대폰이 울리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말했다.“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여보세요?”...또 10분 정도가 흐르고 저편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자리를 피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남자는 어느새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어, 은정 씨. 저 기억하세요?”이에 소은정이 영혼 없이 피식 웃었다.“아, 채태현 씨? 여긴 무슨 일로?”채태현, 박수혁과 조금 닮은 외모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리얼 예능에서 배우 양예영과의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반짝 떴다 반짝 사라진 흔한 연예인 중 하나였다.한편, 소은정은 가뜩이나 마음이 불편한데 박수혁과 닮은 얼굴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그냥 눈치껏 좀 가라...’하지만 채태현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논란이 생긴 뒤로 조연 자리도 얻기 힘들어진 그는 가수로 전향해 보려 앨범까지 내보았지만 그 결과도 참담한 상태.정말 이대로 내처질까 두려워 보이는 동아줄은 다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해외 영화제에 참석하느라고요. 이번에 제가 찍은 영화가 해외에서 좀 반응이 좀 좋더라고요.”“아, 네.”소은정은 그에게 눈빛 조차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정 씨, 지금 저 밖에 사람들 쫙 깔린 거 알아요?”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채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그게... 저희 매니저가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저어야 한다면서 가짜 팬들을 잔뜩 풀어놨거든요. 지금 여기서 바로 나가면 저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스캔들 날지도 몰라요.”“그래서요?”‘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게 다 꼬이네. 동하 씨는 여디 간 거야...’괜히 기자들 눈에 띄였다가 또 희한한 타이틀로 기사를 써제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저랑
발없는 소문이 멀리 퍼진다고 소은정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알바로 고용된 가짜 팬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행인들까지 몰려들었다.대중들에게 널리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보다 신비로운 베일에 감춰진 재벌들의 삶이 사람들에겐 더 큰 먹잇감으로 다가왔다.어느새 개미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 움직이는 것마저 힘들어지고 그 와중에 채태현은 “보디가드” 연기에 심취한 것인지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미안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요. 괜히 스캔들 나지 않게 제가 똑바로 해명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분명 그녀를 일부러 이쪽으로 유인한 거면서 그녀를 위로하는 척하는 채태현의 뻔뻔한 얼굴에 소은정은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려보았다.‘동하 씨, 제발 나 좀 구해 줘요...’이때 인파를 뚫고 나타난 기자가 미친 듯이 소은정을 향해 외쳤다.“소은정 대표님, 최근 SC그룹이 아시아 최초로 스마트칩 프로젝트를 따내셨다면서요? 이 덕분에 회사 주가도 많이 상승했는데 뭐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기자의 말대로 SC그룹이 유럽 스마트칩 생산건을 독점으로 따낸 덕분에 기사도 많이 나고 주가도 예쁘게 상승 곡선을 이어가고 있었다.뭐, 최근 소찬식의 건강 상태 때문에 그 일로 기뻐할 겨를 조차 없었지만 말이다.하지만 적어도 회사에 관한 질문이니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국민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는 SC그룹이 되겠습니다.”기자의 질문에 소은정이 꽤 친절한 말투로 대답하자 사람들은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소은정 대표님, 이번 프로젝트에 태한그룹도 투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사적인 관계 덕분에 투자금을 따내신 겁니까?”“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은 석지 않습니다.”‘또... 또 박수혁...’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낙인처럼 따라오는 박수혁의 존재가 소은정은 혐오스러웠다.‘누구 한 명이 죽어야 끝이 나려나...’하지만 굳은 소은정의 표정에도 눈치없는 기자는 질문을 이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박수혁의 귀에는 그들의 웅성거림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이 공간에 소은정, 박수혁 그저 두 사람만 있는 것만 같았다.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촉 좋은 기자들 역시 박수혁의 눈동자에 담긴 애틋한 사랑의 눈빛을 바로 캐치했다.“박수혁 대표잖아?”“뭐야... 나 지금 드라마 보는 줄 알았잖아.”“설마... 다시 재결합하는 건가?”...한편 박수혁의 등장으로 완전히 화제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채태현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젠장, 이번 기회에 화제성 좀 끌어보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하지만 아침드라마 뺨치는 막장 스토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저 멀리서 경호원들이 사람들 사이를 뚫기 시작했고 홍해처럼 갈라진 길 사이로 전동하가 모습을 드러냈다.전 남편과 얼마 전 스캔들이 난 남자.두 남자가 서로 마주하자 지나가던 행인들은 물론이고 질문 세례를 던지려던 기자들까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숨죽여 이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전동하의 등장에 어딘가 그늘졌던 소은정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공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적에 잠긴 공간을 넘어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전동하의 모습은 마치 구세주와도 같았다.‘와줄 줄 알았어요, 동하 씨.’소은정의 앞에 선 전동하가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에 한번, 그런 스킨십에 전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소은정의 모습에 두번, 구경꾼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뭐야? 박수혁 대표랑은 정말 끝난 걸까?’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팝콘각을 세우고 있을 때 전동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왜 여기 나와있어요.”봄바람처럼 살랑이는 전동하의 목소리와 달리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박수혁은 어둠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이대로 밀리면 안 돼...’주먹을 꽉 쥔 채 다가간 박수혁이 물었다.“나 마중 나온 거 아니었어?”‘오늘은 나랑만 있어주기로 했잖아...’소은정의 눈을 빤히
협박과 명령을 가장한 박수혁의 부탁 덕분에 박상훈은 마지 못해 이번 수술 주치의를 맡기로 동의한 상태였기에 박수혁은 확신에 잠긴 표정이었다.‘적어도 오늘만큼은 은정이는 내 거야. 그러니까 눈치껏 빠져...’역시나 그의 말에 소은정의 얼굴에 난처함이 실렸다.지금 당장 전동하의 손을 잡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소찬식의 핼쓱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고민으로 살짝 떨리는 소은정의 손을 더 꼭 잡은 전동하가 물었다.“위기에 빠진 사람 협박하는 거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묘한 긴장감에 사람들은 다시 숨을 죽였다.전동하의 말에 박수혁이 코웃음을 쳤다.“협박? 협박도 가진 카드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 그 감정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자인 거 알죠?”거의 체념한 상태에서 주어진 마지막 기회, 있는 힘을 다해 잡아야 했다.‘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아. 날 더 경멸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냥... 내 곁에만 있어줘.’하지만 전동하도 밀리지 않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소은정의 손을 잡은 채 전동하가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그럼 두고 보시죠. 누가 끝까지 웃을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하니까요.”한편, 두 사람의 기싸움을 지켜보는 소은정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지금 이 자리에서 박수혁의 손을 뿌리치면 소찬식의 목숨이 위험해지겠지만 그렇다고 매정하게 전동하를 버릴 수도 없었다. 상처받은 그녀의 영혼을 아무런 대가없이 품었던 사람이 바로 전동하, 최소한 인간으로서 이런 배신감을 안겨줄 순 없었다.그리고 꼭 잡은 전동하의 손을 통해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졌다.‘설마...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막연한 기대감을 안은 채 소은정은 결국 전동하와 함께 공항을 떴다.정처없이 주차장으로 향하는 소은정의 머릿속에 수많은 광경이 펼쳐졌다.손만 뻗으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잡힐 것만 같은데 뒤편에서 웅크리고 있는 심연이 자꾸만 그녀의
차 앞을 막은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박수혁이었다.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루만 함께하길 원했었는데.이게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는데.전동하는 또다시 중간에 끼어들어 그의 소은정을 빼앗아가버렸다.그런 박수혁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전동하가 창문을 살짝 내렸다.짙게 된 선팅, 하지만 뒷좌석을 들여다 보기엔 너무나 작은 틈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박 대표님. 더 이상 비겁하게 굴지 마세요. 제 여자한테 찝적대지 마시라고요.”경멸로 가득찬 전동하의 표정보다 박수혁을 더 거슬리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뭐? 네 여자? 누구 마음대로.”‘누구 마음대로 은정이가 네 여자야. 내 거였어. 내 여자였다고.’“박수혁 씨,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지금의 은정 씨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네, 맞아요. 한때는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었죠. 그런 은정 씨의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한없이 밀어내기만 한 것도 당신이었어요. 은정 씨는 당신한테 잘못한 게 없어요. 은정 씨가 평생 그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나요? 무슨 자신감이죠?”전동하의 말을 듣고 있던 박수혁이 이를 악물었다.‘뭐야. 그 표정... 네까짓 게 뭔데 날 그딴 눈으로 바라봐. 네가 뭔데 날 동정하냐고!’“너 때문이잖아. 네가 끼어들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박수혁이 울부짖었다.이마를 뚫고나올 듯한 핏줄이 그의 분노를, 질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평생 이기기만 했던 박수혁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굴러온 돌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도,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치던 소은정이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도...박수혁에게는 생경한 좌절감으로 다가왔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를 더 미치게 만드는 건, 분명 뒷좌석에서 모든 걸 듣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소은정이었다.“네, 맞습니다. 제가 끼어들었고 제가 빼앗았죠. 박수혁 당신한테 조금의 염치라는 게 남아있다면 다신... 은정 씨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이
공항 사건이 벌어진 뒤.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SNS는 다음과 같은 태그로 도배되었다.#소은정 박수혁 재결합#소은정 박수혁 재결합 무산#새 남친 전동하#비련의 남주인공 박수혁현실판 막장드라마에 사람들은 열광했다.“은정 언니, 전 남편이랑은 다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예쁜 사랑하세요!”“와, 저렇게까지 매달리는데 안 받아주냐?”“뭐야. 꼭 드라마 같아. 은정 언니 앞으로 꽃길만 걸으세요!”“전동하라는 사람, 인상만 봐도 좋은 사람 같아.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려요!”“우리 은정 언니한테 잘해 주세요!”“은정 누나 괴롭히면 죽는다!”한편, 세 사람의 스토리에 묻힌 채태현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채태현... 알바까지 풀면서 생쇼를 하더니 묻혀버렸죠?”“연예인 화제성이 이렇게 밀릴 수가 있나?”한편, 구경꾼들에게 밀려 진작 저 뒤편으로 나떨어진 채태현은 몰래 택시를 잡아 공항을 떴다.선글라스와 마스크 뒤에 숨은 그의 얼굴은 불안함으로 가득했다.나름 거금을 들여 알바들까지 푼 건데 화제성 몰이는 이미 물 건너 간데다 괜히 소은정까지 끌어들여 또 미운 털이 박히게 되었다.‘이번에도 잘못되면 난 정말 연예계 퇴출이야... 제발... 제발 오늘 일은 잊어주세요, 은정님.’이렇게 애원하며 휴대폰을 확인한 채태현은 다시 절망감에 잠겼다.역시나, 그의 이름은 세 사람의 러브스토리에 저 멀리 밀려난 상태.게다가 팬 알바로 고용되었다는 네티즌의 자백글까지 올라오면서 자작극을 벌였다는 사실까지 전부 까밝혀지고 말았다.‘으악,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한편, 전동하의 차 안.공항과 멀어지자 무거운 추라도 달아놓은 듯하던 소은정의 마음은 점점 더 홀가분해졌다.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를 푼 건 역시나 전동하였다.“이 교수님은 15년 전, 25살에 레지던트로 수술실에 함께 들어갔을 정도로 천재 의사셨어요. 은정 씨는 기억 못 하려나?”하지만 지금 소은정의 귀에는 전동하의 설명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솔... 솔직히 너무 오래전 일인
별거 아니라는 듯한 이석구의 말투에 소은정은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리고 이석구의 자신감은 실질적인 실력에서 오는 것이었다.심장질환 최고 전문가인 기 교수의 직속 제자로서 이석구는 오랫 동안 함께 연구를 이어왔었고 15년 전, 소찬식의 수술에도 레지던트로서 참여했었기에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도 세상을 뜬 기 교수 다음으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소은정은 이석구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길가에서 봤다면 그저 그런 행인 1로 지나쳤을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를 구해 줄 은인이라니.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병원에 도착한 이석구는 바로 소찬식의 차트부터 확인했다.한편, 의아한 표정을 짓는 한 원장을 발견한 전동하가 이석구를 소개했다.“아, 이 분은 기 교수님 직속 후배, 이석구 교수님이십니다.”전동하의 말에 한 원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석구 교수님?”큰 충격을 먹은 한 원장과 달리 이석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차트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하지만 한 원장은 다시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정... 정말 이석구 교수님이십니까?”나름 의학계에선 실력자라고 불리는 한 원장이 이토록 조심스럽게 말을 걸 정도라니.“네. 선배님이신데 말 편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일단 환자 상태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요. 대화는 잠시 뒤에 나누시죠.”이석구의 말에 여전히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한 원장이 조심스레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바로 소은정을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은정아, 어떻게 이 교수님을 모셔왔어. 대단하네...”한 원장의 반응에 소은정이 오히려 당황하기 시작했다.“저 분이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에요?”“그걸 말이라고? 서울 의대 최연소 수석 입학, 수석 졸업, 대한민국 최연소 교수까지 단 분이셔.”단순히 기 교수의 후배라는 말에 놀랐었던 소은정의 눈이 동그래지고 한 원장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특히 심장외과에선 이 교수를 따라올 사람이 없어. 세계적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한 원장은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어쨌든 은정아.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 소 회장... 운 하나는 참 좋은 사람이라니까. 자식 복에 이어서 사위 복까지...”한 원장의 말에 소은정도, 전동하도 쑥스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난 이 교수님이랑 대화 좀 나눠야겠다. 은정아, 어쨌든 이제 안심하고 일단 집에 가서 한숨 푹 자고 와. 알겠지?”말을 마친 한 원장이 후다닥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이 교수님한텐... 언제 연락한 거예요?”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물었다.“미안,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속인 꼴이 됐네요. 솔직히 그날 한 원장님이 박상훈 교수를 언급할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요.”“뭐가요?”“그게... 몇 년 전에 기 교수님이 이끄는 의로팀에 투자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이석구, 박상훈 교수 모두 의료팀 멤버였죠. 그런데... 기 교수님이 세상을 뜨시고 연구팀 팀장 자리를 두고 묘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는 걸 들은 생각이 나서 알아봤더니... 역시나. 박상훈 그 사람, 태한그룹 일가 친척이라는 백을 이용해 이석구 교수님을 밀어내고 팀장 자리를 차지한 거였어요.”전동하의 설명을 듣던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세상에... 그런 다툼은 그룹 내부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더니... 학술계도 별 다르지 않구만.’“그럼 이 교수님은...”“이석구 교수는 그 뒤로 따로 연구팀을 구성했고 그쪽에도 제가 직접 투자를 했었어요. 솔직히 기 교수님도 대단하지만 이석구 교수는 천재들만 모인다는 의대에서도 화타의 환생이라 불릴 정도로 실력자였어요. 그 분의 실력을 믿으니까 언젠가 성과를 이뤄낼 거라 믿고 투자를 한 거기도 하고요.”“좀 더 일찍 말해 주지. 그럼 박수혁한테 부탁할 필요도 없었잖아요...”소은정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묻어났다.“미안해요. 솔직히... 잊고 있던 프로젝트였어요. 의료 분야는 워낙 수익이 잘 안 나는 쪽이라... 윤 비서님이 확실한 정보를 주기 전엔 은정 씨한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