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하!”전인국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그가 냉정을 되찾기 위해 한참 동안 심호흡을 이어갔다.‘어떻게 일군 회사인데. 이대로 다 잃을 순 없어.’“내가, 내가 도와줄게. 내가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이사들 설득하마. 하지만 전인그룹을 네가 통째로 가지는 건 절대 안 돼!”이에 여유롭게 손목을 돌려 시간을 확인한 전동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아버지, 협상도 자격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세요? 이제 며칠 뒤면 이 세상에서 전인그룹을 사라지게 될 겁니다. SF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 그리고 그 그룹에 당신들 자리는 없을 겁니다.”“뭐... 뭐라고?”전인국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전인그룹으로서 일궜던 모든 걸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니?다 키운 숲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묘목을 심는 거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독한 놈...’하지만 전동하의 눈동자는 자신감으로 빛났다.“앞으로 또 허튼 짓 하시면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산소호흡기 떼어버릴 테니 알아서 하세요.”전기섭의 목숨으로 협박하자 전인국이 벌떡 일어섰다.“지...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방금 전까지 그렇게 화를 내던 사람이 기가 팍 죽었네. 전기섭 목숨이 그렇게 소중한가 보지?’이런 생각에 전동하의 눈동자가 혐오감으로 물들었다.“네, 협박 맞습니다. 이보다 더 잘 통하는 협박이 있을까요? 신중하게 행동하세요. 당신한테 남은 마지막 아들입니다.”전인국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협박? 애원? 구걸?‘내가 어떻게 해야 저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전인국은 왠지 전동하가 낯설게 느껴졌다.한때 전인국은 전동하의 소식을 전부 차단했었다. 아니, 그 이름 조차 귀에 담고 싶지 않았다.사생아이자, 살인의 목격자.전동하는 그에게 인생의 커다란 오점 같은 존재였고 무시하다 보면 언젠가 지워질 거라 생각했었는데...그의 방치로 인해 그
할 일을 마친 전동하는 조용히 귀국했다.사실 미국에서 일주일은 있으려고 했지만 소은정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전동하가 물고기라면 소은정은 물과도 같은 존재. 그녀에게 조금씩 멀어질수록 숨이 턱턱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한편, 윤이한은 전인국과 대면한 전동하의 기분이 엉망이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심지어 이대로 사직서라도 써야 하나 망설이던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전동하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기분이 나쁘긴커녕 굉장히 홀가분한 표정으로 모 브랜드의 가방 디자인이 별로라는둥, 소은정이 언젠가 입었던 코트도 별로였다는 등 시덥지 않은 얘기를 건넸다.“저번에 소 대표님이 입으셨을 땐 예쁘다고 칭찬하셨잖습니까? 설마 거짓말을...”의아한 표정의 윤이한이 말끝을 흐렸다.이에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거짓말은 아니죠. 은정 씨는 이쁜 게 맞으니까.”소은정의 유일한 취미는 쇼핑, 게다가 피팅할 때마다 이건 어떠냐? 어느 게 더 낫냐는 등 질문 세례를 던지는 그녀에게 맞추기 위해 패션의 패자도 모르던 전동하도 언제부터인가 패션 잡지를 읽어보기 시작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안목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고 예전엔 전부 똑같아 보이던 여성용 가방이나 의류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잠시 후, 오피스텔.차에서 내린 전동하가 쇼핑백들을 챙겨들었다.“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윤이한이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전동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별일 없으면 연락하지 마시고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전동하는 미련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소은정은 출근을 한 건지, 텅 빈 오피스텔이 그를 맞이했지만 그녀의 공간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양손 가득 든 쇼핑백을 옷방에 넣어둔 전동하는 그의 서프라이즈 선물에 환하게 웃을 소은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다니. 나도 참 단단히 미쳤네.’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전동하가 오피스텔을 쭉 둘러보았다.전체적으
전동하의 목에 팔을 꼭 감은 채 대롱대롱 매달린 소은정의 모습은 얼핏 보면 아기 코알라 같기도 했다.생각보다 훨씬 더 열정적인 그녀의 스킨십에 전동하 마음 역시 달콤해졌다.“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전동하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편,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이던 소은정은 놀랍게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헤어진 지 겨우 이틀인데,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걸까?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성인이 되고 나선 혼자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전동하가 떠난 그 이틀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평소엔 아늑하기만 하던 집이 왠지 공허했고 전동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은 너무나 쓸쓸하기만 했다.‘아, 이런 게 외로움이라는 건가?’어느새 그녀의 삶을 물들여버린 전동하, 이제 정말 이 남자를 벗어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 정도였다.‘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잠깐 포옹 끝에 전동하의 따뜻한 입술이 소은정의 달콤한 입술에 닿았다. 이틀 동안의 그리움을 풀어내기라도 하 듯 두 사람 사이의 불꽃은 빠르게 달아올랐다.소은정의 손이 슬슬 작전을 시작하려던 그때, 전동하가 그녀를 살짝 밀어낸 뒤 허리를 움켜쥐었다.“왜요?”소은정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키스 때문에 살짝 물든 뺨을 보고 있자니 그날 밤 너무나 매혹적이었던 소은정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고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전동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배고프죠? 일단 밥부터 먹어요.”전동하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지만 소은정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 때려버렸다.‘뭐야? 꼭 내가 밝히는 여자인 것 같잖아?’하지만 흥칫뿡을 외치며 총총총 식탁 앞으로 향한 소은정의 표정은 다시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웬만한 팬시 레스토랑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고급스러운 양식 코스 요리,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세상에나, 도
전동하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선물을 다 살펴본 소은정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옷방을 나섰다.마침 정리를 마친 전동하가 소은정을 꼭 안았다.“샤워해야죠?”왠지 에로틱하게 귀를 간질이는 그의 목소리에 소은정의 귓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부끄럽지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욕실문을 닫으려던 그때, 손 하나가 불쑥 문턱을 잡았다.깜짝 놀란 소은정이 고개를 돌려보니 문틈으로 들어온 전동하가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시간도 너무 늦었고 그냥 같이 씻어요.”‘하, 지금 그걸 핑계라고.’소은정이 고개를 홱 돌렸다.“안 돼요!”“될걸요?”하지만 전동하는 그녀에게 거절할 기회마저 주지 않겠다는 듯 뜨거운 키스를 이어갔다. 천천히 그녀를 욕실로 리드한 전동하가 더듬거리며 샤워부스 물을 틀었다.따뜻한 물줄기가 두 사람의 옷을 전부 적셨지만 그 누구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전동하가 침대에 축 늘어진 소은정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자 소은정이 어딘가 겁 먹은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더는 안 돼요...”소은정은 알고 있을까? 그를 밀어내는 목소리가 얼마나 야릇한지.순간 전동하의 하체가 다시 뻐근하게 달아올랐지만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와 또 시달리는 게 아닌가 싶어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했다.“큭, 알겠으니까 얼른 자요.”이미 잠든 소은정을 안은 전동하는 그제야 어딘가 텅 비었던 마음 한 구석이 꽉 채워지는 기분이었다.‘좋다, 이런 기분... 매일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 평생 해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은정 씨.’다음 날,동이 트기도 전에 다급한 벨소리가 소은정의 달콤한 꿈을 건드렸다.“으음...”역시 벨소리에 깬 전동하가 소은정을 가볍게 흔들었지만 받을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에 결국 직접 수락 버튼을 눌렀다.“네, 은해 형님.”“전 대표?”남자 목소리에 당황한 소은해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은정이 자고
역시 굳은 표정의 전동하가 소은정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꽉 주었다.“괜찮을 거예요.”전동하는 방금 전 휴대폰을 챙기는 것도 잊은 채 혼이 나간 듯 허둥지둥 집을 나서는 소은정의 모습을 떠올렸다.아름다운 두 눈의 생기가 사라질 정도로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라 전동하의 마음도 착잡해졌다.하지만 전동하의 따뜻한 위로에도 소은정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제발...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소은해가 이 새벽에 그녀에게 전화까지 했다는 건 정말 상황이 심각할 수 있다는 소리.방금 전 떨리는 손으로 소은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그쪽도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주위의 복잡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이때 전동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은정 씨, 이제 곧 도착해요. 괜찮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전동하가 빳빳하게 굳은 소은정의 손을 꼭 잡았다.이른 새벽 시간이라 길도 막히지 않았고 기사가 워낙 엑셀을 풀로 밟은 덕에 두 사람은 빠르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굳은 표정으로 한 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은호, 소은해. 역시 착잡한 표정의 한시연.어딘가 무겁게 가라앉은 병원 분위기가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소은정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저번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건강하셨으면서... 왜 갑자기...’종종걸음으로 걸어간 소은정이 물었다.“한 원장님, 저희 아빠 괜찮은 거 맞죠?”괜찮냐고 물었지만 한번도 틀린 적 없는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역시나 한숨을 푹 내쉰 한 원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은정아, 마음의 준비 해둬야겠다. 15년 전에 너희 아버지 심장 수술 받았던 거 기억하지? 수술은 성공적이었다만... 네 아버지 나이도 있고 최근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오늘 새벽 심장마비 증세로 병원에 실려왔다. 응급처치로 지금은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이건 말 그대로 응급처치일 뿐이야. 지금 네 아버지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란다.”한 원
숨 막힐 듯한 정적 끝에 소은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이 세상에 의사가 그 한 명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다른 의사 부르면 되잖아.”이에 소은호가 동생을 힐끗 바라보았다.소은호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무서웠지만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그의 이성을 잡아주고 있었다.“일단 검사 결과부터 기다려보자. 만약 간단한 수술이라면 여기서 바로 받아도 될 테니까.”“그래. 결과 곧 나올 거야.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말을 마친 한 원장이 자리를 뜨고 다시 적막에 잠겼다.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한 소은정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안색이었고 전동하가 그런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한편, 소은해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병원 복도를 끝없이 오갔다.식사 자리에서 소찬식과 투닥이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평범한 밤이었다.하지만 다음 날, 소찬식을 깨우러 들어간 집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 잔잔한 행복을 깨버렸다.비몽사몽한 상태로 깨 눈시울이 붉어진 집사가 구급차를 부르는 모습을 봤을 때도 보호자로서 함께 병원에 온 지금까지도 소은해는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래... 그래 이건 꿈일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날 혼내실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시간이 1분, 1초 흐르고 검사 결과는 여전히 감감무소식.마음이 다급해진 소은정이 일어서서 병실 창문으로 소찬식을 들여다보았다.비록 거리는 떨어져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소찬식이 느끼고 있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의 심장으로 전달되는 듯했다.약 40분 후, 다시 돌아온 한 원장이 내린 결론은 재수술이었다.하지만 소찬식의 나이도 있고 워낙 큰 수술이라 성공률이 확 낮아진 상태.그렇다고 수술을 하지 않기엔 심장이 언제 작동을 멈출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없는 상황이었다.임신 중인 한시연은 다른 병실에 잠깐 쉬고 있고 남은 네 사람이 무거운 표정으로 의논을 시작했다.다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높은 리스크가 마음에 걸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
오후가 되고 해외 의료진들이 도착하자 재검사가 시작되었다.하지만 결과를 확인한 그들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대표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15년 전 교체했던 판막에 손상이 많이 갔어요. 지금으로서 최선의 치료 방법은 수술뿐입니다.”“그럼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아픈 가족을 둔 모든 보호자들이 보내는 절박한 눈빛, 의사로서 봐도 봐도 적응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100%라고 무조건 성공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의사기에 결국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40% 정도입니다. 환자분 나이도 있고 지금 상황이 워낙 안 좋아서...”절반도 되지 않는 성공률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럼 다른 의사가 한다면요?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는 누구죠?”과거 소찬식의 수술을 맡았던 학계에서 나름 존경하는 최고의 실력자가 있을 터, 그 앞에 무릎을 꿇어서라도 모셔올 생각이었다.그녀의 질문에 의사가 대답했다.“지금 심장 질환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박상훈 교수입니다. 게다가 박 교수는 15년 전, 회장님의 수술을 맡았었던 교수님의 수제자죠.”의사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특히 심장질환 재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 교수가 직접 집도한다면... 성공률이 대폭 상승할 겁니다.”15년 전, 소찬식의 수술을 집도했던 교수의 수제자란 말에 다시 희망의 불꽃이 솟는 듯했다.소은정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그럼 얼른 연락해 보자.”하지만 소은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혹시 박 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신가요? 교수님의 추천이 있다면 얘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요.”소은호의 말에 의사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입니다. 다행히 친분이 꽤 있네요. 지금 바로 전화해 보죠.”전화 통화를 위해 의사가 잠깐 자리를 뜨고 소은정도 소은해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전동하는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박상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전동하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박상훈은 박수혁의 아버지 박봉원의 사촌동생입니다. 박씨 일가 사람이란 말이죠.”전동하의 말은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산산조각내버렸다.박씨 일가와 전씨 일가... 현대판 몬테규 가문과 캐퓰릿 가문에 버금가는 앙숙, 박상훈이 소찬식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설 리가 없었다.희망 뒤에 온 절망이라 왠지 더 무겁게 느껴졌다.이때 다혈질은 소은해가 벌떡 일어섰다.“내가 직접 가서 납치를 하든 협박을 하든 데리고 올게.”소찬식의 목숨이 달린 일, 게다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마음이 급해질만도 했다.“소은해, 정신차려. 네가 그 의사를 납치해 온다고 쳐. 그 사람이 제대로 수술을 해줄 것 같아? 수술 중의 작은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너 그 사람한테 아버지 맡길 수 있겠어?”굳은 표정의 소은호가 동생을 나무랐다.한편, 전동하의 눈치를 살피던 소은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박수혁이라면... 그 사람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몰라.”지금 박수혁은 아직 소은정에게 마음의 빚을 가진 상태, 그 죄책감을 이용한다면 박상훈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하지만...박수혁과 모든 관계를 끊어내겠다고 말한 게 겨우 얼마 전, 이렇게 다시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잠깐의 정적을 깬 건 소은호의 깊은 한숨이었다.“내가 연락할게. 일단은 아버지부터 살리는 게 중요한 거잖아? 그쪽에서 무슨 조건을 제시하든 최대한 들어주는 수밖에.”말을 마친 소은호가 바로 돌아섰다.소은정이 나서서 부탁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이렇게나마 소은정을 지키는 게 소은호의 마지막 마지노선이었다.잠시 후, 소찬식이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에 소은정은 부랴부랴 병실로 달려가고...역시 그 뒤를 따르려던 소은해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는 전동하를 힐끗 바라보았다.다른 건 몰라도 남자 복은 유난히 안 따라주던 동생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남자를 데리고 왔다.이번 일로 두 사람 사이에 금이라도 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