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굳은 표정의 전동하가 소은정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꽉 주었다.“괜찮을 거예요.”전동하는 방금 전 휴대폰을 챙기는 것도 잊은 채 혼이 나간 듯 허둥지둥 집을 나서는 소은정의 모습을 떠올렸다.아름다운 두 눈의 생기가 사라질 정도로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라 전동하의 마음도 착잡해졌다.하지만 전동하의 따뜻한 위로에도 소은정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제발...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소은해가 이 새벽에 그녀에게 전화까지 했다는 건 정말 상황이 심각할 수 있다는 소리.방금 전 떨리는 손으로 소은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그쪽도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주위의 복잡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이때 전동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은정 씨, 이제 곧 도착해요. 괜찮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전동하가 빳빳하게 굳은 소은정의 손을 꼭 잡았다.이른 새벽 시간이라 길도 막히지 않았고 기사가 워낙 엑셀을 풀로 밟은 덕에 두 사람은 빠르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굳은 표정으로 한 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은호, 소은해. 역시 착잡한 표정의 한시연.어딘가 무겁게 가라앉은 병원 분위기가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소은정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저번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건강하셨으면서... 왜 갑자기...’종종걸음으로 걸어간 소은정이 물었다.“한 원장님, 저희 아빠 괜찮은 거 맞죠?”괜찮냐고 물었지만 한번도 틀린 적 없는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역시나 한숨을 푹 내쉰 한 원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은정아, 마음의 준비 해둬야겠다. 15년 전에 너희 아버지 심장 수술 받았던 거 기억하지? 수술은 성공적이었다만... 네 아버지 나이도 있고 최근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오늘 새벽 심장마비 증세로 병원에 실려왔다. 응급처치로 지금은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이건 말 그대로 응급처치일 뿐이야. 지금 네 아버지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란다.”한 원
숨 막힐 듯한 정적 끝에 소은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이 세상에 의사가 그 한 명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다른 의사 부르면 되잖아.”이에 소은호가 동생을 힐끗 바라보았다.소은호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무서웠지만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그의 이성을 잡아주고 있었다.“일단 검사 결과부터 기다려보자. 만약 간단한 수술이라면 여기서 바로 받아도 될 테니까.”“그래. 결과 곧 나올 거야.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말을 마친 한 원장이 자리를 뜨고 다시 적막에 잠겼다.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한 소은정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안색이었고 전동하가 그런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한편, 소은해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병원 복도를 끝없이 오갔다.식사 자리에서 소찬식과 투닥이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평범한 밤이었다.하지만 다음 날, 소찬식을 깨우러 들어간 집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 잔잔한 행복을 깨버렸다.비몽사몽한 상태로 깨 눈시울이 붉어진 집사가 구급차를 부르는 모습을 봤을 때도 보호자로서 함께 병원에 온 지금까지도 소은해는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래... 그래 이건 꿈일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날 혼내실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시간이 1분, 1초 흐르고 검사 결과는 여전히 감감무소식.마음이 다급해진 소은정이 일어서서 병실 창문으로 소찬식을 들여다보았다.비록 거리는 떨어져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소찬식이 느끼고 있는 고통이 그대로 그녀의 심장으로 전달되는 듯했다.약 40분 후, 다시 돌아온 한 원장이 내린 결론은 재수술이었다.하지만 소찬식의 나이도 있고 워낙 큰 수술이라 성공률이 확 낮아진 상태.그렇다고 수술을 하지 않기엔 심장이 언제 작동을 멈출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없는 상황이었다.임신 중인 한시연은 다른 병실에 잠깐 쉬고 있고 남은 네 사람이 무거운 표정으로 의논을 시작했다.다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높은 리스크가 마음에 걸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
오후가 되고 해외 의료진들이 도착하자 재검사가 시작되었다.하지만 결과를 확인한 그들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대표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15년 전 교체했던 판막에 손상이 많이 갔어요. 지금으로서 최선의 치료 방법은 수술뿐입니다.”“그럼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아픈 가족을 둔 모든 보호자들이 보내는 절박한 눈빛, 의사로서 봐도 봐도 적응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100%라고 무조건 성공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의사기에 결국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40% 정도입니다. 환자분 나이도 있고 지금 상황이 워낙 안 좋아서...”절반도 되지 않는 성공률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럼 다른 의사가 한다면요?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는 누구죠?”과거 소찬식의 수술을 맡았던 학계에서 나름 존경하는 최고의 실력자가 있을 터, 그 앞에 무릎을 꿇어서라도 모셔올 생각이었다.그녀의 질문에 의사가 대답했다.“지금 심장 질환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박상훈 교수입니다. 게다가 박 교수는 15년 전, 회장님의 수술을 맡았었던 교수님의 수제자죠.”의사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특히 심장질환 재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 교수가 직접 집도한다면... 성공률이 대폭 상승할 겁니다.”15년 전, 소찬식의 수술을 집도했던 교수의 수제자란 말에 다시 희망의 불꽃이 솟는 듯했다.소은정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그럼 얼른 연락해 보자.”하지만 소은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혹시 박 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신가요? 교수님의 추천이 있다면 얘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요.”소은호의 말에 의사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입니다. 다행히 친분이 꽤 있네요. 지금 바로 전화해 보죠.”전화 통화를 위해 의사가 잠깐 자리를 뜨고 소은정도 소은해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전동하는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박상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전동하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박상훈은 박수혁의 아버지 박봉원의 사촌동생입니다. 박씨 일가 사람이란 말이죠.”전동하의 말은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산산조각내버렸다.박씨 일가와 전씨 일가... 현대판 몬테규 가문과 캐퓰릿 가문에 버금가는 앙숙, 박상훈이 소찬식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설 리가 없었다.희망 뒤에 온 절망이라 왠지 더 무겁게 느껴졌다.이때 다혈질은 소은해가 벌떡 일어섰다.“내가 직접 가서 납치를 하든 협박을 하든 데리고 올게.”소찬식의 목숨이 달린 일, 게다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마음이 급해질만도 했다.“소은해, 정신차려. 네가 그 의사를 납치해 온다고 쳐. 그 사람이 제대로 수술을 해줄 것 같아? 수술 중의 작은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너 그 사람한테 아버지 맡길 수 있겠어?”굳은 표정의 소은호가 동생을 나무랐다.한편, 전동하의 눈치를 살피던 소은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박수혁이라면... 그 사람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몰라.”지금 박수혁은 아직 소은정에게 마음의 빚을 가진 상태, 그 죄책감을 이용한다면 박상훈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하지만...박수혁과 모든 관계를 끊어내겠다고 말한 게 겨우 얼마 전, 이렇게 다시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잠깐의 정적을 깬 건 소은호의 깊은 한숨이었다.“내가 연락할게. 일단은 아버지부터 살리는 게 중요한 거잖아? 그쪽에서 무슨 조건을 제시하든 최대한 들어주는 수밖에.”말을 마친 소은호가 바로 돌아섰다.소은정이 나서서 부탁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이렇게나마 소은정을 지키는 게 소은호의 마지막 마지노선이었다.잠시 후, 소찬식이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에 소은정은 부랴부랴 병실로 달려가고...역시 그 뒤를 따르려던 소은해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는 전동하를 힐끗 바라보았다.다른 건 몰라도 남자 복은 유난히 안 따라주던 동생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남자를 데리고 왔다.이번 일로 두 사람 사이에 금이라도 간다면..
뜬금없이 몇 년전의 투자 프로젝트를 물으니 윤이한도 당황스러웠지만 곧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의료 분야는 워낙 연구성과를 얻는 게 어려워 수익 상황이 좋진 않습니다...”그럼에도 전동하가 굳이 의료 분야에 꾸준한 투자를 이어가는 이유는 그의 투자금을 받은 과학자들이 이 세상을 바꿀만한 놀라운 성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이때 전동하가 윤이한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그 연구팀 팀장 이름이 뭐였죠?”빠르게 머리를 굴린 윤이한이 바로 대답했다.“기태석 박사님 말씀이십니까? 아, 그 교수님은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현 담당자는 기 박사님 제자인 박상훈 교수일 겁니다.”‘박상훈?’윤이한의 대답에 전동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박상훈... 박수혁 대표에겐 삼촌 뻘 되는 사람이죠?”투자할 프로젝트 자료를 받았을 때 이미 팀원 구성까지 다 알아봤던 전동하가 물었다.물론 투자한 모든 프로젝트의 팀원들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박수혁과 혈연으로 얽혀있다는 정보가 전동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덕분이었다.‘박수혁 대표...? 태한그룹?’윤이한 역시 전동하가 그저 단순히 투자 현황에 대해 묻는 게 아님을 직감하고 긴장하기 시작했다.“윤 비서님, 저 대신 알아봐주실 게 좀 있는데...”한편, 소찬식의 병실.하룻밤 사이에 십년은 더 늙은 듯한 소찬식이 가족들을 바라보았다.그 누구보다 강한 슈퍼맨 같은 아빠였던 소찬식의 약한 모습에 소은정은 그대로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은정아, 왜 울어. 네 아빠 아직 안 죽었다.”장난스러운 말투로 분위기를 띄워보려 했지만 힘없는 목소리가 소은정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훌쩍이던 소은정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세상 의사 다 불러서라도 아빠 살릴 테니까.”하지만 소찬식은 생각보다 편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빠도 이만하면 살만큼 살았지 뭐. 15년 전에 백 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어.
‘저 인간,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만... 이 상황에 그런 말이 하고 싶을까...’소은정이 다시 눈시울을 붉히려는 소은해를 향해 쿠션을 던졌다.“잘했어!”소찬식이 소은정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한편, 소은해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하, 이 오라버니가 연애 뒤치닥거리까지 다 해주는 것도 모르고. 배은망덕한 계집애.’“은정아, 그만. 지금 아빠 편찮으시잖아. 장난치지 마.”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는 소은해의 모습에 소은정의 눈물도 쏙 들어갔다.잠시 후,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소은호가 묘하게 달아오른 분위기를 느끼고 바로 매서운 눈초리로 소은해를 노려보았다.“소은해, 여기 병원이야. 철 좀 들자?”‘하, 뭐야. 왜 다 나만 갖고 그래! 내가 평소에 그렇게 까부는 이미지였나?’소은해가 억울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해명을 이어가려던 순간, 소찬식이 부들거리며 입을 열었다.“저 자식더러 썩 꺼지라고 해. 저 자식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 것 같으니까.”그렇게 소은호, 소은정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소은해는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겨우 마음을 추스린 소찬식이 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하늘이 말이야... 걔는 저 팔푼이 어디가 그렇게 좋대니?”이 상황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지만 소은정은 눈물을 머금은 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러게요. 그래도 나름 연애할 땐 일편단심이니까. 얼굴도 봐줄만 하고요.”매일 소은해를 혼내고 핀잔주는 게 소찬식의 일상이었지만 정작 생사의 기로에 섰다는 생각을 하니 가장 아픈 손가락인 소은해가 가장 걱정되는 소찬식이었다.‘저 자식... 연예인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을런지...’이때, 소은호가 소은정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은정아, 잠깐 얘기 좀 하자.”이에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소찬식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병실을 나섰다.박상훈 교수 일로 부른 것이라는 걸 직감한 소은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역시나 소은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박 교수 측근과 연락이
“그래.”소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동남아에서 그 일을 겪고 난 뒤로 공적으로는 태한그룹과의 협력을 중단했고 사적으로도 모든 만남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야. 내키진 않지만... 지금은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잖아? 필요하다면 내가 먼저 박수혁한테 연락해 볼게.”“그래. 자존심 따위보단 아빠를 살리는 게 훨신 더 중요하니까.”“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전 대표도...”소은호가 말끝을 흐렸다.SC그룹이 태한그룹과의 공적인 프로젝트까지 전부 중단하는 초강수를 두었던 이유는 단 하나, 이렇게 해서라도 소은정의 마음이 풀리길 바랐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번 기회에 박수혁과의 연을 완전히 끊어냄으로서 전동하와의 새로운 사랑을 더 마음 편히 키워나가길 바랐었다.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할 상황, 아무리 사람 목숨이 우선이라지만 역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소은정이 행여나 서운함을 느낄까 소은호는 걱정스러웠다.하지만 그의 말에 소은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왜 서운해. 나더러 지금 당장 박수혁한테 무릎 꿇고 애원하라고 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어. 박 교수가 우리 아빠 수술만 제대로 해줄 수 있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동하 씨 이런 일로 서운해 할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소은정의 눈동자가 신뢰로 반짝였다.소은정의 태도에 소은호도 한시름 놓은 듯 참았던 한숨을 뱉어냈다.“박수혁이랑 접선은 내가 할 거야. 네가 마주칠 일 없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고마워, 오빠.”다음 날, 소찬식의 상황을 접한 박수혁의 마음은 착잡할 따름이었다.다른 사람의 위기를 기회로 삼는 건 너무나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만 나쁜 욕심이 샘솟았다.이번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소은정과는 영영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박수혁은 이를 악물었다.‘한번만... 한번만 욕심내는 거야. 비겁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어. 은정이가 날 더 싫어하게 돼도 괜찮아. 이렇게라도 은
창문 앞에 서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던 소은정은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타협해야 해. 지금 내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소은정은 끝없이 되뇌었다.“박수혁, 당신 맞지? 사정은 은호 오빠한테서 대충 들었을 거라 생각해. 박 교수님한테 부탁 좀 해줘. 조건은 뭐든 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이 한마디 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든지...소은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바로 그때. 조심스레 그녀의 뒤로 다가온 전동하는 힘들어 보이는 소은정의 뒷모습에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정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찬식뿐, 전동하의 감정도, 그녀 스스로의 감정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수화기 저편, 멈칫하던 박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너랑 나 단 둘이서만, 딱 하루만... 만나줄 수 있을까?”소은정의 거절이 두려워 박수혁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내 조건은 이거 하나야. 이 부탁만 들어주면 삼촌 어떻게든 설득할게. 그래, 나 아직 너 포기 못했어. 비겁한 거 알지만 나한텐 이게 기회야. 그러니까... 하루만, 딱 하루만 나랑 같이 있어줘. 그리고 나서도 네가 날 떠나겠다면... 그땐, 그땐 네 선택 존중해 줄게.”“...”겨우 몇 초간의 정적에 박수혁의 가슴은 타들어갔다.‘제발... 제발 거절하지 말아라...’“은정아, 우리... 부부였잖아. 한번쯤은 기회 줄 수 있는 거잖아.”애원으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소은정의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소은정의 마음은 잠잠하기만 했다.저 남자의 감정에 공감을 해주는 것 자체가 귀찮았고 허무하게 느껴졌다.한참이 지나고, 소은정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일 봐.”이 말을 마지막으로 소은정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먼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진정, 진정하자...’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돌아선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언제부터 뒤에 서있었던 걸까?전동하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어딘가 슬퍼보이는 그의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