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앞에 서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던 소은정은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타협해야 해. 지금 내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소은정은 끝없이 되뇌었다.“박수혁, 당신 맞지? 사정은 은호 오빠한테서 대충 들었을 거라 생각해. 박 교수님한테 부탁 좀 해줘. 조건은 뭐든 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이 한마디 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든지...소은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바로 그때. 조심스레 그녀의 뒤로 다가온 전동하는 힘들어 보이는 소은정의 뒷모습에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정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찬식뿐, 전동하의 감정도, 그녀 스스로의 감정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수화기 저편, 멈칫하던 박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너랑 나 단 둘이서만, 딱 하루만... 만나줄 수 있을까?”소은정의 거절이 두려워 박수혁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내 조건은 이거 하나야. 이 부탁만 들어주면 삼촌 어떻게든 설득할게. 그래, 나 아직 너 포기 못했어. 비겁한 거 알지만 나한텐 이게 기회야. 그러니까... 하루만, 딱 하루만 나랑 같이 있어줘. 그리고 나서도 네가 날 떠나겠다면... 그땐, 그땐 네 선택 존중해 줄게.”“...”겨우 몇 초간의 정적에 박수혁의 가슴은 타들어갔다.‘제발... 제발 거절하지 말아라...’“은정아, 우리... 부부였잖아. 한번쯤은 기회 줄 수 있는 거잖아.”애원으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소은정의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소은정의 마음은 잠잠하기만 했다.저 남자의 감정에 공감을 해주는 것 자체가 귀찮았고 허무하게 느껴졌다.한참이 지나고, 소은정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일 봐.”이 말을 마지막으로 소은정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먼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진정, 진정하자...’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돌아선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언제부터 뒤에 서있었던 걸까?전동하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어딘가 슬퍼보이는 그의 눈빛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전동하라는 걸 알 수 있었으므로 소은정의 눈시울이 빨갛게 물들었다.턱을 머리에 기댄 채 소은정의 머리를 쓰다듬던 전동하가 속삭였다.“이런 상황에서도 은정 씨가 너무 좋아요. 나... 어떡하면 좋죠?”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전동하를 꼭 끌어안았다.소리없는 울먹임이 한참동안 이어지고...먼저 감정을 추스른 전동하가 다시 물었다.“정말 가야 해요?”백번을 물어도 소은정의 답은 하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같이 가요. 박수혁 대표 지금 미국에 있죠? 내일 항공편으로 들어오는 거예요?”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들었다.“괜... 괜찮겠어요?”“내일 다른 친구도 귀국하기로 했거든요. 그냥 가는 김에.”전동하가 소은정의 귀를 살짝 꼬집었다.전동하의 이해가 고마워 소은정은 다시 그를 꼭 끌어안았다.규칙적인 그의 심장소리를 듣고, 따뜻한 온기와 익숙한 체취를 느끼는 순간만큼은 이 참담한 현실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한편, 소은정의 등을 토닥이던 전동하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박수혁... 정말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바로 그때, 누군가 다시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오고...예상치 못한 광경에 소은해는 어이쿠라는 소리와 함께 두 눈을 가려버렸다.“세상에, 백주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이야?”후다닥 떨어진 두 사람이 어색한 헛기침을 이어갔다.“누가 보면 뭐라도 한 줄 알겠어? 그냥 포옹한 걸로 뭐? 누구처럼 솔로인 듯 커플인 듯 사는 것보다야 낫지. 마지막으로 하늘이 얼굴 본 게 언제야?”소은정의 비아냥거림에 소은해의 얼굴이 왠지 울적해졌다.“야, 아픈 데 건드리지 마!”한참을 씩씩대던 소은해가 자리를 뜨고 전동하의 얼굴도 어느새 조금 풀어진 모습이었다.“은해 형님한테 이렇게 깐족거릴 수 있는 사람은 은정 씨뿐일 거예요.”밖에 나가선 세상 도도하게 굴면서 이상하게 소은정 앞에만 서면 꼭 초등학생 남자아이처럼 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두
전동하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이 사랑에 전동하는 모든 걸 갈아넣었다.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전동하는 이 관계에서 비굴한 존재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안정감이 부족한 소은정을 다독이기 위해 남자친구로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함을 알고 있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었다.이때, 전동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소은정이 구시렁댔다.“결혼은 그냥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잖아요. 어차피 내 마음속엔 동하 씨뿐인 걸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는 귀를 의심했다.육체적으로도 이미 깊은 관계까지 발전했지만 이런 말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라니.방금전까지 그를 묘하게 괴롭혔던 섭섭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래. 은정 씨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방금 전 그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전동하는 소은정의 턱을 들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나 좀 달래줘요.”그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정은 망설임없이 그의 입술을 덥쳤다.어두운 병원 한 구석, 두 사람은 세상과 단절된 듯 뜨겁고 긴 키스를 이어갔다.한참 뒤, 아쉬움 넘치는 표정으로 서로에서 벗어난 전동하가 입을 열었다.“이걸론 부족한데요? 여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당장 결혼은 못하더라도 호칭 정도는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한편, 여전히 여운에 잠겨있던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평소엔 여색이라곤 즐기지 않을 것 같은 성인군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도 둘만 있을 때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전동하의 반전매력에 푹 빠진 그녀였다.“여보라고 안 불러줄 거예요?”이제 그녀의 마음을 안 이상 더는 전동하만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이젠... 우리 서로를 향해 다가갈 수 있는 거잖아요.’살짝 가라앉은 전동하의 목소리에 소은정의 심장이 살짝 떨려왔다.입술을 꽉 깨문 소은정이 일단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
“나만 믿어라”, “괜찮을 거다” 이런 말은 어차피 그냥 하는 말이라는 생각에 소은정은 그저 싱긋 웃어보였다.뭐, 그녀에겐 전동하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든든했기에 가능한 미소였다.이때 전동하의 휴대폰이 울리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말했다.“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여보세요?”...또 10분 정도가 흐르고 저편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자리를 피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남자는 어느새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어, 은정 씨. 저 기억하세요?”이에 소은정이 영혼 없이 피식 웃었다.“아, 채태현 씨? 여긴 무슨 일로?”채태현, 박수혁과 조금 닮은 외모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리얼 예능에서 배우 양예영과의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반짝 떴다 반짝 사라진 흔한 연예인 중 하나였다.한편, 소은정은 가뜩이나 마음이 불편한데 박수혁과 닮은 얼굴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그냥 눈치껏 좀 가라...’하지만 채태현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논란이 생긴 뒤로 조연 자리도 얻기 힘들어진 그는 가수로 전향해 보려 앨범까지 내보았지만 그 결과도 참담한 상태.정말 이대로 내처질까 두려워 보이는 동아줄은 다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해외 영화제에 참석하느라고요. 이번에 제가 찍은 영화가 해외에서 좀 반응이 좀 좋더라고요.”“아, 네.”소은정은 그에게 눈빛 조차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정 씨, 지금 저 밖에 사람들 쫙 깔린 거 알아요?”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채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그게... 저희 매니저가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저어야 한다면서 가짜 팬들을 잔뜩 풀어놨거든요. 지금 여기서 바로 나가면 저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스캔들 날지도 몰라요.”“그래서요?”‘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게 다 꼬이네. 동하 씨는 여디 간 거야...’괜히 기자들 눈에 띄였다가 또 희한한 타이틀로 기사를 써제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저랑
발없는 소문이 멀리 퍼진다고 소은정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알바로 고용된 가짜 팬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행인들까지 몰려들었다.대중들에게 널리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보다 신비로운 베일에 감춰진 재벌들의 삶이 사람들에겐 더 큰 먹잇감으로 다가왔다.어느새 개미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 움직이는 것마저 힘들어지고 그 와중에 채태현은 “보디가드” 연기에 심취한 것인지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미안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요. 괜히 스캔들 나지 않게 제가 똑바로 해명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분명 그녀를 일부러 이쪽으로 유인한 거면서 그녀를 위로하는 척하는 채태현의 뻔뻔한 얼굴에 소은정은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려보았다.‘동하 씨, 제발 나 좀 구해 줘요...’이때 인파를 뚫고 나타난 기자가 미친 듯이 소은정을 향해 외쳤다.“소은정 대표님, 최근 SC그룹이 아시아 최초로 스마트칩 프로젝트를 따내셨다면서요? 이 덕분에 회사 주가도 많이 상승했는데 뭐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기자의 말대로 SC그룹이 유럽 스마트칩 생산건을 독점으로 따낸 덕분에 기사도 많이 나고 주가도 예쁘게 상승 곡선을 이어가고 있었다.뭐, 최근 소찬식의 건강 상태 때문에 그 일로 기뻐할 겨를 조차 없었지만 말이다.하지만 적어도 회사에 관한 질문이니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국민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는 SC그룹이 되겠습니다.”기자의 질문에 소은정이 꽤 친절한 말투로 대답하자 사람들은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소은정 대표님, 이번 프로젝트에 태한그룹도 투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사적인 관계 덕분에 투자금을 따내신 겁니까?”“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은 석지 않습니다.”‘또... 또 박수혁...’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낙인처럼 따라오는 박수혁의 존재가 소은정은 혐오스러웠다.‘누구 한 명이 죽어야 끝이 나려나...’하지만 굳은 소은정의 표정에도 눈치없는 기자는 질문을 이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박수혁의 귀에는 그들의 웅성거림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이 공간에 소은정, 박수혁 그저 두 사람만 있는 것만 같았다.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촉 좋은 기자들 역시 박수혁의 눈동자에 담긴 애틋한 사랑의 눈빛을 바로 캐치했다.“박수혁 대표잖아?”“뭐야... 나 지금 드라마 보는 줄 알았잖아.”“설마... 다시 재결합하는 건가?”...한편 박수혁의 등장으로 완전히 화제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채태현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젠장, 이번 기회에 화제성 좀 끌어보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하지만 아침드라마 뺨치는 막장 스토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저 멀리서 경호원들이 사람들 사이를 뚫기 시작했고 홍해처럼 갈라진 길 사이로 전동하가 모습을 드러냈다.전 남편과 얼마 전 스캔들이 난 남자.두 남자가 서로 마주하자 지나가던 행인들은 물론이고 질문 세례를 던지려던 기자들까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숨죽여 이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전동하의 등장에 어딘가 그늘졌던 소은정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공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적에 잠긴 공간을 넘어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전동하의 모습은 마치 구세주와도 같았다.‘와줄 줄 알았어요, 동하 씨.’소은정의 앞에 선 전동하가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에 한번, 그런 스킨십에 전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소은정의 모습에 두번, 구경꾼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뭐야? 박수혁 대표랑은 정말 끝난 걸까?’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팝콘각을 세우고 있을 때 전동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왜 여기 나와있어요.”봄바람처럼 살랑이는 전동하의 목소리와 달리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박수혁은 어둠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이대로 밀리면 안 돼...’주먹을 꽉 쥔 채 다가간 박수혁이 물었다.“나 마중 나온 거 아니었어?”‘오늘은 나랑만 있어주기로 했잖아...’소은정의 눈을 빤히
협박과 명령을 가장한 박수혁의 부탁 덕분에 박상훈은 마지 못해 이번 수술 주치의를 맡기로 동의한 상태였기에 박수혁은 확신에 잠긴 표정이었다.‘적어도 오늘만큼은 은정이는 내 거야. 그러니까 눈치껏 빠져...’역시나 그의 말에 소은정의 얼굴에 난처함이 실렸다.지금 당장 전동하의 손을 잡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소찬식의 핼쓱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고민으로 살짝 떨리는 소은정의 손을 더 꼭 잡은 전동하가 물었다.“위기에 빠진 사람 협박하는 거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묘한 긴장감에 사람들은 다시 숨을 죽였다.전동하의 말에 박수혁이 코웃음을 쳤다.“협박? 협박도 가진 카드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 그 감정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자인 거 알죠?”거의 체념한 상태에서 주어진 마지막 기회, 있는 힘을 다해 잡아야 했다.‘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아. 날 더 경멸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냥... 내 곁에만 있어줘.’하지만 전동하도 밀리지 않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소은정의 손을 잡은 채 전동하가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그럼 두고 보시죠. 누가 끝까지 웃을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하니까요.”한편, 두 사람의 기싸움을 지켜보는 소은정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지금 이 자리에서 박수혁의 손을 뿌리치면 소찬식의 목숨이 위험해지겠지만 그렇다고 매정하게 전동하를 버릴 수도 없었다. 상처받은 그녀의 영혼을 아무런 대가없이 품었던 사람이 바로 전동하, 최소한 인간으로서 이런 배신감을 안겨줄 순 없었다.그리고 꼭 잡은 전동하의 손을 통해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졌다.‘설마...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막연한 기대감을 안은 채 소은정은 결국 전동하와 함께 공항을 떴다.정처없이 주차장으로 향하는 소은정의 머릿속에 수많은 광경이 펼쳐졌다.손만 뻗으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잡힐 것만 같은데 뒤편에서 웅크리고 있는 심연이 자꾸만 그녀의
차 앞을 막은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박수혁이었다.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루만 함께하길 원했었는데.이게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는데.전동하는 또다시 중간에 끼어들어 그의 소은정을 빼앗아가버렸다.그런 박수혁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전동하가 창문을 살짝 내렸다.짙게 된 선팅, 하지만 뒷좌석을 들여다 보기엔 너무나 작은 틈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박 대표님. 더 이상 비겁하게 굴지 마세요. 제 여자한테 찝적대지 마시라고요.”경멸로 가득찬 전동하의 표정보다 박수혁을 더 거슬리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뭐? 네 여자? 누구 마음대로.”‘누구 마음대로 은정이가 네 여자야. 내 거였어. 내 여자였다고.’“박수혁 씨,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지금의 은정 씨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네, 맞아요. 한때는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었죠. 그런 은정 씨의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한없이 밀어내기만 한 것도 당신이었어요. 은정 씨는 당신한테 잘못한 게 없어요. 은정 씨가 평생 그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나요? 무슨 자신감이죠?”전동하의 말을 듣고 있던 박수혁이 이를 악물었다.‘뭐야. 그 표정... 네까짓 게 뭔데 날 그딴 눈으로 바라봐. 네가 뭔데 날 동정하냐고!’“너 때문이잖아. 네가 끼어들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박수혁이 울부짖었다.이마를 뚫고나올 듯한 핏줄이 그의 분노를, 질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평생 이기기만 했던 박수혁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굴러온 돌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도,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치던 소은정이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도...박수혁에게는 생경한 좌절감으로 다가왔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를 더 미치게 만드는 건, 분명 뒷좌석에서 모든 걸 듣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소은정이었다.“네, 맞습니다. 제가 끼어들었고 제가 빼앗았죠. 박수혁 당신한테 조금의 염치라는 게 남아있다면 다신... 은정 씨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