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니라는 듯한 이석구의 말투에 소은정은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리고 이석구의 자신감은 실질적인 실력에서 오는 것이었다.심장질환 최고 전문가인 기 교수의 직속 제자로서 이석구는 오랫 동안 함께 연구를 이어왔었고 15년 전, 소찬식의 수술에도 레지던트로서 참여했었기에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도 세상을 뜬 기 교수 다음으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소은정은 이석구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길가에서 봤다면 그저 그런 행인 1로 지나쳤을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를 구해 줄 은인이라니.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병원에 도착한 이석구는 바로 소찬식의 차트부터 확인했다.한편, 의아한 표정을 짓는 한 원장을 발견한 전동하가 이석구를 소개했다.“아, 이 분은 기 교수님 직속 후배, 이석구 교수님이십니다.”전동하의 말에 한 원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석구 교수님?”큰 충격을 먹은 한 원장과 달리 이석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차트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하지만 한 원장은 다시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정... 정말 이석구 교수님이십니까?”나름 의학계에선 실력자라고 불리는 한 원장이 이토록 조심스럽게 말을 걸 정도라니.“네. 선배님이신데 말 편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일단 환자 상태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요. 대화는 잠시 뒤에 나누시죠.”이석구의 말에 여전히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한 원장이 조심스레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바로 소은정을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은정아, 어떻게 이 교수님을 모셔왔어. 대단하네...”한 원장의 반응에 소은정이 오히려 당황하기 시작했다.“저 분이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에요?”“그걸 말이라고? 서울 의대 최연소 수석 입학, 수석 졸업, 대한민국 최연소 교수까지 단 분이셔.”단순히 기 교수의 후배라는 말에 놀랐었던 소은정의 눈이 동그래지고 한 원장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특히 심장외과에선 이 교수를 따라올 사람이 없어. 세계적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한 원장은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어쨌든 은정아.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 소 회장... 운 하나는 참 좋은 사람이라니까. 자식 복에 이어서 사위 복까지...”한 원장의 말에 소은정도, 전동하도 쑥스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난 이 교수님이랑 대화 좀 나눠야겠다. 은정아, 어쨌든 이제 안심하고 일단 집에 가서 한숨 푹 자고 와. 알겠지?”말을 마친 한 원장이 후다닥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이 교수님한텐... 언제 연락한 거예요?”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물었다.“미안,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속인 꼴이 됐네요. 솔직히 그날 한 원장님이 박상훈 교수를 언급할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요.”“뭐가요?”“그게... 몇 년 전에 기 교수님이 이끄는 의로팀에 투자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이석구, 박상훈 교수 모두 의료팀 멤버였죠. 그런데... 기 교수님이 세상을 뜨시고 연구팀 팀장 자리를 두고 묘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는 걸 들은 생각이 나서 알아봤더니... 역시나. 박상훈 그 사람, 태한그룹 일가 친척이라는 백을 이용해 이석구 교수님을 밀어내고 팀장 자리를 차지한 거였어요.”전동하의 설명을 듣던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세상에... 그런 다툼은 그룹 내부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더니... 학술계도 별 다르지 않구만.’“그럼 이 교수님은...”“이석구 교수는 그 뒤로 따로 연구팀을 구성했고 그쪽에도 제가 직접 투자를 했었어요. 솔직히 기 교수님도 대단하지만 이석구 교수는 천재들만 모인다는 의대에서도 화타의 환생이라 불릴 정도로 실력자였어요. 그 분의 실력을 믿으니까 언젠가 성과를 이뤄낼 거라 믿고 투자를 한 거기도 하고요.”“좀 더 일찍 말해 주지. 그럼 박수혁한테 부탁할 필요도 없었잖아요...”소은정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묻어났다.“미안해요. 솔직히... 잊고 있던 프로젝트였어요. 의료 분야는 워낙 수익이 잘 안 나는 쪽이라... 윤 비서님이 확실한 정보를 주기 전엔 은정 씨한테
‘이렇게... 이렇게 은정이를 놓아줄 수밖에 없는 걸까?’박수혁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왜? 왜 잠깐의 희망만 주고 이렇게 다시 잔인하게 그 기회를 앗아가 버리는 걸까?운명의 장난질 같은 이 상황에 박수혁은 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약 8시간 뒤.굳게 닫혀있던 수술실이 드디어 열리고 이석구 교수가 가족들 앞에 섰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이제 예후만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그의 말에 소은정 일행은 물론이고 박수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 빠진 풍선인형처럼 스르륵 벽을 따라 주저앉은 박수혁은 소은정과 가족들이 나누는 기쁨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냈다.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박수혁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없이 자리를 떴다.‘내가...무슨 자격으로 다시 은정이를 마주하겠어. 전동하 그 자식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병원을 나서니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에 걸린 달이 그를 맞이했다.유난히 밝은 달빛이 그의 비겁하고 옹졸한 마음을 비추는 듯해 박수혁은 비틀거렸다.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한석이 부랴부랴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역시 여덟시간 동안 차에서 박수혁을 기다리던 이한석은 박수혁이 안쓰러우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렇게까지 못 잊으실 거면 애초에 좀 잘해 주시지...’한편, 이한석의 부축을 받은 박수혁은 괜찮다는 말 한 마디 할 기운 조차 없는 듯 고개만 젓고는 차에 몸을 실었다.눈을 질끈 감은 박수혁의 눈치를 살피던 이한석이 물었다.“회사로 들어가시겠습니까?”“거기로 가.”“거기”그 어떠한 곳도 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단어였지만 이한석은 바로 그곳이 어딘지 알아챌 수 있었다.박수혁과 소은정의 신혼집. 그곳으로 가고 싶으신 거겠지...동남아에서 돌아오고 소은정이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며칠 동안에도 박수혁은 그곳에서 눈을 뜨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잠드는 폐인의 삶을 이어갔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며칠 뒤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박수혁을 보며
“대표님의 선택은 항상 이성적이고 정확했습니다. 하지만... 소은정 대표님이 원하는 건... 이성이 아니었을 겁니다.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 앞뒤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런 사랑 아닐까요?”이한석의 말이 가시처럼 목구멍에 박혀 박수혁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대표님, 다른 사람들은 대표님더러 냉정하다 감정이 없다고 말하지만 전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은 사랑하시는 게 너무 많아요. 대표님이 일군 이 회사, 대표님의 명예, 대표님 본인에 대한 모든 걸 아끼고 사랑하시죠. 대표님 인생에서 본인이 1순위가 아니었던 적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나요? 솔직히 전... 대표님이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한번 물꼬를 트니 그 동안 참았던 말이 분수처럼 터져나왔다.‘이러다 잘리는 거 아니야?’이한석이 이를 악물었다.솔직히 이한석은 이번 기회에 소은정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박수혁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내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차라리 무조건적으로 박 교수를 설득했다면 소은정 인격에 인간적으로라도 박수혁에게 고마움을 느꼈을지 모른다.그렇게... 박수혁은 또다시 눈앞까지 다가온 기회를 저버린 것이었다.울음이 터져나오지 않도록 참는 건지 박수혁의 목 근육에 핏줄이 불끈거렸다.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울지 않는 사람이었는데.이렇게까지 무너지는 건 처음 봐서인지 이한석도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그냥... 억울해. 서진인... 그래, 서진이는 다시 재결합했잖아. 왜 난... 왜 난 안 되는 건데?”“추하나 씨는 선택지가 단 한 곳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소은정 대표님은 다릅니다. 이미 가진 게 너무 많아 남자에게 목을 맬 필요가 없어요. 설령 같은 일이 소은정 대표님께 일어난다 해도...”이한석이 말끝을 흐렸지만 그럴 가능성은 0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그날 이후로
다음 날, 간단하게 인수인계를 마친 박수혁이 사무실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솔직히 이한석보다 뛰어난 인재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본사를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직원은 이한석이 유일했다.그리고... 이한석이라면 SC그룹과의 관계도 잘 운영해 나갈 거라고 믿었고 이한석이 한국에 남아있는다면 가끔씩 지나가는 말로나마 소은정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결정을 내리는 데 한몫 했다.‘그러고 보면 은정이는 나보다 이 비서한테 훨씬 더 친절했었지... 질투나네.’이제 하다하다 비서한테까지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해 박수혁은 실소를 내뱉었다.잠시 후, 공항.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낸 박수혁은 바로 휴대폰을 꺼버렸다.한편, 병원.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소찬식은 회복실로 옮겨졌다.임산부인 한시연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가족들은 아직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병원 근처 식당.전동하가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소은정을 바라보고 있다.소찬식이 쓰러지고 나서 잠 한 숨, 밥 한 톨 삼키지 못한 소은정은 수술이 잘 끝났다는 이 교수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미칠 듯한 배고픔에 휩싸였고 바로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미친 듯이 음식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평소 항상 우아한 식사 예절을 고수하던 소은정이 이렇게 허겁지겁 먹는 건 처음 보는 전동하는 놀라우면서도 안쓰러움이 밀려왔다.“천천히 좀 먹어요. 누가 안 뺏으니까.”거의 그릇에 고개를 파묻었던 소은정이 머쓱하게 웃었다.“이상하게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네요. 나 물 한 잔만 줄래요.”전동하가 컵에 물을 따르던 그때, 소은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이제 그만 놓아줄게. 앞으로 무조건적인 사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 진심으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였지만 누가 보낸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에 왠지 눈물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소은정은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자를 삭제했다.이때
하지만 소은정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빠가 눈 뜬 순간 내가 곁에 있어야 해요. 소은해 그 인간한테 밀릴 순 없죠.”잠을 깨려는 듯 손바닥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는 소은정의 모습에 전동하가 웃음을 터트렸다.다 큰 어른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유치한 짓도 서슴치 않는 모습이 웃겨서였다.소찬식이 의식을 회복하고 이석구는 향후 치료 솔루션을 내린 뒤 소리 소문없이 출국했다.이미 비행기에 탑승한 뒤에야 소식을 접한 소은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는데... 식사 대접이라도 해야 하는 게 도리인데...”“걱정하지 말아요. 감사 인사는 투자금으로 대신했고... 이 교수님은 워낙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떠나는 홍길동 같은 분이시라...”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긴 잠 끝에 눈을 뜬 소찬식은 살았다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옆에서 난리법석을 떨어대는 소은해 때문에 다시 정신을 잃고 싶은 마음이었다.“이놈의 자식! 너 정말 네 아버지 제 명에 못 살고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제발 좀 앉아. 정신 사나우니까!”그제야 조용히 의자에 앉은 소은해가 가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아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옆에서 지켜보던 소은정은 오빠를 향해 눈을 흘겨준 뒤 소찬식의 손을 꼭 잡았다.“아빠,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한 원장님 모셔올까요?”빨갛게 부은 소은정의 눈을 바라보던 소찬식이 감탄했다.“역시 우리 딸이 최고라니까.”“당연한 말씀을 하세요.”이에 억지로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소은해가 손가락으로 역시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켰다.“아빠, 저도 울었어요. 아빠가 의식 회복하시는 동안 제가 병수발까지 다 들었다고요!”하지만 소찬식은 괜히 코웃음을 쳤다.“너 배우잖아. 진짜로 운 건지 가짜로 운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차가운 아버지의 말에 소은해가 오버스럽게 입을 틀어막았다.“아빠 미워요!”이때 한 원장과 얘기를 마치고 들어온 소은호가 짜증스레 소은
잠시 후, 회진을 온 한 원장이 환자 좀 쉬게 내버려두라고 모두를 병실에서 쫓아내기 전까지 가족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기본적인 상황을 확인하던 한 원장이 감탄했다.“이럴 때 보면 자네가 참 부러워. 우리 나이에 가장 자랑스러운 게 자식 농사 잘 지은 거잖아. 네 남매 다 잘 컸지. 며느리도 예쁘고 참한데다 예비 사위까지 어쩜 그렇게 완벽한지. 자네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가?”한 원장의 농담에 소찬식이 피식 웃었다.“내가 복이 많아서 그래. 자네는 이번 생엔 틀렸으니 다음 생을 노려. 나처럼 살려면 아픈 환자들 더 많이 살리고.”“하하, 자네 이번에 예비 사위 덕분에 산 건 알아?”“그게 무슨 소리야?”소찬식이 흠칫하자 한 원장이 이석구 교수에 관한 일을 전부 얘기해 주었다.물론 이번 사건과 상관없는 이석구 교수의 휘황찬란한 이력에 대해 홍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그 얘기들은 더 이상 소찬식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나름 생명의 은인이니 자랑할만도 한데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중하게 구는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소찬식은 남자 함부로 믿지 말라고 당부하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다른 재벌가와 달리 정략결혼으로 그룹 세력을 키울 생각도 없었고 할 수만 있다면 귀한 딸 평생 옆에 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자니 언젠가 그가 먼저 세상을 뜰 테고 오빠들도 다 자기 짝 만나 살아갈 텐데 그때 가서 옆에 배우자 한 명, 자식 하나 없이 쓸쓸하게 늙어갈 소은정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그래서 누구보다 소은정이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었다.게다가 소은정은 한번의 아픔을 겪은 상황이라 전동하에게 유난히 더 엄격하게 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조금이라도 나쁜 모습이 보이면 소찬식이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놓을 생각도 해봤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진국인 전동하는 어느새 소찬식의 마음속에 예비 사위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소 회장, 행복한 이번 생, 누릴 거 다 누리고 살아. 저렇게 훌륭한 아들, 딸들 두고 어떻게 눈
전동하가 요새 부쩍 핼쓱해진 소은정의 볼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레 말했다.“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요.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은정 씨 예쁜 얼굴 다 상하겠다. 다 놀면 전화해요.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네.”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전동하를 꼭 안아준 뒤 돌아섰다.오랜만에 만난 한유라는 얼굴에 나 새댁이요라고 적어놓은 듯 행복함이 듬뿍 담긴 모습이었다.며칠 사이에 살이 오른 건지 더 글래머러스하게 변한 그녀를 바라보던 소은정, 김하늘이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재벌집 사모님 되더니 좋아 보인다? 아주 얼굴에 빛이 나는데?”“그러니까. 너 요즘 진짜 행복하긴 한가 보다. 행복하면 살 찐다잖아.”김하늘의 팩폭에 얼굴과 몸 구석구석을 다급하게 만지던 한유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나 살찐 거 맞지? 글쎄 깡은 죽어도 안 쪘다잖아. 하여간... 남자들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니까.”“또 괜히 저런다. 야, 그런데 부케 말이야. 살면서 친구 손에 부케 쑤셔넣는 신부는 처음 본다. 어쩜 넌 결혼식 날에도 그렇게 막무가내니?”피식 웃던 김하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너 시집 못 갈까 봐 내가 특별히 배려한 거잖아.”“큭큭, 은해 오빠한테 던져주지 그랬어. 되게 좋아했을 것 같은데.”이에 김하늘이 소은정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하이고, 결혼식에 참석도 안 하신 분들은 입 다무시죠?”여고생처럼 꺄르륵 대며 세 사람은 대학가 근처 분식집에 도착했다.평소에 가던 미슐랭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그녀들의 학창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의미있는 곳이었다.떡볶이며 쫄면이며 먹을 걸 잔뜩 주문한 한유라가 자신의 신혼 생활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결혼식 하니까 직원들 태도가 아주 싹 바뀐 거 있지? 대놓고 나 왕따시키던 사람들이 커피를 타주질 않나. 디저트를 사주질 않나. 사람이 너무 확 바뀌니까 좀... 소름 돋더라.”“회사 사모님이 비서로 있는 것도 갑질인 거 알지? 차라리 다른 직책으로 옮기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