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니라는 듯한 이석구의 말투에 소은정은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리고 이석구의 자신감은 실질적인 실력에서 오는 것이었다.심장질환 최고 전문가인 기 교수의 직속 제자로서 이석구는 오랫 동안 함께 연구를 이어왔었고 15년 전, 소찬식의 수술에도 레지던트로서 참여했었기에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도 세상을 뜬 기 교수 다음으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소은정은 이석구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길가에서 봤다면 그저 그런 행인 1로 지나쳤을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를 구해 줄 은인이라니.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병원에 도착한 이석구는 바로 소찬식의 차트부터 확인했다.한편, 의아한 표정을 짓는 한 원장을 발견한 전동하가 이석구를 소개했다.“아, 이 분은 기 교수님 직속 후배, 이석구 교수님이십니다.”전동하의 말에 한 원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석구 교수님?”큰 충격을 먹은 한 원장과 달리 이석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차트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하지만 한 원장은 다시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정... 정말 이석구 교수님이십니까?”나름 의학계에선 실력자라고 불리는 한 원장이 이토록 조심스럽게 말을 걸 정도라니.“네. 선배님이신데 말 편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일단 환자 상태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요. 대화는 잠시 뒤에 나누시죠.”이석구의 말에 여전히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한 원장이 조심스레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바로 소은정을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은정아, 어떻게 이 교수님을 모셔왔어. 대단하네...”한 원장의 반응에 소은정이 오히려 당황하기 시작했다.“저 분이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에요?”“그걸 말이라고? 서울 의대 최연소 수석 입학, 수석 졸업, 대한민국 최연소 교수까지 단 분이셔.”단순히 기 교수의 후배라는 말에 놀랐었던 소은정의 눈이 동그래지고 한 원장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특히 심장외과에선 이 교수를 따라올 사람이 없어. 세계적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한 원장은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어쨌든 은정아.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 소 회장... 운 하나는 참 좋은 사람이라니까. 자식 복에 이어서 사위 복까지...”한 원장의 말에 소은정도, 전동하도 쑥스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난 이 교수님이랑 대화 좀 나눠야겠다. 은정아, 어쨌든 이제 안심하고 일단 집에 가서 한숨 푹 자고 와. 알겠지?”말을 마친 한 원장이 후다닥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이 교수님한텐... 언제 연락한 거예요?”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물었다.“미안,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속인 꼴이 됐네요. 솔직히 그날 한 원장님이 박상훈 교수를 언급할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요.”“뭐가요?”“그게... 몇 년 전에 기 교수님이 이끄는 의로팀에 투자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이석구, 박상훈 교수 모두 의료팀 멤버였죠. 그런데... 기 교수님이 세상을 뜨시고 연구팀 팀장 자리를 두고 묘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는 걸 들은 생각이 나서 알아봤더니... 역시나. 박상훈 그 사람, 태한그룹 일가 친척이라는 백을 이용해 이석구 교수님을 밀어내고 팀장 자리를 차지한 거였어요.”전동하의 설명을 듣던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세상에... 그런 다툼은 그룹 내부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더니... 학술계도 별 다르지 않구만.’“그럼 이 교수님은...”“이석구 교수는 그 뒤로 따로 연구팀을 구성했고 그쪽에도 제가 직접 투자를 했었어요. 솔직히 기 교수님도 대단하지만 이석구 교수는 천재들만 모인다는 의대에서도 화타의 환생이라 불릴 정도로 실력자였어요. 그 분의 실력을 믿으니까 언젠가 성과를 이뤄낼 거라 믿고 투자를 한 거기도 하고요.”“좀 더 일찍 말해 주지. 그럼 박수혁한테 부탁할 필요도 없었잖아요...”소은정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묻어났다.“미안해요. 솔직히... 잊고 있던 프로젝트였어요. 의료 분야는 워낙 수익이 잘 안 나는 쪽이라... 윤 비서님이 확실한 정보를 주기 전엔 은정 씨한테
‘이렇게... 이렇게 은정이를 놓아줄 수밖에 없는 걸까?’박수혁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왜? 왜 잠깐의 희망만 주고 이렇게 다시 잔인하게 그 기회를 앗아가 버리는 걸까?운명의 장난질 같은 이 상황에 박수혁은 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약 8시간 뒤.굳게 닫혀있던 수술실이 드디어 열리고 이석구 교수가 가족들 앞에 섰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이제 예후만 지켜보면 될 것 같아요.”그의 말에 소은정 일행은 물론이고 박수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 빠진 풍선인형처럼 스르륵 벽을 따라 주저앉은 박수혁은 소은정과 가족들이 나누는 기쁨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냈다.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박수혁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없이 자리를 떴다.‘내가...무슨 자격으로 다시 은정이를 마주하겠어. 전동하 그 자식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병원을 나서니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에 걸린 달이 그를 맞이했다.유난히 밝은 달빛이 그의 비겁하고 옹졸한 마음을 비추는 듯해 박수혁은 비틀거렸다.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한석이 부랴부랴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역시 여덟시간 동안 차에서 박수혁을 기다리던 이한석은 박수혁이 안쓰러우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렇게까지 못 잊으실 거면 애초에 좀 잘해 주시지...’한편, 이한석의 부축을 받은 박수혁은 괜찮다는 말 한 마디 할 기운 조차 없는 듯 고개만 젓고는 차에 몸을 실었다.눈을 질끈 감은 박수혁의 눈치를 살피던 이한석이 물었다.“회사로 들어가시겠습니까?”“거기로 가.”“거기”그 어떠한 곳도 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단어였지만 이한석은 바로 그곳이 어딘지 알아챌 수 있었다.박수혁과 소은정의 신혼집. 그곳으로 가고 싶으신 거겠지...동남아에서 돌아오고 소은정이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며칠 동안에도 박수혁은 그곳에서 눈을 뜨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잠드는 폐인의 삶을 이어갔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며칠 뒤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박수혁을 보며
“대표님의 선택은 항상 이성적이고 정확했습니다. 하지만... 소은정 대표님이 원하는 건... 이성이 아니었을 겁니다.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 앞뒤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런 사랑 아닐까요?”이한석의 말이 가시처럼 목구멍에 박혀 박수혁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대표님, 다른 사람들은 대표님더러 냉정하다 감정이 없다고 말하지만 전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은 사랑하시는 게 너무 많아요. 대표님이 일군 이 회사, 대표님의 명예, 대표님 본인에 대한 모든 걸 아끼고 사랑하시죠. 대표님 인생에서 본인이 1순위가 아니었던 적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나요? 솔직히 전... 대표님이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한번 물꼬를 트니 그 동안 참았던 말이 분수처럼 터져나왔다.‘이러다 잘리는 거 아니야?’이한석이 이를 악물었다.솔직히 이한석은 이번 기회에 소은정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박수혁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내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차라리 무조건적으로 박 교수를 설득했다면 소은정 인격에 인간적으로라도 박수혁에게 고마움을 느꼈을지 모른다.그렇게... 박수혁은 또다시 눈앞까지 다가온 기회를 저버린 것이었다.울음이 터져나오지 않도록 참는 건지 박수혁의 목 근육에 핏줄이 불끈거렸다.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울지 않는 사람이었는데.이렇게까지 무너지는 건 처음 봐서인지 이한석도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그냥... 억울해. 서진인... 그래, 서진이는 다시 재결합했잖아. 왜 난... 왜 난 안 되는 건데?”“추하나 씨는 선택지가 단 한 곳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소은정 대표님은 다릅니다. 이미 가진 게 너무 많아 남자에게 목을 맬 필요가 없어요. 설령 같은 일이 소은정 대표님께 일어난다 해도...”이한석이 말끝을 흐렸지만 그럴 가능성은 0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그날 이후로
다음 날, 간단하게 인수인계를 마친 박수혁이 사무실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솔직히 이한석보다 뛰어난 인재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본사를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직원은 이한석이 유일했다.그리고... 이한석이라면 SC그룹과의 관계도 잘 운영해 나갈 거라고 믿었고 이한석이 한국에 남아있는다면 가끔씩 지나가는 말로나마 소은정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결정을 내리는 데 한몫 했다.‘그러고 보면 은정이는 나보다 이 비서한테 훨씬 더 친절했었지... 질투나네.’이제 하다하다 비서한테까지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해 박수혁은 실소를 내뱉었다.잠시 후, 공항.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낸 박수혁은 바로 휴대폰을 꺼버렸다.한편, 병원.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소찬식은 회복실로 옮겨졌다.임산부인 한시연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가족들은 아직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병원 근처 식당.전동하가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소은정을 바라보고 있다.소찬식이 쓰러지고 나서 잠 한 숨, 밥 한 톨 삼키지 못한 소은정은 수술이 잘 끝났다는 이 교수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미칠 듯한 배고픔에 휩싸였고 바로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미친 듯이 음식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평소 항상 우아한 식사 예절을 고수하던 소은정이 이렇게 허겁지겁 먹는 건 처음 보는 전동하는 놀라우면서도 안쓰러움이 밀려왔다.“천천히 좀 먹어요. 누가 안 뺏으니까.”거의 그릇에 고개를 파묻었던 소은정이 머쓱하게 웃었다.“이상하게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네요. 나 물 한 잔만 줄래요.”전동하가 컵에 물을 따르던 그때, 소은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이제 그만 놓아줄게. 앞으로 무조건적인 사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 진심으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였지만 누가 보낸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에 왠지 눈물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소은정은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자를 삭제했다.이때
하지만 소은정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빠가 눈 뜬 순간 내가 곁에 있어야 해요. 소은해 그 인간한테 밀릴 순 없죠.”잠을 깨려는 듯 손바닥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는 소은정의 모습에 전동하가 웃음을 터트렸다.다 큰 어른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유치한 짓도 서슴치 않는 모습이 웃겨서였다.소찬식이 의식을 회복하고 이석구는 향후 치료 솔루션을 내린 뒤 소리 소문없이 출국했다.이미 비행기에 탑승한 뒤에야 소식을 접한 소은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는데... 식사 대접이라도 해야 하는 게 도리인데...”“걱정하지 말아요. 감사 인사는 투자금으로 대신했고... 이 교수님은 워낙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떠나는 홍길동 같은 분이시라...”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긴 잠 끝에 눈을 뜬 소찬식은 살았다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옆에서 난리법석을 떨어대는 소은해 때문에 다시 정신을 잃고 싶은 마음이었다.“이놈의 자식! 너 정말 네 아버지 제 명에 못 살고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제발 좀 앉아. 정신 사나우니까!”그제야 조용히 의자에 앉은 소은해가 가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아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옆에서 지켜보던 소은정은 오빠를 향해 눈을 흘겨준 뒤 소찬식의 손을 꼭 잡았다.“아빠,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한 원장님 모셔올까요?”빨갛게 부은 소은정의 눈을 바라보던 소찬식이 감탄했다.“역시 우리 딸이 최고라니까.”“당연한 말씀을 하세요.”이에 억지로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소은해가 손가락으로 역시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켰다.“아빠, 저도 울었어요. 아빠가 의식 회복하시는 동안 제가 병수발까지 다 들었다고요!”하지만 소찬식은 괜히 코웃음을 쳤다.“너 배우잖아. 진짜로 운 건지 가짜로 운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차가운 아버지의 말에 소은해가 오버스럽게 입을 틀어막았다.“아빠 미워요!”이때 한 원장과 얘기를 마치고 들어온 소은호가 짜증스레 소은
잠시 후, 회진을 온 한 원장이 환자 좀 쉬게 내버려두라고 모두를 병실에서 쫓아내기 전까지 가족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기본적인 상황을 확인하던 한 원장이 감탄했다.“이럴 때 보면 자네가 참 부러워. 우리 나이에 가장 자랑스러운 게 자식 농사 잘 지은 거잖아. 네 남매 다 잘 컸지. 며느리도 예쁘고 참한데다 예비 사위까지 어쩜 그렇게 완벽한지. 자네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가?”한 원장의 농담에 소찬식이 피식 웃었다.“내가 복이 많아서 그래. 자네는 이번 생엔 틀렸으니 다음 생을 노려. 나처럼 살려면 아픈 환자들 더 많이 살리고.”“하하, 자네 이번에 예비 사위 덕분에 산 건 알아?”“그게 무슨 소리야?”소찬식이 흠칫하자 한 원장이 이석구 교수에 관한 일을 전부 얘기해 주었다.물론 이번 사건과 상관없는 이석구 교수의 휘황찬란한 이력에 대해 홍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그 얘기들은 더 이상 소찬식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나름 생명의 은인이니 자랑할만도 한데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중하게 구는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소찬식은 남자 함부로 믿지 말라고 당부하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다른 재벌가와 달리 정략결혼으로 그룹 세력을 키울 생각도 없었고 할 수만 있다면 귀한 딸 평생 옆에 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자니 언젠가 그가 먼저 세상을 뜰 테고 오빠들도 다 자기 짝 만나 살아갈 텐데 그때 가서 옆에 배우자 한 명, 자식 하나 없이 쓸쓸하게 늙어갈 소은정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그래서 누구보다 소은정이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었다.게다가 소은정은 한번의 아픔을 겪은 상황이라 전동하에게 유난히 더 엄격하게 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조금이라도 나쁜 모습이 보이면 소찬식이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놓을 생각도 해봤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진국인 전동하는 어느새 소찬식의 마음속에 예비 사위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소 회장, 행복한 이번 생, 누릴 거 다 누리고 살아. 저렇게 훌륭한 아들, 딸들 두고 어떻게 눈
전동하가 요새 부쩍 핼쓱해진 소은정의 볼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레 말했다.“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요.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은정 씨 예쁜 얼굴 다 상하겠다. 다 놀면 전화해요.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네.”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전동하를 꼭 안아준 뒤 돌아섰다.오랜만에 만난 한유라는 얼굴에 나 새댁이요라고 적어놓은 듯 행복함이 듬뿍 담긴 모습이었다.며칠 사이에 살이 오른 건지 더 글래머러스하게 변한 그녀를 바라보던 소은정, 김하늘이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재벌집 사모님 되더니 좋아 보인다? 아주 얼굴에 빛이 나는데?”“그러니까. 너 요즘 진짜 행복하긴 한가 보다. 행복하면 살 찐다잖아.”김하늘의 팩폭에 얼굴과 몸 구석구석을 다급하게 만지던 한유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나 살찐 거 맞지? 글쎄 깡은 죽어도 안 쪘다잖아. 하여간... 남자들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니까.”“또 괜히 저런다. 야, 그런데 부케 말이야. 살면서 친구 손에 부케 쑤셔넣는 신부는 처음 본다. 어쩜 넌 결혼식 날에도 그렇게 막무가내니?”피식 웃던 김하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너 시집 못 갈까 봐 내가 특별히 배려한 거잖아.”“큭큭, 은해 오빠한테 던져주지 그랬어. 되게 좋아했을 것 같은데.”이에 김하늘이 소은정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하이고, 결혼식에 참석도 안 하신 분들은 입 다무시죠?”여고생처럼 꺄르륵 대며 세 사람은 대학가 근처 분식집에 도착했다.평소에 가던 미슐랭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그녀들의 학창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의미있는 곳이었다.떡볶이며 쫄면이며 먹을 걸 잔뜩 주문한 한유라가 자신의 신혼 생활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결혼식 하니까 직원들 태도가 아주 싹 바뀐 거 있지? 대놓고 나 왕따시키던 사람들이 커피를 타주질 않나. 디저트를 사주질 않나. 사람이 너무 확 바뀌니까 좀... 소름 돋더라.”“회사 사모님이 비서로 있는 것도 갑질인 거 알지? 차라리 다른 직책으로 옮기는 게 어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