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몇 년전의 투자 프로젝트를 물으니 윤이한도 당황스러웠지만 곧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의료 분야는 워낙 연구성과를 얻는 게 어려워 수익 상황이 좋진 않습니다...”그럼에도 전동하가 굳이 의료 분야에 꾸준한 투자를 이어가는 이유는 그의 투자금을 받은 과학자들이 이 세상을 바꿀만한 놀라운 성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이때 전동하가 윤이한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그 연구팀 팀장 이름이 뭐였죠?”빠르게 머리를 굴린 윤이한이 바로 대답했다.“기태석 박사님 말씀이십니까? 아, 그 교수님은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현 담당자는 기 박사님 제자인 박상훈 교수일 겁니다.”‘박상훈?’윤이한의 대답에 전동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박상훈... 박수혁 대표에겐 삼촌 뻘 되는 사람이죠?”투자할 프로젝트 자료를 받았을 때 이미 팀원 구성까지 다 알아봤던 전동하가 물었다.물론 투자한 모든 프로젝트의 팀원들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박수혁과 혈연으로 얽혀있다는 정보가 전동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덕분이었다.‘박수혁 대표...? 태한그룹?’윤이한 역시 전동하가 그저 단순히 투자 현황에 대해 묻는 게 아님을 직감하고 긴장하기 시작했다.“윤 비서님, 저 대신 알아봐주실 게 좀 있는데...”한편, 소찬식의 병실.하룻밤 사이에 십년은 더 늙은 듯한 소찬식이 가족들을 바라보았다.그 누구보다 강한 슈퍼맨 같은 아빠였던 소찬식의 약한 모습에 소은정은 그대로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은정아, 왜 울어. 네 아빠 아직 안 죽었다.”장난스러운 말투로 분위기를 띄워보려 했지만 힘없는 목소리가 소은정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훌쩍이던 소은정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세상 의사 다 불러서라도 아빠 살릴 테니까.”하지만 소찬식은 생각보다 편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빠도 이만하면 살만큼 살았지 뭐. 15년 전에 백 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어.
‘저 인간,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만... 이 상황에 그런 말이 하고 싶을까...’소은정이 다시 눈시울을 붉히려는 소은해를 향해 쿠션을 던졌다.“잘했어!”소찬식이 소은정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한편, 소은해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하, 이 오라버니가 연애 뒤치닥거리까지 다 해주는 것도 모르고. 배은망덕한 계집애.’“은정아, 그만. 지금 아빠 편찮으시잖아. 장난치지 마.”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는 소은해의 모습에 소은정의 눈물도 쏙 들어갔다.잠시 후,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소은호가 묘하게 달아오른 분위기를 느끼고 바로 매서운 눈초리로 소은해를 노려보았다.“소은해, 여기 병원이야. 철 좀 들자?”‘하, 뭐야. 왜 다 나만 갖고 그래! 내가 평소에 그렇게 까부는 이미지였나?’소은해가 억울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해명을 이어가려던 순간, 소찬식이 부들거리며 입을 열었다.“저 자식더러 썩 꺼지라고 해. 저 자식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 것 같으니까.”그렇게 소은호, 소은정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소은해는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겨우 마음을 추스린 소찬식이 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하늘이 말이야... 걔는 저 팔푼이 어디가 그렇게 좋대니?”이 상황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지만 소은정은 눈물을 머금은 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러게요. 그래도 나름 연애할 땐 일편단심이니까. 얼굴도 봐줄만 하고요.”매일 소은해를 혼내고 핀잔주는 게 소찬식의 일상이었지만 정작 생사의 기로에 섰다는 생각을 하니 가장 아픈 손가락인 소은해가 가장 걱정되는 소찬식이었다.‘저 자식... 연예인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을런지...’이때, 소은호가 소은정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은정아, 잠깐 얘기 좀 하자.”이에 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소찬식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병실을 나섰다.박상훈 교수 일로 부른 것이라는 걸 직감한 소은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역시나 소은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박 교수 측근과 연락이
“그래.”소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동남아에서 그 일을 겪고 난 뒤로 공적으로는 태한그룹과의 협력을 중단했고 사적으로도 모든 만남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야. 내키진 않지만... 지금은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잖아? 필요하다면 내가 먼저 박수혁한테 연락해 볼게.”“그래. 자존심 따위보단 아빠를 살리는 게 훨신 더 중요하니까.”“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전 대표도...”소은호가 말끝을 흐렸다.SC그룹이 태한그룹과의 공적인 프로젝트까지 전부 중단하는 초강수를 두었던 이유는 단 하나, 이렇게 해서라도 소은정의 마음이 풀리길 바랐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번 기회에 박수혁과의 연을 완전히 끊어냄으로서 전동하와의 새로운 사랑을 더 마음 편히 키워나가길 바랐었다.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할 상황, 아무리 사람 목숨이 우선이라지만 역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소은정이 행여나 서운함을 느낄까 소은호는 걱정스러웠다.하지만 그의 말에 소은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왜 서운해. 나더러 지금 당장 박수혁한테 무릎 꿇고 애원하라고 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어. 박 교수가 우리 아빠 수술만 제대로 해줄 수 있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동하 씨 이런 일로 서운해 할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소은정의 눈동자가 신뢰로 반짝였다.소은정의 태도에 소은호도 한시름 놓은 듯 참았던 한숨을 뱉어냈다.“박수혁이랑 접선은 내가 할 거야. 네가 마주칠 일 없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고마워, 오빠.”다음 날, 소찬식의 상황을 접한 박수혁의 마음은 착잡할 따름이었다.다른 사람의 위기를 기회로 삼는 건 너무나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만 나쁜 욕심이 샘솟았다.이번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소은정과는 영영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박수혁은 이를 악물었다.‘한번만... 한번만 욕심내는 거야. 비겁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어. 은정이가 날 더 싫어하게 돼도 괜찮아. 이렇게라도 은
창문 앞에 서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던 소은정은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타협해야 해. 지금 내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소은정은 끝없이 되뇌었다.“박수혁, 당신 맞지? 사정은 은호 오빠한테서 대충 들었을 거라 생각해. 박 교수님한테 부탁 좀 해줘. 조건은 뭐든 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이 한마디 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든지...소은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바로 그때. 조심스레 그녀의 뒤로 다가온 전동하는 힘들어 보이는 소은정의 뒷모습에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정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찬식뿐, 전동하의 감정도, 그녀 스스로의 감정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수화기 저편, 멈칫하던 박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너랑 나 단 둘이서만, 딱 하루만... 만나줄 수 있을까?”소은정의 거절이 두려워 박수혁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내 조건은 이거 하나야. 이 부탁만 들어주면 삼촌 어떻게든 설득할게. 그래, 나 아직 너 포기 못했어. 비겁한 거 알지만 나한텐 이게 기회야. 그러니까... 하루만, 딱 하루만 나랑 같이 있어줘. 그리고 나서도 네가 날 떠나겠다면... 그땐, 그땐 네 선택 존중해 줄게.”“...”겨우 몇 초간의 정적에 박수혁의 가슴은 타들어갔다.‘제발... 제발 거절하지 말아라...’“은정아, 우리... 부부였잖아. 한번쯤은 기회 줄 수 있는 거잖아.”애원으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소은정의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소은정의 마음은 잠잠하기만 했다.저 남자의 감정에 공감을 해주는 것 자체가 귀찮았고 허무하게 느껴졌다.한참이 지나고, 소은정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일 봐.”이 말을 마지막으로 소은정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먼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진정, 진정하자...’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돌아선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언제부터 뒤에 서있었던 걸까?전동하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어딘가 슬퍼보이는 그의 눈빛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전동하라는 걸 알 수 있었으므로 소은정의 눈시울이 빨갛게 물들었다.턱을 머리에 기댄 채 소은정의 머리를 쓰다듬던 전동하가 속삭였다.“이런 상황에서도 은정 씨가 너무 좋아요. 나... 어떡하면 좋죠?”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소은정이 전동하를 꼭 끌어안았다.소리없는 울먹임이 한참동안 이어지고...먼저 감정을 추스른 전동하가 다시 물었다.“정말 가야 해요?”백번을 물어도 소은정의 답은 하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같이 가요. 박수혁 대표 지금 미국에 있죠? 내일 항공편으로 들어오는 거예요?”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들었다.“괜... 괜찮겠어요?”“내일 다른 친구도 귀국하기로 했거든요. 그냥 가는 김에.”전동하가 소은정의 귀를 살짝 꼬집었다.전동하의 이해가 고마워 소은정은 다시 그를 꼭 끌어안았다.규칙적인 그의 심장소리를 듣고, 따뜻한 온기와 익숙한 체취를 느끼는 순간만큼은 이 참담한 현실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한편, 소은정의 등을 토닥이던 전동하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박수혁... 정말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바로 그때, 누군가 다시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오고...예상치 못한 광경에 소은해는 어이쿠라는 소리와 함께 두 눈을 가려버렸다.“세상에, 백주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이야?”후다닥 떨어진 두 사람이 어색한 헛기침을 이어갔다.“누가 보면 뭐라도 한 줄 알겠어? 그냥 포옹한 걸로 뭐? 누구처럼 솔로인 듯 커플인 듯 사는 것보다야 낫지. 마지막으로 하늘이 얼굴 본 게 언제야?”소은정의 비아냥거림에 소은해의 얼굴이 왠지 울적해졌다.“야, 아픈 데 건드리지 마!”한참을 씩씩대던 소은해가 자리를 뜨고 전동하의 얼굴도 어느새 조금 풀어진 모습이었다.“은해 형님한테 이렇게 깐족거릴 수 있는 사람은 은정 씨뿐일 거예요.”밖에 나가선 세상 도도하게 굴면서 이상하게 소은정 앞에만 서면 꼭 초등학생 남자아이처럼 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두
전동하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이 사랑에 전동하는 모든 걸 갈아넣었다.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전동하는 이 관계에서 비굴한 존재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안정감이 부족한 소은정을 다독이기 위해 남자친구로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함을 알고 있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었다.이때, 전동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소은정이 구시렁댔다.“결혼은 그냥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잖아요. 어차피 내 마음속엔 동하 씨뿐인 걸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는 귀를 의심했다.육체적으로도 이미 깊은 관계까지 발전했지만 이런 말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라니.방금전까지 그를 묘하게 괴롭혔던 섭섭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래. 은정 씨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방금 전 그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전동하는 소은정의 턱을 들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나 좀 달래줘요.”그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정은 망설임없이 그의 입술을 덥쳤다.어두운 병원 한 구석, 두 사람은 세상과 단절된 듯 뜨겁고 긴 키스를 이어갔다.한참 뒤, 아쉬움 넘치는 표정으로 서로에서 벗어난 전동하가 입을 열었다.“이걸론 부족한데요? 여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당장 결혼은 못하더라도 호칭 정도는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한편, 여전히 여운에 잠겨있던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평소엔 여색이라곤 즐기지 않을 것 같은 성인군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도 둘만 있을 때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전동하의 반전매력에 푹 빠진 그녀였다.“여보라고 안 불러줄 거예요?”이제 그녀의 마음을 안 이상 더는 전동하만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이젠... 우리 서로를 향해 다가갈 수 있는 거잖아요.’살짝 가라앉은 전동하의 목소리에 소은정의 심장이 살짝 떨려왔다.입술을 꽉 깨문 소은정이 일단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
“나만 믿어라”, “괜찮을 거다” 이런 말은 어차피 그냥 하는 말이라는 생각에 소은정은 그저 싱긋 웃어보였다.뭐, 그녀에겐 전동하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든든했기에 가능한 미소였다.이때 전동하의 휴대폰이 울리고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말했다.“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이에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여보세요?”...또 10분 정도가 흐르고 저편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자리를 피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남자는 어느새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어, 은정 씨. 저 기억하세요?”이에 소은정이 영혼 없이 피식 웃었다.“아, 채태현 씨? 여긴 무슨 일로?”채태현, 박수혁과 조금 닮은 외모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리얼 예능에서 배우 양예영과의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반짝 떴다 반짝 사라진 흔한 연예인 중 하나였다.한편, 소은정은 가뜩이나 마음이 불편한데 박수혁과 닮은 얼굴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그냥 눈치껏 좀 가라...’하지만 채태현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논란이 생긴 뒤로 조연 자리도 얻기 힘들어진 그는 가수로 전향해 보려 앨범까지 내보았지만 그 결과도 참담한 상태.정말 이대로 내처질까 두려워 보이는 동아줄은 다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해외 영화제에 참석하느라고요. 이번에 제가 찍은 영화가 해외에서 좀 반응이 좀 좋더라고요.”“아, 네.”소은정은 그에게 눈빛 조차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정 씨, 지금 저 밖에 사람들 쫙 깔린 거 알아요?”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채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그게... 저희 매니저가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저어야 한다면서 가짜 팬들을 잔뜩 풀어놨거든요. 지금 여기서 바로 나가면 저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스캔들 날지도 몰라요.”“그래서요?”‘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게 다 꼬이네. 동하 씨는 여디 간 거야...’괜히 기자들 눈에 띄였다가 또 희한한 타이틀로 기사를 써제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저랑
발없는 소문이 멀리 퍼진다고 소은정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알바로 고용된 가짜 팬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행인들까지 몰려들었다.대중들에게 널리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보다 신비로운 베일에 감춰진 재벌들의 삶이 사람들에겐 더 큰 먹잇감으로 다가왔다.어느새 개미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 움직이는 것마저 힘들어지고 그 와중에 채태현은 “보디가드” 연기에 심취한 것인지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미안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요. 괜히 스캔들 나지 않게 제가 똑바로 해명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분명 그녀를 일부러 이쪽으로 유인한 거면서 그녀를 위로하는 척하는 채태현의 뻔뻔한 얼굴에 소은정은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려보았다.‘동하 씨, 제발 나 좀 구해 줘요...’이때 인파를 뚫고 나타난 기자가 미친 듯이 소은정을 향해 외쳤다.“소은정 대표님, 최근 SC그룹이 아시아 최초로 스마트칩 프로젝트를 따내셨다면서요? 이 덕분에 회사 주가도 많이 상승했는데 뭐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기자의 말대로 SC그룹이 유럽 스마트칩 생산건을 독점으로 따낸 덕분에 기사도 많이 나고 주가도 예쁘게 상승 곡선을 이어가고 있었다.뭐, 최근 소찬식의 건강 상태 때문에 그 일로 기뻐할 겨를 조차 없었지만 말이다.하지만 적어도 회사에 관한 질문이니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국민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는 SC그룹이 되겠습니다.”기자의 질문에 소은정이 꽤 친절한 말투로 대답하자 사람들은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소은정 대표님, 이번 프로젝트에 태한그룹도 투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사적인 관계 덕분에 투자금을 따내신 겁니까?”“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은 석지 않습니다.”‘또... 또 박수혁...’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낙인처럼 따라오는 박수혁의 존재가 소은정은 혐오스러웠다.‘누구 한 명이 죽어야 끝이 나려나...’하지만 굳은 소은정의 표정에도 눈치없는 기자는 질문을 이어갔다.